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대
『오늘의 현자들, 다시 신을 묻다』
부제: 유튜브 토론 배틀 <사피엔스 오디세이>
[등장인물]
진행: 이수진 (지적이고 차분한 아나운서. 토론의 균형을 잡으려 노력한다.)
패널 1 (영지주의): 김박사 (명문대 철학과 교수. 세상의 부조리를 지적하는 비판적 지성인. 냉소적이고 날카롭다.)
패널 2 (정통 교부): 최목사 (보수 신학대학의 조직신학 교수.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강조하는 원리주의 신학자. 열정적이고 단호하다.)
패널 3 (신플라톤주의): 이선생 (100만 구독자를 보유한 인기 윤리/인문학 강사. 복잡한 개념을 쉽게 풀어내며, ‘마음 챙김’과 ‘성찰’을 강조한다. 온화하고 합리적이다.)
패널 4 (신비주의): 윤선생 (‘강호의 철학자’로 불리는 재야 사상가. 학위는 없으나, 깊은 체험과 독서를 바탕으로 한 독창적 사유를 펼친다. 예측 불가능하고 직관적이다.)
오프닝: 오늘의 주제 - "왜 세상은 이토록 불공평한가?"
[무대]
세련되고 현대적인 유튜브 방송 스튜디오. 배경의 대형 LED 스크린에는 <사피엔스 오디세이> 라는 프로그램 로고와 함께, 우주와 인간의 뇌 뉴런 이미지가 겹쳐지는 감각적인 영상이 흐르고 있다. 중앙에는 반원형의 토론 테이블이 있고, 진행자석과 네 명의 패널석이 마련되어 있다. 조명은 밝고 경쾌하지만, 토론의 주제를 암시하듯 테이블 아래로는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경쾌한 시그널 음악과 함께 방송이 시작된다. 카메라는 단정하고 지적인 이미지의 진행자, 이수진 아나운서를 비춘다.)
이수진: (환한 미소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안녕하십니까. 당신의 지적 탐험을 위한 안내서, <사피엔스 오디세이>의 이수진입니다. (미소가 살짝 옅어지며,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고들 합니다. 스마트폰 하나로 전 세계와 연결되고, 버튼 하나로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시대. 하지만 이상합니다. 어째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불안하고, 더 외롭고, 더 무력하다고 느끼는 걸까요?
(배경 LED 스크린에 화려한 인스타그램 피드, 명품 사진들과 함께 ‘상대적 박탈감’, ‘수저계급론’, ‘번아웃 증후군’과 같은 키워드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수진: SNS 속에서 타인의 완벽한 삶을 엿보며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태어나는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수저계급론’ 앞에서 느끼는 좌절감. 오늘, <사피엔스 오디세이>에서는 이 모든 문제의 가장 깊은 뿌리, 어쩌면 인류가 시작된 이래 단 한 번도 시원하게 답을 찾지 못했던 바로 그 질문을 정면으로 던져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주제, 바로 이겁니다.
(스크린에 “왜 세상은 이토록 불공평한가?”라는 질문이 강렬하게 떠오른다.)
이수진: 이 위험하고도 근원적인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오늘 각자의 영역에서 가장 뜨거운 사유를 펼치고 계신 네 분의 현자들을 모셨습니다. 한 분 한 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카메라가 차례로 패널들을 비춘다.)
이수진: 먼저, 날카로운 비판과 냉소로 우리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분이죠. ‘헬조선 쓴소리’의 대가, 철학자 김박사님 나오셨습니다.
김박사: (안경을 고쳐 쓰며, 시니컬한 표정으로 가볍게 목례한다) 김박사입니다. 오늘 토론이 얼마나 의미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수진: 다음은, 무너진 공동체의 회복과 신앙의 힘을 역설하시는 분입니다. 보수 신학계의 거목, 최목사님 함께하셨습니다.
최목사: (근엄하지만 온화한 미소로) 최목사입니다. 이 어지러운 시대에 꼭 필요한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수진: 이어서, 100만 구독자의 마음을 움직인 분이죠. ‘생각의 힘’으로 삶을 바꾸는 법을 전파하시는 우리 시대 최고의 인문학 멘토, 이선생님 나오셨습니다.
이선생: (특유의 편안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삶을 응원하는 이선생입니다. 오늘도 많은 것을 배우고 나누고 싶습니다.
이수진: 마지막으로, 제도권의 언어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유를 펼치시는 분입니다. ‘숲속의 철학자’로 불리는 재야 사상가, 윤선생님 모셨습니다.
윤선생: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듯한, 예측 불가능한 눈빛으로) 윤입니다. 불러서 왔습니다.
이수진: 네, 네 분의 현자들과 함께 본격적인 토론을 시작하기 전에, 오늘 주제인 ‘불공평’이라는 키워드에 대한 각자의 첫인상, 혹은 한 줄 논평을 들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일종의 출사표라고 할 수 있겠네요. 김박사님부터 시작해 주시죠.
김박사: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불공평은 오류입니다. 이 세상은 버그로 가득 찬, 아마추어 개발자가 만든 잘못 설계된 시스템이라는 뜻이죠. 우리는 지금 ‘망겜’에 접속해 있습니다.
이수진: 망겜에 접속해 있다. 아주 강렬한데요. 최목사님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최목사: (단호한 목소리로) 불공평은 시련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근육을 키우기 위한 위대한 훈련소에 입소한 것입니다. 모든 시련에는 반드시 그 뜻이 있습니다.
이수진: 영적 훈련소다. 관점이 완전히 다르군요. 이선생님께서는요?
이선생: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불공평은 착각입니다. 세상은 당신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일 뿐입니다. 당신의 세상이 불공평하다면,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 아직 조율되지 않았다는 신호입니다.
이수진: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렇다면 윤선생님,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윤선생: (잠시 침묵하다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불공평은… 거름입니다. 알아들을 분들은 알아들으시겠지만, 가장 아름다운 장미는 가장 지독하게 썩은 거름더미 위에서 피어나는 법입니다.
이수진: (잠시 당황하지만, 이내 미소를 되찾으며) 네, 망겜, 훈련소, 거울, 그리고 거름까지. 시작부터 네 분의 세계관이 얼마나 다른지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과연 이 네 개의 길 위에서, 우리는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사피엔스 오디세이>, 광고 후에 본격적인 1라운드 토론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채널 고정해주십시오.
(경쾌한 음악이 다시 흐르며, 화면이 광고로 전환된다. 네 명의 패널은 각자 다른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하며, 곧 시작될 지적 격투를 준비한다.)
제1라운드: 악(惡)의 문제 - 이 세계의 ‘개발자’는 누구인가?
[무대]
세련되고 현대적인 유튜브 방송 스튜디오. 배경의 대형 LED 스크린에는 <사피엔스 오디세이> 라는 프로그램 로고와 함께, 우주와 인간의 뇌 뉴런 이미지가 겹쳐지는 감각적인 영상이 흐르고 있다. 중앙에는 반원형의 토론 테이블이 있고, 진행자석과 네 명의 패널석이 마련되어 있다. 조명은 밝고 경쾌하지만, 토론의 주제를 암시하듯 테이블 아래로는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경쾌한 시그널 음악이 끝나고, 광고에서 돌아온 화면은 다시 진행자 이수진을 비춘다. 그녀의 표정은 오프닝 때보다 한층 더 진지해져 있다.)
이수진: 네, <사피엔스 오디세이> 1라운드 토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앞서 네 분의 현자들께서 ‘불공평’이라는 키워드에 대해 ‘망겜’, ‘훈련소’, ‘거울’, ‘거름’이라는 정말 흥미로운 화두를 던져주셨는데요. 오늘 첫 번째 토론의 주제는 바로 이 모든 문제의 근원, 바로 ‘악(惡)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우리 시대의 언어로 이렇게 한번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이 세계의 ‘개발자’는 누구인가?”
(배경 스크린에 타이틀이 떠오른다. 이수진은 가장 먼저 김박사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이수진: 김박사님, 오프닝에서 이 세계를 ‘망겜’에 비유하셨습니다. 굉장히 도발적인 표현인데요. 선제공격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박사님께서 보시는 이 세계의 ‘개발자’는 과연 어떤 존재입니까?
ROUND 1-1. 김박사의 선제공격
김박사: (천천히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그의 눈빛은 지쳐 보이지만, 그만큼 날카롭다. 그는 정면의 카메라를 잠시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최목사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김박사: 최목사님, 잠시 뉴스를 보겠습니다. 굳이 먼 옛날의 아우슈비츠나 르완다 학살까지 갈 필요도 없겠지요. 바로 어제,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의 이야기입니다.
(배경 스크린에 가슴 아픈 뉴스 자료화면들이 소리 없이 스쳐 지나간다. 멍든 아이의 사진, 무너진 공장 건물, 슬픔에 잠긴 유가족들의 모습 등.)
김박사: 정인이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양부모의 잔혹한 학대 끝에 16개월의 짧은 생을 마감한 아이. 그 작은 아이가 온몸의 뼈가 부러지고 장기가 파열되는 고통 속에서 죽어가던 그 순간,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전능하고 선하신 ‘개발자’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는 어떻습니까? 컵라면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하고 스무 살의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나간 젊은이. 수많은 청년들이 위험한 환경으로 내몰리고, 일하다 죽어가는 이 끔찍한 산업재해의 현장에서, 그 ‘개발자’의 선한 의지라는 것은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목사님께서는 이 세계를 ‘훈련소’라고 하셨죠. 좋습니다. 그 비유를 그대로 받아서 질문 드리겠습니다. 만약 어떤 게임 개발자가 ‘인생’이라는 이름의 가상현실 게임을 출시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이 게임에는 치명적인 버그가 있습니다. 어떤 플레이어는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치트키’를 가지고 시작하고, 어떤 플레이어는 튜토리얼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이유도 모르는 고통 속에서 캐릭터가 삭제되어 버립니다.
수많은 유저들이 이 버그를 수정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는데, 개발자는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고객센터는 불통이고, 패치 업데이트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을 ‘선하고 전능한 개발자’라고 홍보합니다. 유저들이 항의하면, 일부 광신적인 유저들이 나타나 이렇게 말하죠. “이 모든 버그는 당신의 영혼을 성장시키기 위한 위대한 시련입니다. 개발자의 깊은 뜻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최목사님, 솔직하게 대답해주십시오. 이런 게임이 있다면, 당장 ‘망겜’이라고 불리며 유저들의 비난과 조롱 속에서 서비스 종료 수순을 밟지 않겠습니까? A/S를 거부하고 유저의 고통을 방치하는 게임 개발자는 비난받아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왜, 이 현실이라는 훨씬 더 잔혹하고 불공평한 게임의 개발자에 대해서는 감히 질문조차 던지지 못하고, 그저 그의 선하심을 맹목적으로 믿어야만 합니까?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그 전능하고 선하신 ‘개발자’라면, 이 끔찍하고 명백한 버그들을 왜 즉시 수정하지 않는 겁니까? 아니, 애초에 왜 이따위 버그투성이 게임을 출시한 겁니까?
ROUND 1-2. 최목사의 반격과 역질문
(김박사의 날카로운 공격에 스튜디오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다. 이수진 아나운서조차 침을 삼키며 최목사를 바라본다. 최목사는 잠시 눈을 감고 김박사의 모든 말을 묵묵히 듣는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아닌, 깊은 고뇌와 슬픔이 서려 있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김박사를 향해 단호하지만 떨림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최목사: 김박사님, 좋은 질문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아픈 질문입니다. 그 질문은 오늘날 교회를 향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세상의 가장 정직한 절규일 것입니다. 저 또한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그 참혹한 비극들 앞에서 밤새워 기도하며 ‘하나님,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라고 수없이 물었습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른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단순한 변증이 아닌, 고통에 대한 깊은 공감에서 우러나온다.)
최목사: 박사님, 그 참혹한 현장에 오직 어둠과 절망만이 있었을까요? 정인이가 죽어가던 그 순간, ‘아동학대가 의심된다’며 세 번이나 경찰에 신고했던 용감한 이웃과 의사는 없었습니까? 구의역의 그 젊은이가 스러져간 후,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포스트잇을 붙이고, 비정규직 청년들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거리로 나섰던 수많은 시민들은 없었습니까? 산업재해 현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를 구하려다 함께 희생된 또 다른 젊은 소방관의 이야기는, 우리는 벌써 잊었습니까?
그들의 선한 의지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들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은, 대체 어떤 프로그래밍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박사님께서는 이 세계를 ‘망겜’이라 하셨지만, 저는 오히려 이 세계가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너무나도 위험하고 위대한 권한이 주어진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신께서 박사님의 말씀처럼 모든 버그를 즉시 수정하는 개발자라고 상상해 봅시다. 아이를 학대하려는 부모의 손을 그 순간 멈추게 하고, 위험한 기계를 다루는 노동자의 실수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며, 모든 사고와 질병을 없애버리는 세상. 그곳은 과연 천국일까요?
아닙니다. 그곳은 모든 것이 미리 정해진 대로만 움직이는, 거대한 인형극 무대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곳에는 악(惡)도 없겠지만, 악에 맞서 싸우는 선(善)한 의지 또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곳에는 미움도 없겠지만, 미움을 용서하는 위대한 사랑 또한 피어날 수 없습니다. 그곳에는 비겁함도 없겠지만, 두려움을 무릅쓰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숭고한 용기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신께서는 우리를 완벽하게 프로그래밍된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당신의 형상을 닮은,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에는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 수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는 무서운 책임이 따릅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이 모든 비극은, 신의 무능이나 악의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이 그 위대한 자유를 잘못 사용한 결과입니다.
(최목사는 이제 김박사를 향해 날카로운 역질문을 던진다.)
최목사: 박사님께서는 A/S를 거부하는 개발자를 비난하셨죠. 하지만 신의 A/S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당신의 아들을 이 죄악의 한복판으로 보내시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는 버그를 원격으로 수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친히 게임 속으로 들어와, 가장 비참한 플레이어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고통받고, 마침내 시스템의 가장 큰 버그인 ‘죽음’ 그 자체를 자신의 죽음으로 해킹하셨습니다.
그러니 제가 박사님께 되묻겠습니다. 박사님은 진정으로, 실수할 자유도, 사랑할 자유도 없는 완벽한 통제 사회를 원하시는 겁니까? 당신의 철학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되는 거대한 개미굴과 무엇이 다릅니까?
ROUND 1-3. 이선생의 논점 재구성
(최목사의 열정적인 반격에 김박사는 잠시 말을 잃은 듯,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응시한다. 스튜디오 안에는 자유의지의 무게와 신의 사랑이라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그때, 이선생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두 사람의 대화에 개입한다. 그는 마치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푸는 노련한 장인처럼, 논쟁의 구도를 새롭게 재구성한다.)
이선생: (두 사람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두 분의 깊이 있는 말씀, 정말 잘 들었습니다. 한 분은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며 ‘개발자의 책임’을 물으셨고, 다른 한 분은 그 속에서도 피어나는 선한 의지를 통해 ‘플레이어의 자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양쪽 다 깊이 공감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두 분의 논쟁을 듣다 보니, 저는 마치 두 명의 뛰어난 게임 캐릭터가 서로 다른 버전의 ‘게임 세계관 설정집’을 가지고 와서, “내 설정집이 맞다, 네 설정집은 틀렸다”고 다투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의 비유에 스튜디오에 가벼운 웃음이 터진다.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진다.)
