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사진] 프랑스 빠리, 몽마르트르 사크레 쾨르(예수성심성당) 청동 기마상 왼쪽 생 루이, 오른쪽 잔 다르크
연재하는 <빠리에서 좌충우돌한 별난 사람들>은 실제 상황입니다. 그런 연유로 가명을 쓰고, 출신 지역이나 직장 혹은 개인 신상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밝히지 않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스마트 폰과 카카오톡은 2011년 전후로 사용되었지요.13년 전만 해도 프랑스에서 핸드폰으로 한국과 미국 등에 한글 메시지를 보낼 수 없었어요.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불과 13~14 년 전일인데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그거 웝스믄 워찌 살겨?
병원엘랑 워처키 가구 밥은 누가 줄겨?
잃어버리믄 죽는 거니께!
유럽인지 워딘지
워찌나 도둑이 많다구 허니께
잃어버릴깨비
L.A 집 침대 벼게 밑에 감춰 두구 왔는게비네.
샤를르 드 골 공항은 연휴를 앞두고 출국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우리 일행은 버스에서 가방을 다 꺼내서 미국 뉴욕행 비행기 탑승을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서른 명이 차례로 줄을 서서 체크 인 진입로인 파란 줄 안으로 기차놀이 하듯이 들어가고 있었다. 다들 미국 교민이라서 체크인 정도야 문제없으나 나는 미리 안으로 들어가 창구 앞에서 연로하신 어르신들 좌석표와 짐 체크인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런데 뒤쪽에서 나를 다급하게 불렀다. 뒤 돌아보니 에어프랑스 직원이 내게 어서 와달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보니 키 큰 흑인 여직원이 내게 "이 할머니는 탑승이 안 됩니다. 그러니 탑승 수속 라인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라며 할머니를 제지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어정쩡하게 서 있고, 일행들과 팀을 이끄는 수녀님도 다가왔다. 내가 직원에게 물어보니 할머니 미국 입국 비자가 없다는 거였다. "비자? 이 분은 미국 영주권자인데 왜 비자가 필요하지요? 무슨 카드가 필요한 건데요?"
내가 묻는 것과 동시에 옆에 서 있던 일행 한 분이 이유를 알았다는 듯이 놀란 눈으로 목소리를 높였다."에그머니, 할머니! 그린카드 이디 있어요? 그린카드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할머니 손에 여권만 있었다. 일행들은 그제야 이유를 알아챘는지 다들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러네! 할머니. 그린카드 어디 두셨어요?" 그러자 할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거, 그 카드 말여?" 대답하자 처음 그린카드 어디있느냐고 했던 일행이 다그치듯이 물었다.
"그래요, 그거요, 그린카드 어디 있냐고요? 큰 가방에 넣으셨어요?"
애가 타서 물어보니 할머니가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허이구, 내 자식 겉이 귀한 걸 뭣허러 갖구 대닐겨? 잃어버릴깨비 집엘랑 놔 두구 왔지."
사람들은 술렁였다. 팀 총무가 달려와서 할머니에게 다시 확인했다.
"아유, 어쩌믄 좋아! 왜 이러신데요? 안젤라 자매님! 순례 떠나기 전에 잘 챙기시라고 당부했잖아요. 아마 틀림없이 가방 어디다 넣으셨을 거예요. 다시 잘 찾아보셔요. 그거 없음 미국 못 들어간단 말이에요."
할머니는 그 말을 듣고도 별 동요 없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하다가 비행기를 못 탄다는 말에 한숨을 내 쉬었다.
"하이고, 여길랑 웞어. 웝다니께 그러네. 미국 집엘랑 두구 왔다니께. 그거 웝슴 병원엘랑 워찌 가구 밥은 누가 줄겨? 잃어버릴깨비 집 침대 벼게 밑에 감춰두구 왔는게비네, 그나저나 그거 웝슴 뱅기 못 타는 겨? 워처켜믄 좋을 겨."
미국에서 출국할 때는 대한민국 여권으로 가능했고, 영주권이 필요 없었지만 이제 미국으로 입국을 해야 하니 당연히 비자와 같은 거주증명 카드가 있어야 했다.
