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죽음의 순간에 마주하는 '근원적인 맑은 빛'

by 이호창

제17장: 죽음의 순간에 마주하는 '근원적인 맑은 빛': 티베트 사자의 서(書)의 지혜


17.1. 바르도 퇴돌 (Bardo Thödol)의 초대: 죽음, 해방을 향한 위대한 기회의 문


17.1.1. 바르도 (Bardo)란 무엇인가: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문턱들


우리가 앞선 여정을 통해, 인류의 다양한 지혜 전통들이 한결같이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영원한 빛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음을 확인했다면, 이제 우리의 탐구는 그 빛과 가장 극적이고도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순간, 즉 ‘죽음’이라는 위대한 문턱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 미지의 영역을 항해하는 가장 정교하고도 자비로운 지도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 바로 히말라야의 눈 덮인 지혜, 티베트 불교 (Tibetan Buddhism)의 신비로운 경전인 『바르도 퇴돌, Bardo Thödol (བར་དོ་ཐོས་གྲོལ་)』입니다. 서양에는 종종 『티베트 사자의 서, The Tibetan Book of the Dead』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경전은, 그러나 결코 죽은 자들만을 위한 난해한 주문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살아있는 우리 모두에게 존재의 본질과 의식의 신비,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의 가능성에 대한 심오한 가르침을 전하는 지혜의 서(書)입니다. 이 경전의 중심에는 바로 ‘바르도 (Bardo, བར་དོ་)’라는,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새롭게 조명하는 매우 중요하고도 실천적인 개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다시 반복하자면, ‘바르도’는 티베트어로 문자 그대로 ‘사이 (bar)의 존재 (do)’를 의미하며, 특정한 한 상태가 끝나고 다음 상태가 시작되기 이전의 ‘중간 상태 (Intermediate State)’ 또는 ‘과도기적 문턱 (Transitional Threshold)’을 가리킵니다.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사람이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한 후, 자신의 과거 업 (業, Karma)에 따라 다음 생으로 환생하기 이전까지의 기간 동안 의식이 경험하는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상태를 지칭하는 데 사용됩니다. 이 죽음 이후의 바르도는 의식이 육체라는 견고한 닻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의 생각과 습관, 그리고 감정의 파도에 따라 한없이 표류하게 되는, 매우 혼란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엄청난 영적 가능성이 열리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하지만 티베트의 위대한 스승들은 이 ‘바르도’의 개념을 단지 죽음 이후의 상태에만 국한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사실은 수많은 작은 바르도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통찰했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는 태어남이라는 문턱과 죽음이라는 문턱 사이에 놓인 하나의 거대한 ‘생의 바르도 (Bardo of this Life)’입니다. 우리가 매일 밤 잠이 들어 꿈을 꾸는 시간은, 깨어있는 의식과 완전한 무의식 사이에 존재하는 ‘꿈의 바르도 (Bardo of Dreaming)’입니다. 우리가 깊은 명상에 잠겨 일상적인 생각의 흐름이 멈추고 순수한 자각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순간은, 바로 ‘명상의 바르도 (Bardo of Meditation)’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순간이야말로 가장 미세하고도 근본적인 바르도입니다. 지금 이 순간은 방금 지나가 버린 과거의 순간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순간 사이에 놓인 찰나의 문턱입니다. 우리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그 사이의 짧은 멈춤, 하나의 생각이 끝나고 다음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그 고요한 틈새, 하나의 감정이 스쳐 지나가고 다른 감정이 피어오르기 전의 그 미묘한 공간, 이 모든 것이 바로 ‘순간의 바르도’입니다. 이처럼 바르도는 우리 삶의 모든 곳에 존재하며, 우리에게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행하는 과정 속에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바르도의 경험을 끊임없이 겪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청년이 오랫동안 준비해 온 대학 입학 시험을 마치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그 며칠간의 시간은, 고등학생이라는 과거의 정체성과 대학생이라는 미래의 정체성 사이에 놓인 불안하고도 설레는 바르도입니다. 한 직장인이 오랫동안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찾거나 자신만의 사업을 준비하는 그 기간 역시, 과거의 안정된 삶과 미래의 불확실한 삶 사이에 놓인 중요한 바르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고 혼자가 된 시간, 혹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임신의 기간,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과도기적 문턱’으로서의 바르도인 것입니다.


『바르도 퇴돌』의 지혜는 바로 이러한 삶의 모든 바르도, 특히 가장 강력한 바르도인 죽음의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그 불확실성과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영적인 각성과 해방을 위한 위대한 기회로 전환시킬 수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그 핵심은 바로 모든 바르도의 순간에는 우리 의식의 가장 깊은 본질, 즉 천부경이 노래하는 ‘본심본태양 (本心本太陽)’이자 티베트 불교가 말하는 ‘근원적인 맑은 빛 (Clear Light)’이 잠시나마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의 삶이라는 바르도 속에서 명상과 마음챙김을 통해 이 내면의 빛과 친숙해지는 연습을 꾸준히 한다면, 우리는 마침내 죽음이라는 가장 큰 바르도의 문턱 앞에서 두려움 없이 그 빛을 알아보고, 기꺼이 그 빛과 하나가 되어 영원한 자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위대한 경전이 우리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결국, 바르도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신성한 준비 공간이며, 우리 삶의 모든 문턱은 우리를 더 깊은 진실과 만나게 하려는 우주의 자비로운 초대장인 것입니다.

