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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문정 Nov 29. 2021

싸락눈 흩날리는 밤


바람이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그르렁거렸다. 덧창이 흔들리고 낙엽이 바람과 함께 허공으로 휘도는 소리가 밤새도록 귓가에 울렸다.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네 집처럼 내가 사는 공간도 날아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마저 들었다. 바람소리 때문에 잠 못 이룬 밤이 지나 새벽이 왔다.


아침 방송에 피레네 산맥 자락 루르드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파리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희고 탐스러운 눈송이에 탄성을 내는 것도 잠시! 이내 뉴스에서는 엄청난 눈으로 정지해버린 고속도로 상황을 전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래도 눈 내리는 풍경은 신비롭고 운치 있다. 아울러 내 그리움은 연신 내리는 눈송이만큼 가슴속에 소담스레 쌓인다.



김광균 <장곡천정> 중에서


찻집 미모사의 지붕우에

호텔의 풍속계 우에 눈이 내린다.

기울어진 포스트에 눈이 내린다.

물결치는 지붕지붕의 한끝에 들리던

먼 소음의 조수 잠 들은 뒤


물기 낀 기적만 이따금 들려오고

그 우에

낡은 필름 같은 눈이 내린다

이 길을 자꾸 가면 옛날로나 돌아갈 듯이

등불이 정다웁다

내리는 눈발이 속삭인다

옛날로 가자.

옛날로 가자.



싸락눈 흩날리는 날 / 강문정


싸락눈 흩날리는 밤

세상은 밤바다에 침몰하는 타이타닉처럼 한껏 웅성거리다

도도한 시간의 물결에 휩쓸려 이내 질식해 버린다


몇 겁의 천을 뚫는 음산한 추위는

가슴속까지 해집어놓아 갈 길은 더욱 휑하고

광대한 우주, 이 넓은 지구 한 귀퉁이에서

어둠을 집어삼키며 걷는 이는 까맣게 그늘져 가는구나


싸락눈 흩날리다 멎은 거리가

우리네 뱃속처럼 질퍽해지듯 순수를 외치던 그날들

사위고 난 자리에 얽은 흉터만 도드라져 서러운 밤



나는 마음 시리고 아린 날, 이 시가  떠오른다.


노을 / 이름이 슬픈 시인


가자.

살기위해 자주 아프던

가슴을 두고 가자

이승에서 고아한 건

이승에 모두 내어주고


먼 길 떠나기 무거운 건

길바닥에 모두 내려놓고

그 길 어두워질 때 보이지 않게 만나던

달디 단 비밀을

그냥 두고 가자.


비 젖은 홑적삼마저 벗을까

바람막이 울타리 한 겹 더 덮어주고

오래 감춘 허물

그대로 그냥 두고

가자.



이 음산하고 추운 초겨울, 카뮈가 머물던 곳의 태양, 카뮈가 표현한 '심벌즈 같이 현란한 태양'을

떠올리며 온기를 찾는다. 다시 눈발을 헤치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니까.



알베르 카뮈, 습작 시대 에세이

    - <티파사의 혼례> 중에서


정오가 되기 조금 전 우리는

폐허를 지나 선창가에 있는

조그만 카페 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심벌즈처럼 현란한

태양의 색채 탓인지

온통 우지끈 거리는 머리를 하고

카페에 들어선 우리에게

그늘진 홀과 얼음에 채운

파란 박하주는 얼마나 싱그러웠는지.


카페 밖은 바로 바다

먼지가 뽀얗게 일고 있는 이글거리는 길이었다.

테이블 앞에 앉아서 나는

더위로 하얗게 바랜 하늘의

오색 현혹을 깜박거리는

눈망울 사이로 잡아보려고 노력했다.


얼굴은 땀에 젖었지만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은

제법 신선하여

우리는 온 누리와 혼례를 치른듯한

하루의 권태로움에 늘어질 대로 늘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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