이선생: 김박사님은 이 게임의 장르를 ‘부조리 서바이벌 호러’로 규정하고 계시고, 최목사님은 ‘영적 성장 어드벤처’라고 보고 계십니다. 두 분 모두 ‘게임 개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고 계시죠.
하지만 혹시, 이런 가능성은 없을까요? 이 게임은 애초에 정해진 장르가 없는 ‘오픈월드 샌드박스’ 게임이라는 겁니다. 개발자는 그저 광활한 월드와 기본적인 물리 법칙만을 만들어 놓았을 뿐, 그 안에서 무엇을 할지는 전적으로 ‘플레이어’에게 맡겨 놓은 거죠.
똑같은 ‘오픈월드’ 게임도, 어떤 플레이어는 다른 유저들을 약탈하고 죽이는 ‘PK’를 일삼으며 세상을 ‘서바이벌 호러’로 만듭니다. 반면, 어떤 플레이어는 아름다운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다른 유저들과 교류하며 세상을 ‘힐링 어드벤처’로 만들어갑니다. 여기서 문제는 개발자일까요, 아니면 플레이어의 ‘관점’과 ‘선택’일까요?
(그는 이제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자신의 구독자들에게 말하듯 친근하고 설득력 있는 어조로 말을 잇는다.)
이선생: 여러분, 세상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당신의 마음을 비추는 거대한 거울일 뿐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분노와 피해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면, 세상은 온통 당신을 공격하는 적들과 불공평한 규칙들로 가득 찬 지옥처럼 보일 겁니다. 반대로, 당신의 마음이 감사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세상은 온통 당신을 돕는 기회와 고마운 인연들로 가득 찬 천국처럼 보일 겁니다.
아이가 학대당하는 뉴스를 볼 때, 우리는 “세상은 역시 지옥이야”라고 절망하며 자신의 냉소주의를 강화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김박사님의 방식이겠지요. 반면, 그 속에서도 아이를 구하려 했던 이웃의 용기에 주목하며 “그래도 세상은 아직 살만해”라고 희망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최목사님의 방식일 겁니다.
무엇이 진실일까요? 둘 다 진실입니다. 세상은 당신이 바라보는 그대로 당신에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진짜 질문은 “개발자는 선한가, 악한가?”가 아닙니다. 진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관점으로 이 세계라는 게임에 접속하고 있는가?” 우리는 개발자의 의도를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당장, 우리 자신의 ‘플레이 방식’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개발자가 아니라, 바로 플레이어의 ‘관점’ 아닐까요?
ROUND 1-4. 윤선생의 판 흔들기
(이선생의 합리적이고 희망적인 대안 제시에 스튜디오의 분위기는 잠시 평화로워지는 듯하다. 그의 말은 많은 시청자들에게 위안과 깨달음을 줄 법한, 명쾌한 솔루션처럼 들린다. 그때, 지금까지 모든 대화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듣고만 있던 윤선생이,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천천히 입을 연다. 그의 목소리는 앞선 세 사람과는 전혀 다른, 기묘한 울림을 지니고 있다.)
윤선생: (모두를 천천히 둘러보며) 재미있군요. 한 분은 개발자를 고소해야 한다고 하고, 한 분은 개발자를 믿어야 한다고 하며, 또 한 분은 개발자는 신경 끄고 즐겜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스튜디오의 모든 이들을 자신의 침묵 속으로 끌어들인다.)
윤선생: 저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왜 우리는 처음부터, 이 세계의 ‘개발자’가 ‘선하기만’ 할 것이라고, 혹은 ‘선해야만’ 한다고 가정하는 겁니까?
(그의 질문에 패널들은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그것은 그들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전제를 뒤엎는 질문이다.)
윤선생: 여러분, 가장 완벽한 백신은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깨끗하고 안전한 실험실에서 만들어집니까? 아닙니다. 가장 완벽한 백신은, 가장 치명적이고 강력한 바이러스를 직접 다루고, 그것을 약화시키고, 그 본질을 이해하는 위험한 과정을 통해서만 탄생합니다. 바이러스 없는 백신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 세계는, 우리가 ‘악(惡)’이라고 부르는 이 모든 고통과 부조리는, 더 위대하고 완전한 ‘선(善)’을 탄생시키기 위해 개발자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거대한 ‘면역 실험실’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버그’라고 부르는 그것이, 사실은 시스템 전체를 더 높은 차원으로 진화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바이러스’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는 이제 더 깊은 심연으로 들어간다. 그의 눈빛은 직관과 환상으로 빛난다.)
윤선생: 더 나아가 봅시다. 어쩌면 문제는 더 근원적인 곳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개발자 자신이, 선과 악, 빛과 어둠을 모두 품고 있는 존재라면?
여러분, 그림자 없는 빛을 본 적이 있습니까? 빛이 강렬할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지는 법입니다. 어쩌면 이 세계의 창조주는, 플로티누스가 말하는 저 멀리 있는 고요한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끝없이 빛과 어둠이 투쟁하고, 사랑과 분노가 뒤엉켜 폭발하며, 그 고통스러운 변증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알아가는, 거대하고도 역동적인 ‘심연’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부조리는, 신의 실수가 아니라, 신 자신의 고통스러운 ‘탄생의 기록’인 셈입니다. 우리가 겪는 이 모든 악(惡)은, 어쩌면 신이 스스로의 어두운 본성을 우리라는 거울을 통해 들여다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진짜 질문은 이것입니다. “개발자는 선한가, 악한가?”가 아니라, “우리는 이 거대한 신의 드라마 속에서, 과연 어떤 역할을 맡은 배우인가?” 우리는 그저 그의 선함을 찬양하는 엑스트라인가? 그의 실수를 비난하는 비평가인가? 아니면… 그의 어둠과 빛, 그 모든 것을 껴안고 함께 춤을 추며, 그의 자기 완성을 돕는 공동 창조자인가?
(윤선생의 말이 끝나자, 스튜디오에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고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네 개의 길은 하나의 물음 앞에서, 이제 더 이상 평행선이 아니라, 서로를 비추고 서로를 침식하며 하나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제2라운드: 현실의 문제 - ‘헬조선’은 실재하는가?
ROUND 2-1. 진행자 이수진의 질문
(1라운드의 폭풍 같은 토론이 남긴 지적인 여운이 스튜디오를 감싼다. 잠시 숨을 고르던 진행자 이수진이 패널들을 향해 다시 입을 연다. 그녀의 손에는 시청자들의 실시간 댓글이 올라오고 있는 태블릿 PC가 들려 있다.)
이수진: 네, 정말 숨 막히는 1라운드였습니다. 신의 본질에 대한 네 분의 깊이 있는 통찰,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바로 지금, 저희 방송 채팅창은 그야말로 불이 나고 있습니다. 제가 그중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이디 ‘퇴근하고싶다’ 님의 댓글입니다.
(배경 스크린에 댓글 내용이 크게 떠오른다: "결국 다 뜬구름 잡는 소리. 당장 다음 달 카드값과 미친 집값이 현실인데, 신이 선하든 악하든 무슨 소용입니까? 제발 먹고사는 얘기 좀 합시다!")
이수진: (댓글을 읽은 후, 진지한 표정으로) 어쩌면 이 댓글이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의 가장 솔직한 목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른바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시대. 김박사님, 이 생생한 절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라운드에서 말씀하신 ‘망겜’이라는 진단이 바로 이런 현실을 두고 하신 말씀이겠지요?
ROUND 2-2. 김박사와 이선생의 격돌
김박사: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습니다, 이수진 아나운서. 저 댓글이야말로, 제가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이유입니다. 철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저 고통의 근원을 파헤치는 칼날이어야만 합니다.
(그는 이선생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이전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져 있다.)
김박사: 이선생님께서는 아까 ‘관점’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고 하셨죠. ‘힐링 어드벤처’를 선택할 수 있다고요. 참으로 아름답고, 또 참으로… 무책임한 말씀입니다.
저 댓글을 쓰신 분에게 “선생님,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꿔보세요. 세상은 당신 마음의 거울입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평생을 성실하게 일해도 서울에 작은 아파트 한 채 마련할 수 없는 청년에게, N포 세대가 되어버린 젊은이들에게, 그것이 과연 위로가 될까요?
저것이 바로 현실입니다. ‘수저계급론’과 ‘부동산 불패 신화’는 개인의 노력이나 마음가짐 따위로는 결코 부술 수 없는, 이 시스템의 견고하고 악의적인 ‘설계’입니다. 태어나는 순간 누구는 강남의 펜트하우스에서 시작하고, 누구는 반지하 월세방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공정한 게임입니까? 이것은 명백한 ‘고인물’ 서버이며, 후발주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랭커가 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이선생님, 당신의 ‘마음 챙김’과 ‘긍정의 힘’은, 결국 이 구조적인 악(惡)을 개인의 심리적인 문제로 치환시켜 버리는, 아주 세련된 형태의 ‘지적인 기만’ 아닙니까? 시스템의 문제를 개인의 ‘노오력’ 부족으로 돌리는 지배계급의 논리와 무엇이 다릅니까?
이선생: (김박사의 공격적인 질문에도,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한다)
김박사님, 아주 아픈 지적이십니다. 그리고 그 지적에 담긴 분노에 깊이 공감합니다. 물론입니다. 저 역시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불평등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외면하자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박사님, 질문을 한번 바꿔보겠습니다. 박사님의 말씀처럼 이 시스템이 그토록 완벽한 감옥이라면, 어째서 그 감옥 안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겁니까? 똑같은 흙수저로 태어나, 똑같은 반지하에서 시작했지만, 어떤 청년은 좌절하고 세상을 비관하는 길을 선택하는 반면, 어떤 청년은 그 좌절을 딛고 일어나 마침내 자신의 길을 만들어내는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는 마치 강의를 하듯,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이선생: 외부 환경 탓만 하는 것은 가장 쉽고, 가장 달콤한 정신적 ‘도피’입니다. ‘세상이 이 모양이라서’, ‘부모님이 물려준 게 없어서’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한 모든 책임을 외부로 떠넘기고 ‘나는 피해자다’라는 편안한 역할 뒤에 숨을 수 있게 됩니다.
박사님께서는 이 세계를 ‘망겜’이라고 하셨죠. 저는 이렇게 비유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컴퓨터의 ‘운영체제(OS)’와 같습니다. 아무리 최신 고사양 게임이 출시되어도, 내 컴퓨터의 운영체제가 윈도우 98이라면 그 게임은 돌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컴퓨터는 버벅대고 다운되어 버리겠죠.
‘헬조선’이라는 현실이 바로 그 최신 고사양 게임입니다. 수많은 정보와 기회, 그리고 그만큼의 위험과 경쟁이 공존하는 복잡한 게임이죠. 이 게임을 낡고 비관적인, 바이러스 먹은 운영체제로 돌리려 하니 당연히 힘든 겁니다. 남 탓, 세상 탓만 하는 것은, 낡은 컴퓨터로 게임이 안 돌아간다고 게임 개발사만 욕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말하는 ‘마음 챙김’과 ‘생각의 힘’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현실이라는 게임을 제대로 플레이하기 위해, 먼저 나 자신의 ‘운영체제’를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하고, 불필요한 악성코드를 제거하는 가장 근본적인 작업입니다. 당신의 운영체제를 업데이트하지 않고, 어떻게 세상이라는 게임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ROUND 2-3. 최목사의 개입
(개인의 의지와 시스템의 구조라는,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두 개의 평행선이 팽팽하게 맞서는 순간. 진행자 이수진이 개입하려던 찰나, 최목사가 조용히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는다. 그의 표정에는 두 사람의 논쟁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지점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최목사: (두 사람을 향해 진심 어린 어조로) 두 분의 논쟁, 정말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한 분은 거대한 ‘시스템’을 말씀하시고, 다른 한 분은 그 안의 ‘개인’을 말씀하시는군요. 하지만 두 분 모두, 우리가 잊어버린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놓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시스템과 개인이라는 양 극단 사이에서, 그 둘을 이어주는 따뜻한 다리, 바로 ‘공동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눈빛으로 말을 잇는다.)
최목사: 여러분, IMF 외환위기 시절을 기억하십니까? 국가 시스템은 부도났고, 수많은 가장들이 직장에서 쫓겨나 개인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김박사님의 논리대로라면, 그것이야말로 완벽한 ‘망겜’의 시나리오였죠. 이선생님의 논리대로라면, 각자도생하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했습니까? 우리는 ‘금 모으기 운동’을 했습니다. 장롱 속에 있던 돌 반지, 결혼반지를 들고나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줄을 섰습니다. 실직한 아버지를 위해 온 가족이 허리띠를 졸라맸고, 이웃들은 서로에게 밥 한 끼라도 나누며 함께 울어주었습니다.
무너진 개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날카로운 시스템 비판이나 세련된 자기계발 서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곁에서 내 손을 잡아주고, 나의 고통에 함께 울어주는 ‘이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헬조선’이라 부르는 이 현실의 가장 큰 비극은, 경제적 불평등이나 치열한 경쟁이 아닙니다. 진짜 비극은, 우리가 더 이상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각자의 섬에 갇혀버린 ‘공동체의 붕괴’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함께 금을 모으지 않습니다. 오히려 옆집 사람이 무슨 코인으로 대박이 났는지, 무슨 주식으로 쪽박을 찼는지를 염탐하며 서로를 시기하고 조롱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문제는 시스템도, 개인의 마음가짐도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ROUND 2-4. 윤선생의 비유와 질문
(최목사의 진심 어린 호소에 스튜디오는 잠시 숙연해진다. 공동체의 붕괴라는 그의 진단은, 개인의 성공과 시스템의 모순이라는 기존의 프레임을 넘어서는 깊은 울림을 준다. 그때, 윤선생이 마치 이 모든 논의를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가려는 듯, 자신의 스마트폰을 조용히 들어 올린다.)
윤선생: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참 신기한 물건입니다. 이 작은 상자 하나로, 저는 지구 반대편의 친구와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고, 인류가 쌓아 올린 거의 모든 지식을 손가락 하나로 검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를 하나로 연결하는 위대한 발명품이죠. 천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싸늘한 표정으로 다시 말한다.)
윤선생: 그런데 바로 이 물건 때문에, 아이들은 거북목이 되고, 사람들은 가짜뉴스에 선동되며, 우리는 1분 1초도 쉬지 못하고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립니다. SNS 속 타인의 삶과 나를 비교하며 끝없는 불행에 빠져들기도 하죠. 이것은 우리를 고립시키고 통제하는 가장 작고 완벽한 감옥입니다. 지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다른 세 패널을 천천히 둘러본다.)