17.1.2. ‘듣는 것만으로의 해탈’: 죽은 자를 위한 안내이자 살아있는 자를 위한 각성의 길


우리가 앞선 여정을 통해, 인류의 다양한 지혜 전통들이 한결같이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영원한 빛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음을 확인했다면, 이제 우리의 탐구는 그 빛과 가장 극적이고도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순간, 즉 ‘죽음’이라는 위대한 문턱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 미지의 영역을 항해하는 가장 정교하고도 자비로운 지도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 앞서 살펴 보았던 티베트 불교 (Tibetan Buddhism)의 신비로운 경전인 『바르도 퇴돌, Bardo Thödol (བར་དོ་ཐོས་གྲོལ་)』입니다.


다시 한번 더 이야기 하면, ‘바르도’는 티베트어로 문자 그대로 ‘사이 (bar)의 존재 (do)’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특정한 한 상태가 끝나고 다음 상태가 시작되기 이전의 ‘중간 상태 (Intermediate State)’ 또는 ‘과도기적 문턱 (Transitional Threshold)’을 가리킵니다.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사람이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한 후, 자신의 과거 업 (業, Karma)에 따라 다음 생으로 환생하기 이전까지의 기간 동안 의식이 경험하는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상태를 지칭하는 데 사용됩니다. 이 죽음 이후의 바르도는 의식이 육체라는 견고한 닻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의 생각과 습관, 그리고 감정의 파도에 따라 한없이 표류하게 되는, 매우 혼란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엄청난 영적 가능성이 열리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하지만 티베트의 위대한 스승들은 이 ‘바르도’의 개념을 단지 죽음 이후의 상태에만 국한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사실은 수많은 작은 바르도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통찰했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는 태어남이라는 문턱과 죽음이라는 문턱 사이에 놓인 하나의 거대한 ‘생의 바르도 (Bardo of this Life)’입니다. 우리가 매일 밤 잠이 들어 꿈을 꾸는 시간은, 깨어있는 의식과 완전한 무의식 사이에 존재하는 ‘꿈의 바르도 (Bardo of Dreaming)’입니다. 우리가 깊은 명상에 잠겨 일상적인 생각의 흐름이 멈추고 순수한 자각의 공간으로 들어서는 순간은, 바로 ‘명상의 바르도 (Bardo of Meditation)’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순간이야말로 가장 미세하고도 근본적인 바르도입니다. 지금 이 순간은 방금 지나가 버린 과거의 순간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순간 사이에 놓인 찰나의 문턱입니다. 우리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그 사이의 짧은 멈춤, 하나의 생각이 끝나고 다음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그 고요한 틈새, 하나의 감정이 스쳐 지나가고 다른 감정이 피어오르기 전의 그 미묘한 공간, 이 모든 것이 바로 ‘순간의 바르도’입니다. 이처럼 바르도는 우리 삶의 모든 곳에 존재하며, 우리에게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행하는 과정 속에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바르도의 경험을 끊임없이 겪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청년이 오랫동안 준비해 온 대학 입학 시험을 마치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그 며칠간의 시간은, 고등학생이라는 과거의 정체성과 대학생이라는 미래의 정체성 사이에 놓인 불안하고도 설레는 바르도입니다. 한 직장인이 오랫동안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찾거나 자신만의 사업을 준비하는 그 기간 역시, 과거의 안정된 삶과 미래의 불확실한 삶 사이에 놓인 중요한 바르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고 혼자가 된 시간, 혹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임신의 기간,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과도기적 문턱’으로서의 바르도인 것입니다.


『바르도 퇴돌』의 지혜는 바로 이러한 삶의 모든 바르도, 특히 가장 강력한 바르도인 죽음의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그 불확실성과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영적인 각성과 해방을 위한 위대한 기회로 전환시킬 수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그 핵심은 바로 모든 바르도의 순간에는 우리 의식의 가장 깊은 본질, 즉 천부경이 노래하는 ‘본심본태양 (本心本太陽)’이자 티베트 불교가 말하는 ‘근원적인 맑은 빛 (Clear Light)’이 잠시나마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의 삶이라는 바르도 속에서 명상과 마음챙김을 통해 이 내면의 빛과 친숙해지는 연습을 꾸준히 한다면, 우리는 마침내 죽음이라는 가장 큰 바르도의 문턱 앞에서 두려움 없이 그 빛을 알아보고, 기꺼이 그 빛과 하나가 되어 영원한 자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위대한 경전이 우리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결국, 바르도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신성한 준비 공간이며, 우리 삶의 모든 문턱은 우리를 더 깊은 진실과 만나게 하려는 우주의 자비로운 초대장인 것입니다.

17.2. 빛과의 조우: 의식의 본성과 마주하는 두 번의 결정적 기회


17.2.1. 치카이 바르도 (Chikhai Bardo): 태초의 고요 속, 눈부신 ‘근원적인 맑은 빛’의 현현


우리가 앞서 ‘바르도 (Bardo)’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모든 문턱의 순간을 의미함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우리는 『바르도 퇴돌, Bardo Thödol (བར་དོ་ཐོས་གྲོལ་)』의 안내를 따라 그 가장 극적이고도 결정적인 첫 번째 문턱, 즉 죽음 바로 그 순간의 바르도인 ‘치카이 바르도 (Chikhai Bardo, འཆི་ཁ་'ི་བར་དོ་)’의 신비로운 세계로 들어섭니다. 이 순간은 우리가 한평생 ‘나’라고 믿어왔던 모든 것이 해체되는, 가장 큰 두려움의 순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티베트의 위대한 스승들은 바로 이 완전한 소멸처럼 보이는 순간이야말로, 우리 영혼이 모든 환영의 껍질을 벗고 자신의 가장 순수하고도 찬란한 본래 성품과 마주하는, 해방 (解脫, Liberation)을 위한 최고의 기회라고 가르칩니다.


