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국가라는 이름의 신 - 파시즘과 전체주의

by 이호창

제6장: 국가라는 이름의 신 -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제단


6.1. 유기체로서의 국가: 개인이 전체를 위한 세포가 되는 논리


끈끈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들 사이에서, 혹은 중요한 경기에서 승리한 스포츠팀 안에서 우리는 종종 “우리는 하나다!”라고 외치며 뜨거운 일체감을 느낍니다. 이처럼 개인이 더 큰 집단의 일부가 되어 공동의 목표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은 숭고하고 아름답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파시즘과 전체주의는 바로 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소속감과 헌신의 욕구를 가장 거대하고 위험한 방식으로 뒤틀어 버립니다. 그들은 국가가 단순히 여러 사람이 모인 집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살아 숨 쉬는 ‘유기체 (Organism)’라고 선언합니다.


이 ‘국가 유기체설’은 단순한 비유를 넘어, 개인의 모든 것을 국가에 복속시키는 무서운 이데올로기적 논리를 제공합니다. 이 논리 속에서, 국가는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진화해 온 거대한 생명체와도 같습니다. 이 생명체는 개인의 짧은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고유한 의지와 신성한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몸 안에서, 개개인의 국민은 어떤 존재가 될까요? 그들은 더 이상 고유한 인격과 권리를 가진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 거대한 몸을 구성하는 수억 개의 ‘세포’ 중 하나일 뿐입니다.


우리 몸의 간세포나 피부 세포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세포들의 존재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직 몸 전체의 생존과 건강에 기여하는 데에만 있습니다. 세포는 스스로의 목적이나 꿈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만약 어떤 세포가 몸 전체의 조화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증식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암세포’라고 부르며 제거해야 할 질병으로 취급합니다.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 생물학적 논리를 인간 사회에 그대로 적용합니다. 국가라는 유기체 안에서, 개인의 유일한 존재 가치는 전체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농부는 국가를 위해 식량을 생산하는 세포이고, 노동자는 국가를 위해 무기를 만드는 세포이며, 군인은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세포입니다. 개인의 양심, 자유, 행복은 ‘국가 발전’이나 ‘민족의 영광’이라는 ‘공동선’의 이름 아래 너무나 쉽게 제한되고 억압됩니다. 20세기의 전체주의 국가들은 개인의 모든 삶을 국가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에 던져 넣어 개인의 개성과 자유 의지를 완전히 말살하려 시도했습니다.


이 논리가 가장 끔찍한 힘을 발휘하는 지점은 바로 ‘적’을 규정하는 방식입니다. 국가라는 몸의 건강과 통일을 해치는 모든 것은 ‘질병’으로 간주됩니다.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비판적인 지식인,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예술가, 혹은 다수와 다른 인종이나 종교를 가진 소수자들. 그들은 더 이상 다른 생각을 가진 동료 시민이 아닙니다. 그들은 몸 전체를 병들게 하는 ‘암세포’이자, 반드시 제거해야 할 ‘바이러스’가 됩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언어는, 내부의 반대 세력을 향한 무자비한 숙청과 소수 민족에 대한 집단 학살(Genocide)을, 마치 외과 의사가 환부를 도려내는 것처럼 정당하고 필연적인 ‘치료 행위’로 둔갑시킵니다.


이러한 국가 유기체 사상이 어떻게 그토록 강력한 지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헤겔(G.W.F. Hegel)의 사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1820년에 출간된 그의 대표적인 정치철학 저서 『법철학 강요, Elements of the Philosophy of Right』를 통해, 국가에 대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기념비적인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그 이전의 많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국가를 ‘사회 계약’의 산물로 보았습니다. 즉, 개인들이 자신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각자의 권리 일부를 양도하여 합의를 통해 만들어낸 일종의 편리한 ‘도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헤겔은 이러한 관점이 국가의 본질을 너무나 피상적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헤겔에게 국가는 단순히 개인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족과 시민사회의 단계를 넘어, 인류의 윤리적이고 정신적인 발전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실체였습니다. 그는 국가를 “지상에 현현하는 신의 이념” 혹은 “세계 속에서 신이 행진하는 것”이라는 장엄한 표현으로 묘사했습니다.


이는 국가를 문자 그대로 신으로 숭배하라는 뜻이라기보다는, 국가가 바로 인류의 집단적인 이성과 자유가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제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가장 숭고한 단계라는 의미였습니다. 개인은 이 이성적인 국가 공동체의 일원이 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문제는, 이 심오하고 복잡한 철학이 훗날 전체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단순화되고, 왜곡되고, 무기화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헤겔의 철학에서 ‘국가의 신성함’과 ‘개인은 전체 속에서 완성된다’는 부분만을 떼어내어 극단적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그 결과, 헤겔이 말했던 ‘이성적인 국가’는 ‘민족의 영혼을 체화한 신성한 유기체’로 변질되었고, 개인이 국가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상은 개인이 국가라는 제단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로 왜곡되었습니다. 개인의 양심은 국가의 의지 앞에서 소멸되어야 할 불순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처럼 왜곡된 철학의 세례를 받으며, 국가는 점차 이성과 비판의 영역을 넘어선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국가는 새로운 ‘신’이 되고, 그 지도자는 ‘신의 대리인’이 되며, 국민은 그 제단에 바쳐질 제물이 됩니다. 이탈리아 파시즘의 구호였던 “모든 것은 국가 안에 있고, 어떤 것도 국가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국가에 반대할 수 없다”는 말은, 바로 이 뒤틀린 철학적 여정의 끔찍하고도 완벽한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국가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아름다운 비유는, 개인의 존엄성을 완전히 말살하는 가장 끔찍한 논리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세포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몸은 건강한 몸이 아니라, 암에 걸린 몸입니다. 진정으로 건강하고 강한 국가는 모든 국민을 획일적인 세포로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각기 다른 개성과 자유를 가진 모든 시민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열린 사회’일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 우리에게 ‘전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은 당연하다’고 말하며, 국가를 하나의 거대한 몸처럼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유려한 비유 뒤에 숨겨진 전체주의의 섬뜩한 그림자를 경계해야 합니다.


