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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udia Park Mar 17. 2024

화가의 메세지

그림 속 그림 2편


요한 조파니의 <던다스 가족화> (1769–70) 출처: 위키피디아


<던다스 가족화>를 그린 화가 요한 조파니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독일 출신이었던 조파니는 18세기 런던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당시 런던은 세계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고 초상의 주인공인 던다스와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 내국인들 외에도 기회를 찾아 많은 이들이 해외에서 이주를 하게 됩니다. 일종의 잉글리시 드림을 찾아서 말이죠. 조파니 또한 그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조파니는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미술, 그리고 네덜란드 풍속화와 같은 여러 미술장르를 섭렵한 중견화가였지만 당시 런던에서 가장 좋은 수입원이자 유행하는 미술장르는 가족화(18세기 영국 가족화는 초상의 주인공들의  일상적 모습을  그린 일종의 비공식적 혹은 일상적인  모습의 초상화( informal portraiture) 정도로 풀어 볼 수 있다) 였기에 초상화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기존 초상화 스타일에 바로크 미술적 요소들을 가미해 더욱더 자연스러우며 사실적인 초상화를 제작하며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Johan Zoffany, The Farmer’s Return, 1762. 출처: Yale Center for British Art


조파니는 런던 사교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영국화가 벤자민 윌슨(Benjamin Wilson, 1721-88)과 함께 일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윌슨이 그린 초상화 속 인물의 옷을 그리는 일종의 의상화가(Drapery painter) 정도의 역할에 지나지 않았지만, 윌슨과 함께 일한 덕분에 당대 최고의 화가인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나 극작가이자 배우인 데이비드 개릭(David Garrick, 1717-79) 등과 친분을 쌓게 됩니다. 이후 개릭의 권유로 연극의 장면을 가족화의 형식으로 그린 <농부의 귀환 The Farmer’s Return> (1762년 3월 20일 최초 공연된 연극의 한 장면)이 탄생하게 되고 이 작품이 그해 5월 예술가협회(Society of Artists)에 전시되면서 조파니는 본격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그의 명성은 삽시간에 퍼져 런던 상류층의 후원을 받게 되며 종국에는 영국왕실화가가 되게 됩니다.


(좌) <프린스 오브 웨일스 조지와 요크 공작 프레더릭> (우) <샬롯 왕비와 두 아들들> 출처: 영국 로얄 컬렉션


영국 로열 컬렉션에 소장 중인 <프린스 오브 웨일스 조지와 요크 공작 프레더릭 George, Prince of Wales and Frederick, Later Duke of York> (1764–65)과 <샬롯 왕비와 두 아들들 Queen Charlotte with her Two Eldest Sons> (1764–65)과 같은 작품은 조파니가 궁정화가로써 처음 제작한 왕실 초상화입니다. 이들 작품 속 배경이 되는 공간은  실제와 가상의 오브제들이 뒤섞여 재창조된 공간인데요.


(좌) 카를로 마라티 아류작가의 <십자가를 든 아기 그리스도> 출처: 영국 로얄 컬렉션


장자인 조지왕자와 프레더릭 왕자의 초상화에는 조지 3세와 샬롯 왕비의 초상화가 왕자들 뒤쪽으로 걸려 있습니다.  이들 초상화는 비록 실제 이 공간에 걸려있던 그림은 아니지만 왕과 왕비의 모습을 그려넣음으로써  어린 두 아들을 향한  부모로서의 보호와 사랑을 상징하는 목적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왕과 왕비의  초상화 위로는 17세기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이탈리아 화가 카를로 마라티(Carlo Maratti, 1625-1713)의 아류작가(Follower) 작품인 <십자가를 든 아기 그리스도 The Infant Christ Holding a Cross> (1670-85)가 보이는데 이 작품 역시 실제로는 다른 방에 비치된 그림이었지만 어린 두 왕자들의 모습을 신성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삽입되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양쪽 벽면에는 유럽 초상화의 대가인 안소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의 <찰스 1세의 세 자녀 The Three Eldest Children of Charles I> (1635-1636)와 <제2대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와 프랜시스 빌리어스 경 George Villiers, 2nd Duke of Buckingham (1628-87), and Lord Francis Villiers (1629-48)> (1635)이 걸려 있는데 이 작품들은 왕자들의 정통성을 명시함과 동시에 조파니 자신이 제임스 1세의 왕실 화가이기도 했던 반 다이크를 잇는 적법한 후계라는 일종의 계보(系譜)를 설정한 것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좌) 반 다이크 (찰스 1세의 세 자녀> (우) 제 2대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와 프랜시스 빌리어스> 출처: 영국 로얄 컬렉션


이와 같은 일종의 가상 배경을 만드는데 왕실의 입김이 어느 정도 작용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문서는 없으나 조파니의 작품들이 왕실에서 아주 좋은 반응을 일으켰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작가의 재량이 비교적 자유롭게 발휘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화가가 그의 작품 속에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삽입한 일종의 그림 속 그림이 어떤 의미를 지니며 이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던다스 가족화>에 네덜란드 해경화가 의도적으로 선택되어 메세지를 남긴 것처럼요.


초상화라는 그림 속에 등장하는 또 다른 그림은 단순히 초상의 배경이나 실내오브제의 역할을 넘어 화가가 비교적 변화가 제한된 미술장르인 초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왜 조파니도 네덜란드 해경화를 <던다스 가족화>에 선택해서 그려 넣은 것일까요? 그는 바로 조파니 역시 거부하기 힘든 시대적 소명에 대한 고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760년대부터 영국, 프랑스,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국가들은 해양탐사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전국민적 관심을 받았습니다. 조파니 또한 1768년 이전부터 사이언스 클럽과 같은 모임을 통해 자연과학자이자 식물학자인 조세프 뱅크스(Joseph Banks, 1743-1820)와 교류하며 해양탐험에 대해 관심을 키워갔습니다. 뱅크스는 제임스 쿡(James Cook, 1728-79) 선장을 필두로 떠난 영국의 첫 해양탐사(Great expedition, 1768-1771)에 참여하여 브라질, 타히티,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을 방문하며 성공적인 자연과학탐사를 이끌어 낸 주역이었죠. 그리고 1771년 첫 항해에서 돌아온 지 4개월 정도 지난 시점에서 쿡 선장의 두 번째 항해가 계획되었는데 당시 과학탐사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있었던 뱅크스가 조파니를 수석화가로 함께 가고자 했고 조파니 역시 흔쾌히 수락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뱅크스가 두 번째 항해에 불가피하게 합류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조파니의 해상탐험에 대한 꿈도 안타깝지만 꺾여버렸습니다.


(좌) 얀 판 데 카펠의 <무풍> (1654) (우) 요한 조파니 <던다스 가족화> (1769-70)


<던다스 가족화>는 해양탐험에 대한 화가의 개인적인  기대감이 한참 고조되었을 무렵인 1770년에 완성되었고 이를 미루어 짐작건대 작품 속 등장한 17세기 네덜란드 해경화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작가의 시점으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던다스 초상화 속 삽입된 네덜란드 해경화 <무풍>은 초상을 의뢰한 던다스뿐 아니라 화가 개인의 열망을 말해주는 메세지로 이 초상속 공간에 의도적으로 포함된 것이지요.



참고문헌

Penelope Treadwell, Johan Zoffany: Artist and Adventurer (London: Paul Holberton Publishing, 2009)

Webster, Mary. Johan Zoffany, 1733–1810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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