『바르도 퇴돌』에 따르면, 사람이 마지막 숨을 거두고 외부 세계와의 감각적인 연결이 끊어지는 그 순간, 우리의 의식은 짧은 시간 동안 깊은 무의식 상태 또는 기절 상태로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깊은 침묵과 어둠의 장막이 걷히는 순간, 모든 분별적인 생각과 감정, 그리고 기억의 활동이 완전히 멈춘 태초의 고요 속에서, 순수하고 형언할 수 없는 ‘근원적인 맑은 빛 (the Primordial Clear Light of the Ground)’이 텅 빈 새벽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눈부시게 드러난다고 합니다. 이 빛은 우리가 상상하는 어떤 물리적인 빛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어떤 형태나 색깔, 혹은 경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나’와 ‘세계’, ‘주관’과 ‘객관’이라는 모든 이원론적인 구분이 사라진, 순수한 의식 그 자체의 광채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존재의 본래 바탕인 ‘법신 (法身, Dharmakāya)’의 빛이며, 천부경 (天符經)이 노래하는, 우리 내면의 ‘본심 (本心)’이 바로 ‘본태양 (本太陽)’과 다르지 않음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 죽은 자의 의식 앞에는 오직 이 하나의 눈부신 실재만이 존재합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과거에 대한 후회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습니다. ‘나’라는 작은 자아의 감옥을 지탱하던 모든 벽들이 무너져 내리고, 의식은 마치 한 방울의 물이 거대한 바다로 돌아가듯, 이 무한하고도 평화로운 빛의 바다와 하나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바르도 퇴돌』은 바로 이 결정적인 순간에, 살아있는 스승이나 도반이 죽은 자의 곁에서 “오, 고귀하게 태어난 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그대가 보고 있는 이 눈부신 빛은 그대 자신의 순수한 의식의 빛이며,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이 빛을 알아보고, 그 안으로 편안히 안주하라. 그러면 그대는 해탈하리라.” 하고 속삭여주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만약 죽은 자의 의식이 이 안내에 따라, 혹은 생전의 수행력을 바탕으로 이 ‘맑은 빛’을 자신의 본래 성품으로 즉각적으로 알아보고, 두려움 없이 그 빛 속으로 기꺼이 녹아들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는 그 즉시 모든 윤회 (輪廻, Saṃsāra)의 고통스러운 사슬을 끊고 완전한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생들은 평소에 자신의 본래 마음에 대해 깊이 성찰하거나 수행을 통해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너무나 밝고 압도적인 빛 앞에서 길을 잃고 맙니다. 그들은 이 빛을 자신과는 무관한 외부의 어떤 무서운 현상으로 오인하고, 그 강렬함에 압도되어 공포에 떨거나, 혹은 평생 동안 익숙해져 왔던 개별적인 자아의 감각과 분별의 세계를 그리워하며 그 빛으로부터 달아나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게 됩니다. 마치 평생을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만 살아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지상으로 나와 눈부신 대낮의 태양과 마주했을 때, 그 빛의 아름다움과 따뜻함을 느끼기보다는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고통과 두려움에 다시 지하실의 익숙한 어둠 속으로 황급히 도망치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현대인들의 일상적인 삶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종종 진정한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바쁜 일과와 끝없는 외부의 자극, 그리고 소셜 미디어의 소음 속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내면의 고요함과 마주해야 하는 순간을 끊임없이 회피합니다. 혼자 있는 시간의 침묵이 불안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권태를 견디지 못하며, 자신의 가장 깊은 감정과 욕망을 들여다보는 것을 불편해합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 우리 내면의 ‘맑은 빛’, 즉 순수한 자각의 공간이 지닌 무한한 자유와 책임감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익숙하고 안전한 자아 (Ego)의 감옥, 즉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스스로 규정한 낡은 이야기 속으로 도망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르도 퇴돌』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일상적인 회피가 죽음의 순간에 겪게 될 근원적인 두려움의 예행연습과도 같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결국, 치카이 바르도에서 마주하는 ‘근원적인 맑은 빛’은 죽음의 순간에만 특별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마음의 모든 생각과 감정의 파도 아래에 항상 고요하게 흐르고 있는 우리 의식의 본래 바탕입니다. 우리가 매일 잠시라도 명상을 통해 생각의 소음을 가라앉히고 이 내면의 고요한 빛과 친숙해지는 연습을 할 때, 우리는 점차 그 빛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 안에서 깊은 평화와 안정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살아있을 때의 작은 연습들이야말로, 마침내 죽음이라는 가장 큰 바르도의 문턱 앞에서 우리를 영원한 자유와 해방의 길로 이끌어줄 가장 소중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17.2.2. 초니 바르도 (Chönyid Bardo): 마음이 빚어낸 환영들과 그 이면의 ‘두 번째 빛’