6.2. 카리스마적 지도자 숭배: 이성을 마비시키는 신격화의 과정


앞에서 우리는 국가가 그 자체로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 여겨지는 위험한 논리를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유기체는 추상적이고 차가운 개념입니다. 인간은 시스템이나 개념과 사랑에 빠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살아있는 인간과 사랑에 빠지고, 그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체주의라는 제단 위에는 국가라는 이름의 신을 대리할 ‘살아있는 신’, 즉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지도자에 대한 대중의 열광적인 숭배는 아무 때나 나타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극심한 사회적 혼란과 불안의 토양 위에서 독버섯처럼 피어납니다.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한 국가적 굴욕, 감당할 수 없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적 파탄, 극심한 정치적 대립으로 인한 사회 분열 등과 같이 사회가 혼란스럽거나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은 강력한 지도자나 확고한 시스템이 제시하는 질서와 안정을 갈망하게 되며, 그 대가로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내어놓으려 합니다. 마치 거친 폭풍우 속에서 작은 배의 선원들이 모든 권한을 경험 많은 선장에게 일임하듯, 대중은 위기 상황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강력한 영웅의 등장을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바로 이 대중의 갈망에 응답하는 구원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20세기 초, 독일의 위대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 (Max Weber)는 그의 역작 『경제와 사회, Economy and Society』에서 권력이 대중의 동의를 얻는 방식, 즉 지배의 정당성이 어디서 오는지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왕이나 가부장처럼 오래된 관습과 전통에 의존하는 ‘전통적 지배’이고, 둘째는 현대 국가의 공무원처럼 합리적인 법규와 절차에 기반한 ‘합법적 지배’입니다.


베버가 제시한 마지막 유형이 바로 ‘카리스마적 지배’입니다. 이것은 앞선 두 가지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권력입니다. 이 지배의 정당성은 전통이나 법률이 아닌, 오직 지도자 한 개인이 가진 비범하고 초인적인 ‘카리스마(Charisma)’에서 나옵니다. 여기서 카리스마란 단순히 사람을 끄는 매력을 넘어, 예언자나 영웅, 혹은 위대한 선동가에게서 나타나는, 거의 신적인 권능이나 사명처럼 여겨지는 특별한 자질을 의미합니다.


대중은 이 지도자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도자의 정책을 분석하거나 그의 과거 행적을 검토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지도자 개인에게 완전히 감정적으로 매료되어, 그를 향한 전적인 믿음과 헌신을 바칩니다. 지도자의 말은 곧 법이며, 그의 의지는 곧 국가의 나아갈 길이 됩니다. 베버에 따르면, 카리스마적 지배는 본질적으로 ‘혁명적’입니다. 왜냐하면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언제나 “옛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외치며, 기존의 낡은 전통과 합리적인 규칙을 모두 부수고, 오직 자신의 의지에 기반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지도자는 자신을 평범한 정치인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는 역사의 부름을 받은 자, 민족의 운명을 짊어진 자, 고통받는 대중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진 ‘메시아’로 자신을 연출합니다. 20세기 전체주의 독재자들은 바로 이 카리스마적 지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법률 위에 군림했고, 전통을 파괴했으며, 오직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와 자신에 대한 신격화를 통해 그 거대한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이 신격화의 과정은 치밀하게 계산된 거대한 연극을 통해 완성됩니다. 히틀러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처럼, 수십만 명이 운집한 광장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군중집회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밤하늘을 수놓는 서치라이트의 빛기둥, 끝없이 나부끼는 깃발의 물결, 통일된 제복을 입은 청년들의 행진, 그리고 광장을 뒤흔드는 열광적인 함성. 이 모든 장엄한 스펙터클은 개인의 이성적 판단 능력을 완전히 마비시키고, 군중을 거대한 감정의 용광로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정점에서, 지도자는 신처럼 등장하여 단순하고, 단호하며, 선동적인 언어로 대중의 분노를 어루만지고 희망을 약속합니다. 이 순간, 지도자와 대중 사이에는 더 이상 논리적 관계가 아닌,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합일의 체험이 일어납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자신과 국가를 완벽하게 동일시합니다. “히틀러가 곧 독일이고, 독일이 곧 히틀러다”라는 나치의 구호처럼, 지도자는 이제 민족의 영혼과 국가의 의지가 육화(肉化)된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지도자를 사랑하는 것은 곧 애국이 되며, 지도자를 비판하는 것은 국가 전체를 향한 반역 행위가 됩니다. 대중은 지도자를 ‘위대한 영도자 수령 동지’ 혹은 ‘민족의 아버지’와 같은 이름으로 부르며, 자신의 모든 판단과 양심을 그에게 위임합니다.

“지도자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그것은 진리일 것이다.”

이제 개인은 더 이상 스스로 생각하고 책임지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위대한 아버지를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는, 철없는 자녀의 편안한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 숭배는,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내는 가장 위험하고 퇴행적인 아편입니다. 그것은 한 사회 전체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수천만 명의 개별적인 의지를 단 한 사람의 의지—종종 과대망상과 편집증에 사로잡힌—속에 종속시켜 버립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반복해서 경고합니다. 인간이 신의 자리에 오를 때, 다른 모든 인간은 그의 제단에 바쳐질 하찮은 제물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위기 속에서 강력한 지도자를 바라는 마음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열망이 한 개인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로 이어질 때, 그 끝에는 언제나 끔찍한 파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6.3. 미학의 정치화: 장엄한 스펙터클을 통한 대중의 감정 동원


웅장한 대성당 안에 들어서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쏟아지는 빛의 향연을 본 적이 있나요? 혹은 수만 명의 관중이 함께 떼창을 하는 거대한 록 콘서트의 한가운데에 서 본 적이 있습니까? 이러한 순간, 우리는 종종 ‘나’라는 개인의 경계가 흐려지고, 더 거대하고 장엄한 무언가와 하나가 되는 듯한 깊은 황홀경과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개인의 이성은 잠시 멈추고, 집단적인 감정의 파도에 온몸을 맡기는 것입니다.


