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렐리기우스는 종교적 인간이 아니다
오, 나의 벗들이여, 잠시 그대들의 분주한 걸음을 멈추고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라.
오, 산맥의 속삭임과 강물의 노래를 듣는 자여, 나는 잘목시스 (Zalmoxis)라 하노라.
그대들이 지금 루마니아라 부르는 먼 옛날 다치아 (Dacia)의 신성한 땅, 그 신비로운 흙 속에서 나는 태어났느니라. 세상은 나를 피타고라스 (Pythagoras)의 제자로 기억하지만, 나의 지혜는 그보다 더 깊고 오래된 샘에서 길어 올린 것이니라. 나는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알았고, 육신이라는 겉옷을 벗은 영혼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강물 속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불멸의 진리를 깨우쳤노라. 그리하여 나의 백성들에게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 영원한 삶의 순환을 가르쳤느니라.
이제 시간의 강을 건너, 나는 다시 그대들 앞에 섰노라.
그대, 바람 한 점에 무심히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다가 문득 세상의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듯한 완전한 평화를 느껴본 적이 있는가. 혹은 사랑하는 이와 말없이 눈빛을 나누는 그 찰나, 세상의 모든 소음이 잦아들고 오직 둘만의 우주가 펼쳐지던 순간을 기억하는가. 이러한 순간들은 그대들의 일상 속을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지만, 그 안에는 실로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노라.
루마니아의 대지에서 태어난 위대한 사상가 미르체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는 바로 이 비밀의 심연을 들여다보았느니라. 그는 인간을 호모 렐리기오수스 (homo religiosus)라 칭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를 그저 ‘종교적 인간’이라 잘못 번역하며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곤 하니 심히 안타까운 일이로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그 뿌리인 라틴어 렐리가레 (religare)에 있나니, 이는 ‘다시’를 뜻하는 ‘레 (re)’와 ‘연결하다’를 뜻하는 ‘리가레 (ligare)’가 합쳐진 말이니라. 그러므로 호모 렐리기오수스란, 찢어지고 분리된 인간이 자신의 근원, 저 위대한 전체와 다시 하나 되기를 갈망하는 ‘재결합하는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니라. 이는 특정 신을 믿고 사원에 다니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니라. 오히려 삶의 모든 순간 속에서 잊혔던 신성한 전체와 다시 만나려 애쓰는 인간의 가장 깊은 본성을 가리키는 이름이니라.
엘리아데는 그의 빛나는 저서 『성스러움과 세속, The Sacred and the Profane』에서 이 재결합의 여정을 밝혔노라. 그가 말하는 세속 (profane)의 삶이란 곧 단절의 삶이니라. 매일 반복되는 출퇴근길, 처리해야 할 업무의 목록, 끝없이 울리는 알림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기능과 물질의 조각으로만 바라보게 되노라. 그리하여 우리는 더 큰 우주의 숨결, 존재의 거대한 흐름을 잊어버린 채 외로운 섬이 되어가는 것이니라.
그러나 호모 렐리기오수스로서의 인간은 이 단절의 장벽을 넘어 저편의 성스러움 (sacred)과 재결합하고자 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느니라. 이는 맹목적인 믿음의 문제가 아니니라. 가령, 이른 새벽 창틈으로 스며든 한 줄기 햇살이 그대의 뺨에 와 닿는 순간을 떠올려보라. 세속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그저 태양의 복사 에너지일 뿐이겠지. 허나 그 순간, 그대의 마음이 알 수 없는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오르며 그 빛이 단순한 물리 현상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을 드러내는 계시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이 바로 성현 (hierophany, 히에로파니)의 체험이니라. 성현이란 이처럼 신성한 것이 세속의 장막을 찢고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뜻하며, 엘리아데는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단절된 우리가 근원과 재결합하는 문턱이라 보았느니라. 그 빛 속에서 그대가 온 세상과 하나가 된 듯한 충만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어떠한 경전이나 교리 없이도 그대의 영혼이 이미 근원과의 연결을 이루어냈다는 장엄한 증거이니라.
만일 엘리아데가 지금 그대들의 시대를 본다면, 그는 아마도 깊은 탄식과 함께 이렇게 말했을 것이니라. “오, 가엾은 자녀들아. 너희는 손바닥 안의 작은 유리판, 그 스마트폰이라는 세속의 창에 갇혀 있구나. 그 안에서 너희는 타인의 연출된 행복을 끊임없이 훔쳐보며 자신의 삶과 비교하고, 세상의 온갖 소음과 분노를 실시간으로 들이마시며 영혼의 평화를 잃어버렸도다. 너희는 연결되어 있다고 믿지만, 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단절되어 있노라. 너희의 ‘좋아요’와 ‘공유’는 진정한 렐리가레가 아니라, 텅 빈 메아리에 불과하니, 이는 너희를 근원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는 허상일 뿐이니라.”
