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내면의 본질을 찾는 길
명상, 사유, 그리고 깨어있음
제15장: 내면의 본질을 찾는 길 - 명상, 사유, 그리고 깨어있음
15.1. 변하는 것에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을 기억하는 지혜
15.1.1. 집착(Attachment) 내려놓기: 고통의 근원에 대한 이해
우리가 앞선 여정을 통해, 천부경 (天符經)의 "용변부동본 (用變不動本)"이라는 심오한 가르침 속에서 존재의 위대한 이중주, 즉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 (用變)의 강물과 그 모든 흐름의 바탕이 되는 영원불변의 근원 (不動本)이 어떻게 하나의 통일된 실재를 이루는지를 탐구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여정은 이러한 우주적인 통찰을 우리 각자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 가져와, 그것을 어떻게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체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천적인 지혜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 첫 번째 관문은 바로 우리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과 불안의 가장 깊은 뿌리를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그 근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고대의 지혜 전통들은 한결같이, 우리의 고통이 외부의 사건이나 다른 사람들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변화하는 것들을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그것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려는 우리 자신의 마음, 즉 ‘집착 (執着, Attachment)’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불교 (Buddhism)에서는 이러한 집착을 ‘취 (取, Upādāna)’라고 부르며, 모든 고통 (苦, Duḥkha)의 직접적인 원인인 갈애 (渴愛, Tṛṣṇā)가 더욱 견고해진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마치 목마른 사람이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소금물은 잠시 갈증을 해소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더 극심한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이, 우리가 변화하는 대상에 집착할수록 우리의 만족감은 일시적일 뿐이며 그 대상이 변하거나 사라질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더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우리는 젊음과 건강,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우리가 쌓아 올린 재산과 사회적 명예, 그리고 심지어 우리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마저도 영원히 변치 않고 우리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천부경이 "용변 (用變)"이라고 명확히 선언했듯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적인 것들은 예외 없이 생성되고, 머무르며, 변화하고, 마침내 소멸하는 무상 (無常, Anicca)의 법칙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필연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치 흐르는 강물을 손으로 움켜쥐어 멈추게 하려는 어리석은 시도처럼, 변화하는 것들에 헛되이 매달리는 것이 바로 집착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변치 않고 영원히 나만을 사랑해주기를 바라지만, 그 사람의 마음 또한 수많은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강물과 같습니다. 우리는 안정된 직장과 사회적 지위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지만, 경제 상황의 변화나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인해 언제든 그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젊음과 아름다움 역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그러나 어김없이 시들어갑니다. 이처럼 우리가 집착하는 대상이 변하거나 사라질 때, 우리의 마음은 마치 뿌리 뽑힌 나무처럼 흔들리며 상실감과 슬픔, 분노와 두려움이라는 고통의 파도에 휩쓸리게 됩니다. 결국,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변화 그 자체가 아니라, 변화를 거부하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우리 자신의 집착인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학파 (Stoicism) 철학자들 역시 이와 유사한 통찰을 제시했습니다. 에픽테토스 (Epictetus)와 같은 현자들은 우리 삶의 평온을 얻기 위한 가장 중요한 지혜는 바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데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의지와 같은 내면의 영역뿐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건강, 재산, 명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평판과 같은 외부적인 것들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통제 밖에 있습니다.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는, 바로 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인 것들에 우리의 행복과 안녕을 의존시키고 그것들이 우리의 뜻대로 되기를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오직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내면의 덕 (德, Virtue)을 쌓는 데에만 집중하라고 조언했습니다. 이는 천부경의 언어로 말하자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용변 (用變)’의 세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우리 내면의 ‘부동본 (不動本)’을 발견하고 그곳에 굳건히 서라는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코 세상을 등지고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인 태도로 살아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것을 더욱 깊이 사랑하고 온전히 경험하기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소유하려 하거나 영원히 붙잡아두려 할 때, 우리는 그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보기보다는 그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대상이 언젠가는 변하고 사라질 수 있다는 무상함의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 있는 그 존재의 소중함을 더욱 절실히 느끼고, 아무런 조건이나 기대 없이 순수하게 사랑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마치 아름다운 노을을 사진 속에 영원히 가두려 애쓰는 대신, 그저 그 순간의 찬란한 빛과 색깔의 변화를 온 마음으로 감상하고 그 경이로움을 가슴에 새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고통의 근원에 대한 이해는 우리를 자기 연민이나 절망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향한 첫걸음으로 안내합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이 외부 세계의 탓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집착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탓하는 것을 멈추고 우리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영적인 여정의 시작입니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이 집착하는 마음의 작동 방식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고, 그 견고한 사슬을 풀어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길은 바로 명상과 깊은 사유를 통해, 변화하는 마음의 파도 너머에 있는 고요한 자각의 바다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15.1.2. 변화를 수용하는 삶의 태도