파시즘과 전체주의는 바로 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미적, 종교적 체험을 정치적 선동의 도구로 활용하는 ‘미학의 정치화 (Politicization of Aesthetics)’를 완성시킨 체제입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토론이나 이성적인 설득을 통해 대중의 동의를 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거대하고 장엄한 ‘스펙터클 (Spectacle)’을 통해 대중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자극하고, 그들을 거대한 국가 드라마의 열광적인 관객이자 배우로 동원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독일의 사상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그의 기념비적인 에세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의 마지막 장에서 던진 섬뜩한 경고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는 파시즘이 필연적으로 ‘정치의 미학화(Aestheticization of Politics)’로 귀결된다고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벤야민이 말하는 ‘정치의 미학화’란 무엇일까요? 이는 실제 정치적 문제, 즉 먹고사는 문제, 불평등 문제, 권력 분배의 문제 등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대신, 그 정치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처럼 만들어 대중에게 선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파시즘은 대중에게 그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권리’를 주는 대신, 그들의 억눌린 감정을 표현하고 거대한 집단의 일부가 되었다는 황홀경을 느낄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실업과 가난에 시달리는 대중에게 복잡한 경제 정책을 설명하는 것은 지루하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분노와 좌절감을 한데 모아 ‘위대한 민족의 부활’이라는 장엄한 드라마로 연출하는 것은 훨씬 더 쉽고 효과적입니다. 파시즘의 지도자는 더 이상 정책을 설명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이 거대한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연출가가 됩니다. 대규모 군중집회는 그의 무대가 되고, 통일된 제복과 깃발은 무대 장치가 되며, 열광하는 군중은 배우가 됩니다.


벤야민에 따르면, 영화나 라디오와 같은 새로운 대중 매체 기술은 이러한 미학화를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기술들은 지도자의 이미지와 목소리를 수백만 명에게 동시에 복제하여 전달함으로써, 대중이 마치 지도자와 직접적이고 신비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정치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시민이 아니라, 지도자가 연출하는 거대한 스펙터클을 감격 속에서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구경꾼’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벤야민은 이 정치의 미학화가 도달하는 필연적인 정점이 바로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전쟁이야말로 국가의 모든 기술적, 인적 자원을 총동원하여 ‘파괴’라는 이름의 가장 장엄하고 숭고한 스펙터클을 연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불타는 도시, 진격하는 탱크, 하늘을 뒤덮는 폭격기 편대의 모습은, 선전 영화를 통해 하나의 비극이 아닌 아름답고 영웅적인 예술 작품으로 포장됩니다. 대중은 자신들의 아들과 형제들이 죽어가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민족의 영광스러운 운명이 실현되는 장엄한 스펙터클을 보며 미적인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벤야민의 경고는, 파시즘의 가장 큰 위험이 그 추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아름다움’에 있다는 역설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이 아니라 감각과 감정에 직접 호소하며, 현실의 고통을 잊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시대의 아편입니다.


이러한 미학적 프로파간다의 가장 완벽한 사례는 바로 나치 독일이 연출했던 대규모 군중집회, 특히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가 연출한 ‘빛의 대성당(Cathedral of Light)’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밤중, 150여 개의 대공 서치라이트가 밤하늘을 향해 일제히 수직의 빛기둥을 쏘아 올립니다. 이 빛기둥들은 광장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벽이자 지붕이 되어, 그 안에 있는 수십만 명의 군중을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신성한 공간 속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이 빛의 제단 안에서, 개인은 더 이상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끝없이 나부끼는 거대한 하켄크로이츠 깃발의 물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행진하는 통일된 제복의 대열, 그리고 지도자의 연설에 맞춰 “하일 히틀러!”를 외치는 거대한 함성의 일부가 될 뿐입니다. 이 압도적인 시각적, 청각적 스펙터클 속에서 개인의 비판적 이성은 완전히 마비됩니다. 남는 것은 오직 ‘위대한 독일 민족 공동체’라는 거대한 유기체와 하나가 되었다는 벅찬 감격과 종교적인 희열뿐입니다.


이러한 미학의 정치화는 집회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영역으로 확장됩니다. 전체주의 국가의 건축물들은 의도적으로 거대하고 위압적으로 설계되어, 그 앞에 선 개인이 국가의 영원한 힘 앞에서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느끼게 만듭니다.

'하켄크로이츠' (Hakenkreuz: 독일어로 ‘갈고리 십자가’라는 뜻으로, 나치 독일의 상징. 동양의 불교 등에서 사용하는 만(卍) 자와 비슷하지만, 방향과 기울기가 다름)나 '파스케스' (Fasces: 나무 막대기 묶음 속에 도끼를 끼운 모양으로, 고대 로마에서 권력과 권위를 상징. 결속을 통한 힘을 의미하며 이탈리아 파시즘 Fascism의 어원이 되었음)와 같은 단순하고 강렬한 상징들은 복잡한 정치적 논쟁을 대체하고, 사람들의 무의식에 직접적으로 파고듭니다.


지도자의 연설은 논리적인 설득이 아니라, 목소리의 높낮이와 극적인 침묵, 계산된 제스처를 통해 대중의 감정을 조종하는 한 편의 오페라와도 같습니다.


