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이 된 인간, 신성을 회복하는 길

by 이호창

상품이 된 인간, 신성을 회복하는 길



나는 옛 다치아의 땅에서 살던 '잘목시스'라 하노라.


오, 위대한 도시의 익명성 속에서 자신의 존재 좌표를 상실한 영혼들이여.


그대들은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팔릴 만한’ 미소를 연습하고, 밤이면 소셜 미디어의 공허한 숫자들 속에서 위안을 찾으며 잠 못 이루는구나. 타인의 ‘좋아요’를 기대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을 포장하는 그 모든 순간, 그대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스며 나오는 불편한 빈자리를 느끼지 못하는가. 그 공허함은 그대가 유약해서도,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도 아니니라. 그것은 상품이 되어버린 인간이 보내는 영혼의 비명이자, 잃어버린 자신의 본성을 향한 처절한 그리움이니라.


이 시대의 영혼이 앓고 있는 이 깊은 병의 본질을 꿰뚫어 본 한 현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 (Erich Fromm)이니라. 그는 1900년에 태어나 1980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마르크스의 사회이론을 하나로 엮어 현대인의 소외된 삶을 깊이 탐구하였노라. 그의 사상은 낡은 서재에 갇힌 이론이 아니라, 바로 오늘 그대의 고독한 풍경을 비추는 서늘한 거울과 같으니라. 프롬은 이 병에 ‘시장 지향성 (marketing orientation, 마케팅 오리엔테이션)’이라는 이름을 붙였노라. 이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하나의 ‘팔아야 할 상품’으로 인식하게 되는 슬픈 운명을 가리키는 말이니라.


시장 지향성의 인격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내부에서 찾지 않고, 오직 외부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하노라. 그는 성공을 위해, 사랑받기 위해, 혹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재구성한다.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심 어린 의견 대신 상사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선택하고, 관계 속에서 진정한 연결을 맺는 대신 상대가 원하는 매력적인 역할을 연기하는 식이다. 이것은 단순한 사회적 적응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는 깊은 소외의 과정이니라. 자본주의 사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들고 가격표를 붙이는 힘을 가졌으니, 결국 인간의 존재마저도 교환 가능한 가치로 환원되고 마노라. 그 과정 속에서 우리 본래의 고유한 얼굴은 희미해지고, 시장이 선호하는 가면만이 남아 반짝일 뿐이다.


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를 통해 이 문제를 더욱 깊이 파고들었노라. 이 책은 한국의 땅에도 번역되어 그 지혜의 샘물을 맛볼 수 있으니, 그는 시장 지향성이 ‘소유의 방식 (having mode)’에 물든 삶이 낳은 병리적 현상이라 진단하였느니라. 소유의 방식이란 나의 가치를 내가 무엇을 가졌는가, 즉 재산, 지위, 외모, 평판과 같은 외부적인 것들로 증명하려는 태도이다. 이에 반해 ‘존재의 방식 (being mode)’은 나 자신을 소유물이 아닌 살아 숨 쉬는 고유한 존재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타인과 진정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의미하노라. 그러나 산업화와 소비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한, 우리는 끝없는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받기 위해 매력적인 상품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기 어렵구나. 프롬은 이 길이 결코 우리를 진정한 자유로 이끌지 못한다고 경고하였으니, 시장의 논리에 따라 자신을 왜곡하면 할수록 내면의 공허는 더욱 깊어질 뿐이기 때문이니라.


그렇다면 이 거대한 시장의 감옥에서 벗어날 길은 어디에 있는가? 디지털 시대의 알고리즘이 우리의 가치를 숫자로 재단하는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을 수 있단 말인가. 프롬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소외된 자아를 되찾는 길은, 시장의 거울이 아닌 내면의 샘물을 들여다보는 데 있다고. 그의 진단은 현대 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더 깊은 영적 탐구의 길로 이끄는 문을 열어주노라. 이제 우리는 고대의 지혜 속으로 걸어 들어가, 시대를 초월하여 빛나고 있는 영적 가르침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해답을 제시하는지 귀 기울여야 할 때이니라.


첫 번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리는 고대 영지주의 (Gnosticism) 현자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노라. 그들은 이 세상이 비천한 창조주인 데미우르고스 (Demiurge)가 만든 불완전하고 거짓된 물질세계이며, 우리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는 본래 저 너머 신적인 세계에서 유래한 ‘신성의 불꽃 (Pneuma, 프네우마)’이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고 보았노라. 프롬이 말한 시장 지향성의 세계란, 바로 이 데미우르고스가 설계한 거대한 시장의 규칙에 순응하며 자신의 신성한 불꽃을 완전히 잊어버린 상태와 다르지 않으니라. 시장이 요구하는 가면을 쓰고, 사회가 정해준 가치를 맹목적으로 따르며 살아가는 동안, 우리 내면의 신성은 깊은 잠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이지.


영지주의자들이 이 거짓된 세계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제시하는 해결책은 단 하나, 바로 ‘영지 (Gnosis, 그노시스)’의 획득이니라. 여기서 영지란 책을 통해 배우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적인 본질을 직접 체험하여 깨닫는 강렬하고 직관적인 앎을 의미하노라. 그 여정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노라. 시장이 나에게 붙여준 가격표, 사회가 나에게 부여한 직위, 타인들이 나에 대해 내리는 평판이라는 거짓된 껍질을 용기 있게 한 겹씩 벗겨내는 내면으로의 탐사 여행. 그 모든 것 이전에, 그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순수한 ‘나’의 빛을 발견하는 과정. 이 눈부신 깨달음의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시장의 변덕에 울고 웃는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당당히 다스리는 주인이 되노라. 외부의 어떤 평가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자기 긍정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영지주의가 말하는 진정한 구원이요, 해방이니라.