우리가 앞서 인간 고통의 가장 깊은 뿌리가 변화하는 것들을 영원할 것이라 착각하고 그것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려는 ‘집착 (Attachment)’에 있음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우리는 그 고통의 사슬을 끊고 진정한 자유와 평화로 나아가는 지혜로운 삶의 태도를 모색해야 합니다. 그 길은 바로 변화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대신, 오히려 삶의 끊임없는 흐름과 변화무쌍함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유연하게 춤추는 법을 배우는 ‘수용 (Acceptance)’의 태도입니다. 여기서의 수용은 결코 운명 앞에서 무력하게 체념하거나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주의 근본적인 리듬, 즉 천부경 (天符經)이 노래하는 ‘용변 (用變)’의 법칙을 깊이 신뢰하고, 그 거대한 흐름과 싸우는 대신 그 힘을 지혜롭게 활용하여 자신의 삶이라는 배를 항해해나가는 매우 적극적이고도 역동적인 삶의 기술입니다.
이는 마치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숙련된 뱃사공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미숙한 뱃사공은 바람과 파도의 힘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려 하거나,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만을 고집하며 억지로 노를 젓습니다. 그 결과 그는 곧 지치고 좌절하며, 결국에는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난파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뱃사공은 바람의 방향을 바꿀 수 없음을 압니다. 대신, 그는 바람의 흐름을 면밀히 읽고 그 힘을 이해하며, 자신의 돛을 그 방향에 맞춰 정교하게 조절합니다. 때로는 역풍을 만나더라도, 그는 돛의 각도를 바꾸어 지그재그로 나아가며 결국에는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 전진합니다. 그는 바람과 싸우는 대신 바람과 함께 춤을 추는 것입니다. 이처럼 변화를 수용하는 삶의 태도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삶의 거대한 흐름 (운명, 외부 조건)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즉 우리 자신의 반응과 태도 (돛의 방향)를 지혜롭게 조절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동양의 도가 (道家) 사상이 가르치는 ‘무위자연 (無爲自然)’의 삶 속에서 그 정수를 드러냅니다. ‘무위 (無爲)’는 억지로 행함이 없이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며, 이는 곧 물 (水)의 덕 (德)을 본받는 삶입니다. 물은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단단한 바위를 만나면, 결코 그 바위와 힘으로 맞서 싸우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부드럽게 그 바위를 비켜 흘러가거나, 혹은 그 주변을 감싸 안아 새로운 길을 만들어냅니다. 또한, 물은 어떤 그릇에 담기느냐에 따라 자신의 모양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놀라운 유연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처럼 변화를 수용하는 삶이란, 예기치 않은 장애물이나 시련 앞에서 좌절하거나 저항하는 대신, 물처럼 유연하게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고,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자신을 창조적으로 변형시켜나가는 지혜입니다. 그것은 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단단한 것마저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서양의 스토아학파 (Stoicism) 철학자들 역시 이러한 수용의 지혜를 다른 언어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우주 전체가 ‘로고스 (Logos)’라는 신성한 이성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운행된다고 믿었으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설령 그것이 고통스럽게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이 거대한 우주적 조화의 일부로서 필연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현자의 길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불평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우주의 필연적인 뜻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 즉 ‘운명애 (Amor Fati, 아모르 파티)’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운명을 체념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삶에 주어진 모든 것, 즉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만남과 이별을 모두 끌어안고 “이것이 바로 나의 삶이며, 나는 이 모든 것을 원했다”고 선언하는 영혼의 위대한 긍정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는 삶의 태도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매우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오랫동안 준비해 온 중요한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우리는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며 세상을 원망하고 자기 연민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변화에 저항하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변화를 수용하는 태도는, 먼저 그 실패의 고통을 온전히 느끼고 인정하되, 그것을 자신의 성장을 위한 또 다른 기회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실패는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기 위해 찾아왔을까? 어쩌면 이 길이 나의 진정한 길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혹은, 나에게 더 깊은 겸손과 인내를 가르쳐주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다.” 이처럼 변화를 수용한다는 것은, 일어난 사건을 긍정적인 이야기로 다시 써 내려가는 창조적인 행위이며, 모든 끝 속에서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지혜의 눈을 뜨는 것입니다.