결국, 미학의 정치화가 노리는 것은 대중의 ‘이성을 우회하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토론은 언제나 반론과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만, 감정적인 합일의 체험은 어떠한 의심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엄한 스펙터클이 주는 벅찬 감동에 취해 있는 동안, 우리는 그 아름다운 무대 뒤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일들, 즉 소수자에 대한 박해나 개인의 자유 억압과 같은 불편한 진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어떤 정치 세력이 합리적인 정책 토론 대신, 감성적인 구호와 화려한 이미지, 그리고 대규모 군중 동원에 더 집중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대중을 주체적인 시민이 아니라 수동적인 관객으로 만들려는 위험한 신호일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건강한 사회의 아름다움은, 광장을 가득 메운 획일적인 함성이 아니라, 일상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울려 퍼지는 각기 다른 목소리들의 조화로운 합창 속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6.4. ‘내부의 적’ 발명: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숙청과 배제


자동차는 연료가 있어야 움직이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거대한 정치 운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게 만드는 강력한 ‘정신적 에너지원’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희망, 사랑,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비전은 분명 훌륭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파시즘과 전체주의는 훨씬 더 단순하고, 원초적이며, 폭발적인 에너지원에 주목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증오’입니다.


프로파간다(Propaganda), 즉 정치 선전은 단순히 체제의 우월성을 홍보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전체주의에서 프로파간다의 가장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과업은, 바로 대중의 모든 불만과 불안, 그리고 분노를 한 곳으로 모아 터뜨릴 수 있는 ‘공동의 적’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저서 『나의 투쟁, Mein Kampf』에서 프로파간다의 핵심은 지적인 설득이 아니라, 대중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데 있다고 노골적으로 밝혔습니다. 그는 복잡한 진실보다 단순한 거짓말을, 이성적인 논리보다 감정적인 선동을, 그리고 사랑보다 증오를 훨씬 더 효과적인 정치적 도구로 여겼습니다.


성공적인 프로파간다는 이 ‘적’을 매우 특별한 모습으로 그려냅니다.


첫째, 그 적은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단 하나의 원인이 되어야 합니다. 경제가 무너진 것도, 우리가 전쟁에서 패배한 것도, 사회의 도덕이 타락한 것도, 모두 저 ‘적’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단순 명쾌한 논리는 사람들을 복잡한 현실 분석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둘째, 그 '적'은 역설적인 이중의 이미지를 가져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민족의 순수성을 오염시키는 ‘역겨운 기생충’이나 ‘박멸해야 할 해충’처럼 비천하고 열등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는 대중이 그들을 경멸하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둔감해지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적은 무대 뒤에서 세계의 금융과 언론을 조종하고,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거대한 음모를 꾸미는 ‘무섭고 강력한 존재’로 그려져야 합니다. 이 위협적인 이미지는 대중을 공포에 빠뜨리고, 국가와 지도자에게 모든 권력을 위임해야만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논리를 정당화해 줍니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인류의 기생충”이라고 부르면서 동시에 “세계 금융을 지배하는 그림자 정부”라고 주장했던 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셋째, 이 적의 이미지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단순화되어야 합니다. 프로파간다는 결코 대중이 생각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대신, ‘유대인은 우리의 불행’, ‘타도하자 반동분자’와 같은 단순하고 감정적인 구호를 수천, 수만 번 반복하여 사람들의 무의식에 각인시킵니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창조된 ‘적’은 전체주의 체제를 움직이는 만능 연료가 됩니다. 내부의 불만을 외부의 적으로 돌림으로써, 독재자는 자신의 무능과 실정을 감출 수 있습니다. ‘우리 편’과 ‘저쪽 편’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진솔한 대화와 이해 대신 혐오와 배척의 감정을 키워나갑니다. 이 공동의 적을 향한 증오는, 이질적인 개인들을 ‘민족 공동체’라는 이름의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묶어주는 가장 강력한 접착제가 됩니다. 정치적 이념, 경제적 계층 등 온갖 종류의 잣대로 사람들을 나누고 서로 반목하게 만듦으로써, 정작 이 모든 분열을 조장하고 이득을 취하는 권력의 실체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결국 증오를 동력으로 삼는 체제는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있습니다. 증오라는 연료는 계속해서 새로운 ‘적’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적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프로파간다의 칼날은 내부를 향하게 됩니다. 어제의 동지들이 ‘불순분자’나 ‘반역자’라는 새로운 이름의 ‘적’으로 규정되고, 체제는 끝없는 숙청과 자기 파괴의 악순환에 빠져듭니다. 증오의 불길은 처음에는 ‘그들’을 태우지만, 결국에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 버리는 가장 위험한 불장난입니다.


6.5. 과거의 신화화: 영광스러운 역사를 통해 현재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우리 모두는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부심을 느낍니다. 우리는 조상들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이나 고난을 극복해 온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정체성을 확인하고, 현재를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이처럼 과거의 역사는 우리에게 소중한 지혜와 영감의 원천이 됩니다. 하지만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는 이 소중한 역사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왜곡하여, 현재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미래를 속박하는 강력한 프로파간다의 도구로 변질시킵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첫 번째 기술은, 복잡하고 모순적인 실제 ‘역사(History)’를 단순하고 영광스러운 ‘신화(Myth)’로 바꾸는 것입니다. 역사는 수많은 실수와 부끄러움, 그리고 다양한 해석이 공존하는 입체적인 공간입니다. 반면, 신화는 오직 하나의 위대한 이야기만을 들려줍니다. 그 이야기는 언제나 동일한 구조를 가집니다.


“우리는 과거에 위대하고 순수했던 황금시대를 누렸다. 그러나 외부의 적 혹은 내부의 배신자 때문에 우리는 타락하고 약해졌다. 이제 위대한 지도자와 함께, 저들을 제거하고 우리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되찾아야 한다!”


