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에 대한 나의 응징
2012년 6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남수단을 여행했을 때의 일이다. 우간다 캄팔라(Kampala)에서 남수단의 수도 주바(Juba)로 가는 버스를 탔다. 당시 남수단은 독립한 지 얼마 안된 상태라 수도라고 해도 마땅히 묵을 만한 숙소가 흔치 않았다. 주바 터미널에 내려 사람들에게 타운(Town)이 어디냐고 물으니 대답은 안해주고 서로 자기 오토바이 택시(Boda boda)에 태우려고 하는 통에 짜증이 나서 그 더운 날씨에 무작정 시내를 향해 걸었다. 캄팔라는 나무도 많고 잠깐 들어가서 에어컨 바람 쏘일 만한 건물들도 많았는데, 2012년의 주바는 나무도 안보이고 건물들도 적었다. 요즘 주바의 사진을 보면 허허벌판에 문명을 일군 역사가 그대로 드러난 것 같아서 감개가 무량하다.
시내에 도착해 SIM카드를 MTN에서 Zain으로 갈아 끼운 후, 시장을 돌아 다니다가 만난 이집트인이 알려준 숙소에 짐을 풀었다. Huawei 소속으로 인터넷 장비 설치하는데 파견된 로지스틱스 전문가라고 했던 그 이집트인은 살면서 나처럼 눈이 작은 사람을 처음 본다며 계속 나를 신기해했다. 욕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그냥 무시하고 내 방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날씨가 너무 더운 탓에 에어컨이 켜진 방을 나올 엄두가 안 나서 도착한 첫 날은 시내 구경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숙소에서 그냥 쉬었다. 낮에 갑자기 쏟아지는 빗소리에 청량한 공기를 맡고 싶어 창문을 열었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마저 뜨거웠던 것이다.
나의 목적지는 쉐벳(Cuibet)이었는데 주바에서 바로 가는 교통편이 없어서, Lake state의 주도인 룸벡(Rumbek)을 거쳐서 가야 했다. 당시 도로는 한창 공사중이라 내가 탄 택시(지프차 형태)의 기사님은 흙먼지 폭풍 속을 헤집고 차 앞유리를 연신 걸레로 닦아가며 혼신을 다해 운전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흙먼지가 시야를 가려서 정면 추돌하는 사고가 많이 나는 길이었는데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그 기사님은 북수단 사람이라 그런지 아랍 느낌이 많이 나는 얼굴이었지만 남수단 사람들도 아랍어를 꽤 잘해서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어보였다. 남수단과 북수단 간에 다툼도 많아서 결국 독립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정작 민간에서는 그럭저럭 잘 지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룸벡에 도착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어서 나와 함께 택시에 탄 승객들 모두 숙소를 잡았다. 기사님이 데려간 숙소에 가서 문을 열어보니 맨바닥에 매트리스와 모기장만 있고 창문이라고는 벽에 작게 뚫린 구멍이 전부였다. 숨이 턱 막힌 나는 애써 미소를 보이며 거절했고, 다른 승객들은 "혼자 어디 가서 지낼 거냐"며 같이 지내자고 권유했지만 너무 더워서 단 하룻밤이라도 거기서 잘 수가 없었다. 당시 가성비를 엄청 따졌던 나조차도 남수단의 더위 앞에 무릎을 꿇고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외국인이 운영한다는 호텔로 향했다.
저녁 7시가 돼 갈 무렵 주위가 어두워져서 걸어서 가기엔 무리라고 생각한 나는 오토바이 택시를 하나 골라 잡아 흥정했고, 내가 오토바이에 타려고 하자 한 남자가 자기도 같은 방향에 간다며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오토바이 택시기사는 돈을 더 벌기 위해 나와 그 남자를 함께 태웠고, 나는 다른 오토바이 택시를 찾아 흥정하는 게 귀찮아서 기사와 그 남자 사이에 끼어 탈 수 밖에 없었다. 출발한 지 3분 쯤 지나서였을까. 내 목에 뭔가 축축한 게 닿는 느낌이 나서 놀라 소리를 질렀다. 뒤에 탄 남자가 내 뒷목을 핥았던 것이다! 나는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따졌고 뒤에 탄 남자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앞에 탄 기사는 자기 뒤에서 벌어진 실랑이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달렸고, 화가 난 나는 기사의 어깨를 흔들며 운전을 못하게 방해했다.
기사가 오토바이를 멈추자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뒤에 탄 남자한테 내리라고 소리쳤다.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남자를 내리게 한 뒤 기사에게 더 빨리 운전해달라고 부탁하여 호텔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그 남자를 내팽개치고 나니 속이 좀 후련했던 나는 호텔 로비에 앉아 있는 외국인 중년 여성을 보자 안도감마저 들었다. 그 중년 여성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기 어떻게 왔냐고 물었고, 나는 여행 중이라고 대답했다. "여길 여행 왔다고?" 어이없어 하던 그녀의 반응대로 그 호텔은 UN, NGO 직원들이 출장 차 방문하여 묵는 숙소였고, 여행자가 묵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했다.
하룻밤에 150불이 넘었던 그 호텔은 싱글침대와 에어컨, TV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지만 에어컨이 나온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제 값을 하기에 충분했다. 샤워를 하니 머리를 감은 건지 걸레를 빤건지 흙탕물이 계속 나왔다. '왜 사람 목을 핥아?'라는 어이없는 생각과 함께, 땀에 찌든 내 목을 핥은 그 남자는 짠맛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정말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기사와 남자가 한 패가 아니었던 점, 남자가 순순히 죄를 인정하고 사과한 점, 기사가 나를 목적지로 바로 데려다 준 점을 다행스럽게 여겨야 했다. 이 일은 잔소리를 바가지로 들을 게 뻔해서 여러 사람에게 말 안했던 일인데, 씁쓸한 기억이지만 오늘 문득 남수단 소식(비행기 추락)을 들으니 갑자기 생각나 급하게 끄적거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