천부경의 "용변부동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궁극적인 지혜는, 이처럼 변화의 흐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위에서 자유롭게 춤추는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변화를 두려워하는 노예가 아니라, 변화라는 파도를 타고 노는 자유로운 서퍼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지혜는 우리를 삶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란으로부터 해방시켜,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더 깊고 고요한 차원, 즉 우리 내면의 ‘부동본’을 향한 탐구로 자연스럽게 이끌어줍니다.
15.2. 고요 속에서 발견하는 ‘부동본(不動本)’: 명상과 마음챙김
15.2.1. 마음챙김: 현재 순간에 깨어 있기
우리가 앞서 변화하는 것들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삶의 끊임없는 흐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수용(Acceptance)’의 지혜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제 우리는 그 지혜를 구체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체득하고 실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천적인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천부경 (天符經)이 노래하는 영원불변의 근본 바탕, 즉 ‘부동본 (不動本)’은 단지 믿음의 대상이나 철학적인 개념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 각자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직접 체험하고 발견할 수 있는 살아있는 실재입니다. 그 고요하고도 흔들림 없는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장 직접적이고도 보편적인 길이 바로 ‘마음챙김 (Mindfulness)’이라고 불리는, 현재 순간에 온전히 깨어 있는 연습입니다.
마음챙김은 불교 (Buddhism)의 위빠사나 (Vipassanā, 비파사나) 수행 전통에 그 깊은 뿌리를 두고 있으며, 최근에는 서양 심리학과 뇌 과학의 주목을 받으며 스트레스 해소와 정신 건강을 위한 효과적인 도구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 마음챙김은 단순한 심리적 기법을 넘어, 우리를 존재의 가장 깊은 진실과 만나게 하는 강력한 영적인 수행입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경험들, 즉 마음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과 감정, 우리 몸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감각, 그리고 주변 환경의 소리와 빛과 공기의 흐름을 어떠한 판단이나 해석, 혹은 저항 없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수용하는 섬세한 기술입니다.
이 연습은 아주 단순한 행위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용한 곳에 편안하게 앉아, 그저 자신의 자연스러운 호흡이 몸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부드럽게 관찰합니다. 숨이 들어올 때, 배가 부풀어 오르는 감각을 알아차리고, 숨이 나갈 때, 배가 꺼지는 감각을 알아차립니다. 우리는 호흡을 억지로 조절하거나 바꾸려 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호흡을 다정한 친구처럼 지켜볼 뿐입니다. 하지만 이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결코 고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을까?’ 하는 사소한 계획에서부터, ‘어제 그 사람이 했던 말이 왜 그렇게 기분 나빴을까?’ 하는 과거에 대한 곱씹음, 그리고 ‘내일 있을 중요한 발표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마치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처럼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속을 찾아와 주의를 흩트려 놓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음챙김의 진정한 연습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의 손님들을 쫓아내려 애쓰거나 그들과 싸우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어 함께 휩쓸려 가지도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마치 강둑에 고요히 앉아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 속의 나뭇잎들을 그저 무심히 바라보듯, 이러한 생각과 감정들이 단지 우리 마음속을 스쳐 지나가는 일시적인 현상임을 알아차립니다. “아, 지금 내 마음속에 불안이라는 감정이 일어나고 있구나.”, “아, 과거에 대한 후회라는 생각이 떠올랐구나.” 하고 그저 그 존재를 부드럽게 인정하고 이름 붙여준 뒤, 다시 우리의 주의를 호흡이라는 고요한 닻으로 되돌려옵니다.