이러한 역사 왜곡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영국의 위대한 역사가 에릭 홉스봄 (Eric Hobsbawm)이 그의 저서 『만들어진 전통, The Invention of Tradition』에서 제시한 통찰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홉스봄에 따르면, 우리가 아주 오래되고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많은 국가적 ‘전통’들—예를 들어 국가(國歌)를 부르는 의식, 국기에 대한 경례, 왕실의 화려한 행사 등—이 사실은 아주 먼 옛날부터 이어져 온 것이 아니라, 비교적 최근인 19세기 이후 근대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특정 정치적 목적을 위해 ‘발명’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국가는 왜 전통을 ‘발명’해야만 했을까요? 홉스봄은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어내고, 그 구성원들에게 공통된 정체성과 소속감을 심어주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산업화 이전의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작은 마을의 일원으로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근대 국가가 탄생하면서, 서로 다른 지역과 계급의 사람들을 ‘프랑스인’ 혹은 ‘독일인’이라는 하나의 국민으로 묶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때 국가는 공통의 언어를 표준화하고, 의무 교육을 통해 공통의 ‘국사’를 가르치며, 공통의 상징과 의례를 만들어 보급함으로써,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국민적 일체감’이라는 새로운 전통을 창조해 낸 것입니다.


전체주의는 바로 이 ‘전통의 발명’과 ‘역사의 창조’를 가장 극단적이고 체계적인 수준까지 밀어붙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몇 가지 의례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도록 과거 역사 전체를 거대한 서사극으로 재창조합니다. 이 과정에서 역사는 더 이상 객관적인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적 목적에 복무하는 한 편의 잘 짜인 프로파간다가 됩니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이 자신들을 고대 로마 제국의 진정한 후계자로 자처하고, 나치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순수한 ‘아리안 민족’의 신화를 만들어냈던 것이 바로 그 예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권이 역사의 우연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위대한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신화 속에서, 그들이 현재 저지르는 모든 폭력과 억압은 더 이상 범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민족의 부활이라는 성스러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과거로부터 이어진 불순물을 제거하는 신성한 의식이자 역사적 사명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고대 로마 제국을 자신들의 황금시대로 소환했습니다. 무솔리니는 스스로를 로마의 황제에 비유했고, 로마 군단의 경례법을 부활시켰으며, 고대 로마의 권력의 상징이었던 ‘파스케스’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유적지에서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며, 마치 자신들이 2천 년 전 제국의 영광을 재현할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연출했습니다. 이러한 연출 속에서, 그들이 벌이는 폭력적인 정치 활동은 더 이상 단순한 권력 투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로마 제국의 부활이라는 신성한 사명을 수행하는 역사적인 행위가 되었습니다.


나치 독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 속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신화적인 과거를 발명해 냈습니다. 그들은 게르만 민족이 본래 세계를 지배했던 순수한 혈통의 ‘아리안족’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민족이 유대인과 기독교 같은 외부의 ‘오염원’ 때문에 타락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고대의 신화와 상징들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하고, 학교 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이 조작된 역사를 유일한 진실인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국가가 역사까지도 완벽하게 통제하여 인간을 사육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완벽하게 조작된 ‘영광스러운 과거’의 신화는, 현재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알리바이가 됩니다.


첫째, 그것은 정권의 모든 행동을 ‘역사적 운명’의 필연적인 귀결로 포장합니다. 독재자의 침략 전쟁은 더 이상 탐욕스러운 영토 확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에 우리가 가졌던 신성한 영토를 ‘회복’하는 정의로운 행위가 됩니다.


둘째, 그것은 ‘적’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를 정당화합니다. 유대인이나 소수 민족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위대한 황금시대를 무너뜨린 ‘역사적 원수’이자, 민족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불순물’입니다. 따라서 그들을 사회에서 제거하는 것은 증오 범죄가 아니라,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역사적 정화 작업’이 됩니다.


셋째, 그것은 대중에게 현재의 고통과 희생을 감내하도록 요구합니다. “우리의 위대한 조상들이 그러했듯, 우리도 위대한 제국의 부활을 위해 기꺼이 희생해야 한다.” 이 영광스러운 신화 앞에서, 개인의 삶과 행복은 하찮은 것이 되어버립니다.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반납하고, ‘천년 제국’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환상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제물로 바치게 됩니다.


결국, 과거를 신화로 만드는 행위는 죽은 자들의 영광을 이용해 살아있는 자들을 속박하는 가장 교활한 프로파간다입니다. 아름답게 포장된 과거는 미래를 향한 나침반이 아니라, 현재를 억압하는 무거운 족쇄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과거의 영광만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그 영광을 되찾기 위해 현재의 희생을 강요하고, 특정 집단에 대한 증오를 부추긴다면 말입니다. 진정으로 건강한 사회는 조작된 과거의 신화에 갇혀 있는 사회가 아니라, 과거의 실수와 부끄러움까지도 정직하게 성찰하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사회입니다.


6.6. 전체주의의 교훈: 인간이 어떻게 기꺼이 자유를 반납하는가


우리는 스스로를 자유를 사랑하는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위해 싸운 영웅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으며,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외침은 우리 가슴을 뜨겁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20세기의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빼앗아가는 독재자를 향해 열광적으로 환호하고, 기꺼이 전체주의라는 거대한 제단에 자신의 삶을 제물로 바쳤던 그 끔찍한 역사를 말입니다.


전체주의의 가장 깊고 어두운 교훈은, 그것이 외부에서 온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불안과 욕망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그의 명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깊이 탐구했듯, 근대적 자유는 인간에게 독립을 주었지만 동시에 고립과 불안을 안겨주었습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자유의 무게는 때로 너무나 버겁고 고통스럽습니다. 전체주의는 바로 이 자유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들에게, 그 짐을 대신 져주겠다는 달콤한 유혹의 손길을 내밉니다.


