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디지털 연금술과 새로운 바포메트

by DrLeeHC

제5부: 프리메이슨의 현대적 맥락과 미래


제21장: 디지털 연금술과 새로운 바포메트: 우리 안의 괴물을 경계하라


21.1 레오 탁실의 유령, 유튜브에 강림하다


19세기 말, 레오 탁실 (Léo Taxil)이라는 한 명의 교활한 작가는, 잉크와 인쇄술, 그리고 막 꽃피기 시작한 대중적 신문이라는 매체를 이용하여, 프리메이슨과 악마 숭배에 대한 거대한 거짓 신화를 전 유럽의 의식 속에 성공적으로 심어놓았습니다. 100여 년이 흐른 지금, 그의 유령은 더 이상 낡은 종이 위를 배회하지 않습니다. 그의 유령은 이제 광섬유 케이블을 타고, 유튜브 (YouTube)와 소셜 미디어라는 훨씬 더 강력하고 전염성 강한 새로운 매개체 위에 완벽하게 강림했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시대의 탁실들은, 과거의 선배가 미처 가지지 못했던 가장 강력하고도 노골적인 동기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과거의 음모론자들이, 비록 그것이 뒤틀렸을지언정, 나름의 정치적, 종교적 '대의 (Cause)'나 '진실'을 전파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면, 오늘날 디지털 플랫폼 위에서 증오와 분열을 퍼뜨리는 많은 새로운 선동가들에게, '진실'은 더 이상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추동하는 가장 정직하고도 강력한 동기는, 이제 숨길 필요조차 없는 노골적인 금전적 이익입니다. 유튜브의 슈퍼챗 (Super Chat) 기능과 시청자들이 보내는 자발적인 후원금은, 음모론의 생산과 유통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제 거짓 정보는 더 이상 단순한 신념의 산물이 아니라,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하나의 '금융 상품'이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시장의 논리는 지극히 간단하고도 무자비합니다. 더 자극적이고, 더 극단적이며, 더 분노를 유발하는 주장을 할수록, 시청자들의 감정은 격앙되고, 그 격앙된 감정은 곧바로 '슈퍼챗'이라는 현금의 형태로 연단 위의 선동가에게 흘러 들어갑니다. 이 과정에서 합리적인 분석이나 객관적인 증거, 그리고 사실 확인과 같은,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모든 지적인 노력들은, 단지 수익 창출의 속도를 늦추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로 전락하고 맙니다. '진실인가?'라는 질문은, '돈이 되는가?'라는 훨씬 더 원초적이고 강력한 질문 앞에서 그 힘을 잃습니다.


이처럼, 레오 탁실이 세상을 조롱하기 위해 벌였던 거대한 지적 사기극은, 이제 우리 시대에 와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완벽한 '비즈니스 모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디지털 가짜 연금술사들이 어떻게 대중의 불안과 분노를 원재료로 삼아 금전적 이익이라는 황금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라는 공동체가 어떻게 서서히 병들어가고 있는지를 깊이 해부해 보아야 합니다.


21.2 극우·극좌 유튜버: 분열을 상품화하는 디지털 상인들



과거의 음모론자들이 프리메이슨이라는 거대한 허수아비를 '절대악'으로 규정하여 대중의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고, 그 공포를 양식 삼아 자신들의 책을 팔았던 것처럼, 오늘날의 극단주의 유튜버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반대파를 새로운 시대의 '악마'로 규정하여 시청자의 맹목적인 분노를 자극하고, 그 분노를 동력 삼아 자신들의 은행 계좌를 채웁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와 전술은 놀라울 정도로 동일합니다.