이러한 마음챙김의 연습을 꾸준히 반복하다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에 대한 매우 중요하고도 혁명적인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각과 감정의 흐름’과, ‘그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고요하고 변치 않는 의식’이 서로 다른 것이라는 체험적인 자각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분노라는 감정 자체가 ‘나’라고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대신, "아, 내 마음이라는 무대 위에 분노라는 배우가 잠시 등장하여 연기를 하고 있구나" 하고 그것을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는, 무대 뒤의 고요한 관객이자 무대 그 자체인 내면의 광대한 공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용변 (用變)’의 세계, 즉 끊임없이 변화하는 마음의 파도로부터, ‘부동본 (不動本)’, 즉 그 모든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고요한 바다로 우리의 정체성을 옮겨오는 위대한 전환의 순간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생각이나 감정, 혹은 육체적 감각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담고 있고, 알아차리며, 그것들로부터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순수한 ‘자각 (Awareness, 覺)’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이 순수한 자각은 마치 영화 스크린과도 같습니다. 스크린 위에서는 온갖 종류의 기쁘고 슬픈, 평화롭고 폭력적인 영화 장면들이 현란하게 펼쳐졌다가 사라지지만, 그 모든 영상이 끝나고 난 후에도 스크린 자체는 그 어떤 장면에 의해서도 물들거나 긁히거나 변하지 않고, 항상 하얗고 깨끗하며 고요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마음챙김은 바로 우리를 영화 속의 주인공과 동일시하는 환상에서 깨어나, 우리 자신이 바로 그 모든 드라마를 가능하게 하는 영원하고 변치 않는 스크린임을 깨닫게 하는 지혜입니다.
이처럼 현재 순간에 온전히 깨어 있는 마음챙김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천부경이 노래하는 ‘부동본’을 우리 자신의 가장 직접적인 체험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추상적인 철학적 개념이나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내면의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운 고향입니다. 이 고요한 중심으로의 귀환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삶의 모든 변화와 도전을 지혜롭게 마주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15.2.2. 명상: 생각의 소음을 넘어 순수한 자각에 이르기
우리가 앞서 ‘마음챙김 (Mindfulness)’이라는 부드러운 관찰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각과 감정의 흐름과 그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고요한 의식의 공간이 서로 다름을 발견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면, 이제 우리는 그 길 위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나아가게 됩니다. 그 걸음은 바로 ‘명상 (Meditation, 瞑想)’이라는,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중심으로 의식적으로 돌아가려는 적극적인 여정입니다. 마음챙김이 강둑에 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이었다면, 명상은 이제 그 강물 속으로 용기 있게 잠수하여, 모든 표면적인 소용돌이 너머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고요하고도 깊은 심연, 즉 천부경 (天符經)이 노래하는 ‘부동본 (不動本)’의 실체와 직접적으로 만나는 신성한 기술입니다.