윤선생: 제가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 스마트폰이라는 기술 자체는 선한 겁니까, 악한 겁니까?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윤선생: 대답하기 어렵겠죠. 기술 자체에는 선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용하는 인간의 내면에 따라, 천국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지옥의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가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이 현실 또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이 현실은 그 자체로 지옥도, 천국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의 내면 풍경이 그대로 투영된, 거대한 ‘스크린’과 같습니다.
내 안에 지옥이 들끓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불의와 부조리만을 보며 이곳을 ‘헬조선’이라 부를 것입니다 (김박사를 보며). 내 안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은, 세상의 모든 가능성과 희망을 보며 이곳을 ‘기회의 땅’이라 부르려 노력하겠지요 (최목사와 이선생을 보며).
하지만 만약, 이 둘이 본래 하나라면 어떨까요? 어둠이 있어야 빛이 의미를 갖고, 실패가 있어야 성공이 가치를 갖듯이, 이 ‘헬조선’이라는 지옥 같은 현실이야말로, 우리 영혼이 진정한 천국을 창조해낼 수 있는 유일한 재료이자 무대가 아닐까요?
우리는 지금, 시스템을 욕할 것인가, 내 마음을 닦을 것인가, 공동체를 회복할 것인가를 두고 다투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진짜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지금, 이 ‘헬조선’이라는 거대한 스크린 위에, 내 영혼의 어떤 영화를 상영하고 있는가?”
제3라운드: 해법의 문제 - 그래서, 우리는 내일 무엇을 해야 하는가?
ROUND 3-1. 진행자 이수진의 최종 질문
(2라운드의 치열한 공방이 남긴 흥분과 성찰의 공기가 스튜디오를 감싼다. 진행자 이수진은 잠시 숨을 고르며, 태블릿 PC에 쏟아지는 시청자들의 반응을 살핀다. 이윽고 그녀는 결심한 듯, 진지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패널들을 향해 마지막 라운드의 시작을 알린다.)
이수진: 네, 정말 뜨거운 토론입니다. ‘헬조선’이라는 현실을 두고 시스템의 문제인지, 개인의 관점의 문제인지, 혹은 공동체의 붕괴인지, 나아가 우리 내면이 투영된 스크린이라는 말씀까지 나왔습니다. 아마 많은 시청자분들께서 머릿속이 복잡해지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3라운드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그녀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마치 TV 너머의 한 사람에게 직접 말을 걸 듯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수진: 어젯밤에도 야근을 하고, 오늘 아침에도 만원 지하철에 시달리며 겨우 출근해서, 지금 막 퇴근한 평범한 직장인이 있다고 상상해 보겠습니다. 그는 이 방송을 보며 ‘내 얘기 같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지쳤습니다. 철학은 너무 멀고, 구원은 너무 거창하게 들립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 내일 아침,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작지만 구체적인 ‘삶의 솔루션’일 것입니다.
자, 이제 마지막 라운드입니다. 내일 아침 출근해야 하는 이 평범한 직장인에게, 네 분께서는 각자 어떤 솔루션을 제안하시겠습니까?
ROUND 3-2. 네 개의 솔루션, 그리고 상호 논박
(이수진의 질문에, 네 명의 패널들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지금까지의 거대 담론을 한 사람의 구체적인 삶으로 응축시켜야 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입을 여는 것은, 언제나 공동체의 회복을 강조해온 최목사다. 그는 이선생을 먼저 바라보며, 그의 해법이 가진 한계를 지적하는 것으로 자신의 제안을 시작한다.)
최목사: (진심 어린 우려의 표정으로 이선생을 향해) 이선생님, 저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자기 성찰’과 ‘내면의 힘’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깊이 존중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주일 아침, 당신의 이웃과 함께 예배하고 봉사하십시오라고 말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선생님의 ‘자기계발’ 솔루션은, 이 지친 직장인에게 또 다른 ‘업무’를 할당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출근길에 명상하고, 점심시간에 책을 읽고, 퇴근 후에 또 무언가를 배우라니요. 그것은 결국 ‘너 혼자 더 강해져서 이 지옥 같은 경쟁에서 살아남으라’는 말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것은 결국 더 치열한 경쟁을 부추기는, 또 다른 형태의 ‘이기심’을 세련되게 포장한 것은 아닙니까?
진정한 평화와 구원은 ‘나’를 채울 때가 아니라, ‘나’를 비우고 내어줄 때 찾아옵니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는 고독한 섬이 되지 마십시오. 당신의 주말 아침, 그 귀한 시간을 잠시만 떼어내어, 당신보다 더 아픈 이웃을 위해 교회의 무료 급식소에서 밥을 퍼주거나, 독거노인의 집을 청소해주십시오. 그 속에서 당신은, 백 권의 자기계발서가 결코 줄 수 없는 살아있는 기쁨과 연결의 감각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나를 비우고 타인을 섬길 때 찾아옵니다.
이선생: (최목사의 말에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응수한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하지만, 그 안에는 단단한 논리가 서려 있다.)
목사님,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한 그 말씀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리고 그 진심에 깊이 동의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바로 서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남을 온전히 도울 수 있겠습니까? 제 안에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남에게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최목사를 향해 정중하지만 분명하게 반론을 제기한다.)
이선생: 저는 그 직장인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10분간 명상하고, 점심시간에 책을 읽으십시오.”
왜냐하면, 맹목적인 공동체는 때로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식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라는 이름 아래, 개인의 고유한 생각과 감정을 억압하고, 집단의 논리에 순응하도록 강요하는 폭력적인 공동체도 세상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이 제대로 된 치유 없이 봉사활동에 나선다면, 그것은 타인을 돕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확인하고 위로받으려는 또 다른 이기심의 발로일 수 있습니다.
먼저 당신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출근길 소음 속에서 10분만이라도 눈을 감고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십시오. 당신을 괴롭히는 생각들을 그저 구름처럼 흘려보내십시오. 점심시간, 동료들과 남의 험담을 하는 대신, 위대한 철학자의 책 한 페이지라도 읽으십시오. 그렇게 당신의 내면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고요하고 단단한 중심을 세워야 합니다.
당신이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당신의 마음이 평화로워져야, 당신은 비로소 타인에게 진정한 평화를 전해줄 수 있습니다. 당신이 먼저 행복해져야, 당신의 행복이 세상을 향해 흘러넘칠 수 있습니다.
김박사: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마침내 참을 수 없다는 듯 냉소를 터뜨린다.)
하… 정말 감동적인 설교와 강연의 향연이군요. 한 분은 교회로, 다른 한 분은 명상센터로 사람들을 이끌고 계십니다. 두 분 다 틀렸습니다.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인다.)
김박사: 예배와 명상은, 이 부조리한 시스템에 당신을 순응하게 만드는 가장 세련되고 효과적인 ‘정신적 아편’일 뿐입니다. 최목사님의 봉사활동은, 가난한 이들에게 ‘이것이 당신의 운명이니 받아들이고, 작은 위안에 만족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선생님의 명상은, ‘시스템은 바꿀 수 없으니, 그냥 당신의 마음이나 닦아서 편안해지라’고 속삭이는 것과 같습니다. 두 분 모두, 노예에게 노래를 가르쳐주며 ‘자, 이제 너의 삶이 조금은 즐거워졌지?’라고 말하는 친절한 노예주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는 이제 카메라를 향해, 마치 대중을 선동하듯 힘주어 말한다.)
김박사: 저는 그 직장인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회사의 부당함에 대해 동료들과 토론하고, 당신의 돈과 시간을 빼앗는 소비 자본주의의 광고를 차단하십시오.”
아침에 일어나 명상할 시간에, 당신의 노동력을 어떻게 착취하고 있는지에 대한 책을 읽으십시오. 점심시간에 자기계발서 읽을 시간에, 당신과 똑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와 커피 한잔하며 ‘이 월급으로 대체 어떻게 살란 말인가’라는 현실적인 대화를 나누십시오. 주말에 교회 가서 봉사할 시간에, 당신의 감정을 조종하고 불필요한 소비를 부추기는 SNS와 유튜브 채널을 모두 ‘차단’하고, 당신의 지갑과 시간을 지키십시오!
구원은 당신의 마음이나 영혼을 바꾸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구원은 당신을 둘러싼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먼저 당신이 갇힌 감옥의 구조를 똑바로 파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노래를 배우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윤선생: (세 사람의 격렬한 토론을 지켜보던 윤선생이, 마침내 고개를 젓는다. 그의 표정에는 그 모든 해법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 서려 있다.)
모두… 도망치고 있군요.
(그의 한마디에 스튜디오의 모든 소음이 멎는다. 모두가 그를 주목한다.)
윤선생: (차례로 세 사람을 바라보며) 최목사님은 ‘이웃’에게로 도망치고 있고, 이선생님은 ‘내면’으로 도망치고 있으며, 김박사님은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적에게로 도망치고 있습니다. 모두가 진짜 마주해야 할 단 하나를 교묘하게 피해가고 있군요.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는 이제 이수진 아나운서를 지나, 카메라 너머의 시청자를 직접 응시하며 말한다.)
윤선생: 저는 그 지친 직장인에게, 그 어떤 것도 ‘하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이렇게 묻겠습니다.
“오늘 밤, 당신을 가장 괴롭히는 그 감정을 똑바로 마주하고, 그것에 대해 시(詩)를 한 편 써보십시오.”
당신을 괴롭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회사 상사에 대한 살의에 가까운 분노입니까? 동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질투입니까? 미래에 대한 밑바닥 없는 불안입니까?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지독한 자기혐오입니까?
좋습니다. 피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똑바로 느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시를 쓰든, 그림을 그리든, 노래를 만들든, 형체를 주십시오. 당신의 어둠에게 목소리를 주십시오.
당신의 상처와 결핍이야말로, 당신을 진정으로 성장시킬 유일한 스승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어둠 속에, 당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빛의 씨앗이 숨겨져 있습니다.
어쩌면, 그 모든 시스템 비판과 자기계발, 그리고 공동체 활동이, 실은 당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이 무섭고 추악한 ‘그림자’와 마주하기가 두려워서 만들어낸, 가장 그럴듯하고 고상한 ‘알리바이’는 아니었을까요?
(윤선생의 마지막 질문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모든 이의 가장 깊은 곳을 찌르는 날카로운 송곳처럼 스튜디오의 공기를 가른다. 네 개의 솔루션은 서로를 반박하며,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물음표가 되어 시청자 앞에 던져졌다.)
클로징: 당신의 채널, 당신의 선택
4-1절. 네 명의 논객, 마지막 한 마디
(무대는 제3라운드의 마지막, 윤선생의 날카로운 질문이 남긴 깊고 서늘한 침묵에 잠겨 있다. 네 명의 패널들은 잠시 동안 각자의 사유에 잠긴다. 진행자 이수진이 이 침묵을 깨고,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마지막을 알린다.)
이수진: 네… “우리의 모든 활동이, 실은 내면의 그림자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알리바이는 아니었을까요?” 윤선생님의 마지막 질문이 스튜디오뿐만 아니라, 지금 이 방송을 보시는 많은 분들의 가슴에 깊이 박혔을 것 같습니다.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이 이제 거의 다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청자분들께 꼭 전하고 싶은 각자의 마지막 메시지를 한 말씀씩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김박사님부터 시작해 주시죠.
(김박사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마지막까지 냉소적인 지성의 자세를 잃지 않고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지만, 그 안에는 기묘한 해방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김박사: 저는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위로는 마약일 뿐입니다. 대신 저는 당신에게 ‘자각’을 권합니다. 당신이 매일 아침 마시는 커피 한 잔, 당신이 무심코 클릭하는 유튜브 영상, 당신이 월급날을 기다리며 견뎌내는 그 모든 노동이, 실은 당신을 이 거대한 시스템의 부품으로 만들기 위한 정교한 장치임을 똑바로 보십시오. 당신의 욕망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입된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나십시오. 잠에서 깨어난 자는 더 이상 꿈속의 행복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꿈이 꿈이었음을 알 뿐입니다. 그것은 고독한 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그 고독 속에서만 시작됩니다. 당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의심하십시오. 특히 당신 자신에게 가장 달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가장 먼저 의심하십시오.
(최목사는 김박사의 말을 듣고,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그는 두 손을 모으고, 진심 어린 목자의 마음으로 시청자들을 바라본다.)
최목사: 저는 ‘의심’이 아니라 ‘신뢰’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세상은 의심의 눈으로 보면 한없이 비정하고 차가운 곳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절망의 순간 속에서도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넘어진 당신을 일으켜주는 친구의 손길 속에서, 지친 당신을 위해 저녁을 차려주는 가족의 사랑 속에서, 그리고 당신의 아픔에 함께 울어주는 이웃의 눈물 속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혼자서 강해지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혼자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당신의 지성과 교만을 내려놓고, 당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을, 그리고 당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돌아오십시오. 우리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선생은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시청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듯 따뜻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선생: 저는 ‘의심’이나 ‘신뢰’보다, 먼저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존재입니다. 당신의 내면에는 이 세상의 어떤 문제보다도 더 큰 힘과 지혜가 잠들어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려 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을 바꾸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대신, 당신 자신을 바꾸는 것에 집중하십시오. 당신의 생각을 바꾸면, 당신의 감정이 바뀌고, 당신의 행동이 바뀌며, 마침내 당신의 세상이 바뀔 것입니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말해주십시오. “나는 내 삶의 창조자다.” 작은 성공을 축하하고, 실패를 통해 배우십시오. 당신의 삶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조각하는 조각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당신의 손에 모든 가능성이 쥐어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윤선생이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예측 불가능한 광기가 아닌,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고 고요한 지혜로 가득 차 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하지만, 스튜디오 전체를 압도한다.)
윤선생: 저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하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당신은 너무나 많은 것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잠시 멈추기를 권합니다.
당신을 성공으로 이끄는 저 빛나는 목소리들, 당신을 분노하게 만드는 저 비판의 목소리들, 당신을 위로하는 저 따뜻한 목소리들. 그리고 그 모든 목소리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불안에 떠는 당신 자신의 목소리까지.
그 모든 소음을 잠시 멈추고, 그 모든 것의 가장 깊은 곳, 그 무엇도 아닌 침묵의 심연으로 내려가 보십시오. 그곳에는 당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정답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곳에, 당신의 질문 자체가 바로 당신이라는, 당신의 고통 자체가 바로 구원이었다는, 눈부신 역설이 빛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상처를… 축복하십시오.
4-2절. 진행자 이수진의 마무리
(네 명의 논객이 각자의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고, 무대에는 깊은 여운이 감돈다. 진행자 이수진은 잠시 동안 그 여운을 음미하듯 눈을 감고 있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제 진행자의 역할이 아닌, 이 모든 질문을 함께 겪어낸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진솔한 표정이 담겨 있다.)
이수진: 네 명의 현자, 네 개의 불꽃. 그리고 네 개의 길.
김박사님은 우리에게 ‘저항하는 삶’을, 최목사님은 ‘함께하는 삶’을, 이선생님은 ‘성장하는 삶’을, 그리고 윤선생님은 ‘마주하는 삶’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어떤 길은 차갑고 고독하며, 어떤 길은 뜨겁고 소란스럽습니다. 어떤 길은 고요한 이성을 요구하고, 어떤 길은 격렬한 고통을 통과하라 말합니다. 무엇이 정답일까요? 어쩌면 정답은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리모컨 모양의 소품을 들어 보인다.)
