한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것/독일이 더 좋은 것
짐을 덜고 싶은 마음과, 꼭 챙기고 싶은 몇 가지 사이
짐을 싸다 보면 늘 다짐을 한다. 이번엔 가볍게 가자. 그러다도 어떤 것들 앞에선 손이 멈춘다. 이건 놓치면 안 되겠다 싶은 것들. 나에게는 밥솥과 김치냉장고, 그리고 숟가락·젓가락 세트가 그랬다. 결국 사람을 버티게 하는 건 거창한 가전이 아니라, 매일의 온도와 손끝의 습관이더라—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며.
전압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국가마다 미세하게 다르고, 시간이 문제일 뿐 언젠간 탈이 난다고. 그래서 큰 모터가 들어간 냉장고·세탁기·건조기는 쓰다가 고장나면 현지에서 구매하기로 했다. 수리도, 보증도, 말이 통하는 쪽이 마음이 편하다. 대신 밥솥은 한국에서 데려왔다. 밥 냄새 한 번이면 집이 바로 켜지는 경험을 알고 나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이가 “오늘 밥이 집 같아”라고 말하던 그 표정을 나는 오래 기억한다. 김치냉장고도 마찬가지다. 이쪽엔 대체재가 애매하다. 겉절이의 숨, 묵은지의 깊이를 지키려면, 결국 그 온도와 그 습관을 같이 데려와야 했다. 전압 어댑터를 꼭 확인하고, 설치는 신중하게. 그래도 나는 안다. 김치의 온도가 우리 가족의 컨디션을 바꾼다는 걸.
(+처음 집에 들어올때 전 세입자들이 쓰던 한국식 냉장고/세탁기를 헐값에 구매했고 건조기는 대형으로 한국에서 가져왔었다...한국제는 모두 2~3년 사이 고장났고, 고장난 제품들을 수거하고 새제품을 알아보는 과정이 굉장히 지난했다 자주쓰는, 모터가 들어간 제품은 현지구매를 추천한다)
의외로 꼭 필요했던건 커트러리였다. 초대하고, 초대받는 일이 한국보다 확실히 잦았다. “식탁에서 같이 웃는 시간”이 이곳에선 관계의 첫 단추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숟가락·젓가락 세트는 넉넉하게 챙겼다. 여덟 벌쯤? 모자라지 않게 열두 벌도 나쁘지 않다. 포크·나이프는 현지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지만, 한식 커트러리의 길이와 무게는 몸이 기억하는 감각이라 대체가 잘 안 된다. 국을 뜨는 깊이, 비빔국수 한 젓가락의 무게. 사소하지만 입안의 리듬을 바꾸지 않게 해 준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날, 긴 숟가락이 식탁을 안정시킨다. 이런 게 집이다.
가구는 웬만하면 가져오는 쪽을 택했다. 한국에서 쓰던 책상과 식탁은 이미 우리 자세에 맞춰진 것들이라, 새 집에서도 금세 자리를 잡아줬다. 이쪽에서도 충분히 살 수 있다. 다만 내 눈엔 조금 투박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많았다. 조립이 깔끔하지 않거나, 서랍 레일이 미세하게 어긋난다든가. 그래서 서랍장 세트와 한국식 **행거 시스템(왕자행거 같은 것)**은 과감히 가져왔다. 벽면을 가로지르는 그 단단함이 주는 안심이 있어서. 비가 잦고 공기가 축축한 겨울엔, 옷이 걸린 채로 잘 말라주는 구조가 의외로 중요하다. 서랍이 부드럽게 닫히는 소리, 옷걸이가 흔들리지 않는 감각—이게 생활의 스트레스를 줄인다.
(+초대가 많아지므로 거대한 식탁은 현지구매를 추천, USM브랜드가 한국보다는 많이 저렴해서 귀국할때 많이 구매하는 편이다)
약 이야기로 잠깐 새자. 처음 몇 달은 뭐든 **‘익숙한 것’**이 이긴다. 그래서 평소 잘 맞는 상비약을 소분했고, 의사와 상의해 비상용 항생제는 약 14일치 처방을 받아왔다. 쓸 일이 없으면 더 좋지만, “문 열자마자 약국부터”라는 초조함을 줄여주는 작은 보험처럼. 사용은 당연히 신중하게, 필요할 때 의료진 지시대로. 가방 안 작은 약통 하나가 밤의 불안을 가볍게 만든다.