명상은 본질적으로 ‘길들지 않은 마음을 길들이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종종 고삐 풀린 원숭이나 쉴 새 없이 지저귀는 새들의 무리와도 같아서, 단 한 순간도 고요히 머물러 있지 못하고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사이를 끊임없이 오고 갑니다. 이러한 내면의 끊임없는 소음과 산만함이야말로 우리가 존재의 깊은 평화와 진리를 체험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다양한 명상 기법들, 예를 들어 호흡에 집중하는 아나파나사티 (Ānāpānasati), 특정 소리나 진언 (Mantra, 만트라)을 반복적으로 암송하는 명상, 혹은 자애로운 마음을 확장시키는 자애 명상 (Mettā Bhāvanā) 등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처럼 흩어지고 산만한 마음의 에너지를 하나의 고요한 중심으로 모으고, 생각의 끊임없는 흐름을 점차 잠재워, 마침내 순수한 ‘자각 (Awareness, 覺)’ 그 자체의 빛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명상의 과정은 마치 흙탕물이 가득 담긴 유리잔을 가만히 내려놓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흙탕물을 맑게 하기 위해 손을 넣어 휘젓거나 흙을 억지로 건져내려 할수록 물은 더욱 혼탁해질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저 그 유리잔을 아무런 방해 없이 고요한 곳에 가만히 내려두고 기다리기만 한다면, 무거운 흙먼지들은 중력의 법칙에 따라 저절로 서서히 바닥으로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물은 점차 투명해지고, 마침내 우리는 그 물을 통해 반대편의 풍경을 왜곡 없이 맑게 볼 수 있게 됩니다. 명상은 바로 이와 같이, 우리 마음속의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라는 흙먼지들을 억지로 없애려 싸우는 대신, 그저 고요히 머무름으로써 그것들이 저절로 가라앉도록 하는 지혜로운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꾸준히 명상을 실천하다 보면, 처음에는 견디기 힘들었던 생각과 생각 사이의 짧은 침묵의 순간들이 점차 길어지고 깊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마치 시끄러운 시장의 소음이 점차 잦아들고 마침내 고요한 새벽의 정적이 찾아오듯이, 우리 내면의 끊임없는 독백이 멈추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그동안 생각의 소음에 가려져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바탕에 항상 흐르고 있던 순수한 의식의 공간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곳에는 어떠한 판단도, 어떠한 분별도, 어떠한 갈등도 없는 완전한 평화와 고요,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만이 존재합니다. 이것이 바로 천부경의 ‘부동본 (不動本)’, 즉 변화하는 현상 (用變) 너머에 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듯한 영원하고 변치 않는 순수한 자각의 실체입니다.
이 순수한 자각은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내용물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앎이 아니라, ‘앎’ 그 자체의 순수한 빛입니다. 그것은 마치 텅 빈 하늘과도 같아서, 어떤 구름이나 바람이 그 안을 지나가더라도 하늘 자체는 결코 더럽혀지거나 변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 내면의 하늘, 즉 ‘부동본’을 발견하고 그곳에 안주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어떤 변화나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깊은 안정감과 내적인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삶의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존재가 아니라, 그 모든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고요히 지켜보는 드넓고 깊은 바다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명상은 우리를 생각의 소음으로 가득 찬 머리의 세계에서, 순수한 존재의 고요함이 깃들어 있는 가슴의 세계로, 그리고 마침내 모든 분별이 사라진 영혼의 가장 깊은 중심으로 이끄는 신성한 여정입니다. 이 여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단지 유한하고 변화무쌍한 육체와 감정의 덩어리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담고 있고 그것들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영원하고도 신성한 의식의 불꽃임을 직접 체험하게 됩니다. 이 깨달음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변하는 것에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을 기억하는 지혜’를 체득하고, 삶의 모든 순간을 평화와 자유 속에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5.3. 삶의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변화 속에서 중심 잡기
15.3.1. 폭풍의 눈: 외부의 혼란 속 내면의 평화 유지하기
우리가 앞서 명상과 마음챙김이라는 고요한 내면의 길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각과 감정의 파도 너머에 항상 존재하는 순수한 자각의 바다, 즉 ‘부동본 (不動本)’을 발견하는 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의 여정은 그 발견된 중심을 어떻게 일상의 삶 속으로 가져와, 우리를 둘러싼 외부 세계의 거친 폭풍우 속에서도 그 평화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실천적인 지혜로 나아갑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를 고요한 명상실 안에만 머무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서는 순간, 우리는 예기치 않은 사건의 소용돌이와 복잡한 인간관계의 격랑, 그리고 수많은 요구와 책임감의 비바람과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천부경 (天符經)의 "용변부동본 (用變不動本)"의 지혜는 우리에게 ‘폭풍의 눈 (The Eye of the Storm)’과 같은 삶의 태도를 가르쳐줍니다.