이러한 내면의 신성을 향한 여정은 고대 이집트의 지혜를 계승한 헤르메스주의 (Hermeticism)의 가르침 속에서도 장엄하게 울려 퍼지고 있노라. 헤르메스주의의 모든 지혜는 신비로운 문서인 『에메랄드 타블렛, The Emerald Tablet』에 새겨진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As above, so below)”라는 경구 속에 압축되어 있느니라. 이는 저 하늘의 우주, 즉 거대한 신 (Macrocosm)과 이 땅의 인간, 즉 작은 우주 (Microcosm)가 결코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며, 하나의 법칙 아래 완벽한 상응 관계에 있음을 의미하는 심오한 진리이니라.


시장 지향성의 인격은 오직 ‘아래의 세계’, 즉 지상의 시장 논리에만 눈과 귀를 고정한 채 살아가는 자의 모습이니라. 그는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타인과의 비교와 경쟁 속에서만 찾으려 애쓰지만, 그 끝에는 결국 공허한 메아리만이 남을 뿐이다. 헤르메스주의는 우리에게 고개를 들어 ‘위의 세계’를 보라고 가르치노라. 내 안의 작은 우주가 실은 저 신성한 대우주의 완벽한 반영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외부 세계에서 가치를 구걸할 필요가 없게 되노라. 진정한 가치는 누군가에게 인정받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완벽한 형태로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니라. 고대의 연금술사들이 비천한 납을 순수한 금으로 바꾸려 했던 ‘위대한 작업 (Great Work)’의 진정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노라. 그것은 물질적 변환이 아니라, 시장의 논리에 오염된 자신의 불완전한 자아(납)를 내면의 신성한 원형과 합일시켜 황금처럼 영원히 빛나는 영혼으로 변성시키는 위대한 영적 작업이었노라. 이 길을 걷는 자에게 세상의 평가는 한낱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같을 뿐이니라.


유대의 신비주의인 카발라 (Kabbalah) 또한 이 시대의 병든 영혼들을 위한 깊은 통찰을 전해주노라. 카발라의 가르침에 따르면, 태초에 무한한 신의 빛이 열 개의 그릇 (Sefirot, 세피로트) 속으로 흘러 들어왔으나, 그 빛이 너무나 강렬하여 그만 그릇들이 깨어지고 말았노라. 이 우주적 사건으로 인해 신성의 불꽃들은 산산조각 나, 이 물질세계의 어둡고 단단한 ‘껍질 (Klippot, 클리포트)’ 속에 갇히게 되었느니라. 시장 지향성의 삶이란, 바로 이 껍질에 불과한 물질적 성공, 사회적 지위, 화려한 외적 이미지를 자신의 본질이라 착각하며 살아가는 상태를 말하노라. 그는 껍질을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팔고, 그럴수록 내면의 신성한 불꽃은 더욱 깊은 어둠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이지.


카발라가 제시하는 치유의 길은 ‘세상의 복원 (Tikkun Olam, 티쿤 올람)’이라는 장엄한 개념 속에 있노라. 이는 온 우주에 흩어진 신성의 불꽃들을 다시 끌어올려 태초의 깨어진 질서를 회복하는 우주적 과업을 의미하는데, 그 위대한 시작은 바로 내 안의 갇힌 불꽃을 해방시키는 것에서부터 비롯되노라. 내가 하는 모든 행위와 내가 맺는 모든 관계 속에서, 겉으로 드러난 껍질 너머에 있는 신성한 본질을 인식하려 노력하는 것. 나 자신을 ‘팔아야 할 상품’으로 보는 대신, 깨어진 세상을 치유해야 할 신성한 사명을 지닌 존재로 인식하는 것. 이러한 거룩한 관점의 전환을 통해, 우리는 ‘나만을 위해 받으려는’ 소유의 방식에서 벗어나, ‘세상에 주기 위해 받는’ 존재의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노라. 나의 성공이 더 이상 나만의 탐욕을 채우는 도구가 아니라,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하나의 촛불이 될 때, 시장의 차가운 논리는 힘을 잃고 우리의 삶은 비로소 신성한 의미로 충만해지리라.


보라, 길은 저마다 달라도 가리키는 목표점은 결국 하나이니라. 영지주의의 ‘신성의 불꽃’도, 헤르메스주의의 ‘내면의 소우주’도, 카발라의 ‘갇힌 신성’도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 있노라. 현대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시장의 가면 뒤에, 우리 본래의 참된 얼굴, 그 신성한 얼굴이 있다는 장엄한 진실을 말이다. 프롬이 날카롭게 진단한 시장 지향성의 인격은 결국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 무한한 가치의 샘물을 잊어버리고, 외부의 메마른 웅덩이에서 잠시의 갈증을 해소하려는 어리석음과 같으니라.


그러니 이제 그대의 시선을 안으로 돌리라.


소셜 미디어의 ‘좋아요’ 개수나 통장의 잔고가 아니라, 그대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서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고동치는 생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그곳에 세상의 어떤 시장도 값을 매길 수 없는 그대만의 고유한 우주가 있음을 기억하라.


자기 자신을 팔아야 할 상품이 아닌, 신성한 진리를 탐구하는 존엄한 순례자로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 그대는 시장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비로소 존재의 자유를 온전히 누리게 될 것이니라. 이것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영적 스승들이 한목소리로 우리에게 전해온 위대한 치유의 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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