죽음의 순간, 태초의 고요 속에서 눈부시게 현현했던 ‘근원적인 맑은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압도적인 광채 앞에서 다시 익숙한 어둠 속으로 물러난 의식에게, 우주의 자비는 두 번째 해방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의식은 이제 죽음의 첫 번째 바르도인 치카이 바르도 (Chikhai Bardo)를 지나, 두 번째 중간 상태인 ‘초니 바르도 (Chönyid Bardo, ཆོས་ཉིད་བར་དོ་)’, 즉 ‘법성 (法性)의 바르도’ 또는 ‘실재의 바르도’라고 불리는 경이로우면서도 가장 위험한 여정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죽은 자의 의식은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모든 업 (業, Karma)의 기운들이 마치 강력한 영사기에서 투사된 빛처럼, 생생하고도 압도적인 환영 (幻影, Illusion)의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르도 퇴돌, Bardo Thödol (བར་དོ་ཐོས་གྲོལ་)』은 바로 이 현란하고도 무서운 환영들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그 이면에 숨겨진 ‘두 번째 빛’을 인식함으로써 여전히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우리를 안내합니다.


초니 바르도의 첫 며칠 동안, 죽은 자의 의식 앞에는 먼저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의 신들 (Peaceful Deities)이 눈부신 빛과 함께 나타납니다. 그들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자비로운 손짓을 하며, 천상의 음악과 함께 의식을 유혹합니다. 하지만 이어서 나타나는 것은 끔찍하고 위협적인 모습의 진노한 신들 (Wrathful Deities)입니다. 그들은 불을 뿜고, 날카로운 무기를 휘두르며,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의식을 공포의 나락으로 몰아넣습니다. 이 평화로운 신들과 진노한 신들의 환영은 너무나도 생생하여, 준비되지 않은 의식은 그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집착하거나 그 끔찍함에 압도되어 공포에 떨며, 자신의 운명이 외부의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 심판받고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바르도 퇴돌』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핵심적인 지혜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 모든 현상들, 즉 아름다운 천신(天神)과 무서운 악마처럼 보이는 이 모든 존재들은 결코 외부에서 온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바로 죽은 자 자신의 마음이, 즉 그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던 자비와 지혜의 측면(평화로운 신들)과, 분노와 교만, 질투와 같은 어두운 감정의 에너지(진노한 신들)가 투사되어 만들어낸 거대한 심리 드라마이자, 자기 자신의 내면 풍경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극장에서 압도적인 스케일의 3D 영화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스크린 위에서는 거대한 괴물이 우리를 향해 포효하며 달려오고, 아름다운 주인공이 우리를 향해 미소 짓습니다. 우리는 잠시 동안 그 모든 것이 실제라고 착각하고 공포에 떨거나 사랑에 빠지지만, 우리가 이것이 단지 스크린 위에 비친 빛과 그림자의 장난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 모든 환영들은 우리에 대한 힘을 잃고 우리는 평온을 되찾게 됩니다.


바르도에서 마주하는 모든 환영들 역시 이와 같아서, 그것들이 아무리 생생하고 무섭게 보일지라도, “이 모든 것은 내 마음의 투영이며, 그 본질은 텅 비어 있고 나의 본래 마음인 맑은 빛과 다르지 않다”고 자각하는 순간, 그 환영들은 힘을 잃고 다시 빛 속으로 녹아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위스의 위대한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 (Carl G. Jung)이 우리의 꿈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이 사실은 우리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러 측면, 즉 원형 (Archetype)들이 의인화된 것이라고 통찰했듯이, 초니 바르도의 신들은 바로 우리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잠재된 원형적인 힘들, 즉 ‘내면의 신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초니 바르도의 경험을 매일같이 축소된 형태로 겪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특별한 이유 없이 그에게 강렬한 호감을 느끼거나 혹은 참을 수 없는 반감을 느끼는 것은, 종종 그 사람이 우리 내면의 긍정적인 측면 (내면의 평화로운 신) 또는 우리가 억압하고 있는 부정적인 그림자 (내면의 진노한 신)를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밤에 꾸는 기이하고 무서운 꿈들은 바로 우리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던 두려움과 욕망이 환영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극심한 스트레스나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세상이 온통 나를 공격하는 적들로 가득 찬 것처럼 느껴지거나 혹은 반대로 구원의 손길이 나타날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품게 되는 것 역시,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초니 바르도의 환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르도 퇴돌』은 바로 이러한 우리 마음의 투사 작용을 꿰뚫어 보고, 외부 세계의 모든 현상과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들이 결국 내 마음의 거울에 비친 상(像)임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의 열쇠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환영들의 바탕에는, 그것들을 비추고 있는 거울 그 자체, 즉 치카이 바르도에서 잠시 만났던 ‘근원적인 맑은 빛’이 여전히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이 빛은 이제 ‘두 번째 빛’으로서, 환영들의 현란함 속에서도 그것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의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결국, 초니 바르도의 여정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마음이 바로 천국과 지옥을 모두 창조해내는 위대한 마법사임을 깨닫게 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에 속아 그것을 실제라고 믿는 한, 우리는 영원히 기쁨과 공포 사이를 오가는 꼭두각시 인형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모든 환영들의 본질이 ‘텅 빈 빛’임을 알아차리고 더 이상 그것에 휘둘리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마음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모든 환영의 드라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위대한 자각의 기회야말로, 초니 바르도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두 번째 해방의 문입니다.