우리가 자유를 기꺼이 반납하는 첫 번째 이유는, ‘선택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예측 불가능한 세상 속에서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며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커다란 정신적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전체주의는 이러한 ‘선택의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위대한 지도자와 당이 우리를 대신해 모든 것을 결정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고뇌할 필요 없이, 그저 그들이 제시하는 명쾌한 해답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두 번째 이유는, ‘고립의 공포’로부터 탈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의 개인은 종종 거대한 익명성 속에서 외로움을 느낍니다. 전체주의는 이 고립된 개인들을 ‘민족 공동체’라는 이름의 거대한 용광로 속에 녹여, 뜨거운 일체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장엄한 군중집회 속에서 ‘나’는 사라지고 ‘우리’만 남는 황홀한 체험은, 개인의 실존적 외로움을 마취시키는 가장 강력한 마약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혼돈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회가 혼란스럽거나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은 강력한 지도자나 확고한 시스템이 제시하는 질서와 안정을 갈망하게 되며, 그 대가로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일부 혹은 전부를 내어놓으려 합니다. 전체주의는 ‘내부의 적’과 ‘외부의 위협’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이 두려움을 극대화합니다. 그리고 그 공포 앞에서, ‘안전을 위해서라면 약간의 불편함과 자유의 제한은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는 너무나 쉽게 받아들여집니다.


결국 전체주의가 우리에게 제안하는 거래는 명확합니다. “당신의 불안한 자유를 우리에게 반납하라. 그러면 우리는 당신에게 안전과 질서, 소속감과 명확한 삶의 의미를 주겠다.” 극심한 불안에 시달리는 대중에게, 이 거래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체주의의 교훈은 단지 과거의 특정 독재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 대한 영원한 경고입니다. 우리 안에는 안락한 예속 상태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비겁함과, 스스로 생각하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지적 게으름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유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불안과 책임을 감수하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려는 용기 있는 실천을 통해서만 지켜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의 대가가 영원한 경계심이라면, 그 경계의 최전선은 바로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6.7. 나치즘: ‘피와 땅’의 신화와 기술적 야만


인류의 역사에는 수많은 비극이 있었지만, 나치즘(Nazism)만큼 그 이름만으로도 인간 정신의 가장 어두운 심연을 떠올리게 하는 이데올로기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나치즘을 히틀러라는 한 미치광이가 벌인 야만적인 광기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 실체를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훨씬 더 불편하고 섬뜩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나치즘의 진짜 공포는, 그것이 가장 원시적인 신화와 가장 근대적인 기술을 결합시켜 탄생한, 끔찍하고도 강력한 ‘하이브리드 괴물’이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나치즘의 정신적 심장부에는 ‘피와 땅(Blut und Boden)’이라는 이름의 신화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 구호가 아니라, 독일 민족의 운명을 설명하는 하나의 신비주의적 종교였습니다.


여기서 ‘피(Blut)’는 생물학적이고 인종적인 순수성을 의미했습니다. 나치 사상가들은 ‘아리안족’이라는 이름의 우월하고 신성한 인종이 존재하며, 오직 독일 민족만이 그 순수한 피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피’는 한 개인의 가치, 지능, 심지어 영혼까지도 결정하는 절대적인 운명이었습니다.


반면, ‘땅(Boden)’은 이 신성한 피가 뿌리내리고 자라나야 할 신성한 영토, 즉 독일의 대지를 의미했습니다. 식물이 흙을 떠나 살 수 없듯, 위대한 민족 역시 자신들의 고유한 땅에 깊이 뿌리내릴 때만 번성할 수 있다는 낭만주의적 믿음이었습니다. 이 ‘피와 땅’의 신화는 당시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고향을 잃고 소외감을 느끼던 독일 대중에게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그것은 복잡한 현실에서 벗어나, 자연과 민족이라는 원초적이고 신비로운 공동체로 회귀하라는 달콤한 유혹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신화는 훗날 ‘레벤스라움 (Lebensraum)’, 즉 독일 민족의 생존을 위해 동유럽의 광대한 영토를 정복해야 한다는 침략 전쟁의 핵심적인 명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치즘의 가장 큰 역설이자 비극은, 이처럼 비합리적이고 과거 회귀적인 ‘피와 땅’의 신화를 실현하기 위해,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최신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기술’을 총동원했다는 점입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이 그의 역작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Modernity and the Holocaust』에서 통찰했듯, 홀로코스트는 결코 현대 이성이 잠시 마비된 야만적 광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극히 ‘현대적인’ 프로젝트였으며, 근대적 이성과 합리성이 낳은 가장 끔찍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유대인 600만 명을 체계적으로 학살한 아우슈비츠는, 분노에 휩싸인 군중이 벌인 광란의 학살 현장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곳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공장과도 같았습니다.


그 거대한 학살 공장은 세 개의 차가운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지독하게 현대적인 시스템이었습니다.


첫째, 학살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듯, 수많은 평범한 관료들의 서류 작업과 보고, 그리고 명령 체계를 통해 효율적으로 관리되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유럽 전역에서 실어 나르기 위해 정교한 열차 시간표를 작성했고, 가스실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으며, 학살에 필요한 자원을 배분하는 행정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그들은 피에 굶주린 악마가 아니라, 상관의 지시에 충실하고 맡은 바 업무를 유능하게 처리하는 ‘성실한 공무원’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이러한 냉정한 관료제는 당시 최첨단 과학 기술과 결합하여 그 효율성을 극대화했습니다. 희생자들을 유럽 각지에서 강제 수용소까지 실어 나른 것은 대륙을 촘촘하게 연결하는 철도 시스템이었고, 수십만 명을 한 번에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청산가리 계열의 독가스인 치클론 B(Zyklon B)라는 화학적 발명품이었으며, 그 끔찍한 증거를 인멸한 것은 산업적인 규모로 설계된 소각로 기술이었습니다. 이처럼 학살은 가장 진보된 기술이 총동원된 ‘과학적인’ 프로젝트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거대한 학살 공장의 가장 교묘한 장치는 바로 ‘분업화’였습니다. 공장의 생산 라인처럼, 학살의 과정은 여러 단계로 잘게 나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희생자들의 명단을 작성했고, 어떤 사람은 열차를 운전했으며, 어떤 사람은 가스를 투입했습니다. 이 분업화는 각 개인이 자신이 저지르는 거대한 악의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하고,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라는 착각 속에서 죄책감을 마비시키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스스로를 ‘학살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성실한 ‘행정가’, 유능한 ‘기관사’, 충실한 ‘임무 수행자’였을 뿐입니다.