19세기의 레오 탁실 (Léo Taxil)이 『프리메이슨의 비밀』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대중을 유혹했다면, 21세기의 디지털 상인들은 '충격 단독', '경악 실체 폭로', '이 영상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와 같은 문구와, 경악하는 표정의 인물 사진,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화살표로 가득 찬 썸네일로 우리의 말초 신경을 현혹합니다. 그들의 목표는 결코 복잡한 진실을 규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목표는, 당신이 이성과 비판적 사고의 스위치를 내리고, 감정과 분노의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인 채, 화면 하단의 '후원하기' 버튼을 누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들의 서사 전략은, 확인되지 않은 정보와 노골적인 거짓말, 그리고 교묘하게 편집된 사실의 조각들을 하나의 거대한 서사 속에 뒤섞어, 마치 숨겨진 진실을 폭로하는 것처럼 포장하는 데 그 기반을 둡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반하는 모든 증거를 '주류 언론의 조작' 혹은 '거대 권력의 은폐 시도'로 치부해 버림으로써, 자신들의 채널만이 유일한 진실의 성소(聖所)라는 강력한 믿음을 신도들에게 심어줍니다. 이 굳건한 믿음의 성채 안에서, 시청자들은 자신들이 단순한 정보 소비자가 아니라, 사악한 기득권에 맞서 진실을 수호하는 용감한 전사라는 강력한 소속감과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게 됩니다. 슈퍼챗을 통해 송금되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은, 이제 단순한 후원금이 아니라, 이 거룩한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바치는 십일조와도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지만 이 디지털 제단 위에서 벌어지는 축제가 현실 세계에 남기는 것은 결코 성스러운 구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를 증폭시키며, 우리 공동체 전체에 치유하기 어려운 불행의 상처를 남깁니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근거하여 특정인을 '부패한 정치인' 혹은 '사상을 의심받는 인물'로 낙인찍는 영상 하나는, 수십만 번의 조회 수를 기록하며 한 개인과 그 가족의 명예를 하룻밤 사이에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버립니다. 특정 지역이나 특정 집단을 향한 근거 없는 혐오 발언은, 온라인상의 언어폭력을 넘어, 현실 세계의 물리적인 폭력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끔찍한 논리를 제공합니다. 이처럼 디지털 상인들이 분열을 팔아 얻는 금전적 이익의 대가는,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지불해야만 하는 사회적 신뢰의 파산이라는, 너무나도 값비싼 청구서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안의 가장 어두운 편견과 분노를 자극하여 돈을 벌고, 그 결과로 우리 사회는 서로를 더 이상 믿지 못하고 영원히 반목하는 지옥도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는, 실로 악마적인 흑마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21.3 '사이버 렉카' 현상: 진실의 무게보다 빠른 속도의 경쟁


만약 극우, 극좌 유튜버들이 자신들의 확고한 이념적 진영 안에서 분열의 씨앗을 키우는 '농부'라면, '사이버 렉카 (Cyber Wrecker)'들은 이념의 밭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기회주의적인 약탈자들입니다. 실제 교통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가 이익을 챙기는 견인차(렉카)처럼, 이들은 사회적 논란이나 개인의 비극이라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현장에 나타나 대중의 관심을 견인하고 그것을 조회 수와 후원금이라는 금전적 이익으로 바꾸어 갑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좌나 우의 이념이 아니라, 오직 '트래픽'이라는 단 하나의 신(神)뿐입니다. 그리고 이 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유일한 제물은 바로 속도입니다.


이 속도의 경쟁 속에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모든 저널리즘적, 지성적 원칙들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자 비용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사실 관계를 교차 확인하고, 다양한 관점을 취재하며, 신중하게 결론을 내리는 과정은, 이 경쟁에서 필패(必敗)로 가는 길입니다. 승리는 오직, 논란이 발생한 지 단 몇 시간 만에, 확인되지 않은 정보와 인터넷 커뮤니티의 소문들을 짜깁기하여, 가장 먼저 자극적인 제목의 영상을 만들어내는 자에게 돌아갑니다. 이 생태계에서 진실의 무게는 속도의 가벼움 앞에서 너무나도 무력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이버 렉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혹은 의도적으로, 음모론의 가장 원시적인 문법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복잡한 사건의 전후 맥락을 모두 제거하고, 대중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를 제시하는 것이, 가장 빠르게 대중의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즉시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규정하고, 대중에게 누구를 향해 분노의 돌을 던져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지시합니다. 증거가 부족한 부분은 "무언가 숨겨진 배후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거나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진실"이라는 식의 암시를 통해, 자신들의 섣부른 주장을 오히려 용기 있는 폭로처럼 포장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공적(公的) 논의들은, 그 본래의 무게를 모두 잃어버리고, 한낱 흥미 위주의 가십 (Gossip)과 구경거리 (Spectacle)로 전락하고 맙니다. 심각한 정치적 부패 의혹은 한 명의 '절대악' 정치인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축소되고, 복잡한 사회적 갈등은 양측의 자극적인 말실수만을 편집한 '싸움 구경'으로 변질됩니다. 대중은 더 이상 해당 사안의 본질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고민하는 성숙한 시민이 아니라, 다음에는 또 어떤 더 자극적인 폭로가 터져 나올지를 기대하는 수동적인 관객의 자리로 밀려나게 됩니다.