17.3. 빛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삶 속에서의 준비와 실천


17.3.1. ‘본성은 곧 빛이다’: 왜 우리는 자신의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두려워하는가?


우리가 앞서 『바르도 퇴돌, Bardo Thödol (བར་དོ་ཐོས་གྲོལ་)』의 안내를 따라, 죽음이라는 위대한 문턱에서 의식이 어떻게 자신의 가장 순수하고도 눈부신 본래 성품, 즉 ‘근원적인 맑은 빛 (Clear Light)’과 마주하게 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가르침의 가장 핵심적인 전제는 바로 “우리의 본성은 본래부터 빛이다”라는 경이로운 선언입니다. 이는 천부경 (天符經)의 "본심본태양앙명 (本心本太陽昻明)"과 정확히 그 맥을 같이하며,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는 어떠한 어둠이나 결핍도 없는, 완전하고 순수한 의식의 광채가 영원히 깃들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가슴 아픈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의 본성이 진정으로 빛이라면, 왜 우리는 그토록 자주 어둠 속에서 방황하며 고통받는 것입니까? 그리고 왜 우리는 마침내 죽음의 순간에 그 찬란한 본성의 빛과 마주했을 때, 그것을 기쁘게 알아보는 대신 오히려 두려워하며 그로부터 달아나려 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이 물질세계에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 우리 자신이라고 굳게 믿게 된 두 개의 두꺼운 구름, 즉 ‘자아 (Ego)’와 ‘업 (業, Karma)’의 작용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첫 번째 구름인 ‘자아 (Ego)’는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개별적이고 분리된 정체성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름, 육체, 성격, 기억, 그리고 사회적 역할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른 모든 존재와 나를 구분하는 경계선을 긋고 그 경계 안의 ‘나’를 보호하고 확장하려는 강력한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아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존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이 일시적이고 조건적으로 형성된 자아를 우리 존재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작은 자아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그 감옥의 벽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칩니다.


바로 이 견고한 자아의 벽이야말로 우리 내면의 ‘맑은 빛’을 가리는 가장 두꺼운 구름입니다. ‘맑은 빛’의 본질은 모든 경계와 분별이 사라진 무한한 통일성입니다. 하지만 자아의 본질은 경계를 긋고 분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아가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는 모든 것과 하나 된 근원적인 빛의 체험을 위협으로 느끼게 됩니다. ‘맑은 빛’과 마주하는 것은 곧 ‘나’라는 개별적인 자아가 녹아내리고 소멸되는 경험, 즉 ‘자아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나’라는 이름의 견고한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왕처럼 군림하며 살아온 자아에게, 그 성벽이 허물어지고 무한한 바다와 하나가 되라는 초대는 가장 큰 공포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마치 작은 웅덩이 속의 올챙이가 자신이 곧 드넓은 하늘을 나는 개구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웅덩이의 안전함과 익숙함을 떠나는 것을 죽음처럼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대인들이 겪는 많은 심리적 문제, 예를 들어 성공에 대한 강박, 타인의 평가에 대한 지나친 집착, 그리고 실패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은 모두 이처럼 자신의 연약한 자아를 보호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의 다른 표현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구름은 바로 ‘업 (Karma)’입니다. ‘업’은 ‘행위’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로,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 그리고 그 이면에 있는 의도가 남기는 미세한 에너지의 흔적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평생에 걸쳐 쌓아온 모든 습관적인 행동 패턴과 감정적인 반응, 그리고 깊이 뿌리내린 신념 체계가 바로 우리의 ‘업’입니다. 특히, 탐욕과 분노, 그리고 무지 (三毒, 삼독)와 같은 부정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들은 우리의 마음속에 어둡고 무거운 업의 흔적을 남겨, 우리 본래 마음의 맑은 빛을 가리는 두꺼운 먼지 층을 형성합니다.


죽음의 순간, 육체라는 닻을 잃어버린 의식은 바로 이 자신이 평생 동안 쌓아온 업의 바람에 의해 휩쓸리게 됩니다. 평생 동안 분노와 미움의 습관을 쌓아온 사람은 바르도에서 진노한 신들의 무서운 환영을 보게 될 가능성이 크며, 평생 동안 탐욕과 집착의 습관을 쌓아온 사람은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해방의 기회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업은 우리가 ‘맑은 빛’을 마주했을 때, 그 빛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색안경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그 빛을 자신의 업이 투사된 두려움이나 욕망의 색깔로 왜곡하여 보게 되며, 그 결과 자신의 본래 성품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시 윤회의 어두운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특정 상황에 대해 항상 똑같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면 (예: 비판을 들으면 무조건 화부터 내거나, 어려운 일 앞에서는 무조건 회피하려는 습관), 그것이 바로 우리의 업이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을 가로막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결국, 『바르도 퇴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본래부터 눈부신 태양처럼 밝고 맑은 빛이지만, 우리가 평생에 걸쳐 쌓아온 ‘자아 (Ego)’라는 견고한 성벽과 ‘업 (Karma)’이라는 두꺼운 먼지 층이 그 빛을 가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 빛이 지닌 무한한 자유와 통일성이 우리에게 익숙한 ‘나’라는 작은 감옥을 파괴할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입니다. 그 감옥의 문을 열고 빛 속으로 걸어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영원한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지혜는 우리에게 삶 속에서의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수행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17.3.2. 삶이라는 수행: 명상과 자각을 통해 내면의 빛에 익숙해지기