이수진: 우리는 매일 수많은 채널 속에서 살아갑니다.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뉴스 채널,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예능 채널,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종교 채널, 그리고 내면의 성장을 약속하는 자기계발 채널까지. 우리는 어떤 채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울고, 웃고, 분노하고, 또 위로받습니다.
하지만 오늘 네 분의 현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습니다. 그 수많은 채널을 돌리고 있는 그 손의 주인은, 대체 누구냐고 말입니다.
어떤 채널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오늘 밤, 당신의 삶이라는 리모컨은 오직 당신의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사피엔스 오디세이>,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수진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스튜디오의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네 명의 패널은 각자의 생각에 잠긴 채 희미한 실루엣으로 남는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서막에 나왔던 네 가지 다른 선율-첼로, 오르간, 플루트, 바이올린-이 하나의 신비로운 화음으로 어우러지며 장엄하게 울려 퍼진다.)
(완전한 어둠. 침묵.)
[막 내림]
2. 고대
『영원의 서재, 네 개의 불꽃』
부제: 신, 세계, 그리고 구원의 길에 대한 네 현자의 변증
[등장인물]
발렌티누스 (Valentinus): 2세기 영지주의 사상가. 세상은 무지한 창조주가 만든 감옥이며, 오직 비밀스러운 ‘지식(Gnosis)’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비극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지식인.
이레나이우스 (Irenaeus): 2세기 리옹의 주교. 영지주의에 맞서 정통 기독교 교리를 수호한 교부. 창조주와 구원주가 한 분의 선한 신임을 강조하며, ‘믿음’과 ‘교회’를 통한 구원을 역설한다. 신념에 찬 목자.
플로티누스 (Plotinus): 3세기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모든 것의 근원인 초월적 ‘하나(The One)’로부터 세계가 유출되었다고 보며, 철학적 ‘사유’를 통한 영혼의 상승과 복귀를 가르친다. 고요하고 이성적인 철학자.
야콥 뵈메 (Jacob Boehme): 16-17세기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 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둠과 빛의 투쟁, 즉 ‘변증’을 통해 우주와 인간의 비밀을 탐구한다. 격정적이고 환상에 가득 찬 구두 수선공.
서막: 네 개의 길, 하나의 물음
(무대는 완전한 어둠에 잠겨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깊고 고요한 침묵만이 흐른다. 이윽고,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듯한, 성별도 나이도 가늠할 수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진다.)
나래이터:
인간의 영혼은 어둠 속에서 태어난다.
자신이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존재라는 거대한 미궁에 던져진다.
어둠 속에서 영혼은 빛을 갈망하고, 침묵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절규한다.
그 절규에 응답하듯, 영겁의 세월을 가로질러 네 개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희미한 빛이 무대 네 군데를 차례로 비춘다. 빛이 비출 때마다 다른 음색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비극적이고 낮은 첼로 선율이 깔린다.)
나래이터:
첫 번째 불꽃은 슬픔 속에서 타오른다.
그것은 이 세계가 잘못 만들어진 감옥이며, 우리는 고향을 잃고 유배된 신의 파편이라 속삭인다.
저 멀리 참된 아버지가 계시나, 우리는 무지한 창조주의 쇠사슬에 묶여 신음하고 있다고.
이 불꽃은 오직 비밀스러운 ‘지식’의 열쇠를 가진 자만이 감옥 문을 열고 빛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노래한다.
그것은 유배된 왕의 불꽃이다.
(장엄하고 힘찬 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진다.)
두 번째 불꽃은 반석 위에서 타오른다.
그것은 이 세계를 만드신 이도, 우리를 구원하실 이도 오직 한 분의 선한 목자라고 선언한다.
세상은 감옥이 아니라 그 분의 사랑이 담긴 작품이며, 역사는 우리를 그 분의 모습으로 빚어가는 거대한 계획이라고.
이 불꽃은 흩어진 양 떼를 하나의 우리로 모으는 ‘믿음’의 횃불을 들어 올리라 외친다.
그것은 길을 제시하는 목자의 불꽃이다.
(맑고 투명한 플루트 소리가 들려온다.)
세 번째 불꽃은 고요한 수면 위에서 타오른다.
그것은 이 모든 현상 세계가 저 너머에 있는 완벽한 ‘하나’의 희미한 그림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영혼은 그 근원의 빛을 잊고 그림자들의 춤에 취해있다고.
이 불꽃은 감각의 소란을 잠재우고, 고요한 ‘사유’의 계단을 한 걸음씩 밟아 올라 마침내 빛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그것은 그림자를 넘어 실체를 보는 철학자의 불꽃이다.
(천둥 소리와 함께 격정적인 바이올린 연주가 이어진다.)
네 번째 불꽃은 폭풍의 심장에서 타오른다.
그것은 신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 그 빛의 근원 안에 이름 없는 어둠과 거룩한 분노가 함께 있다고 절규한다.
이 세계는 바로 그 신의 내면적 투쟁이 밖으로 터져 나온 장엄하고도 고통스러운 드라마라고.
이 불꽃은 우리 또한 그 신성한 ‘변증’의 일부가 되어, 내 안의 어둠과 빛을 모두 껴안고 불타오를 때 비로소 신을 이해하게 되리라 예언한다.
그것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신비가의 불꽃이다.
(모든 소리가 멎고, 무대는 다시 완전한 어둠에 잠긴다.)
나래이터:
네 개의 길, 네 개의 불꽃, 네 개의 진리.
그들은 서로를 이단이라 부르고, 서로를 어둠이라 부르며 천년의 시간 속을 흘러왔다.
하지만 오늘 밤, 이곳 영원의 서재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한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그들이 과연 답해야 할 질문은 서로 다른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 모든 길은, 단 하나의 거대한 물음 앞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 오솔길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신과 세계, 그리고 인간.
그 슬프고도 찬란한 관계에 대한,
하나의 물음.
(침묵. 이윽고 희미한 빛이 서서히 무대를 밝히기 시작하며, 제1막으로 이어진다.)
제1막: 영원의 서재, 네 개의 그림자
1장: 만남
[무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무화(無化)된 듯한 ‘영원의 서재’.
서가(書架)는 끝을 알 수 없이 위, 아래, 그리고 양옆으로 뻗어 나가, 마치 지성(知性) 그 자체가 만들어낸 기하학적 심연을 보는 듯하다. 서가에는 인류가 기록한 모든 형태의 지식이 꽂혀 있다. 파피루스 두루마리, 점토판, 양피지 코덱스, 금속에 새긴 서판, 심지어는 빛으로 이루어진 채 허공에 떠 있는 정체불명의 텍스트까지.
무대 중앙에는 거대하고 낡은 떡갈나무로 만들어진 독서대가 하나 놓여 있다. 조명은 특정 광원 없이, 서재 전체에서 은은하고 부드러운 빛이 스며 나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공기는 낡은 종이 냄새와 먼지 냄새, 그리고 미세한 오존 냄새가 뒤섞여, 숨 막힐 듯한 지식의 무게와 영겁의 시간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모든 것이 정지해 있는 절대적인 침묵의 공간.
(막이 오르면, 무대는 텅 비어 있다. 잠시 동안 이 절대적인 침묵과 정적이 흐른다. 이윽고, 무대 뒤편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인영(人影)이 그림자가 분리되듯 스르르 걸어 나온다. 그는 발렌티누스다. 그의 걸음에는 소리가 없고, 그의 존재는 주변의 빛을 흡수하는 듯하다. 그는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학자처럼 보이는, 정교하게 주름 잡힌 튜닉을 입고 있다.)
(발렌티누스는 서재를 둘러본다. 그의 눈에는 경외감이나 기쁨이 아닌, 깊고 차가운 슬픔과 권태가 서려 있다. 그는 이 모든 지식이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는 헛된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는 한 서가로 다가가, 인간의 해부학에 관한 두꺼운 양피지 책을 꺼내 든다. 그는 책장을 넘기다, 정교하게 그려진 인체의 근육과 뼈 그림을 보며 희미한 경멸의 미소를 짓는다. 마치 아름답게 만들어진 감옥의 설계도를 보는 듯한 눈빛이다. 그는 책을 아무렇게나 다시 꽂아 넣고, 서가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무언가 다른 것, 이 서재의 공식적인 목록에는 없을 법한 ‘숨겨진 책’을 찾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
(그때, 무대의 다른 쪽에서 단호하고 위엄 있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이레나이우스가 등장한다. 그는 발렌티누스처럼 어둠에서 스며 나온 것이 아니라, 마치 처음부터 존재했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처럼 당당하다. 그는 리옹의 주교임을 상징하는 소박하지만 권위 있는 복장을 하고 있으며, 그의 손에는 양치기의 지팡이처럼 보이는 목자장(牧者杖)이 들려 있다.)
(이레나이우스는 서재의 풍경보다, 먼저 어둠 속에 서 있는 발렌티누스를 발견한다. 그의 눈빛은 즉시 날카로워진다. 양 떼의 우리 주변을 맴도는 이리의 그림자를 발견한 목자의 경계심이다. 그는 발렌티누스가 아무렇게나 꽂아 넣은 책을 다시 꺼내, 각을 맞추어 반듯하게 정리해 넣는다. 그의 모든 행동에는 무질서를 바로잡고, 주어진 권위를 수호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는 발렌티누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서재의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와 굳건히 선다. 두 인물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잠시 후, 무대 중앙의 거대한 독서대 옆, 은은한 빛기둥이 비추는 공간에 세 번째 인물이 조용히 나타난다. 그는 플로티누스다. 그는 어디선가 걸어 들어온 것도, 어둠에서 나타난 것도 아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으나, 방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고요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로마 시대 철학자의 수수한 토가를 입고 있으며, 그의 시선은 발렌티누스나 이레나이우스를 향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신의 내면, 혹은 저 높은 곳의 어떤 관념을 응시하는 듯, 깊은 사색에 잠겨 있다.)
(플로티누스는 서가에 꽂힌 책들, 즉 현상 세계의 복잡한 지식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오직 독서대 위를 비추는 순수한 빛줄기만을 바라본다. 그는 손을 뻗어 그 빛을 만지려는 듯하지만, 이내 그 빛 또한 궁극의 광원이 아닌, 더 높은 곳에서 온 그림자임을 깨달은 듯 손을 거둔다. 그의 존재는 뜨거운 논쟁이나 신념의 대립이 아닌, 초월적인 관조와 이성적인 상승을 상징한다. 그는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것을 자신과는 무관한,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들의 싸움처럼 관망할 뿐이다.)
(네 번째 인물의 등장은 앞선 셋과는 전혀 다르다. 특별한 조명이나 움직임도 없는데, 무대 전체의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서가의 책들이 저절로 작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야콥 뵈메가 무대 구석의 낡은 의자에 앉은 채로 ‘발견’된다. 그는 투박한 가죽 앞치마를 두른 구두 수선공의 모습이다. 그는 책을 읽거나 사색에 잠겨 있지 않다. 그는 마치 자신의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격렬한 폭풍의 소리를 듣는 듯,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다.)
(뵈메는 고개를 들어 다른 세 사람을 바라본다. 그의 눈은 교육받은 자의 지성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환상을 직접 목격한 자의 광기와 고뇌로 불타오르고 있다. 그는 신의 사랑뿐만 아니라, 신의 분노와 어둠까지도 온몸으로 겪어낸 사람처럼 보인다. 그의 투박한 존재는 영지주의자의 지적인 우월감, 교부의 교리적 권위, 철학자의 이성적 초월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진리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의 등장은 정립된 사상들의 고요한 대립에, 예측 불가능한 신비주의의 불꽃을 던져 넣는다.)
(마침내 네 명의 인물이 모두 무대에 자리한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발렌티누스는 이레나이우스를 ‘자신이 탈출해야 할 감옥의 간수’처럼 바라보고, 플로티누스와 뵈메를 ‘자신과 마찬가지로 감옥에 갇힌, 그러나 아직 깨어나지 못한 영혼’처럼 연민 어린 눈으로 훑어본다.)
(이레나이우스는 발렌티누스를 ‘자신이 반드시 쳐부숴야 할 이단’으로 노려보고, 플로티누스와 뵈메를 ‘진리의 빛으로 인도해야 할, 길 잃은 양’으로 여긴다.)
(플로티누스는 다른 세 사람을 ‘영혼의 여정에서 만날 수 있는 서로 다른 단계의 미망(迷妄)’으로 관조한다. 발렌티누스는 물질에 대한 과도한 혐오에, 이레나이우스는 인격신에 대한 유치한 믿음에, 뵈메는 통제되지 않은 격정에 사로잡혀 있다고 분석한다.)
(뵈메는 다른 세 사람을 본다. 그의 눈에는 경멸이나 연민, 분석이 없다. 오직 그들 모두의 영혼 안에서도 자신이 겪고 있는 것과 똑같은 ‘어둠과 빛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하는 듯한, 깊은 공감과 고통의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네 개의 그림자. 네 개의 불꽃. 네 개의 세계. 영원의 서재에 모인 그들은, 이제 곧 시작될 장대한 대화를 예감하며, 침묵 속에서 서로의 깊이를 가늠한다. 무대 중앙의 빛이 서서히 밝아지며, 그들의 첫 번째 목소리를 재촉한다.)
2장: 자기소개: 나는 누구인가
1절. 영지주의자의 탄식
(시간과 공간을 알 수 없는 ‘영원의 서재’. 발렌티누스, 이레나이우스, 플로티누스, 야콥 뵈메, 네 명의 인물이 각자의 자리에 서 있거나 앉아 있다. 1장 마지막의 길고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네 개의 세계는 서로를 응시할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는다.)
(마침내, 가장 깊은 어둠과 닮아있는 인물, 발렌티누스가 그 침묵을 깬다. 그는 고개를 들어 서재의 무한한 서가들을 둘러본다. 그의 입가에는 경외가 아닌, 깊은 조소와 연민이 뒤섞인 미소가 걸려 있다.)
발렌티누스: (나지막하지만, 서재 전체를 울리는 듯한 목소리로)
결국 이곳이로군. 모든 지식이 모여 있다는 영원의 서재. 인류가 쌓아 올린 모든 생각의 기념비이자, 모든 기록의 무덤. 참으로 장관이야. (그는 한 서가로 다가가, 법률에 관한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 들고 펼쳐본다.) 신들의 법, 인간들의 법… 감옥의 규칙을 이토록 상세하게 기록해 놓다니. (두루마리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다.)
(그는 다른 서가로 이동하여, 역사에 관한 거대한 책을 쓰다듬는다.)
발렌티누스: (책을 열어보지도 않은 채) 그리고 이것은… 기나긴 질병의 기록이겠지. 망각에서 망각으로 이어지는, 의미 없는 전쟁과 잠시의 평화. 더 깊은 잠에 빠지기 위해 꾸는 꿈들의 목록. (그는 천문학에 관한 책을 가리킨다.) 저것은 또 어떤가. 별들의 운행을 기록한 책인가? 감옥의 벽이 얼마나 두껍고, 창살이 얼마나 정교하게 배열되어 있는지를 측량한 기록일 뿐. 이 모든 지식은 결국 이 감옥을 더욱 감옥답게 만드는 장식에 불과하다.
