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존재로서의 교사

by 이만희

미켈란젤로는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나는 여전히 배운다(Ancora imparo)"라고 말했다. 교사로 살아온 세월 속에서, 나는 이 말의 무게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배움은 완성을 향한 여정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방식이다. 책에서 사유를 배우고, 사람에게서 관계를 배우며, 나 자신에게서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배운다.

시력을 잃었을 때, 나는 역설적으로 '보는 법'을 새롭게 배웠다. 눈이 아닌 마음으로, 빛이 아닌 의미로 세계를 느끼는 법을 익혔다. 이는 단순한 적응이 아니었다. 존재론적 전환이었다. 보이는 것만이 실재가 아니며, 감각의 부재가 곧 세계의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깨달음. 메를로-퐁티가 말한 '체현된 인식'의 의미를 나는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교육 현장에서 나는 완벽한 교사가 아니다. 완벽한 부모도 아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미완성을 숨기지 않는다. 넘어지고 일어나는 과정, 시행착오와 성찰의 순간들을 학생들 앞에 드러낸다. 왜냐하면 교육의 본질은 완성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배움의 과정을 함께 걷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과의 갈등, 동료와의 오해. 이러한 불편함은 교육 현장의 불가피한 요소다. 그러나 갈등은 관계의 파열이 아니라 심화의 계기가 된다. 진정한 대화는 매끄러운 동의가 아닌 불편한 마주침에서 시작된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와 대면, 그 윤리적 책임의 순간이 바로 여기에 있다.

노자는 물의 철학을 말했다.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강한 것을 이긴다고. 교사로서 나는 이 역설을 체득한다. 강압이 아닌 흐름으로, 지시가 아닌 동행으로 학생들과 함께 걸어간다. 흐르는 물처럼 막힘없이, 그러나 끊임없이 제 길을 내어가는 것. 이것이 교육적 관계의 본질이 아닐까.

"힘들다고 멈추지 말고, 부드럽게 흘러가자." 나는 학생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흐름 속에서 배우고, 배움 속에서 자란다. 이는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에 대한 제안이다.

행복은 고통의 부재가 아니다. 그것은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삶의 깊이 속에서 발견된다. 눈을 감았을 때 더 선명하게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교실 창문을 스치는 바람의 촉감. 이 모든 것이 내 존재를 살아있게 한다.

행복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성장의 과정에 이미 내재하여 있다. 완벽을 향한 추구가 아니라,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용기 속에 행복이 있다. "괜찮아, 완벽하지 않아도 돼. 넘어질 수도 있고, 때로는 두렵기도 하지. 하지만 너는 여전히 배우고 있잖아." 이 자기 대화는 자기 위로가 아니라, 자기 성찰의 언어다.

교사의 존재론적 정체성

교사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완성된 지식의 소유자로 서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존재로서 학생들과 함께 서는 것이다. 교사는 살아있는 교과서가 되어야 한다. 단순히 교재의 내용을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배움 그 자체를 몸으로 보여주는 존재로서.

나의 시력 상실은 교직 생활의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배움의 시작이었다. 점자를 통해 나는 다시 세계를 읽었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느끼는 법을 배웠다. 장애는 결핍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가능성이었다. 이 경험은 나의 교육 철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모든 학생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계를 감각하고 이해한다. 교사의 역할은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배움의 방식을 존중하고 촉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배운다. 학생들과 함께 배우고, 실패를 통해 배우며, 침묵 속에서 배운다. 교사로서의 삶은 여전히 미완이고, 그 미완성이야말로 나의 교육적 정체성을 구성한다. 완성된 교사는 더 이상 배우지 않는다. 그러나 배우는 교사는 끊임없이 성장한다.

"나는 여전히 배운다." 이 문장은 겸손의 고백이 아니라, 존재의 선언이다. 교사로서, 부모로서, 한 인간으로서 나는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이 배움의 여정 속에서, 나는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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