말하자면 체류증과 비탈카드(프랑스 의료카드, 운전면허증처럼 신분증을 대신하기도 한다.)가 필요한데 할머니는 여권밖에 없으니 탑승 수속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말을 듣고 팀 단장은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고 내게 물었다 할머니 상황을 얘기하고 좀 도와달라고, 좀 봐주면 안 되겠느냐고 직원한테 물어봐달라 했다.
나 역시 당황하고 기가 막혀서 머릿속이 하얗게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난 안 될 걸 알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직원에게 상황 설명했다. 그러나 직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안타깝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고 했다. 옆에 서 있던 일행들도 안타까운 마음에 부탁했으나 직원 대답은 "안 됩니다.(Non, Mesdames)"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롯해 할머니 일행들은 할머니 혼자 빠리에 두고 갈 수가 없으니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비행기표 있고, 일행들이 있으니 미국에 도착만 하면 국경 수비대(컨트롤 타워)에 다 설명하겠다고 제발 비행기만 탈 수만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또 사정했다.
난감한 표정을 짓던 흑인 직원은 말문을 닫고 있다가 나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마담, 상황은 잘 알겠는데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어요. 할머니 모시고 미국 대사관이나 영사관 가서 미국 영주권자인걸 증명받아야 해요. 그거 없이 이 라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범죄가 되는 거예요. 미국은 비자 없이 못 들어가는 나라니까. 수 십만 유로의 벌금 낼 자신 있어요? 벌금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방관하고 내버려 둔 나도 문제가 됩니다. 불법적인 일을 할 순 없지 않겠어요? 그렇지요?"
범죄란 말에 기가 막혔다. 그렇지, 범죄자가 될 순 없지! 벌금은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고, 할머니는 밀입국자로 체포될 거고, 나와 에어 프랑스 직원은 밀입국자를 도운 조력자가 된다니! 범죄자 신세가 될 순 없지 않겠는가? 정신이 아득해졌다.
파리 몽마르트르 사크레 쾨르(에수성심 성당) 돔 안에 18톤 사브와 야르드 종/ 청동기마상 왼쪽 생루이와 오른쪽 잔 다르크
사건 발생 4일 전으로 시간 이동! 빠리 몽파르나스 역 낮 14시경!
햇살 찬란한 5월 늦은 봄날이었다. 그 해는 유난히 가톨릭 성지순례하는 분들이 많았다. 미국에서도 여러 지역에서 모여 한 팀을 이뤄 왔는데 특히 L.A로 표현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많이 왔다.
난 오래전에 통역일과 여행사 관련 일을 겸해서 일을 했다. 덕분에 각계각층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국회의원들을 포함한 공무원 연수, 프랑스에서 열리는 의사 학회나 교수들 학회, 원자력 관련 통역이나 성지순례도 무척 많이 진행했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만나면서 세상을 간접체험 할 수 있어서 내 인생과 글쓰기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
내가 진행한 팀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고, 만난 사람들도 너무 많아 이름은 물론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내게 강렬한 인상과 한 획을 긋고 가신 분들은 가끔 떠오른다.
내가 직접 당한 일이 아닐지라도 그들에게 발생하는 사건이 곧 내 일이 되고 결국은 내가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일을 겪는 분과 같은 심정이 되기도 하고, 때론 당사자보다 더 애타하며 충격과 걱정으로 짓눌리기도 했다.
주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실 건디
뭔 걱정인겨! 잘 되것지 뭐
앞서 공항 사건의 주인공은 미국 L.A 에서 오신 차복동 할머니다. 어찌나 느긋하시고, 여유로우셨는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그분 말씀이 생각나곤 한다."주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실 건디 뭔 걱정인겨! 잘 되것지 뭐"
차복동 할머니와 일행은 크로아티아에 있는 '메쥬고리예'와 프랑스 루르드 순례를 하고 빠리로 오는 길이었다.
프랑스 피레네 산맥 인근 성지, 루르드 피에르 암벽위에 건축된 피에르 성당과 마사비엘 동굴 성모님 발현지와 기적수 샘물
당시 크로아티아 메쥬고리예는 성모 마리아께서 어린이들에게 발현하신 성지로 알려지면서 세계 각국 가톨릭 신자들이 메쥬고리에로 향했다. 보스니아 전쟁 등으로 스프리트 공항으로 가는 길이 험난했으나 신앙 깊은 순례자들은 개의치 않고 그곳을 찾았다.