(+추후 필요한 약은 현지에서 구매하게 되는데, 독일약은 좋은것들이 많다. 다만 항생제에 익숙한 한국인에게 일반약이 아닌 처방약인 항생제는 나이어린 자녀가 있거나 오래 앓게되는 감기에 걸리면 현지에서 구하기 쉽지 않다.)
향은 한국에서 들고 온다. 고춧가루, 진간장, 참기름, 들기름, 다시마, 건미역. 봉지에 크게 쓴다. ‘찌개용’, ‘겉절이용’. 비 오는 날, 밥 위에 참기름 반 숟가락만 떨어뜨려도 이 집이 어디였는지 금세 기억난다. 육류 성분 들어간 분말은 규정이 까다로워서 과감히 두고, 식물성 위주로 가볍게. 김(김밥용) 한 묶음은 늘 옳다. 도시락 뚜껑을 닫을 때, 바삭한 소리가 하루를 붙잡아 준다.
몸에 닿는 건 익숙함이 최고다. 속옷과 양말은 한국에서. 너무 소소해서 미루다 보면 도착해서 더 크게 아쉬운 것들. 겨울 비가 많은 동네라서 양말은 두께 다른 걸로, 3개월치만 챙겨도 마음이 넉넉하다. 낯선 하루를 견디는 건, 생각보다 고무줄 텐션 같은 디테일이다.
책은 얇게, 그러나 꼭. 아이에게 최애 그림책 5권과 워크북 2권, 내게는 산문집 1권과 빈 노트 1권. 국제학교라 영어가 든든해도, 모국어로 숨 고르는 시간이 따로 필요하다. 페이지를 넘길 때 나는 종이의 마찰음이, 이곳의 고요를 덜 낯설게 만든다. 무겁지 않게, 대신 반복해서 읽을 것을 고른다. 짧은 문장이 멀리 간다.
이쯤 쓰고 보니, 내가 챙기는 것들의 공통점이 보인다. 매일의 리듬을 바로 세우는 것들. 밥이 제시간에 뜨거운 그릇으로 올라오고, 김치가 제 온도를 지키고, 젓가락이 손에 꼭 맞고, 서랍이 거슬림 없이 닫히고, 필요할 때 약이 손에 잡히는 것. 거대한 가전보다 이런 것들이 낯선 도시에서 나를 오래 버티게 했다.
그래서 기준을 다시 적어 둔다. 큰 모터와 복잡한 수리가 필요한 가전은 현지에서. 대신 밥솥과 김치냉장고는 한국에서—우리 집의 맛과 호흡을 함께 데려오기. 식탁엔 숟가락·젓가락 세트 넉넉히, 초대가 잦은 나라의 리듬에 맞추기. 서랍장과 행거는 한국에서 쓰던 그 단단함으로. 약은 익숙한 것과 14일의 안심을 챙기기. 적응의 날들 이후 나머지 날들은 아마 적응하게 될 미래의 나에게 맡기기
짐을 닫는 마지막 순간, 늘 빠뜨린 게 떠오른다. 그래도 괜찮다. 중요한 건 들고 왔다. 밥의 온도, 김치의 숨, 손에 맞는 커트러리, 흔들리지 않는 서랍, 그리고 혹시 모를 밤을 지나가게 할 작은 약통. 익숙한 집 부엌의 양념. 불면의 밤을 이길 모국어의 책..이 정도면, 이상할 만큼 조용한 이 마을에서도 우리가 우리답게 숨 쉴 수 있다. 내일은 누군가를 집으로 초대해 볼까. 긴 숟가락으로 국을 떠서 건네며, 속으로 또 한 번 중얼거릴 것이다. 가져오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