우리가 앞서 우리 내면의 본래 성품이 눈부신 빛과 같음에도 불구하고, 평생에 걸쳐 쌓아온 ‘자아 (Ego)’라는 견고한 성벽과 ‘업 (Karma)’이라는 두꺼운 먼지 층 때문에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워하게 됨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우리는 가장 중요하고도 희망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살아있는 동안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이 두꺼운 구름을 걷어내고, 죽음이라는 위대한 문턱 앞에서 마침내 우리 자신의 빛과 기쁘게 재회할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바르도 퇴돌, Bardo Thödol (བར་དོ་ཐོས་གྲོལ་)』을 비롯한 모든 위대한 지혜의 전통들은 한결같이, ‘삶 그 자체가 바로 수행의 장’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죽음의 순간을 위한 준비는 결코 죽음 직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모든 일상의 순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가장 핵심적인 수행이 바로 ‘명상 (Meditation, 瞑想)’과 ‘마음챙김 (Mindfulness)’을 통해, 우리 내면의 ‘근원적인 맑은 빛’과 점차 친숙해지고 그 빛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평생 한 번뿐인 중요한 연주회를 앞둔 연주자와도 같습니다. 연주회 당일 무대 위에서 갑자기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는 연주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위대한 연주는 수년, 수십 년 동안 매일같이 악기와 씨름하며 음계를 연습하고, 악보를 해석하며, 자신의 감정을 소리에 싣는 법을 배우는 지루하고도 성실한 연습의 시간을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그 꾸준한 연습을 통해, 연주자는 자신의 악기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어떤 긴장된 상황 속에서도 자유자재로 아름다운 선율을 피워낼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가장 거대한 무대 위에서 우리 의식이 ‘맑은 빛’이라는 우주적 교향곡과 조화롭게 합일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동안 매일의 삶 속에서 명상이라는 악기를 통해 우리 내면의 빛과 조율하는 꾸준한 연습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명상은 본질적으로 우리 마음의 주의를 외부 세계의 소란스러움에서 내부 세계의 고요함으로 되돌리는 연습입니다. 우리는 조용한 곳에 앉아 자신의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부드럽게 관찰합니다. 처음에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마치 성난 파도처럼 우리를 덮쳐오지만, 꾸준히 연습하다 보면 우리는 점차 그 파도들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고요한 틈새, 즉 순수한 침묵의 공간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그 침묵의 공간이 우리 본래 마음의 ‘맑은 빛’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첫 순간입니다. 처음에는 그 순간이 찰나처럼 짧고 희미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우리가 매일같이 그 고요함 속으로 돌아가는 연습을 반복할수록, 그 빛은 점차 더 밝고 선명해지며 우리 존재 전체를 감싸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현존 (Presence)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이 과정은 마치 우리가 어두운 방안에서 눈을 감고 있다가 서서히 눈을 뜨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 점차 방안의 희미한 사물들의 윤곽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명상은 바로 이처럼, 우리 마음의 눈이 일상적인 자아와 감정의 어둠에 익숙해지도록 훈련시켜, 그 너머에 항상 존재하고 있던 더 깊고 미묘한 빛의 차원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평소의 삶 속에서 내면의 빛과 친숙해진 의식은, 마침내 죽음의 순간에 압도적인 광채로 현현하는 ‘근원적인 맑은 빛’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낯설고 두려운 외부의 현상으로 오인하는 대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그리운 친구나 사랑하는 고향의 풍경처럼 반갑게 알아보고 기꺼이 그 품에 안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바쁜 일상 속에서 이러한 명상 수행은 종종 사치스럽거나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르도 퇴돌』의 지혜는 우리에게 삶의 모든 순간이 바로 이 내면의 빛을 발견하고 그와 친숙해지는 수행의 장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한 잔의 커피 향에 온전히 집중하는 순간, 출근길 지하철의 소음 속에서도 자신의 호흡을 고요히 알아차리는 순간, 동료와 대화할 때 판단 없이 그의 말에 온전히 귀 기울이는 순간, 그리고 설거지를 할 때 물의 따뜻함과 그릇의 감촉에 주의를 기울이는 그 모든 순간들이 바로 ‘마음챙김’의 수행이자, 우리를 내면의 빛과 연결시켜주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바르도 퇴돌』이 우리에게 전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특별한 비법을 찾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 순간을 깨어있는 의식으로 살아가며, 우리 자신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행동의 주인이 되고,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순수한 자각의 빛과 끊임없이 연결되려 노력하는 삶,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가장 위대한 바르도를 위한 최고의 준비이자 가장 지혜로운 수행입니다. 이 삶이라는 수행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빛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영광스러운 귀향임을 깨닫고, 두려움 없이 그 문을 향해 평화롭게 걸어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17.4. 만다라처럼 펼쳐지는 빛의 교향곡: 동서양 지혜의 공명


