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r Joshua Reynolds, The Honorable Henry Fane with Inigo Jones and Charles Blair, 1761–66. The MET
18세기 영국미술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초상화이다. 전통적으로 초상화에 강세였던 영국은 가족화(conversation piece)라는 변형된 초상화 양식을 통해 당대 유행들을 접목시키기 시작했다. 이런 양상을 소위 절충(折衷) 주의(eclecticism)라고 한다. 절충주의란 신학이나 철학에서 한 가지 주의만을 따르지 않고 여러 가지 설 중에서 좋은 것을 뽑아 절충한 주의 사상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는데 18세기 영국초상화에서 이러한 절충주의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당시 영국은 자국을 대표하는 미술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던 차였다. 1768년 영국왕립미술원이 창립되었지만 이 전까지의 영국미술은 주로 외국화가들에 의해서 왕실초상화를 제작하는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게다가 초상화는 유럽미술전통에서 종교화나 역사화에 비해 하위장르에 불과했다. 당연히 전통적인 양식의 초상화만으로는 부족했다. 이에 영국왕립미술원 창립자이자 초대회장인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nolds, 1723–1792 London)나 영국 초상화가의 대가 토마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1727–1788)와 같은 화가들은 그들의 초상화에 당시 유행하던 이탈리아풍의 풍경이나 혹은 고전미술적 요소들을 가미하기 시작했다. 초상화의 클래스를 끌어올리기 위한 일환으로 말이다.
Claude Lorrain, The Trojan Women Setting Fire to Their Fleet, 1643.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Claude Lorrain, The Judgment of Paris, 1645/1646. The National Gallery, Washington D. C.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초상화에 고전미술적 요소를 그려 넣은 것은 그렇다쳐도 풍경화는 왜일까라는 의문이다. 사실 풍경화라는 장르만을 따지고 보면 초상화와 별반 다를 것이 없던 처지였다.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등은 여전히 유럽미술전통에서 하위그룹이었다. 그런데 왜? 풍경화를?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당시 영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클로드 로레인(Claude Lorrain, 1604/05-1682)의 풍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로레인은 프랑스 출신이지만 일생을 이탈리아에서 보내면서 17세기 이탈리아 풍경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동시대인들 뿐만 아니라 한 세기 후인 18세기 영국인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다.
로레인의 풍경화는 비슷한 시기에 발전된 네덜란드 풍경화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네덜란드 풍경화가 사실적인 지형 묘사에 관점을 둔 것에 비해 로레인으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풍경화는 고전주의에 영향을 받아 발전했다는 것이다. 로레인 풍경화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르네상스 미술의 정수인 벨리니나 조르조네로 대표되는 아르카디아 풍경화(Arcadian landscape)의 목가적 전통(pastoral tradition)을 잇는 동시에 그리스, 로마시대의 고전적 요소들을 풍경화 속 배치함이 그 특징이었다.
이 시기 영국인들은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산천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과 같은 감정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치 고대 시인 버질의 목가시를 회화적으로 구현한 듯한 로레인의 풍경화가 18세기 영국인들의 심미(審美)를 충족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당시 영국인들에게 풍경화를 초상화에 접목시킨다는 것은 고대목가시를 초상에 입혀 초상화의 수준을 격상시키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John Wootton, Classical Landscape with Gypsies, 1748, Oil on canvas,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 한편, 영국 초상화가들이 그들의 작품에 여러 요소들을 접목하여 영국만의 새로운 초상화 양식을 발전시키고 있는 동안 18세기 영국미술의 두 번째 흐름인 풍경화 또한 그 변화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다.
영국에서 로레인 풍경화의 인기는 과히 열광적이었고 이런 인기를 증명하듯 존 우턴(John Wootton, 1686-1764)이나 조지 램버트(George Lambert, 1700-65)와 같은 로레인의 아류화가들이 생겨났다. 영국의 초기 풍경화가들은 주로 로레인의 판화작품을 따라 그리면서 풍경화의 기법들을 터득하기 시작했고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알렉산더 카즌스(Alexander Cozens, 1717-86), 리처드 윌슨(Richard Wilson, 1713-82), 조나단 스켈튼(Jonathan Skelton, 1735-59)과 같은 화가들이 로레인이 보고 그렸을 법한 이탈리아 로마의 유적지등을 직접 가서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이런 노력들을 통해 영국풍경화가들은 서서히 풍경화를 어떻게 제작하는지에 대한 이해에 도달했고 더 나아가 이탈리아 풍경이 아닌 자국의 풍경을 어떻게 감상하고, 그려내며, 또한 이를 어떻게 회화의 주제로 삼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좌) 로레인 <아폴로와 뮤즈가 있는 풍경> 1652. Scottish National Gallery (우) 윌슨 <와이 강에서> 18세기 중반. Tate Gallery 이들 중 로레인의 풍경화를 가장 잘 터득하고 이해한 작가로 손꼽히는 리처드 윌슨은 풍경화를 영국 고유의 미술장르로 토착화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평가된다. 윌슨의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와이 강에서 On the Wye>를 로레인의 <아폴로와 뮤즈가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Apollo and the Muses> (1652)과 비교해 보면 미묘한 차이점이 발견된다.
이 작품에서 윌슨은 로레인 풍경화의 양식적 특징(3단계 레이아웃: 전경, 중경, 후경의 구분이 뚜렷한 풍경화법으로 로레인이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로레인 풍경화법이라고도 불림)은 유지했지만 아폴로와 같은 고전 문학적 요소를 지워버리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이 그림의 제목에 영국에서 가장 긴 강 중의 하나인 ‘와이 강’을 붙였다. 그 덕분에 윌슨의 풍경화는 비록 로레인의 풍경화법을 사용했지만 영국의 강을 그린 영국의 풍경화로 거듭나게 되었다. 윌슨은 영국에서 초상화가가 아닌 풍경화가로 명성을 얻었고 그의 작품은 영국의 낭만풍경화 (Romantic landscape)의 초석을 다지는 역할을 하였기에 영국풍경화의 아버지라 불린다.
이처럼 로레인풍 풍경화는 초상화에도 풍경화에도 영향을 주며 18세기 영국미술을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었고 이 시대 대부분의 영국화가들은 풍경화에 대한 관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참고문헌
Claire Pace, “‘Paise antique’: Claude Lorrain and Seventeenth-Century Responses to Antique Painting,” Artibus et Historiae 36, no. 72 (2015)
Deborah Howard, “Some Eighteenth-Century English Followers of Claude,” special issue devoted to Claude, Nicolas, and Gaspard Poussin in connection with the Claude Exhibition at the Hayward Gallery, The Burlington Magazine 111, no. 801 (December 1969)
Vittoria Di Palma, “Is Landscape Painting?” In Is Landscape?: Essays on the Identity of Landscape, ed. Gareth Doherty and Charles Waldheim (London: Routledge,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