(그는 무대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와, 다른 세 사람을 차례로 둘러본다. 그의 눈빛은 동등한 대화 상대를 보는 눈이 아니라,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동료 수감자들을 바라보는 눈빛이다.)
발렌티누스: 그대들은 아직도 이 장엄한 풍경에 감탄하고 있는가? 이 지식의 무게에 경외를 느끼는가? 그렇다면 그대들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나의 이름은 발렌티누스. 나는 알렉산드리아의 학자였고, 로마의 교사였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나의 진정한 이름은 ‘유배된 자’이며, 나의 고향은 이곳이 아니다.
나의 고향은, 그대들의 빈약한 언어로는 감히 형용할 수 없는 빛의 세계, ‘플레로마(Pleroma)’, 즉 충만의 세계다. 그곳에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심연의 아버지, ‘비토스(Bythos)’께서 영원한 침묵, ‘시게(Sige)’와 함께 존재하신다. 그분으로부터 빛나는 신적 존재들, ‘아이온(Aeon)’들이 쌍을 이루어 발출(發出)되었고, 그들은 완벽한 조화 속에서 아버지를 찬미하며 존재했다. 그것이 바로 본래의 세계, 진정한 실재다.
그런데 비극이 시작되었다. 가장 어리고 지혜로운 아이온, ‘소피아(Sophia)’가 감히 아버지의 위대함을 직접 이해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열망은 분수를 넘었고, 그로 인한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그녀는 플레로마의 경계 밖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깊은 슬픔에 잠긴다.)
발렌티누스: 빛의 세계 밖, 어둠과 공허 속에서 소피아의 불완전한 열망은 끔찍한 형상을 낳았다. 그것은 사자의 머리를 한 뱀의 모습을 한, 오만하고 무지한 존재. 바로 이 물질세계의 창조주, ‘데미우르고스(Demiurge)’, 너희 유대인들이 ‘야훼’라 부르는 신이다!
(그는 이레나이우스를 날카롭게 쳐다본다.)
발렌티누스: 그 미숙한 창조주는 자신이 유일한 신이라 착각한 채, 플레로마의 그림자를 흉내 내어 이 불완전하고 추악한 물질 우주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천사들, ‘아르콘(Archon)’들과 함께 진흙으로 인간을 빚었지.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 소피아가, 자신의 피조물 속에 감추어진 빛의 불꽃을 되찾기 위해 몰래 그에게 속삭였다는 것을. 데미우르고스는 소피아의 계략에 빠져, 자신이 플레로마로부터 훔쳐 온 신성한 불꽃, ‘프네우마(Pneuma)’의 작은 파편을 흙으로 빚은 인간 아담에게 불어넣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진실이다! 우리는 저 무지한 창조주가 만든 육체(Soma)와 저급한 영혼(Psyche) 속에, 빛의 세계에서 온 신성한 불꽃(Pneuma)이 갇혀있는, 끔찍하고도 영광스러운 존재다. 이 세계는 우리의 집이 아니라 감옥이며, 역사는 구원의 드라마가 아니라 기나긴 망각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저 너머 빛의 세계에서 온 구원자, 그리스도의 부름을 듣는 것이다. 그는 이 세계의 신이 만든 율법이나 믿음을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신성의 불꽃을 일깨우는 비밀의 ‘지식’, 즉 ‘그노시스(Gnosis)’를 전해주러 온 것이다.
그노시스는 책을 읽어 배우는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상기(想起)’다. 내가 누구였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기억해내는 것. 이 기억을 되찾은 영혼, 즉 ‘영지주의자(Gnostic)’는 더 이상 이 감옥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는 육체의 죽음을 통해 마침내 이 어둠의 세계를 탈출하여, 일곱 행성을 지배하는 아르콘들의 방해를 뚫고, 마침내, 마침내 빛의 고향 플레로마로 돌아가 자신의 짝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발렌티누스는 긴 독백을 마치고, 다시 다른 세 사람을 차례로 응시한다. 그의 눈빛에는 이제 슬픔이 아닌, 확신에 찬 자의 오만함과 연민이 가득하다.)
발렌티누스: (이레나이우스를 향해) 그대, 목자여. 그대는 내가 탈출해야 할 이 감옥의 간수를 아버지라 부르며 숭배하고 있구나. 그대의 ‘믿음’은 그저 아름다운 쇠사슬일 뿐이다.
(플로티누스를 향해) 그대, 철학자여. 그대는 이 감옥 벽에 비친 희미한 빛의 그림자를 측정하고 분석하며 그것을 진리라 부르는구나. 그대의 ‘이성’은 감옥의 크기를 재는 자에 불과하다.
(야콥 뵈메를 향해) 그리고 그대… 투박한 영혼이여. 그대는 감옥의 토대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있구나. 하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숨결이 아니라, 이 낡은 감옥이 무너지는 소리임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린다.)
발렌티누스: 나의 이름은 발렌티누스. 내가 아는 유일한 진실은 이것이다.
우리는, 집에 있는 것이 아니다.
2절. 목자의 증언
(발렌티누스의 마지막 말, “우리는, 집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차가운 선언이 서재의 침묵 속으로 스며든다. 그의 오만한 연민이 다른 세 사람을 향해 뻗어 나갈 때, 지금까지 굳건히 서서 그를 지켜보던 이레나이우스가 손에 쥔 목자장을 바닥에 ‘쿵’ 하고 내리찍는다. 그 소리는 작지만 단호하여, 서재 전체의 공기를 뒤흔들고 발렌티누스의 독백이 만들어낸 우울한 분위기를 단번에 깨뜨린다.)
이레나이우스: (분노와 연민이 뒤섞인,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집이 아니라고? 뱀의 혓바닥처럼 교활한 말이로다! 늑대가 양의 우리를 보며 ‘여기는 너희 집이 아니다’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구나. 양들을 꾀어내어 저 어둡고 굶주린 자신의 소굴로 끌고 가려는 속셈이지.
(그는 발렌티누스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선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단순한 경계가 아닌, 이단을 향한 거룩한 분노와 그가 미혹하는 영혼들에 대한 애끓는 슬픔으로 불타오른다.)
이레나이우스: 그대의 이름이 발렌티누스라 했던가. 아, 그 이름을 나는 기억한다. 그대의 꿀 바른 말과 복잡한 계보 놀음이 로마와 갈리아의 순진한 영혼들을 얼마나 혼란에 빠뜨렸는지를 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대는 그대의 지식이 깊다고 자랑하지만, 그대의 지식은 병든 나무의 뿌리와 같아, 파고들수록 진리의 샘에서 멀어져 교만의 독수(毒水)만을 빨아들일 뿐이다.
나의 이름은 이레나이우스. 서머나의 위대한 순교자 폴리카르포스의 제자였고, 이제는 갈리아 리옹의 주교로서 그리스도의 양 떼를 돌보는 자다. 나의 스승 폴리카르포스는 사도 요한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으니, 나의 믿음은 그대의 공상 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직접 맡기시고, 그 사도들이 피로써 증언하며 대를 이어 우리에게까지 전해주신, 명백하고 살아있는 진리다.
(그는 목자장을 들어 발렌티누스가 말한 ‘데미우르고스’의 개념을 정면으로 겨눈다.)
이레나이우스: 그대는 감히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를 무지하고 오만한 존재라 모독하는구나! 그대의 눈이 어두워, 아버지와 아들을 둘로 나누고, 창조주와 구원주를 서로 다른 신이라 말하는도다. 잘 들어라, 혼돈의 자식아! 하늘과 땅을 만드신 창조주 야훼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기록하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을 보시며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계는 실수가 아니며 감옥은 더더욱 아니다! 이 세계는 그분의 사랑과 지혜가 담긴 위대한 작품이며, 우리 인간은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다.
물론, 우리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를 짓고 죽음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작품을 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더욱 당신의 모습으로 완성시키기 위한 기나긴 ‘교육의 계획’을 시작하셨다. 구약의 율법과 예언자들은 모두 그 계획의 일부였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힘과 확신에 가득 찬다.)
이레나이우스: 마침내 때가 차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Logos)께서 직접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분은 그대가 말하는 것처럼 비밀스러운 ‘지식’을 속삭이러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아담이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회복하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해 오셨다!
이것이 바로 ‘총괄갱신(Recapitulation)’ 또는 재현이라고 하는 위대한 신비다! ‘총괄갱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다시 머리가 되어 모든 것을 요약하고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첫 사람 아담이 자신의 삶의 정점에서 불순종으로 모든 것을 망쳐놓았기에,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모든 삶의 단계, 그러니까, 갓난아이 시절부터, 소년기, 청년기를 거쳐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친히 다시 살아내심으로써, 그 모든 단계를 거룩하게 하시고 아담의 실패를 되돌려 놓으셨다. 아담이 나무 아래서 저지른 불순종의 매듭을,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라는 나무 위에서 순종으로 풀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영혼만의 도망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 전체를, 우리의 연약한 육체까지도 포함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머리 안에서 하나로 모아 회복하고 완성하는, 장엄한 회복의 드라마다!
그분은 아담이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영혼뿐만 아니라 이 비천한 육체까지도 자신의 거룩한 삶과 죽음과 부활 안에서 회복하고 새롭게 하셨다!
구원은 소수의 선택된 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비밀스러운 암호 따위가 아니다! 구원은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길이며, 그 길은 오직 하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겸손한 ‘믿음’뿐이다.
그대는 교회의 가르침을 감옥의 규칙이라 조롱했지. 그러나 교회는 감옥이 아니라, 거친 풍랑 속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노아의 방주’다. 이 방주 밖에는 오직 혼돈과 죽음뿐이다.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앙의 규범(Rule of Faith)’을 굳건히 지키고 있으며, 성경의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너희와 같은 이단에 맞서 진리를 수호하는 기둥이자 터전이다.
(이레나이우스는 다른 두 사람, 플로티누스와 뵈메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낮추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단호한 권위가 실려 있다.)
이레나이우스: (플로티누스를 향해) 그대, 철학자여. 그대의 이성은 존경할 만하나, 이성만으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소. 철학은 신앙의 시녀가 되어야지, 주인이 되려 해서는 안 되오.
(야콥 뵈메를 향해) 그대, 고뇌하는 영혼이여. 그대의 열정은 뜨거우나, 개인적인 환상은 교회의 공적인 가르침 안에서 검증받아야만 하오. 그렇지 않으면 그 불꽃은 그대 자신을 태우고 말 것이오.
(그는 다시 발렌티누스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의 눈빛에는 이제 분노가 아닌, 길 잃은 양을 향한 목자의 깊은 슬픔이 담겨 있다.)
이레나이우스: 나의 소명은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진리를 ‘보존’하는 것이다. 나는 목자다. 나의 의무는 늑대의 달콤한 속삭임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양 떼를 지키고, 그들을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가, 즉 성경의 말씀과 교회의 성례전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의 집이 이곳이 아니라고 했지. 맞다. 우리의 진정한 집은 이곳이 아니다. 우리의 본향은 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나라다.
하지만 발렌티누스여, 우리는 그 집에 도둑처럼 몰래 담을 넘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친히 보내주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그분이 열어주신 정문을 통해 당당하게 들어가는 것이다.
그 문은 ‘지식’의 문이 아니라, ‘믿음’의 문이다.
3절. 철학자의 시선
(이레나이우스의 힘찬 선언, “그 문은 ‘믿음’의 문이다”라는 말이 서재의 기둥들 사이를 맴돌다 잦아든다. 발렌티누스는 경멸 어린 침묵으로, 이레나이우스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본다. 그들의 격렬한 대립이 만들어낸 뜨거운 공기는, 그러나 세 번째 인물에게는 닿지 않는 듯하다.)
(지금까지 독서대 옆의 빛줄기만을 응시하던 플로티누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잔잔한 호수에 이는 첫 파문처럼, 느리고 우아하다. 그는 발렌티누스의 절망과 이레나이우스의 열정을 바라보지만, 그의 눈에는 동의나 반박이 아닌,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의 근원을 분석하는 듯한, 지극히 고요하고 이성적인 시선이 담겨 있을 뿐이다.)
플로티누스: (조용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소란스럽구나. 그림자들이 서로를 향해 소리치고 있군. 한 그림자는 자신이 갇힌 동굴이 사악한 감옥이라 절규하고, 다른 그림자는 동굴을 만든 주인이 선하다고 찬미한다. 하지만 그대들 모두, 자신이 여전히 동굴 안에 있다는 사실은 잊은 듯하다.
(그는 서재의 무한한 책들을 향해 손을 휘젓는다. 그의 동작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있지 않다.)
플로티누스: 이 모든 기록들. 이 모든 이야기들. 신들의 계보와 인간들의 역사. 이것들은 모두 저 너머에 있는 ‘진정한 실재’가 이 낮은 세상의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대들은 그 그림자를 두고 그것이 선한지 악한지를 다투고 있구나. 참으로… 덧없는 논쟁이다.
나의 이름은 플로티누스. 나는 이집트의 리코폴리스에서 태어나, 위대한 암모니우스 사카스의 제자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웠으며, 로마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허나 나의 진정한 스승은 플라톤이시며, 나의 진정한 고향은 이 감각의 세계가 아닌, 순수한 ‘예지(叡智)의 세계’다.
(그는 발렌티누스와 이레나이우스를 차례로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그들의 주장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이 나오게 된 근본적인 오류를 지적하는 의사의 시선과 같다.)
플로티누스: 그대들은 모두 ‘신’에 대해 말하지만, 그대들의 신은 너무나 인간을 닮았다. 어떤 신은 실수하고 질투하며(발렌티누스의 소피아와 데미우르고스), 어떤 신은 계획하고 교육하며 분노한다(이레나이우스의 야훼). 그러나 진정한 근원은, 모든 것의 시작은 그러한 속성들 너머에 있다.
모든 것의 저 너머에는 형용할 수도, 사유할 수도 없는 궁극의 실재, ‘하나(το Εν, The One)’가 있을 뿐이다. ‘하나’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분은 ‘선’이라는 개념 자체를 낳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분은 ‘존재’라는 개념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생각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그분은 완벽한 충만 그 자체이며,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침묵이며, 모든 소리의 근원이다.
이 세계는 그 ‘하나’가 의지를 가지고 ‘창조’한 것이 아니다. 또한 실수나 타락으로 인해 ‘잘못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이 세계는 완벽하게 충만한 ‘하나’로부터 빛이 태양에서 흘러나오듯, 열이 불에서 뿜어져 나오듯, 물이 샘에서 넘쳐흐르듯, 필연적이고 자연스럽게 ‘유출(Emanation)’된 것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빛줄기를 가리키며, 유출의 단계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플로티누스: 보라. 가장 먼저 ‘하나’로부터 ‘지성(Νους, Nous)’이 유출되었다. 지성은 ‘하나’를 관조하며, 그 안에서 모든 이데아, 즉 만물의 영원한 원형들을 사유한다. 이곳이 바로 진정한 실재의 세계이며, 플라톤께서 말씀하신 이데아의 세계다.