'사이버 렉카' 현상은 우리 시대의 정보 소비 문화가 가진 가장 어두운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진실을 향한 고통스러운 탐구 과정보다는, 즉각적이고 강렬한 감정적 배설을 선호하는 우리의 집단적 욕망이 만들어낸 괴물입니다. 이들이 생산해 내는 것은 정보나 지식이 아니라, 오직 더 많은 분노와 냉소, 그리고 불신뿐입니다. 이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마치 실제 교통사고 현장처럼, 파괴된 개인의 명예와, 사회적 신뢰의 파편, 그리고 진실이 무엇인지 자체를 더 이상 아무도 믿지 않게 되어버린, 깊은 허무주의의 그림자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21.4 당신의 '클릭'이 새로운 괴물을 키운다


우리는 이 기나긴 여정을 통해, 프리메이슨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론이라는 괴물이 어떻게 태어나고 성장해 왔는지를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탐사의 끝에서 우리가 마주해야 할 가장 서늘하고도 불편한 진실은, 21세기의 괴물이 더 이상 소수의 광신도나 교활한 선동가들의 서재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의 괴물은 바로 우리 각자의 무심하고도 무비판적인 '클릭'과, 감정적인 동조의 표시인 '좋아요', 그리고 분노에 찬 '후원금'을 자양분 삼아, 바로 우리 자신의 스크린 속에서 매일같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진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괴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수동적인 관객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그 괴물에게 생명의 피를 공급하는, 이 끔찍한 창조의 공모자(共謀者)이자 가장 중요한 후원자입니다.


19세기의 레오 탁실 (Léo Taxil)이 대중의 공포를 자극하기 위해 창조해 낸 위대한 괴물이 바로 산양 머리의 바포메트 (Baphomet)였다면, 오늘날 우리가 진정으로 경계하고 맞서 싸워야 할 새로운 시대의 바포메트는 더 이상 외부의 제단 위에 서 있는 돌 조각상이 아닙니다. 21세기의 가장 무서운 바포메트는 바로 우리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웅크리고 앉아, 세 가지의 신성모독적인 교리를 숭배하도록 우리를 유혹하는 보이지 않는 우상입니다. 그 첫 번째 교리는 '진실보다는 이익'을 숭배하는 것이며, 두 번째 교리는 '대화보다는 단절'을 찬양하는 것이고, 마지막 세 번째 교리는 '관용보다는 증오'를 신성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가락이 사실 확인의 수고로움 대신, 즉각적인 분노를 유발하는 자극적인 제목을 클릭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 새로운 바포메트의 제단 위에 첫 번째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를 이해하려는 고통스러운 노력 대신, 그의 목소리를 차단하고 조롱하며, 나와 같은 믿음을 가진 이들의 메아리 속에 안주하려 할 때, 우리는 이 새로운 바포메트의 신도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보이지 않는 괴물에 맞서 어떻게 싸워야만 하겠습니까? 그 해답은 더 이상 외부의 적을 찾아내어 파괴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해답은 바로 우리 각자가 디지털 시대의 시민으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할, 하나의 신성하고도 무거운 '지성의 의무'를 다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모든 정보의 출처를 비판적으로 확인하고, 나의 믿음을 강화시켜주는 달콤한 속삭임일수록 더욱더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용기입니다. 둘째,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악마화하고 조롱하는 목소리에 '좋아요'를 누르는 대신, 그들의 목소리에 담긴 고통과 불안에 귀를 기울이려는 겸손함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열과 증오를 팔아 자신의 배를 불리는 모든 디지털 상인들의 유혹을 단호히 거부하고, 그들의 제단에 단 한 푼의 후원금도, 단 한 번의 클릭도 바치지 않겠다는 윤리적 결단입니다.


프리메이슨의 가장 위대한 이상은, 자기 자신이라는 불완전한 돌을 갈고닦아, 인류라는 이름의 위대한 신전을 함께 지어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30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이상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스크린 앞에서, 진실을 향한 의지와 타인에 대한 존중이라는 이름의 직각자 (Square)와 컴퍼스 (Compasses)를 사용하여, 무분별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지성을 반듯하게 세우는 바로 그 작은 행위 하나하나가, 어쩌면 분열과 증오로 무너져 내린 우리 시대라는 이름의 위대한 신전을 재건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첫걸음이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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