결국 나치즘의 본질은, ‘피와 땅’이라는 가장 비합리적인 광신과, ‘관료제와 과학 기술’이라는 가장 합리적인 시스템이 맺은 ‘악마의 계약’이었습니다. 신화는 그들에게 ‘왜’ 죽여야 하는지에 대한 숭고한 명분(민족의 정화)을 제공했고, 기술은 그들에게 ‘어떻게’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는지에 대한 완벽한 수단을 제공했습니다. 이성은 광기의 충실한 노예가 되었고, 인류의 위대한 성취였던 과학 기술은 역사상 가장 끔찍한 야만을 실현하는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나치즘의 교훈은 명확합니다. 기술의 발전이 곧 인류의 도덕적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세련된 시스템과 가장 진보된 기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만약 증오와 배타성에 기반한 비이성적인 신화의 손에 쥐어질 때, 인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파멸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합니다.


6.8. 파시즘: 행동과 의지의 미학, 국가 숭배의 원형


나치즘이 ‘인종’이라는 생물학적 신화를 그 중심에 놓았다면, 20세기 전체주의의 또 다른 얼굴인 이탈리아의 파시즘(Fascism)은 조금 다른 형태의 우상을 제단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들이 숭배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혈통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거대하고 장엄한 실체, 바로 ‘국가(The State)’ 그 자체였습니다. 파시즘은 이성과 토론, 그리고 복잡한 사상 체계를 경멸했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오직 순수한 ‘행동’의 역동성과 ‘의지’의 강력함만을 찬양했습니다. 파시즘은 하나의 정교한 이론이라기보다는, 국가라는 이름의 신을 향한 열정적인 행동 강령이자, 현대 국가 숭배의 가장 강력한 원형이었습니다.


파시즘의 창시자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우리의 강령은 단순하다. 우리는 이탈리아를 통치하길 원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은 파시즘의 본질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복잡한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낡고 무기력한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강력한 의지를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역동적인 ‘행동’ 그 자체였습니다. 파시즘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과 무력감에 빠져 있던 이탈리아 사회에, 이성적 토론과 의회 민주주의의 지루함을 비웃으며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토론을 나약함의 상징으로, 타협을 부패의 증거로 여겼습니다. 대신, 그들은 거리에서의 폭력, 군대식 규율, 그리고 지도자의 명령에 대한 즉각적인 복종을 새로운 시대의 미덕으로 제시했습니다.


이러한 ‘행동과 의지의 미학’은 당시 유럽을 휩쓸던 미래주의(Futurism)와 같은 예술 사조와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미래주의자들은 과거의 유물을 파괴하고, 기계의 속도와 전쟁의 역동성을 찬양했습니다. 파시즘은 바로 이 위험한 미학을 정치의 영역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들에게 전쟁은 피해야 할 비극이 아니라, 민족의 의지를 단련하고 나약함을 정화하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행위였습니다. 파시스트가 꿈꾸는 이상적인 인간은 서재에 앉아 고뇌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전투기와 자동차를 몰고 역동적으로 질주하며, 지도자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기꺼이 폭력을 행사하는 ‘행동하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행동과 의지가 향하는 단 하나의 궁극적인 대상이 바로 ‘국가’였습니다. 파시즘 국가 숭배의 철학적 기반은 조반니 젠틸레(Giovanni Gentile)와 같은 사상가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국가는 단순히 국민을 보호하는 행정기구가 아니었습니다. 국가는 모든 개인의 의지를 하나로 모아 구현하는 살아있는 윤리적 실체였습니다. 개인은 국가라는 거대한 전체의 일부가 될 때만 비로소 진정한 의미와 자유를 찾을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무솔리니의 유명한 구호 속에서 그 전체주의적 본질을 완벽하게 드러냅니다. “모든 것은 국가 안에서, 어떤 것도 국가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국가에 반대할 수 없다.” 이 구절은 파시즘이 개인의 삶에 단 한 뼘의 사적인 영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섬뜩한 선언입니다. 개인의 양심, 종교, 예술, 심지어 가족에 대한 사랑까지도, 그것이 국가의 의지와 충돌할 때는 즉시 제거되어야 할 불순물이 됩니다. 국가는 이제 삶의 모든 영역을 통제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신, 즉 ‘스태이톨라트리(Statolatry, 국가 숭배)’의 대상이 됩니다. 국민은 그 신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충실한 신도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파시즘의 유산은 우리에게 중요한 경고를 남깁니다. ‘행동’과 ‘의지’라는 이름으로 이성적 사유를 경멸하고, ‘국가’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와 양심을 억압할 때, 사회가 어떤 비극을 맞이하게 되는지를 말입니다. 파시즘은 사람들에게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위대한 국가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역사를 창조하고 있다는 짜릿한 환상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환상의 대가는 너무나도 참혹했습니다. 그들이 숭배했던 국가라는 이름의 신은, 결국 그 신도들의 피를 제물로 삼아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거짓된 우상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6.9. 루마니아 철위단: 대천사의 이름으로 행해진 순교와 암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파시즘과 나치즘이 각각 ‘국가’와 ‘인종’이라는 세속적인 우상을 숭배했다면, 20세기 초 루마니아를 뒤흔들었던 ‘철위단(Garda de Fier)’은 전혀 다른 차원의 신을 내세웠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끄는 것이 총통이나 군주가 아니라, 하늘의 군대를 이끄는 ‘대천사 미카엘 (Archangel Michael)’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처럼 철위단의 파시즘은 정치적 운동의 외피 아래, 순교를 갈망하는 종교적 열정과 극단적인 민족주의, 그리고 피의 복수를 신성시하는 신비주의가 기이하게 결합된, 역사상 가장 광신적인 이데올로기 중 하나였습니다.