그 다음, 지성으로부터 ‘영혼(Ψυχή, Psyche)’이 유출되었다. 영혼은 위로는 지성을 관조하며, 아래로는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워 이 물질세계를 만들고 질서를 부여한다. 이 세계를 운행하는 ‘세계 영혼’이 있으며, 우리 각자의 몸 안에 깃든 ‘개별 영혼’이 있다.
그리고 마침내, 영혼의 힘이 가장 희미해진 곳, 빛이 가장 멀리 닿아 어둠과 섞이는 그 경계에, ‘물질(υλη, Hyle)’이 나타난다.
(그는 발렌티누스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플로티누스: 그러므로 그대, 발렌티누스여. 물질은 그대가 말하는 것처럼 사악한 어떤 힘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악의 원리가 아니라, ‘선의 결핍’이다. 빛이 없는 상태를 우리는 어둠이라 부르지만, 어둠은 그 자체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물질은 ‘하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기에 가장 불완전하고, 가장 어두울 뿐이다. 이 세계는 감옥이 아니라, 아름다운 원형의 가장 희미하고 흐릿한 ‘모상(模像)’일 따름이다.
(그는 다시 이레나이우스를 향해 말한다.)
플로티누스: 그리고 그대, 이레나이우스여. 그대의 말처럼 이 세계가 선한 신의 작품이라는 것에는 일리가 있소. 왜냐하면 이 세계는 선의 근원인 ‘하나’로부터 흘러나온 것이기 때문이오. 하지만 이 세계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소. 그것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향을 가리키는 이정표이자, 우리가 건너야 할 강물일 뿐이오. 그림자를 숭배하느라 그림자를 그린 실체를 잊어서는 안 되지.
우리의 영혼은 본래 저 높은 예지의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신이 만들어낸 이 물질세계의 아름다움과 다양성에 매혹된 나머지, 자신의 신성한 기원을 잊어버리고 이 육체라는 그림자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것이 우리의 ‘타락’이다. 그것은 어떤 신화적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영혼 자신의 선택과 망각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비밀스러운 지식(Gnosis)에 있지도, 역사적 사건에 대한 믿음(Pistis)에 있지도 않다. 구원은 우리 영혼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는 길, 즉 ‘철학(Philosophia)’에 있다.
그 길은 ‘상승’의 길이다. 우리는 먼저 덕(德)을 실천하여 육체적 욕망의 소란을 잠재워야 한다. 그 다음, 감각의 세계가 주는 덧없는 정보들에서 눈을 돌려, 변치 않는 수학적, 기하학적 원리들을 사유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형상과 개념을 넘어서서, 순수한 ‘사유’를 통해 예지의 세계, 즉 ‘지성’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여정의 마지막, 아주 드물게, 이성의 빛마저 꺼지고 모든 것이 사라진 지고의 순간에, 우리의 영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경 속에서 근원인 ‘하나’와 신비로운 ‘합일(Henosis)’을 경험하게 된다. 그 순간, ‘나’는 사라지고 오직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플로티누스는 말을 마치고 다시 침묵에 잠긴다. 그의 표정에는 어떤 자부심이나 격정이 없다. 오직 자신이 설명한 진리의 체계가 그러할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고요하고 이성적인 확신만이 깃들어 있다.)
플로티누스: 나의 이름은 플로티누스.
나는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나는 원리를 사유한다.
나는 구원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나의 본향으로 돌아간다.
나의 길은 믿음의 길이 아니라, 앎의 길이다.
그러나 그 앎의 끝에는 모든 앎이 사라지는,
눈부신 무지(無知)가 있을 뿐.
4절. 신비가의 불꽃
(플로티누스의 마지막 말, “눈부신 무지(無知)”라는 역설이 서재의 고요함 속으로 스며든다. 발렌티누스는 경멸적으로, 이레나이우스는 의심스럽게, 플로티누스는 초연하게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들의 논쟁은 마치 세 개의 닫힌 원처럼, 서로를 맴돌 뿐 결코 만나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그때, 구석의 의자에서 머리를 감싸 쥔 채 신음하던 야콥 뵈메가 갑자기 벌떡 일어선다. 그의 움직임은 격렬하고 갑작스러워, 다른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한다. 그는 투박한 구두 수선공의 모습 그대로지만, 그의 눈은 마치 불타는 석탄처럼 이글거리고 있다. 그는 고통과 황홀이 뒤섞인 표정으로, 앞선 세 사람의 말을 모두 부정하듯 허공을 향해 절규하듯 외친다.)
야콥 뵈메: (거칠고 떨리는 목소리로)
아, 헛되고 헛되도다! 그대들의 말이여! 빛과 어둠, 선과 악, 존재와 비존재! 그대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나뉘어 있었다고 말하는구나! 한쪽은 이 세계가 어둠의 산물이라 저주하고, 다른 쪽은 빛의 작품이라 찬미하며, 또 다른 쪽은 그저 빛이 옅어진 그림자일 뿐이라 말한다. 아무도, 아무도 보지 못하는구나! 빛이 태어나기 위해 반드시 어둠이 있어야만 했다는 것을! 선이 자신을 알기 위해 반드시 악이라는 거울을 필요로 했다는 것을!
(그는 가슴을 치며, 마치 자신의 안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전쟁을 묘사하듯 격정적으로 말을 잇는다.)
야콥 뵈메: 나의 이름은 야콥 뵈메. 나는 독일의 작은 마을 괴를리츠에서 구두를 만드는 비천한 장인이다. 나는 그대들처럼 고대의 언어를 배우지도, 철학의 책들을 탐독하지도 못했다. 나의 스승은 책이 아니었다. 나의 스승은 ‘고통’이었고, 나의 교실은 ‘신의 심연’이었다!
어느 날, 내가 작업실에서 주석 그릇에 비친 햇빛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나의 영혼의 문이 열렸다. 나는 모든 것의 근원, 모든 존재의 뿌리를 보았다. 나는 그대들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하나’를 본 것이 아니다. 나는… 나는… 불타는 분노와 사무치는 고뇌, 끝없는 갈망으로 몸부림치는 거대한 ‘의지’를 보았다!
(그는 마치 환상에 다시 사로잡힌 듯, 눈을 크게 뜨고 허공을 응시한다.)
야콥 뵈메: 모든 것의 시작 이전, 빛도 어둠도 있기 이전, 그곳에는 오직 ‘운그룬트(Ungrund)’, 즉 ‘근거 없는 심연’만이 있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며(Nichts), 동시에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 그 자체였다. 이름도, 의지도, 성질도 없는 영원한 고요. 하지만 그 고요 속에서, 그 ‘무(無)’ 속에서, 스스로를 알고자 하는 거대한 갈망, 즉 ‘최초의 의지’가 태어났다.
그 의지는 가장 먼저 ‘아니오!’라고 외쳤다. 그것은 스스로를 붙잡고, 안으로 수축하며, 자신을 어둡고 단단하게 만드는 첫 번째 성질, 즉 ‘혹독함’이었다. 이것이 바로 신의 분노, 아버지의 원리다!
그러자 그 혹독한 수축에 대한 반작용으로, 밖으로 터져 나가려는 두 번째 성질,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것은 쓰디쓴 고통이자, 영원한 불안이었다.
그리고 이 두 힘, 안으로 움켜쥐려는 힘과 밖으로 터져나가려는 힘이 서로 충돌하며, 끔찍한 고뇌의 수레바퀴, 즉 세 번째 성질, ‘불안의 회전’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지옥의 불꽃이며, 모든 존재가 겪는 고통의 근원이다! 신은, 스스로 신이 되기 위해, 가장 먼저 자기 자신 안에서 지옥을 창조하셨다!
(그의 목소리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무대의 조명이 불안하게 깜빡이는 듯하다.)
야콥 뵈메: 그러나 보라! 이 어둠과 고통의 절정 속에서, 거대한 기적이 일어났다! 세 개의 어두운 성질이 자신들의 끔찍한 상태를 자각하는 순간, 그 고통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섬광(Blitz)’이 터져 나왔다! 어둠이 스스로를 앎으로써 빛이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 번째 성질, ‘사랑의 불꽃’이며, 아들의 원리다!
이 빛 속에서, 어둠의 분노는 비로소 거룩한 힘으로 변화되었다. 고통의 외침은 다섯 번째 성질인 ‘소리’, 즉 창조의 말씀 ‘로고스’가 되었고, 혼돈의 움직임은 여섯 번째 성질인 ‘지혜로운 질서’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 일곱 번째 성질, 즉 ‘신의 나라’, 영광스러운 ‘천국’이 펼쳐진 것이다!
이 세계는, 이 자연 만물은, 바로 이 신의 내면에서 벌어진 일곱 단계의 장엄하고도 고통스러운 드라마가 밖으로 드러난 ‘서명(Signatur)’이다! 저 돌멩이의 단단함 속에는 아버지의 첫 번째 혹독함이, 저 식물의 끈질긴 생명력 속에는 아들의 사랑의 빛이 새겨져 있다. 인간의 분노와 사랑, 절망과 희망은 모두 신 자신의 양면적인 본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는 다른 세 사람을 향해, 불타는 눈으로 돌아선다.)
야콥 뵈메: (발렌티누스를 향해) 그대, 영지주의자여! 그대는 이 세계를 만든 창조주가 무지하다고 말했지. 그렇다! 그는 처음에는 무지했다! 그는 자신의 어두운 본성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고통을 통해 스스로를 깨달아 빛을 낳았다! 그대는 감옥만을 볼 뿐, 그 감옥이 어떻게 빛을 낳는 자궁이 되는지를 보지 못하는구나!
(이레나이우스를 향해) 그대, 목자여! 그대는 선하고 사랑이신 창조주를 말했지. 그렇다! 신은 선하시다! 하지만 그대는 그 선하심이 어떤 맹렬한 분노의 불꽃을 뚫고 태어났는지를 감히 직시하지 못한다! 그대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얼굴만을 보려 할 뿐, 그분의 등 뒤에 있는 타오르는 진노의 불을 외면하고 있다!
(플로티누스를 향해) 그대, 철학자여! 그대는 고요한 ‘하나’로부터 빛이 흘러나왔다고 말했지. 아니다! 빛은 결코 고요하게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끔찍한 고통과 자기 분열이라는 대폭발 속에서, 피를 흘리며 태어났다! 그대는 저 멀리서 빛의 아름다움을 관조할 뿐, 그 빛을 낳은 불의 뜨거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구나!
(뵈메는 두 손을 가슴에 얹는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절규가 아닌, 깊은 신비와 하나가 된 자의 조용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야콥 뵈메: 나의 이름은 야콥 뵈메. 나는 학자가 아니며, 사제도, 철학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내 구두에 가죽을 꿰매듯, 신의 어둠과 빛을, 분노와 사랑을 내 영혼 안에서 하나로 꿰매려는 비천한 장인일 뿐이다.
나의 길은 이 어둠과 빛의 거룩한 전쟁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전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도록,
나 자신이 바로 그 전쟁터가 되는 것이다.
제2막: 신은 누구인가? - 감추어진 아버지, 선한 창조주, 혹은 스스로를 낳는 심연
1장: 논쟁의 시작: 창조주에 대한 물음
(제1막의 격렬했던 자기소개가 남긴 네 개의 서로 다른 진리의 향기가 공기 중에 섞이지 못한 채, 팽팽한 침묵이 흐른다. 발렌티누스는 여전히 경멸적인 시선으로 서재를 맴돌고, 이레나이우스는 목자장을 굳게 쥔 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서 있다. 플로티누스는 모든 현상 너머의 어떤 원리를 응시하는 듯 고요하며, 야콥 뵈메는 내면의 폭풍이 남긴 여진에 가늘게 몸을 떨고 있다.)
(고요를 먼저 깨는 것은 발렌티누스다. 그는 마치 지루한 연극의 다음 막을 재촉하는 배우처럼, 연민이 뒤섞인 눈으로 이레나이우스를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연다.)
발렌티누스: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그 안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숨겨져 있다)
선한 목자여. 그대의 신념에 찬 목소리는 참으로 우렁차더군. 마치 폭풍우 속에서 길 잃은 양 떼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그대는 그대의 신이 이 세계를 창조했으며, 그가 바로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아버지라고 말했지. 그대의 신념은 단순하고, 굳건하며, 아마도… 위안이 되겠지. 장님에게 자신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가 세상의 전부이듯.
(이레나이우스는 미동도 하지 않지만, 그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는다.)
발렌티누스:
하지만 목자여, 그대는 한 번이라도 물어본 적이 있는가? 그대가 그토록 찬미하는 그 창조주가, 실은 눈먼 장님이었다는 것을.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미숙하고 오만한 존재였다는 것을 말일세.
(발렌티누스는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오며, 마치 학생들에게 강의하듯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의 말투는 이제 조롱이 아닌, 비밀을 전수하는 자의 은밀한 우월감으로 가득 차 있다.)
발렌티누스:
내가 진실을 말해주지. 그대들이 창세기에서 읽는 그 신,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외쳤던 그 존재는, 결코 만물의 근원이 아니다. 그는 더 낮은 하늘의 지배자, ‘데미우르고스 (Demiurge)’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그를 ‘얄다바오트 (Yaldabaoth)’, 즉 ‘혼돈의 아들’이라 부르기도 하지.
그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저 높은 빛의 세계, 플레로마의 가장 낮은 아이온이었던 ‘소피아’의 불완전한 열망이 공허 속으로 흘러넘쳐, 마치 유산된 태아처럼 끔찍한 형상으로 잉태된 존재.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자신 위에 완전한 빛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는 휘장 아래의 어둠 속에서 태어나, 오직 자신이 본 그림자들을 흉내 내어 이 조잡하고 고통스러운 물질 우주를 만들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지 못한 채, 오만하게 선언했지. “내가 곧 신이요,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어찌나 어리석고 가련한 독백인가. 그는 마치 동굴의 가장 깊은 곳에 사는 벌레가, 동굴 전체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것과 같았다.
(그는 손을 들어 서재 전체를, 나아가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듯한 몸짓을 한다.)
발렌티누스:
보라! 이 모든 것이 그의 작품이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감옥의 벽, 운명과 율법이라는 보이지 않는 쇠사슬. 그리고 우리의 육체, 이 피와 점액으로 이루어진 더러운 옷까지. 그는 이 모든 것을 만들어놓고 스스로 만족하며, 자신의 피조물에게 맹목적인 복종과 찬양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그대가 믿는 선한 창조주의 실체다!
참된 아버지는, 진정한 신은, 저 너머에 계신다. 그분은 이 더러운 물질세계의 창조에 일절 관여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심연 (Bythos)이며, 형언할 수 없는 빛이시다. 그분은 이 세계에 대해 침묵하고 계시며, 오직 당신으로부터 흘러나온 신성한 불꽃의 파편들이 이 어둠 속에서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계실 뿐이다.
(발렌티누스는 다시 이레나이우스에게로 시선을 고정한다. 그의 눈에는 이제 연민마저 사라지고, 서늘한 진실을 고하는 자의 냉정함만이 남아 있다.)