17.4.1. 힌두교의 브라흐만-아트만과 불교의 법신: 근원적 자아로서의 빛


우리가 앞서 『바르도 퇴돌, Bardo Thödol (བར་དོ་ཐོས་གྲོལ་)』의 신비로운 안내를 따라, 죽음이라는 가장 극적인 문턱에서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자신의 가장 순수하고도 눈부신 본래 성품, 즉 ‘근원적인 맑은 빛 (Clear Light)’과 마주하게 되는지를 살펴보았다면, 이제 우리는 이 히말라야의 고원에서 울려 퍼지는 지혜의 노래가 결코 고립된 외침이 아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깊은 정신적 고향인 인도의 광활한 대지에서 수천 년 동안 흘러온 두 개의 위대한 지혜의 강물, 즉 힌두교 (Hinduism)와 불교 (Buddhism)의 가장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근원적인 물소리와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교향곡을 이룹니다. 티베트의 ‘맑은 빛’은 바로 힌두교의 베단타 (Vedānta) 철학이 노래하는 ‘브라흐만 (Brahman)과 아트만 (Ātman)의 합일’의 순간에 드러나는 광채이며, 동시에 대승불교 (Mahayana Buddhism)가 가리키는 모든 존재의 본래 바탕인 ‘법신 (法身, Dharmakāya)’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먼저, 고대 인도의 성현 (聖賢)인 리쉬 (Rishi)들이 깊은 명상 속에서 발견한 지혜를 담고 있는 우파니샤드 (Upanishads) 철학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이 지혜의 핵심에는 바로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이자 모든 존재의 근원인 ‘브라흐만 (Brahman, ब्रह्मन्)’과, 각 개인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자리한 참된 자아 (True Self) 또는 영혼인 ‘아트만 (Ātman, आत्मन्)’이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범아일여 (梵我一如, Brahman is Ātman)’의 위대한 진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거대한 바다 (브라흐만)와 그 바다에서 떠오른 한 방울의 물방울 (아트만)이, 비록 그 형태와 크기는 달라 보일지라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똑같은 물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티베트의 ‘맑은 빛’은 바로 이 ‘범아일여’의 진리가 가장 극적으로 체험되는 순간의 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개별적인 자아 (Ego), 즉 우리의 생각과 감정, 기억과 욕망의 소용돌이가 죽음의 순간에 마침내 그 활동을 멈추고 고요해질 때, 그 모든 파도가 잠잠해진 자리에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바탕인 순수한 의식의 바다, 즉 ‘아트만’입니다. 그리고 이 ‘아트만’의 본질은 바로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영원한 생명의 빛, ‘브라흐만’과 다르지 않기에, 그것은 무한하고 눈부신 ‘맑은 빛’으로 체험되는 것입니다. 즉, 죽음의 순간에 마주하는 빛은 외부의 어떤 신적인 존재가 비추는 빛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본질, 우리 내면의 ‘본심 (本心)’이 바로 우주적인 ‘본태양 (本太陽)’과 하나임을 깨닫는 순간의 광채인 것입니다.


반면에, 불교는 힌두교와는 사뭇 다른 길을 통해 이 내면의 빛에 접근합니다. 붓다 (Buddha)의 가르침은 ‘아트만’과 같은 영원불변하는 고정된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아 (無我, Anātman)’의 통찰에서 시작됩니다. 이는 언뜻 보기에 힌두교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불교가 부정한 것은 우리 내면의 신성한 빛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빛을 ‘나의 것’이라고 소유하려는 에고의 집착이었습니다. 불교의 지혜는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모든 것, 즉 우리의 몸과 마음, 생각과 감정이 모두 고정된 실체 없이 인연 따라 잠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공 (空, Śūnyatā)’한 것임을 꿰뚫어 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바로 이 ‘공’의 지혜를 통해, 우리가 ‘나’라는 모든 생각과 관념, 그리고 집착의 구름을 완전히 걷어냈을 때, 그 텅 빈 고요함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 바로 ‘법신 (法身, Dharmakāya)’입니다. ‘법신’은 ‘진리의 몸’ 또는 ‘실재의 몸’이라는 뜻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존재하는 우주적인 진리 그 자체이자, 모든 부처의 본질적인 깨달음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형태나 속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마치 텅 비어 있지만 모든 것을 비추는 맑고 깨끗한 거울처럼, 순수하고 장애 없는 의식의 빛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 법신이야말로 모든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근원적인 깨달음의 가능성, 즉 ‘불성 (佛性, Buddha-nature)’입니다.


티베트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근원적인 맑은 빛’은 바로 이 법신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죽음의 순간, 우리의 개별적인 자아 (Ego)를 구성하던 모든 심리적인 요소들이 해체되고 마음이 텅 비게 될 때, 바로 그 ‘공’의 상태에서 우리 마음의 본래 성품인 법신의 빛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힌두교가 ‘나의 참된 자아가 바로 우주적 빛이다’라고 긍정적으로 선언한다면, 불교는 ‘나라고 할 만한 모든 것이 본래 비어 있음을 깨달을 때, 바로 그 비어 있음 자체가 빛이다’라고 역설적으로 가르칩니다. 두 가르침은 서로 다른 산길을 오르고 있지만, 결국에는 같은 정상, 즉 개별적인 자아의 한계를 넘어선 순수하고 무한한 의식의 빛과 하나가 되는 경지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대의 지혜는 우리 현대인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완전히 몰입하여 ‘나’를 잊어버리는 ‘몰입 (Flow)’의 순간을 경험할 때, 예를 들어 한 명의 예술가가 창작 활동에 완전히 빠져들거나, 한 명의 운동선수가 경기의 흐름과 하나가 되거나, 혹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깊이 교감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를 때, 그 순간에는 ‘내가 이것을 하고 있다’는 분별적인 자의식이 사라집니다. 그 자리에는 오직 맑고 깨어있는 순수한 ‘행위’와 ‘자각’만이 존재합니다. 바로 이러한 ‘무아 (無我)’의 순간에, 우리는 우리 본래 마음의 바탕인 법신의 빛, 혹은 아트만-브라흐만의 합일을 어렴풋이나마 체험하게 됩니다.