거대한 태풍이나 허리케인의 중심에는 놀라울 정도로 고요하고 맑게 갠 원형의 공간, 즉 ‘폭풍의 눈’이 존재합니다. 그 주변에서는 시속 수백 킬로미터의 맹렬한 바람이 모든 것을 파괴하며 휘몰아치고 있지만, 바로 그 중심에 있는 눈 안에서는 바람 한 점 없이 평화롭고 고요한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도 바로 이와 같은 ‘폭풍의 눈’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명상을 통해 발견했던 순수한 자각의 공간, 즉 ‘부동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외부 세계의 모든 혼란과 소란, 즉 질병, 경제적 어려움, 인간관계의 갈등, 그리고 사회적 불안과 같은 것들은 바로 이 눈의 주변을 맹렬하게 맴도는 폭풍의 벽과 같습니다.
삶의 지혜는 폭풍 자체를 없애려 애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삶의 폭풍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바로 이 폭풍이 휘몰아치는 한가운데에서도, 우리 자신의 중심에 있는 고요한 ‘폭풍의 눈’ 안에 머무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외부의 상황이 아무리 거칠고 혼란스럽게 변하더라도 (用變),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평화와 안정의 중심 (不動本)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그 진정한 힘을 발휘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직장에서 갑작스러운 문제로 인해 상사로부터 거친 비난을 받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 비난의 말들은 당신을 향해 몰아치는 강력한 폭풍과도 같습니다. 이때 우리의 일반적인 반응은 그 폭풍에 함께 휩쓸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떨거나, 억울함에 분노하거나, 혹은 수치심에 자신을 자책하며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듭니다. 우리의 내면은 상사의 분노라는 외부의 폭풍과 똑같은 혼란과 고통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하지만 ‘폭풍의 눈’ 안에 머무르는 법을 아는 사람은 다르게 반응합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호흡으로 돌아와 내면의 중심을 잡습니다. 그는 상사의 분노가 자신을 향한 폭풍임을 인식하지만, 그 폭풍이 자신의 본질이 아님을 압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고요한 관찰자의 자리에서, 상사의 말과 그로 인해 자신의 몸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파도를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봅니다. 그는 그 감정에 저항하거나 휩쓸리지 않고, 마치 폭풍의 눈 안에서 바깥의 비바람을 조용히 관찰하듯, 그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허용합니다. 바로 이 고요한 중심 속에서, 그는 감정적인 반응 대신 가장 지혜롭고 건설적인 대응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가정에서의 격렬한 말다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의견 충돌은 종종 우리를 가장 깊은 상처와 분노의 폭풍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비난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감정의 칼날로 서로를 베고 상처 입힙니다. 하지만 그 순간 잠시 멈추어, 이 격렬한 감정의 폭풍 너머에 있는 우리 각자의 내면의 고요한 중심, 즉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싶어 하는 본래의 마음 (不動本)을 기억해낼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 ‘폭풍의 눈’ 속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상대방의 말 속에 숨겨진 아픔과 두려움을 들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고, 이 싸움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관계의 평화를 되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폭풍의 눈’ 안에 머무르는 지혜는 우리에게 외부의 혼란과 내면의 평화가 결코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님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거나 모든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 평화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내면의 평화는 외부의 조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본질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영원한 샘물과도 같습니다. 명상과 마음챙김은 바로 이 내면의 샘물로 돌아가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연습입니다. 이 연습을 통해 우리는 점차 외부의 폭풍이 아무리 거세게 몰아친다 해도, 우리 내면의 고요한 중심을 잃지 않고 그 안에서 힘과 지혜, 그리고 사랑을 길어 올리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얻는 길이며, 천부경이 노래하는 ‘용변부동본’의 지혜를 우리 삶 속에서 온전히 살아내는 모습입니다.