발렌티누스:
그러니 목자여, 내가 다시 묻겠다. 그대는 대체 누구를 경배하고 있는가? 그대는 어째서 양들에게, 이 감옥을 설계한 무지한 간수를 ‘아버지’라 부르며 무릎을 꿇으라고 가르치는가? 그대의 구원주 예수는 바로 그 간수의 아들인가, 아니면 이 감옥의 존재조차 모르시는 저 멀리 계신 참된 아버지의 사자인가? 그대들의 성경은 이 둘을 하나인 것처럼 교묘하게 뒤섞어 놓았지만, 빛과 어둠이 하나일 수 없듯, 그 둘은 결코 하나일 수 없다.
자, 대답해보라. 그대의 신은 누구인가?
(발렌티누스의 질문이 서재의 침묵을 날카롭게 가른다. 목자장을 쥔 이레나이우스의 손이 분노로 하얗게 변하고, 그의 입술이 무언가 반박하려 들썩인다. 플로티누스는 고요히 눈을 감는다. 마치 어린아이들의 신화 다툼을 듣는 노인처럼, 그의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없이 오직 지적인 분석의 빛만이 감돈다. 야콥 뵈메는 고통스러운 동시에 황홀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무지한 창조주… 고통 속에서 태어난… 아, 그렇구나…” 그는 발렌티누스의 말 속에서, 자신이 본 신의 심연 속 어둠의 투쟁과 맞닿는 어떤 파편을 발견한 듯하다.)
(모든 시선이 이제 이레나이우스에게로 향한다. 발렌티누스가 던진 논쟁의 불씨는 이제 막 타오르기 시작했다.)
2장: 이레나이우스의 반박
(발렌티누스의 마지막 질문, “그대의 신은 누구인가?”라는 말이 서재의 기둥들 사이를 뱀처럼 휘감는다. 목자장을 쥐고 있던 이레나이우스의 손이 분노로 하얗게 변하고, 그의 입술이 가늘게 떨린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의 떨림이 아니라, 거룩한 진리가 모독당하는 것을 목격한 자의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의 떨림이다.)
(그는 발렌티누스의 교만하고 차가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불타는 눈으로 그를 정면으로 마주 본다. 그는 목자장을 바닥에 다시 한번 ‘쿵!’ 하고 내리찍는다. 그 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크고 단호하여, 마치 흔들리는 믿음의 땅을 다지는 듯한 울림을 지닌다.)
이레나이우스: (처음에는 낮고 위엄 있게, 그러나 점점 더 열정적인 웅변으로)
나의 신이 누구냐고 물었는가? 그대의 혀는 꿀을 바른 칼과 같고, 그대의 지식은 거미줄처럼 정교하나, 그 안에는 오직 죽음의 독만이 흐르는구나! 그대는 어둠 속에서 속삭이며, 빛의 자녀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구나.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속삭였던 바로 그 목소리를 내가 지금 듣고 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며, 창조주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를!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발렌티누스가 펼쳐놓은 모든 논리를 하나씩 격파하기 시작한다.)
이레나이우스:
그대는 감히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둘로 나누었지. 하나는 무지하고 다른 하나는 선하며, 하나는 이 세계의 간수이고 다른 하나는 저 너머의 구원자라고. 이 얼마나 끔찍한 신성모독인가! 그대의 눈이 교만으로 멀어, 하나의 진리를 둘로 쪼개는구나!
잘 들어라, 뱀의 지혜를 뽐내는 자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야훼, 예언자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알리셨던 바로 그 창조주께서,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신 유일하고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고, 바로 그 아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다. 창조와 구원은 두 개의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사랑 이야기의 시작과 절정이다!
그대는 이 세계를 감옥이라 저주했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창조주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구나. 이 세계는 실수가 아니다! 이 흙과 물, 나무와 별들은 모두 선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닿은 작품이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성전이다! 물론, 인간의 죄로 인해 이 땅은 가시덤불을 내고 우리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대는 신의 가장 위대한 지혜를 보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벽하게 완성된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다. 그는 우리를 마치 갓난아이처럼, 미숙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만드셨다. 왜냐고? 진정한 사랑과 선함은, 강요된 완벽함 속에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과 성장의 과정 속에서만 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에 힘을 더하며)
이 세계는 감옥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단련하는 거대한 ‘훈련장’이다! 우리가 겪는 시련과 고통은, 우리를 파괴하기 위한 형벌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의지를 시험하고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기 위한 신의 교육이다. 갓난아이는 넘어져야만 걷는 법을 배우고, 근육은 찢어지는 고통을 겪어야만 더 강해지는 법이다. 우리의 영혼 또한 이 고통스러운 역사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사랑과 순종을 배워 신의 모습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자녀가 넘어진 놀이터를 저주하고 버리시는 분이 아니다. 그는 친히 그 놀이터로 내려와, 흙먼지를 뒤집어쓴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상처를 싸매주시는 분이다!
(이레나이우스의 목소리는 이제 설교의 절정에 이른다. 그의 손은 목자장이 아닌, 마치 십자가를 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이레나이우스:
바로 그 일을 위해, 말씀(Logos)이 육신이 되셨다! 그분은 그대가 말하는 것처럼 유령처럼, 그림자처럼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실제로 태어나셨고, 우리와 똑같이 먹고 마시며, 피 흘리고 고통받으셨다. 왜냐고? 첫 사람 아담이 나무(선악과)와 불순종으로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기에,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나무(십자가)와 순종을 통해 인류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바로 ‘총괄갱신 (Recapitulation)’의 위대한 신비다! 그분은 아담이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영혼뿐만 아니라 이 비천한 육체까지도 자신의 거룩한 삶과 죽음과 부활 안에서 회복하고 새롭게 하셨다!
그대는 구원이 비밀스러운 ‘지식(Gnosis)’을 통해 소수에게만 주어진다고 속삭였지. 이 얼마나 지독한 오만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골방에서 비밀스럽게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만인을 위해 일어난 공적인 사건이다! 구원은 인간의 머리로 깨닫는 오만한 지식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게 무릎 꿇는 ‘믿음(Pistis)’을 통해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대의 상상 속에서 피어나는 공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도들에게서 시작하여, 그들의 제자들에게로, 그리고 다시 그 제자들에게로 끊어짐 없이 이어져 내려온 ‘사도 전승(Apostolic Succession)’ 안에 굳건히 서 있다. 나는 내 스승 폴리카르포스에게서 들었고, 그는 사도 요한에게서 들었으며, 요한은 주님 품에 기대어 직접 그분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이 명백하고 공적인 계승의 사슬 앞에, 그대가 속삭이는 비밀의 계보는 얼마나 허약하고 초라한가!
(그는 서재 전체를 향해, 그리고 보이지 않는 양 떼를 향해 외친다.)
이레나이우스:
그러므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자는 이리저리 헤맬 필요가 없다. 진리는 교회 안에 있다!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이라는 반석 위에 세워졌으며, 성경이라는 기둥으로 지탱되고, 성령이라는 지붕 아래 보호받는 진리의 집이다. 이 집 밖에는 오직 혼돈과 분열, 그리고 늑대들의 거짓된 노래만이 있을 뿐이다!
(이레나이우스는 길고 열정적인 반박을 마치고, 숨을 고른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분노가 아닌, 진리를 수호하는 자의 확고한 평화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발렌티누스를 향해 마지막으로 말한다.)
이레나이우스:
나의 신은 누구냐고 물었지.
나의 신은 이 세계를 저주하는 그대의 ‘감추어진 아버지’가 아니다.
나의 신은 당신의 사랑하는 작품이 망가진 것을 슬퍼하시며, 친히 진흙탕으로 내려와 우리와 함께 우시는 ‘선한 창조주’시다.
나의 신은,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우리에 남겨두고 밤새도록 광야를 헤매는,
나의 목자시다.
3장: 플로티누스의 중재
(이레나이우스의 열정적인 증언이 끝나자, 서재 안에는 다시 한번 팽팽한 침묵이 흐른다. 발렌티누스는 그의 ‘믿음’을 경멸하고, 이레나이우스는 발렌티누스의 ‘지식’을 이단으로 규정한다. 두 개의 불꽃은 서로를 태울 듯 맹렬하게 타오르지만, 결코 섞이지 않는다. 그들의 논쟁은 더 이상 나아갈 길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하다.)
(그때, 지금까지 모든 것을 관조하던 플로티누스가 고요히 눈을 뜬다. 그는 마치 시끄러운 시장 한복판에서 홀로 깊은 사색에 잠겨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기로 결심한 현자와 같다. 그의 목소리는 두 사람의 격정을 잠재우는, 차갑고 맑은 샘물처럼 서재를 채운다.)
플로티누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어떤 감정도 싣지 않은 채)
그대들의 논쟁은 잘 들었소. 한 사람은 아버지가 둘이라고 말하고, 다른 한 사람은 아버지가 하나라고 주장하는군. 하지만 그대들 모두, 그대들이 말하는 그 ‘아버지’라는 존재를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소.
(그는 먼저 발렌티누스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플로티누스:
그대, 발렌티누스여. 그대는 그대의 신들에게 너무나 많은 감정을 부여했소. ‘소피아’는 분수를 넘는 열망에 사로잡혔고, ‘데미우르고스’는 무지와 오만에 빠져있다고 말이오. 실수하고, 질투하고, 자신의 작품을 뽐내는 존재. 그것이 어찌 만물의 근원일 수 있겠소? 그것은 그저 인간의 비극을 하늘에 투사한, 또 다른 신화에 지나지 않소.
(그는 이어서 이레나이우스를 향해 말한다.)
플로티누스:
그리고 그대, 이레나이우스여. 그대의 신 또한 마찬가지요. 그는 계획하고, 교육하며, 사랑하고, 또한 진노하는 존재요. 그는 당신의 양 떼를 돌보는 위대한 목자일지는 모르나, 모든 존재의 시작과 끝을 설명해야 하는 철학의 물음 앞에서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너무나… 인격적이오.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은, 결국 인간의 사유가 만들어낸 가장 정교한 우상일 뿐이오.
(플로티누스는 무대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온다. 그의 존재감은 논쟁의 열기를 식히고,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플로티누스:
그대들은 모두 ‘창조’라는 행위를 두고 다투고 있소. 마치 도공이 의지를 가지고 진흙으로 그릇을 빚듯이, 신이 의도적으로 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군. 발렌티누스는 그 도공이 솜씨 없는 자였다고 말하고, 이레나이우스는 그가 위대한 장인이었다고 주장할 뿐이오.
하지만 만약, 창조가 그런 의지적인 행위가 아니었다면 어찌하겠소?
모든 것의 저 너머, 그대들의 모든 신화와 신앙 너머에는, 우리가 어떤 이름으로도 부를 수 없고, 어떤 속성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궁극의 실재, ‘하나(το Εν, The One)’가 있을 뿐이오.
‘하나’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소. 그분은 ‘선’과 ‘악’이라는 개념 자체를 낳은 분이시기 때문이오. 그분은 존재하지도 않소. 그분은 ‘존재’라는 개념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분이시기 때문이오. 그분은 생각하지도, 원하지도 않소. 그분은 스스로 완벽한 충만 그 자체이며,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오. 그분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침묵이며, 모든 소리의 근원이오.
이 세계는 그 ‘하나’가 ‘만든’ 것이 아니오.
이 세계는 완벽하게 충만한 ‘하나’로부터, 빛이 태양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듯, 열이 불에서 저절로 뿜어져 나오듯, 물이 샘에서 저절로 넘쳐흐르듯, 필연적이고 자연스럽게 ‘유출(Emanation)’된 것이오.
(그는 허공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고, 그 원에서부터 빛이 퍼져나가는 듯한 손짓을 한다.)
플로티누스:
보시오. 가장 먼저 완벽한 ‘하나’로부터, 그 ‘하나’를 되돌아보는 첫 번째 사유, 즉 ‘지성(Νους, Nous)’이 유출되었소. 지성은 ‘하나’를 관조하며, 그 안에서 만물의 영원한 원형들, 즉 이데아들을 사유하오. 이곳이 바로 진정한 실재의 세계요.
그 다음, 지성으로부터 ‘영혼(Ψυχή, Psyche)’이 유출되었소. 영혼은 위로는 지성을 바라보며 질서를 갈망하고, 아래로는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워 이 물질세계를 만들고 시간 속에서 운행하게 하오.
그러므로 발렌티누스여, 그대가 말하는 ‘데미우르고스’는 사악하고 무지한 존재가 아니오. 그는 아마도 이 ‘세계 영혼’이 자신의 본성에 따라,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하여 물질에 질서를 부여하는 그 필연적인 과정을 그대들의 언어로 신화화한 것이겠지. 그는 악한 간수가 아니라,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성실한 건축가일 뿐이오.
또한 이레나이우스여, 그대의 창조주가 유일한 분이라는 말은 옳소. 왜냐하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라는 유일한 근원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오. 그러나 그 근원은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인격적으로 말을 걸거나, 역사 속에서 특정한 계획을 세우는 그런 분이 아니오. 그분은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초월적인 원리 그 자체요.
이 논쟁은 처음부터 잘못된 질문에서 시작되었소. ‘이 세계를 만든 신은 선한가, 악한가?’라고 물어서는 안 되오.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하오. ‘이 현상 세계는 궁극의 실재인 하나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빛의 근원에서 멀어질수록 빛이 희미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요. 그것은 태양의 잘못이 아니지 않소. 이 세계가 불완전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이 ‘하나’로부터 가장 멀리 유출된, 빛이 가장 희미해진 영역에 있기 때문이오.
그러니 그대들의 신화 다툼을 멈추시오. 감추어진 아버지도, 선한 창조주도, 그 모든 것은 결국 궁극의 ‘하나’를 인간의 언어로 더듬거리며 설명하려는 시도일 뿐. 진정한 철학자는 이야기의 진위를 다투는 대신, 그 모든 이야기가 가리키고 있는 저 너머의 침묵을 관조해야만 하오.
4장: 야콥 뵈메의 환상
(플로티누스의 마지막 말, “침묵을 관조해야만 하오”라는 말이 서재의 정적과 하나가 되는 순간, 구석에서 몸을 떨고 있던 야콥 뵈메가 마치 내면의 폭발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거친 신음 소리를 내뱉는다. 그의 눈은 감겨 있지만, 그의 온몸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과 사투를 벌이는 듯 경련하고 있다. 다른 세 사람은 놀라움과 당혹감 속에서 그를 바라본다.)
야콥 뵈메: (감긴 눈으로, 거의 울부짖듯이)
고요가 아니오! 침묵이 아니란 말이오! 아아, 철학자여… 그대의 ‘하나’는 얼마나 차갑고, 얼마나 멀리 있단 말인가! 그대는 저 하늘의 별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말하지만, 그 별이 태어나기 위해 어떤 맹렬한 불의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는 보지 못하는구나!
