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면 습관처럼 손이 먼저 움직인다. 머리맡에 놓인 점자책을 더듬어 찾는다. 아직 세상이 잠들어 있는 새벽 5시 30분, 나만의 고요한 시간이 시작된다. 시각장애학교에서 20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며 쌓인 일상의 무게가 아무리 무거워도,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 된다. 점자의 돌출된 점들이 손끝에 닿는 순간, 세상은 다시 태어난다. 어둠은 더 이상 장벽이 아니다. 오히려 집중을 위한 고요한 배경이 되어준다. 아침 공기처럼 맑은 정신으로 나는 책장을 넘긴다. 이것이 나의 '속독의 시간이다.
"독서는 세상을 향해 열린 창문이다." 내가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지만, 사실 이는 나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시각장애가 있는 우리에게 책은 단순한 정보의 집합체가 아니다. 그것은 상상력의 날개이자, 세상을 만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점자로 읽는 한 문장 한 문장은 손끝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며, 그 과정에서 더욱 깊이 각인된다.
수업 중에 B학생이 나에게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책에서 읽은 걸 다 기억하세요?"
나는 미소 지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더 많아. 하지만 중요한 건 기억하려는 그 마음가짐이야. 잊힌 문장들도 내 마음 어딘가에 스며들어서 나를 조금씩 바꾸고 있어."
하루 종일 학생들과 씨름한 후,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나면 또 다른 독서의 시간이 찾아온다. 아침과는 전혀 다른 리듬이다. 서두르지 않는다. 한 문장을 읽으며 잠시 멈추고, 그 여운을 음미한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 따뜻한 차 한 잔의 온기, 그리고 손끝으로 느끼는 점자의 촉감.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하나의 시간이 된다. 이것이 나의 '정독' 시간이다.
장애인학교에서 20년을 보내며 깨달은 것이 있다. 사람들은 시각장애인에게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동정의 시선으로, 때로는 무관심으로, 때로는 과도한 보호욕으로. 하지만 책을 읽는 순간, 그 모든 편견은 의미가 없어진다.
책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시각장애가 있든 없든, 젊든 늙었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책은 오직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사람만을 받아들인다. 독서의 힘은 눈에 띄는 큰 변화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변화들에서 나타난다. 아침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다. 처음에는 의무감으로 시작했던 것이 이제는 없으면 안 될 삶의 일부가 되었다.
점자를 읽는 것은 확실히 느린 과정이다. 하지만 그 느린 속도야말로 축복일지도 모른다. 급하게 넘어가지 못하기에 더 깊이 음미할 수 있고,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책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오늘도 나는 책을 읽는다. 아침의 속독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의 정독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20년간 반복해 온 이 리듬이 내 삶의 중심축이 되었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오는 날에도, 마음이 무거운 날에도 나는 책을 읽는다. 손끝으로 만나는 그 첫 문장이 오늘도 새로운 하루를 약속한다.
어둠은 더 이상 나의 한계가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이 집중할 수 있는 고요한 공간이 되어준다. 그 공간에서 나는 책과 만나고, 책을 통해 무한한 세상과 만난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이것이 내가 믿는 진실이다. 그리고 그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책을 읽는다. 아침에는 속독으로, 저녁에는 정독으로. 그렇게 하루하루를 책과 함께 만들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