15.3.2. 영원한 현재에 뿌리내리기
우리가 앞서 ‘폭풍의 눈’이라는 비유를 통해, 외부 세계의 거친 혼란 속에서도 내면의 고요한 중심을 발견하고 그곳에 머무르는 지혜를 살펴보았다면, 이제 우리는 그 중심으로 들어가는 가장 직접적이고도 유일한 문, 즉 ‘지금 이 순간’이라는 영원한 현재(Eternal Now)에 우리 존재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법을 탐구하게 됩니다. 천부경 (天符經)의 "용변부동본 (用變不動本)"이 노래하는 위대한 이중주, 즉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 (用變)과 그 모든 변화의 바탕이 되는 영원불변의 근원 (不動本)이 만나는 유일한 지점은 바로 ‘지금 여기 (Here and Now)’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기억의 그림자일 뿐이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상상의 투영일 뿐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 숨 쉬고, 느끼고, 행동하며, 존재의 진실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영원히 지속되는 현재, 바로 이 순간뿐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의 마음은 대부분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있지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타임머신처럼,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 사이를 불안하게 오고 갑니다. 우리는 어제 했던 실수나 상처받았던 기억을 되새기며 후회와 자책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혹은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현재의 불만족을 키웁니다. 동시에, 우리는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의 일들을 미리 걱정하고 계획하며 불안에 떱니다. ‘다음 주에 있을 중요한 발표를 잘 해낼 수 있을까?’, ‘노후 자금은 충분히 모을 수 있을까?’, ‘내 아이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까?’ 와 같은 수많은 걱정의 시나리오들이 우리 마음속을 점령하고, 우리는 정작 지금 이 순간 눈앞에 펼쳐져 있는 삶의 생생한 아름다움과 소중한 기회들을 놓쳐버리고 맙니다. 스마트폰의 끊임없는 알림과 소셜 미디어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자극적인 정보들은 이러한 우리의 마음의 방황을 더욱 부추깁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 자신의 몸과 호흡 안에 존재하는 대신, 가상의 시간과 공간 속을 헤매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현재를 놓쳐버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겪는 많은 심리적 고통의 근원입니다.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이자 현대 영성 지도자인 에크하르트 톨레 (Eckhart Tolle)는 그의 저서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The Power of Now』에서, 이러한 심리적 시간으로부터의 자유야말로 깨달음의 핵심이라고 역설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문제는 ‘지금’이 아닌 곳에 마음이 가 있을 때 발생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주의를 온전히 지금 이 순간으로 가져와, 자신의 몸 안에서 흐르는 생명의 감각을 느끼고, 자신의 호흡을 알아차리며, 주변의 모든 것을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과거와 미래라는 허상에 묶여 있던 마음의 고통은 저절로 힘을 잃고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천부경의 지혜는 바로 이러한 ‘영원한 현재에 뿌리내리기’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 (用變)은 바로 이 현재 순간 속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영원불변의 근본 바탕 (不動本) 또한, 오직 이 현재 순간의 고요함 속에서만 그 존재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현재 순간에 완전히 집중하고 깨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변화의 흐름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그에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으며, 동시에 우리 내면의 깊은 고요함과 평화 속에서 변치 않는 진리의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때 우리의 마음이 어제 있었던 다툼이나 내일 처리해야 할 업무 걱정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결코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한 차의 향기와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 그리고 함께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온전히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반쯤 살아있는 상태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식적으로 모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찻잔의 따뜻한 감촉, 찻잎의 섬세한 향기, 상대방의 눈빛에 담긴 애정, 그리고 우리를 감싸고 있는 고요한 공기의 흐름까지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시간은 멈춘 듯하고, 우리는 존재의 충만한 기쁨과 평화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현재’에 뿌리내리는 경험입니다.
이러한 실천은 결코 현실을 도피하거나 미래를 계획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지혜로운 준비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해야 할 일에 온전히 집중하고 최선을 다할 때, 미래는 저절로 가장 좋은 모습으로 펼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과거의 감정적인 짐을 현재까지 끌고 와 자신을 괴롭힐 필요는 없습니다. 과거는 참고서일 뿐, 우리 삶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용변부동본"의 지혜를 우리 삶 속에서 온전히 살아내는 것은, 마치 해바라기가 항상 태양을 향해 자신의 얼굴을 돌리듯이, 우리의 의식을 항상 ‘지금 이 순간’이라는 영원한 태양을 향해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이 현재 순간이야말로 변화와 불변이 만나고, 유한과 무한이 입 맞추며, 삶의 모든 고통이 녹아내리고 존재의 순수한 기쁨이 솟아나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이 지혜를 가슴에 새기고 매 순간을 온전히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천부경이 노래하는, 변화의 파도를 자유롭게 타면서도 영원한 평화의 중심을 잃지 않는 위대한 삶의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