이 운동의 창시자이자 ‘캡틴(Căpitanul)’이라 불린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Corneliu Zelea Codreanu)는 평범한 정치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루마니아 민족의 영적 구원을 위해 보내진 예언자라고 여겼습니다. 그에게 당시 루마니아의 문제는 단순히 정치 부패나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 공산주의자, 그리고 부패한 기성 정치인들이라는 ‘악마의 세력’에 의해 루마니아 민족의 신성한 영혼이 더럽혀지고 있다는 ‘영적인 질병’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제시한 해결책 또한 정치적 개혁이 아닌, 피의 희생을 통한 ‘국가적 구원’이었습니다.


철위단의 이데올로기는 세 가지 기둥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적 민족주의’입니다. 그들에게 ‘루마니아’는 단순히 땅과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땅과,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과, 그리고 죽은 조상들의 영혼이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영적 유기체였습니다. 단원들은 목에 작은 주머니를 걸고 다녔는데, 그 안에는 루마니아의 신성한 흙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흙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 조국의 대지와 연결되어 있음을 상징했습니다. 그들에게 조국은 신앙 그 자체였으며, 민족은 곧 교회였습니다.


둘째는 ‘전투적인 정교회 신앙’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대천사 미카엘 군단’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미카엘은 성경에서 사탄의 군대를 무찌르고 하늘에서 추방한, 가장 호전적인 천사장입니다. 이 이름은 철위단의 정체성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들의 신앙은 사랑과 용서의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민족의 영혼을 더럽히는 ‘적’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하고, 조국을 정화하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의 종교였습니다. 그들의 정치 집회는 종종 종교적인 의식처럼 치러졌고, 그들은 전투에 나가기 전 교회에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셋째는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죽음의 숭배’입니다. 철위단의 가장 기이하고 섬뜩한 특징은 바로 ‘순교’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었습니다. 역사가 스탠리 페인 (Stanley G. Payne)이 그의 파시즘 연구서에서 지적했듯, 철위단은 ‘죽음에 대한 거의 강박적인 숭배’를 보인 독특한 사례였습니다. 코드레아누는 단원들에게 “죽음을 사랑하는 자는 결코 노예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에게 이 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비극적인 희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죄를 씻고, 조국의 영적 구원에 동참하며, 하늘에 있는 ‘군단원의 군대’에 합류하는 가장 영광스러운 행위였습니다. 이러한 ‘죽음의 미학’은 단원들을 암살과 정치 테러를 스스럼없이 저지르는 광신적인 전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창조하고자 했던 ‘새로운 인간(Omul Nou)’은, 바로 이 죽음을 향한 숭배 속에서 탄생하는, 성자의 마음과 암살자의 손을 동시에 가진 존재였습니다. 이 역설적인 조합이야말로 철위단을 다른 파시즘 운동과 구별 짓는 가장 독특하고도 위험한 지점입니다.


먼저, ‘성자의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개인적인 욕망과 물질적 탐욕,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순수한 영혼을 의미했습니다. 코드레아누는 단원들에게 금욕적인 생활과 끊임없는 기도, 그리고 명상을 통해 내면을 정화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새로운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의 모든 행동은 오직 신과 루마니아 민족의 영적 부활이라는 단 하나의 숭고한 목표만을 향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철저한 자기 부정과 희생 정신을 통해, 그는 인간의 나약함을 극복한 초인적인 존재, 즉 ‘정치적 성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성자의 마음’이 ‘암살자의 손’을 정당화하는 끔찍한 논리로 이어집니다. 정치사상가 에밀리오 젠틸레 (Emilio Gentile)가 ‘정치 종교 (Political Relig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듯, 이들은 정치를 세속의 영역이 아닌, 성과 속이 나뉘는 신성한 투쟁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이 이처럼 신성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모든 수단 역시 신성한 것이 됩니다. 부패한 정치인이나 유대인 금융가를 암살하는 행위는 더 이상 살인이라는 죄악이 아닙니다. 그것은 민족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악마’를 처단하고 조국을 정화하는,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필요한 ‘외과 수술’이자 ‘성스러운 의례’가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말한 ‘새로운 인간’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분노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는 차가운 연민과 종교적인 사명감 속에서 방아쇠를 당깁니다. 그의 손은 피로 물들지만, 그의 마음은 조국을 구원했다는 성스러운 확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위의 결과로 자신이 죽게 된다면, 그것은 죄의 대가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순교’가 됩니다. 이처럼 철위단은 폭력과 암살을 ‘성자의 길’로 포장함으로써, 구성원들의 도덕적 가책을 완전히 마비시켜 버렸습니다.


철위단이 꿈꿨던 ‘새로운 인간’은 인류를 구원할 성자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가장 위험한 광신도의 모습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이는 숭고한 이상이 어떻게 가장 끔찍한 야만을 정당화하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교훈입니다. 인간을 불완전한 존재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그를 완벽한 ‘성자’로 개조하려는 모든 이데올로기적 시도 끝에는, 언제나 ‘암살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루마니아 철위단의 이야기는, 이데올로기가 종교의 절대적인 믿음과 만났을 때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정치적 반대자는 더 이상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대천사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할 ‘악마’가 됩니다. 정치적 암살은 비열한 범죄가 아니라, 조국을 위한 거룩한 ‘순교’ 행위로 미화됩니다. 이처럼 종교의 언어가 정치적 증오를 정당화하는 순간,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잔혹함에는 더 이상 한계가 없어집니다.


철위단의 비극은, 인류의 가장 숭고한 정신적 가치인 신앙이, 어떻게 가장 야만적인 폭력을 정당화하는 프로파간다의 도구로 타락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피로써 증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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