결국, 힌두교의 깊은 지혜와 불교의 고요한 통찰은, 티베트의 ‘맑은 빛’이 결코 낯설거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가장 깊은 본질 속에 보편적으로 깃들어 있는 근원적인 자아의 광채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생 동안 찾아 헤매던 진정한 고향이자, 모든 고통과 분열을 넘어선 영원한 평화와 자유의 공간입니다.

17.4.2. 서양의 신성한 불꽃: 영지주의와 카발라의 내면의 빛과의 비교


동방의 지혜가 우리 내면의 빛을 ‘근원적인 맑은 빛 (Clear Light)’ 또는 ‘참된 자아 (Ātman)’라는 고요하고도 광대한 바다의 이미지로 노래했다면, 이제 우리는 서양 에소테리즘 (Esotericism) 전통이 그 동일한 실재를 어떻게 한 줄기 ‘신성한 불꽃 (Divine Spark)’이라는, 더욱 역동적이고도 극적인 이미지로 그려냈는지를 탐구하게 됩니다. 고대 영지주의 (Gnosticism)와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 (Kabbalah)는 비록 그 신화적 배경과 철학적 전개 방식은 매우 다르지만,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본질이 바로 저 멀리 신성한 빛의 세계로부터 온 작은 조각이자 불꽃이며, 이 내면의 불꽃을 다시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구원의 핵심이라고 한목소리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티베트의 ‘맑은 빛’이 우리 마음의 본래 성품이라는 가르침에 대한, 서양적 맥락에서의 또 다른 위대한 변주곡입니다.


먼저, 고대 영지주의자들이 들려주는 격정적인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그들은 인간 영혼의 본래 고향이 ‘플레로마 (Pleroma, πλήρωμα)’라고 불리는, 어떠한 어둠이나 결핍도 없는 완전한 빛의 충만 세계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우주적인 실수나 타락으로 인해, 이 신성한 빛의 일부, 즉 ‘신성한 불꽃’이 플레로마로부터 분리되어, 무지하고 오만한 창조신 데미우르고스 (Demiurge)가 지배하는 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물질세계의 감옥 안에 갇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인간은 자신의 고귀한 혈통을 잊고 진흙탕 속에서 방황하는 ‘유배된 왕자’와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왕자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왕국의 표식이자 꺼지지 않는 불꽃, 즉 신성한 기원에 대한 희미한 기억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 ‘신성한 불꽃’이 바로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우리 내면의 빛이며, 티베트 불교의 ‘맑은 빛’과 그 본질을 같이합니다. 구원은 바로 ‘그노시스 (Gnosis, γνῶsis)’라는 직접적이고 체험적인 깨달음을 통해, 자신이 이 어두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저 영원한 빛의 세계로부터 온 신성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이 깨달음은 마치 긴 기억상실증에서 깨어나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되찾는 순간과도 같으며, 그 순간 영혼은 더 이상 물질세계의 지배자나 운명의 법칙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가 됩니다.


카발라의 전통 역시 이 ‘내면의 불꽃’에 대한 정교한 설명을 제공합니다. 카발라는 우주의 궁극적인 근원인 ‘아인 소프 (Ain Soph, 끝 없음)’로부터 ‘무한한 빛 (Ain Soph Aur)’이 발현되고, 이 빛으로부터 모든 세계가 유출 (Emanation)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인간 영혼의 가장 높고 순수한 차원인 ‘네샤마 (Neshamah, נשמה)’는 바로 이 태초의 ‘무한한 빛’으로부터 직접 흘러나온 한 줄기 광선이자 ‘신성한 불꽃’입니다. 이 네샤마는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핵심에 자리하며, 비록 우리가 세속적인 삶 속에서 그 존재를 잊고 지낼지라도 결코 그 빛을 잃거나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대 사회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외부적인 성공이나 타인의 인정에서만 찾으려 할 때, 우리는 종종 깊은 공허감과 소외감을 느끼곤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지주의자들이 말한 ‘망각의 잠’이며, 카발라가 말하는 ‘네샤마의 빛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절망의 순간에 문득, 우리는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선행을 베풀거나, 혹은 타인의 깊은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며 눈물 흘리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바로 이러한 순간들이, 우리의 이기적인 자아 (Ego)의 껍질을 뚫고 내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신성한 불꽃’ 네샤마가 그 따뜻한 빛을 잠시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결국, 동방의 ‘맑은 빛’이 모든 것이 본래 비어 있고 고요하다는 ‘공 (空)’의 지혜 속에서 발견된다면, 서방의 ‘신성한 불꽃’은 종종 어둠과의 치열한 투쟁과 분리된 자아의 고통스러운 자각을 통해 그 존재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실재는 동일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는 결코 소멸되거나 더럽혀질 수 없는, 영원하고도 신성한 의식의 빛이 깃들어 있다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티베트의 스승과 영지주의의 현자, 그리고 카발라의 신비가는 각기 다른 산길을 올랐지만, 결국 정상에서 만나 같은 태양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지혜의 교향곡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바로 그 빛이며, 그 빛을 깨닫고 세상과 나누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숭고한 소명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전 17화제16장: 본심본태양앙명(本心本太陽昻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