나는 그분들을 몽파르나스 역에서 기다렸다. 테제베(TGV)에서 내린 일행들과 만나 점심을 먹고 나서 빠리 6구에 있는 기적의 메달 성당과 외방전교회에 갔다.
외방전교회는 1664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은 곳으로 아시아에 전교 나가시는 신부님들이 머무시던 공간이다. 지금도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시아계 신부님들이 계신다.
기적의 메달 성당 미사 후에 노트르담 대성당도 다녀왔다. 다음 날은 몽마르트르에 있는 사크레 쾨르(예수 성심성당)에서 미사 드린 후에 빠리 일정을 마무리했다.
프랑스 노르망디 리지외 바실리크 대성당
3일째 되는 날은 그룹 대형 버스를 타고 노르망디로 향했다. 소화 데레사 성녀의 생가가 있는 알랑송을 거쳐 리지외에 바실리크 대성당과 소화데레사 기념관까지 다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한 순간도 허투루 버리는 일 없이 영성 가득한 성지순례를 잘 마무리하고 빠리로 돌아왔다.
마지막날 서른 명이 넘는 미국 성지 순례단은 여행용 가방에 짐을 다 싸고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요일로 기억한다. 그룹버스를 타고 우리는 샤를르 드 골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탑승 수속을 밟기 전에 루르드에서 갖고 온 성수 등과 함께 가방을 잘 쌌는지 점검한 후에 미국 L.A로 가는 에어 프랑스 비행기 창구로 이동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상황처럼 탑승 수속조차 할 수 없었던 차복동 할머니는 혼자 빠리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일행들이 좌석표를 받고 게이트로 들어가기 전 작별 인사를 나눴다. 일행들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 했다. 일흔중반이시고 영어도 전혀 못 하시는데 나중에 혼자 어떻게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올 것이며, 무엇보다 어르신을 낯선 빠리에 홀로 두고 떠나야 하는 그들 심정도 무척 괴롭고 무거웠을 것이다.
할머니는 영어를 전혀 못 하셔요.
L.A 오신지는 5년 정도 되셨어도
거긴 뭐 한국 사람이 워낙 많아서
영어 쓸 일이 없으시니까요.
할머니 딸은 다른 주에 사시거든요.
사위가 미국인인데 직장 때문에 이사 간 거지.
할머니는 L.A가 편하고 성당 친구들도 있고 하니까
혼자 남으신 건데요.
그나저나 집 베개 밑에 둔 그린카드를 어떻게 전해 받아야 하나?
걱정이네요.
미국 도착하면 연락할게요.
우리도 미국에서 방법을 알아볼테니까
도와주세요!
복 받으실 거예요!
일행 중에 대표되는 분이 내게 할머니가 미국에 잘 도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신신당부 했다. 그 분으로부터 비상 연락처를 받고, 할머니 딸과 전화 통화하면서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할머니 아파트 문을 열고, 베개 밑에 있다는 그린카드를 찾아서 미국 대사관을 통해 받는 방법을 알아보기로 했다. 일단 상황 정리를 하고 나서 그렇게 일행들은 걱정하면서 미국으로 떠났다.
나와 할머니는 샹젤리제 개선문까지 가는 에어프랑스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해일 같은 충격때문에 파도치던 마음은 한결 잦아졌다.
그러나 마음 한켠으론 걱정이 새록새록 들기 시작했다. 왜냐면 다음 날부터 스케줄이 연이어 있어서 시간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이야기하기도 하고, 피로해서 잠시 눈을 붙이기도 하다 보니 샹젤리제 개선문 카르노 거리 에어프랑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콩코드 광장 근처에 있는 미국 대사관으로 갔다. 미국 대사관 건축물 앞에 성조기가 휘날리는 걸 보신 할머니가 "워메 , 미국 국기 아녀? 웜청 오랜만에 보는구먼."하며 반가워하셨다.
대사관 근처로 다가가니 컨트롤하는 경호원이 다가와서 무슨 일로 왔는지 물었다. 나는 상황을 그대로 얘기했다. 그리고나서 경호원 대답에 또다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비자 및 그린카드 관련 업무는 인근 영사관으로 가라고 하면서 오늘내일 그리고 모레까지 휴무라고 했다. 그렇구나! <성신 강림 대축일>이었다. 프랑스는 가톨릭 축일이 휴일이기 때문에 토 일 월요일까지 3일 동안 연휴였다.