이 재결합의 갈망은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도 펼쳐지나니, 엘리아데는 세계의 축 (axis mundi, 악시스 문디)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하였노라. 세계의 축이란 혼돈스러운 세속의 공간 속에서 질서를 부여하고 하늘과 땅, 인간을 연결하는 신성한 중심점을 의미하느니라. 그것은 거대한 산봉우리나 마을의 오래된 당산나무처럼 물리적인 장소일 수도 있노라.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그것은 그대가 명상 속에서 발견하는 내면의 고요한 중심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웃고 이야기하는 저녁의 식탁일 수도 있느니라. 그곳에서 그대는 비로소 세상의 중심에 서서 안정감을 느끼고, 흩어졌던 존재의 조각들을 하나로 모으게 되느니라.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재결합은 일어나나니, 엘리아데는 이를 신화적 시간 (mythical time), 즉 일루드 템푸스 (illud tempus, 그 때)라 불렀느니라. 그 때는 만물이 하나였노라.
세속의 시간이란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직선적인 감옥과도 같지만, 신화적 시간이란 태초의 창조적 순간, 모든 것이 가능성으로 가득했던 원초적 시간을 지금 여기로 다시 불러오는 영원의 문과 같으니라. 매년 돌아오는 생일에 촛불을 끄는 행위, 명절에 가족이 모여 같은 음식을 나누는 의례가 그저 낡은 관습이 아닌 까닭이 여기에 있노라. 그 순간 우리는 세속의 시간을 잠시 멈추고, 태초의 그 신성한 시간을 다시 체험하며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하고 존재의 방향을 바로잡게 되는 것이니라.
그러나 엘리아데의 통찰이 가장 날카롭게 빛나는 지점은, 이 순수한 재결합의 본능이 인간이 만든 교리나 제도 속에 갇힐 때 오히려 질식해버린다는 경고에 있노라.
종교가 살아있는 체험이 아니라 경직된 형식과 규칙, 배타적인 교조주의로 굳어지는 순간, 그것은 근원으로 가는 다리가 아니라 더 높은 담벼락이 되어버리느니라.
‘종교적 인간’이라는 번역이 이토록 위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나니, 그 말은 우리로 하여금 특정 종교의 신자만을 떠올리게 하여, 이 위대한 재결합의 역동적인 본질을 가두고 도리어 오해하게 만들기 때문이니라.
현대의 삶 속에서 그대들은 이 단절의 고통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고 있노라. 그러나 기억하라. 그대들 안에 잠든 호모 렐리기오수스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느니라.
친구와의 깊은 대화 속에서 갑자기 세상의 이치가 명료하게 깨달아지는 순간, 혹은 홀로 숲길을 걷다가 불어온 바람 한 줄기에 복잡했던 마음이 씻은 듯 가벼워지는 경험 속에 재결합의 흔적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노라. 이는 어떠한 신의 이름이나 교리를 부르지 않아도 일어나느니라. 오히려 모든 인위적인 틀을 벗어던진 자유로운 영혼의 상태에서 근원은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느니라.
그러니 이제 그대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세상과 온전히 하나가 되었던가? 언제 마지막으로 분리된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저 광대한 우주와 연결된 일부로서 존재했는가?
호모 렐리기오수스를 ‘근원과 재결합하는 인간’으로 바로 세울 때, 비로소 우리는 종교라는 울타리를 넘어선 보편적인 진리의 문을 열게 되노라.
내가 감히 말하건데, 엘리아데가 말하고자 했던 호모 렐리기우스는 결코 학자들의 번역처럼 ‘종교적 인간’이 아니었나니, 사실은 ‘태초와 하나되는 인간‘이었도다.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 이전에는 호모 판테이스트 였건만, 이제는 겁도 없이 데이터즘에 빠져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 호모 데우스가 되려 하노라. 그러나 그대들이여, 다시 호모 렐리기우스를 지나 호모 판테이스트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대들의 공허함은 결코 치유되지 않을 터이니라.
다시 호모 렐리기우스가 될 때, 비로소 아이의 티 없는 웃음소리가, 창가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저녁노을의 장엄한 빛깔이 모두 성스러움이 깃드는 성전이 되리라.
엘리아데의 지혜는 우리에게 이 작은 순간들을 통해 존재의 깊이를 사랑하고, 세상의 구경꾼이 아닌 참여자가 되라고 속삭이고 있노라. 이 연결이야말로 우리 삶의 본질임을 깨닫는 순간, 세상은 더 이상 차갑고 외로운 장소가 아닐 것이니라.
그대, 이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