나는 미국 영사관에 가서 화요일 문 여는 시간과 관련 사무실 직통 전화번호 등을 적었다. 그리고 할머니와 루브르 박물관 근처 카페로 가서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내일부터 이어지는 내 스케줄 때문에 할머니를 끝까지 모실 수 없어서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여행사에서는 할머니를 호텔에 가시게 하라고 했다. 물론 모든 비용은 할머니가 다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호텔비, 식비, 나중에 공할 갈 때 드는 교통비와 서류 관련 일을 도와줄 사람에게 주는 비용 등등은 할머니 몫이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화요일에 영사 업무를 본다 해도 미국에 있는 할머니 그린카드를 어떻게 찾고 전해 받는단 말인가?
다른 주에 사는 할머니 딸이 할머니 집에 가서 카드를 찾고 공증을 받아서 빠리 미국 주재 영사관으로 보내면 이곳에서 미국 입국 때 필요한 서류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련의 과정이 생각처럼 그렇게 빨리빨리 처리가 되지 않을 것이기에 막막했다.
우선 할머니가 지낼 수 있는 집을 알아봐야 했다.최소한 5일은 예상해야 하는데 체류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항공권은 다행히 에어 프랑스에서 조정해 준다고 확답받았으므로 걱정을 덜었다. 그룹 티켓이라 안 되는 것이었는데 사정사정해서 연기했던 것이다. 마침 할머니 비상금이 빠듯하게나마 체류비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천진난만하게 웃는 할머니, 나만 바라보는 할머니를 보면서 귀찮고 힘들다기보다는 그냥 마음이 싸르르 아려왔다. 미국 L.A에 가신 지 5년이 되셨다고 했는데 늘 혼자 계신 삶에 익숙한 것 같았다. 오래전부터 한국에 혼자 계셨는데 점점 나이가 드식니까 미국에 따님이 어머니를 초청했다고 했다. 무슨 운명인지 거기서도 함께 살지 못하고 사위 직장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통에 할머니는 다시 홀로 L.A에 남으시게 된 사연이었다.
외로워도 워쳐켜? 참구 지내야 쓰지
언내처럼 울어야 쓸거여?
다 주님의 뜻이니께
그러려니 허구 지내다보믄
원젠간 다들 가는 거기루다 가것지.
하늘나라 말여.
다 내 팔잔겨.
한국에 있어두 외롭구
미국에 살어두 외로운 건 다 똑같혀.
워쨌거나 우리 딸이 웜청 효녀구
나한티 웜청 잘 혀.
같이 살것다고 웜니 불렀는디
우리 사우가 직장이 바뀌니께 워쳑헐겨?
살어야 허니께,
워디래두 일혀셔 돈을 벌어야 해설랑은 간걸 워척헐거여.
우리 딸이 웜니 같이 가지구 너무 졸랐는디
내가 불편허니께 안 간 거여.
말두 안 통허는 사우랑 한집서 사는 것두 그렇구
난 거기가두 헐 일두 웝잖여, 말두 안 통허니께
그려두 L.A 엔 한국사람이 많어설랑
영어 못 혀두 아쉴울 것두 웝으니께.
허이구 거기는 한국이여, 웞는 기 웞어.
그래설랑은 그냥 사는 거여.
인생이 다 그런거 아닌가 몰러.
그려두 배 안 곯고 아프믄 병원서 약주구 치료해주구
월매나 좋은 지 몰러. 미국이잖여.
외롭긴혀두 아쉴울 거 웞어.
워디가믄 안 외롭남.
걱정할 것두 웞구
주님이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니께.
할머니 말이 한동안 귀에 맴돌았다. 할머니 모습이 영사기 돌아가면서 화면으로 도드라지듯 눈앞에 그려졌다.
할머니와 식사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보기로 했다. 할머니를 호텔로 혼자 보내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며칠동안 할머니를 모실 수 있는 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물론 공짜는 없었다.
민박처럼 하루에 얼마씩 드리고 아침 점심 저녁 드시게 하면서 산책도 하고, 화요일 미국 영사관 열면 공증 업무도 봐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생각하고 여기저지 연락한 끝에 정말 착하고 성품 좋은 후배 부부가 가능할 것 같다고 긍정적인 대답을 해줬다.
빠리 인근에 살고, 어린 아이가 있는 학생부부였다. 다행히 체재비는 할머니가 가진 돈으로 가능했다, 혹시라도 부족한 건 나중에 미국에서 따님이 여행사를 통해 보내는 방법을 강구해 보기로 했다. 돈도 돈이지만 믿을 만하고 후배 부부는 책임감 강한 성격이라 할머니를 잘 모실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몇 시간 후 그들을 만나서 할머니와 인사를 나눈 후 모든 사항을 인수인계해 주었다. 내가 갖고 있는 것도 좀 더 보태주었다. 할머니와 맛있는 거 사서 가능한한 즐겁고 편안한 시간이 되도록 하라는 당부도 여러번 했다.
그날 할머니는 나와 헤어지면서 너무나 아쉬워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저려왔다. 공항에서 탑승 수속이 안 된다고 할 때도 별로 놀라지도 않으시고, 걱정도 안 하시는 것 같던 할머니였다. 미국 일행들과 헤어질 때도 마치 빠리에 볼 일이라도 있으신 듯, 가족이라도 있으신 것처럼 의연하게 손을 흔들었었다.
그런데 그때와 달리 나와 헤어지실 때는 눈물을 글썽이셨다. 내 손을 꼭 잡은 채 놓지 못 하시고는 "워쳐켜? 워처켜믄 좋를겨?" 라고 되뇌셨다. 할머니는 그제서야 할머니 상황이 실감 난 것 같았다. 그래도 나와는 4일동안 함께 있었기때문에 공항에서 미국 일행이 떠날 때도 외롭지 않고 걱정을 안 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낯선 젊은이들이 오고, 함께 있던 나는 떠난다니까 할머니 감정이 복받쳐올랐던 것 같다.
그렇기에 내 마음도 너무 무겁고 아팠다. 마치 가족하고 이별하는 느낌이었다. 차복동 할머니는 잠깐이나마
나를 의지하셨던 것 같았다. 나는 일하면서도 할머니 생각에 하루에도 여러번 전화로 안부를 묻곤 했다.
미국에 따님이 할머니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 베개 밑에 꼭꼭 숨겨놓으신 그린카드를 찾아 미국에서 공증 받고 여러 절차를 거쳐 빠리 주재 미국 영사관으로 보냈다. 차복동 할머니 거주증, 말하자면 미국 입국 허가증이 오기까지는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그리고 수요일을 거쳐 목요일에야 서류가 완료되었다고 했다.
할머니가 떠나던 날도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무척 바빴다. 후배 부부가 할머니를 공항까지 모셔다 드리고, 공항에서 탑승 수속을 무사히 마친 후에 후배가 내게 전화를 했다. 그리곤 할머니를 바꿔줘서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워처혀믄 좋을겨?
너어무 고마워서 워처켜.
너어무 보고싶은디 월굴도 못 보구설랑
떠나야허니 참말로 아쉽구먼.
워쨌거나 건강허구
잘 살아유.
아 참! 그라구설랑
주님이 다 알아서 혀 주시니께
너어무 애쓰지 말구
다 혀주시것지 허구서
그냥 모든 걸 주님께 맽기구설랑
편안허게 지내유.
그려야 주님두 좋아허시니께
다 잘 될겨.
복 많이 받을겨.
원제나 만날까 몰르지만서두
그냥 워디서든 잘 살믄 되는거니께.
인생이 다 그런거니께.
몸 건강히 잘 지내구설랑!
먼 훗날 만나믄 되는 것이구.
주님께서 다 알아서 혀 주실거니께.
걱정 붙들어메구 잘 살 사슈.
워척허든지간에 외국서 잘 먹구 잘 살구
성공허구 행복허믄 좋것구
착허구 성실히 살다보믄
그 분이 다 아시니께
원젠간 다 복으루 받게 되것쥬.
카드 덕분에 빠리에서두 살어보구
나 차복동은 복두 많은겨.
그러니께 사방 막힌것 겉이 힘들어두
주님의 뜻인가벼 허구살다보믄
다 좋아진데니께~.
너어무 고마웠어유.
잘 살어유.
프랑스 샤를르 드 골 국제 공항 / 2공항 F 홀 이른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