(그는 벌떡 일어서며, 마침내 눈을 뜬다. 그의 눈은 더 이상 인간의 눈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가장 깊은 심연, 그 창조의 고통과 영광을 직접 목격한 자의, 경외와 공포로 가득 찬 두 개의 불꽃이다. 그는 플로티누스의 이성적인 중재를 정면으로 거부하며, 서재 전체를 향해 자신의 환상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야콥 뵈메:
그대들은 모두 신을 ‘이미 완성된 존재’로 여기고 있소! 그래서 그대들의 질문은 언제나 ‘그는 선한가, 악한가?’, ‘그는 하나인가, 둘인가?’라는 어리석은 분별 놀음에 갇혀 있는 것이오.
아무도, 아무도 묻지 않는구나!
신은, 대체 어떻게, 신이 되셨는가?
(그의 외침은 서재의 모든 책들을 떨게 할 만큼 강력하다. 그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자신의 내면에서 본 것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야콥 뵈메:
들으시오! 모든 것의 시작 이전, 그대들이 말하는 빛도 어둠도, 존재도 비존재도 있기 이전, 그곳에는 오직 ‘운그룬트(Ungrund)’, 즉 ‘근거 없는 심연’만이 있었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며(Nichts), 동시에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영원한 가능성, 이름 없는 의지, 영원한 자유였소.
하지만 그 영원한 고요 속에서, 그 끝없는 자유 속에서, 스스로를 알고자 하는, 스스로를 붙잡아 느끼고자 하는 거대한 ‘갈망’이 태어났소. 그것은 마치 텅 빈 거울이 무언가를 비추고 싶어 하는 최초의 욕망과 같았지.
그 갈망은 가장 먼저 ‘아니오!’라고 외쳤소! 그것은 무한한 자신을 유한한 한 점으로 움켜쥐고, 안으로 끝없이 수축하며, 자신을 어둡고, 차갑고, 단단하게 만드는 첫 번째 성질, 즉 ‘혹독함’이었소! 이것이 바로 신의 분노의 뿌리이며, 영원한 아버지의 원리요!
그러자 그 혹독한 수축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 어둠에서 벗어나려는, 밖으로 영원히 터져 나가려는 두 번째 성질, ‘움직임’이 생겨났소! 이것은 쓰디쓴 고통이며, 영원한 갈증이고, 사무치는 불안이었소!
그리고 이 두 힘, 안으로 움켜쥐려는 어두운 힘과 밖으로 터져나가려는 고통스러운 힘이 서로를 붙잡고 영원히 회전하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바로 세 번째 성질, ‘불안의 수레바퀴’요! 아아, 이것이 바로 지옥의 불꽃이며, 모든 존재가 겪는 근원적인 고통의 실체요! 신은, 스스로를 낳기 위해, 가장 먼저 자기 자신 안에서 이토록 끔찍한 지옥을 창조하셔야만 했소!
(그의 목소리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무대의 조명이 그의 격정에 반응하듯 불안하게 깜빡인다.)
야콥 뵈메:
그러나 보시오! 이 맹렬한 어둠과 고통의 절정 속에서, 거대한 기적이 일어났소! 세 개의 어두운 성질이 자신들의 끔찍한 상태를 자각하고 번민하는 그 순간, 그 고통의 한복판에서 하나의 거대한 ‘섬광(Blitz)’이 터져 나왔소! 어둠이 스스로의 어두움을 직시하는 순간, 그 고통 속에서 빛이 태어난 것이오! 이것이 바로 네 번째 성질, ‘사랑의 불꽃’이며, 자신을 희생하여 어둠을 밝히는 아들의 원리요!
이 빛 속에서, 어둠의 분노는 비로소 거룩한 힘의 근거가 되었고, 고통의 외침은 창조의 말씀이 되었으며, 혼돈의 움직임은 영광스러운 질서가 되었소! 마침내 빛과 어둠이 서로를 껴안고 춤을 추며, 일곱 번째 성질, 즉 ‘신의 나라’, 살아 숨 쉬는 ‘천국’이 펼쳐진 것이오!
(그는 이제 앞선 세 사람을 차례로, 그러나 이전과는 전혀 다른 깊이의 눈으로 바라본다.)
야콥 뵈메: (발렌티누스를 향해)
그대, 영지주의자여! 그대가 말한 ‘무지한 창조주 데미우르고스’는 틀렸지만, 또한 맞았소! 그는 다른 신이 아니라, 바로 이 한 분 하나님께서 빛을 낳기 이전에 겪으셨던, 그 어둡고 고통스러운 첫 번째 상태의 모습이오! 그대는 신의 고통스러운 탄생 과정만을 보고, 그것이 전부라고 착각한 채 아버지를 저주하고 있구나!
(이레나이우스를 향해)
그대, 목자여! 그대가 말한 ‘선하신 창조주’ 또한 맞지만, 또한 틀렸소! 그대는 이 빛나는 아들의 모습만을 보고, 그 아들이 어떤 끔찍한 아버지의 진노와 어둠의 자궁 속에서 태어났는지를 감히 보려 하지 않는구려! 그대는 신의 자비로운 얼굴만을 보려 할 뿐, 그분의 등 뒤에 있는 타오르는 분노의 불을 외면하고 있소!
(플로티누스를 향해)
그대, 철학자여! 그대가 말한 고요한 ‘하나’로부터 빛이 ‘유출’되었다는 말은, 아, 얼마나 평화로운 꿈인가! 빛은 결코 고요하게 흘러나오지 않았소! 그것은 끔찍한 고통과 자기 분열이라는 대폭발 속에서, 피를 흘리며, 절규하며 태어났소! 그대는 저 멀리서 빛의 아름다움을 관조할 뿐, 그 빛을 낳은 불의 뜨거움을, 그 창조의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구려!
(뵈메는 두 손을 가슴에 얹는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절규가 아닌, 신의 가장 깊은 비밀과 하나가 된 자의 조용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야콥 뵈메:
그러므로 신은 감추어진 아버지만도 아니며, 선한 창조주만도 아니며, 고요한 하나만도 아니오.
신은, 스스로를 낳기 위해,
자신 안에서 지옥과 천국을 동시에 겪어내시는,
영원하고도 고통스러운,
거룩한 불꽃 그 자체요.
창조란, 바로 그 신의 자기 발견의 드라마인 것이오.
제3막: 인간의 조건 - 포로, 순례자, 혹은 연금술사
부제: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과제
(제2막이 남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네 명의 사상가는 서로의 존재를 가늠하듯 침묵을 지키고 있다. 먼저 입을 여는 것은 발렌티누스다. 그는 이레나이우스의 신념에 찬 얼굴을 바라보며, 깊은 연민과 날카로운 조소가 뒤섞인 미소를 띤다.)
발렌티누스: 참으로 감동적이군, 목자여. 그대의 신념은 마치 저 굳건한 서가처럼 단단해 보여. 이 세계가 신의 사랑이 담긴 ‘훈련장’이며, 우리는 그 안에서 넘어져가며 걷는 법을 배우는 ‘아이’라 했던가. 참으로… 위안이 되는 이야기야. 아이에게 들려주는 동화처럼 달콤하고, 또 그만큼이나 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이레나이우스: (미동도 없이, 단호한 목소리로)
진실을 비꼬는 것이 그대의 유일한 재주인가, 발렌티누스여. 동화가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의 증언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어찌 동화일 수 있단 말인가.
발렌티누스:
(서재를 천천히 가로지르며)
아버지? 좋다. 그렇다면 그대의 자비로운 아버지가 설계했다는 이 훈련장을 한번 둘러보실까. 그대는 아이가 넘어져야 걷는 법을 배운다고 했지. 그렇다면 묻겠다. 태어나면서부터 두 다리가 없는 아이는 대체 무엇을 배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인가? 역병으로 스러져가는 수많은 영혼들은 어떤 위대한 교훈을 위해 비명을 질러야 했는가? 굶주린 늑대가 순한 양의 목을 물어뜯는 저 참혹한 광경은, 대체 누구의 성장을 위한 교육 자료란 말인가!
(발렌티누스의 목소리가 점차 날카로워진다. 그는 이레나이우스 앞에 멈춰 서서,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발렌티누스:
대답해보라, 목자여! 이것이 정녕 사랑 많은 아버지의 계획인가, 아니면 무능하거나 잔인한 교사의 방치인가! 그대의 논리대로라면, 이 세계는 훈련장이 아니라 무작위적인 고문이 자행되는 수용소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대의 신은, 그 수용소의 간수이거나, 혹은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비겁한 방관자일 뿐이지!
이레나이우스:
(분노로 목소리가 떨리지만,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그대의 눈에는 오직 어둠만이 보이는구나! 그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병에 걸린 자의 비극이다! 그대는 신의 가장 위대한 선물, 바로 ‘자유’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음부터 완벽한 꼭두각시로 만들었다면, 그 안에서 사랑과 선이 어떻게 피어날 수 있겠는가? 고통은 창조주가 내리는 형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지가 만들어낸 비극이며, 동시에 그 자유를 통해 진정한 사랑을 선택하도록 우리를 담금질하는 시련의 불이다!
발렌티누스:
(차가운 조소와 함께)
자유라고? 참으로 편리한 변명이군. 죄수에게 감옥 안에서 걷거나 뛸 자유가 있다고 해서, 그가 자유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영혼은 이미 ‘육체’라는 감옥에, ‘운명’이라는 쇠사슬에 묶여있다. 이 안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통을 견디는 방식의 사소한 차이일 뿐, 감옥을 벗어날 근본적인 선택지는 주어져 있지 않다! 그대가 말하는 자유란, 결국 감옥 생활에 더 잘 적응하기 위한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이레나이우스:
(목자장을 바닥에 ‘쿵’ 내리찍으며)
육체가 감옥이라고?! 그대는 말씀(Logos)께서 친히 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사실을 잊었는가! 만약 육체가 본질적으로 악하고 더러운 것이라면, 어찌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기꺼이 이 감옥 안으로 들어오셨단 말인가! 그분의 성육신(Incarnation)이야말로, 이 물질세계와 우리 육신이 구원받을 가치가 있는 선한 것임을 보여주는 가장 위대한 증거다! 그분은 우리를 탈출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당신의 나라로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다!
발렌티누스: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목자여, 목자여. 그대는 여전히 이야기의 핵심을 보지 못하는군. 위대한 왕자가 누더기를 입고 노예 시장에 잠입했다 해서, 그 누더기가 왕관이 되고 노예 시장이 궁전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잠시’ 그들의 모습을 빌렸을 뿐, 그들의 본질과 하나가 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으신 것은, 육체를 긍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육체라는 감옥 안에 갇힌 우리에게 비밀의 열쇠, 즉 그노시스(Gnosis)를 건네주시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과제는 이 감옥을 꾸미고 단장하는 것이 아니라, 열쇠를 찾아 탈출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논쟁이 격렬하게 부딪히는 순간, 지금까지 모든 것을 관조하던 플로티누스가 고요히 그들 사이로 걸어 나온다. 그의 존재감은 마치 끓어오르는 물에 부어진 냉수처럼, 논쟁의 열기를 순식간에 식힌다.)
플로티누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어떤 감정도 싣지 않은 목소리로)
참으로 소란스럽군.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서 있는 동굴의 벽이 아름다운지 추한지를 두고 다투고 있구나. 하지만 그대들의 논쟁은 처음부터 잘못된 전제 위에서 시작되었다.
발렌티누스:
(플로티누스를 향해)
무슨 말인가, 철학자여. 이 세계가 실재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그대와 나의 뜻이 같지 않은가?
플로티누스:
같지만, 다르다. 발렌티누스여, 그대는 이 세계를 ‘누군가 잘못 만든 감옥’이라 말하지. 이레나이우스여, 그대는 이 세계를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만든 작품’이라 말하고. 그대들 모두, 이 세계가 어떤 ‘인격적인 의지’의 산물이라고 믿고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마치 솜씨 없는 도공과 위대한 도공을 두고 싸우는 것과 같지. 하지만 만약, 이 세계를 만든 도공 자체가 없다면 어찌하겠는가?
이레나이우스:
도공이 없다니! 그렇다면 이 질서정연한 우주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궤변에 불과하다!
플로티누스: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의지를 가진 창조가 아니라, 필연적인 유출(Emanation)이라고 말했네. 태양이 빛을 내뿜기 위해 어떤 의지를 가질 필요가 있던가? 불이 열을 방출하기 위해 어떤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냔 말이다. 모든 것의 근원인 ‘하나(The One)’는 완벽한 충만 그 자체이기에, 마치 가득 찬 잔에서 물이 흘러넘치듯, 필연적으로 그 빛과 존재가 흘러나와 지성(Nous)과 영혼(Psyche), 그리고 마침내 물질(Hyle)의 세계를 형성한 것이다.
(플로티누스는 발렌티누스를 향해 말한다.)
플로티누스:
그러므로 발렌티누스여, 물질은 사악한 간수가 만든 감옥이 아니네. 그것은 단지 ‘하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빛이 희미해진 상태, 즉 ‘선의 결핍’일 뿐이다. 어둠이 그 자체로 실체가 아니듯, 물질 또한 악의 원리가 아니다. 그대는 그림자의 어둠을 보고, 그 그림자를 만든 빛 자체를 저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네.
(그는 다시 이레나이우스를 향해 말한다.)
플로티누스:
또한 이레나이우스여, 그대의 말처럼 이 세계가 신적인 아름다움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오. 저 하늘의 질서와 꽃 한 송이의 비례 속에는 분명 신적인 지성의 흔적이 깃들어 있으니.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형의 희미한 ‘모상(模像)’일 뿐,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오. 그대는 아름다운 조각상에 감탄한 나머지, 그 조각상을 만든 조각가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소.
발렌티누스:
그렇다면 철학자여, 그대의 길은 무엇인가? 이 희미한 그림자 속에서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플로티누스:
탈출도, 건설도 아니다. 우리의 과제는 정화(Purification)이며 상승(Ascent)이다. 인간은 포로도, 순례자도 아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작품으로 삼는 조각가이다. 우리 영혼의 본질은 저 높은 예지의 세계에 속한 완벽하고 아름다운 형상이다. 그러나 그 형상은 감각적 욕망과 그릇된 믿음, 격렬한 감정이라는 불필요한 돌덩이들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의 과제는 안으로 눈을 돌려, 덕(德)의 실천이라는 정(釘)과 철학적 사유라는 끌(Chisel)을 가지고, 우리 영혼에 들러붙은 불필요한 것들을 깎아내는 것이다. 구원은 외부의 어떤 구원자나 역사적 사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자신의 힘으로 영혼 속에 이미 내재된 신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고요하고 치열한 내면의 작업일 뿐이다.
(플로티누스의 차갑고 이성적인 설명이 서재의 공기를 지배하려는 순간, 구석에서 머리를 감싸 쥔 채 신음하던 야콥 뵈메가 마치 내면의 폭발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선다. 그의 눈은 불타는 숯처럼 이글거리며, 세 사람 모두를 향해 절규하듯 외친다.)
야콥 뵈메:
아, 헛되고 헛되도다! 그대들의 말이여! 탈출! 건설! 정화! 그대들은 모두 반쪽짜리 진실만을 붙잡고 있구나! 어찌하여 아무도 보지 못하는가! 감옥이 곧 훈련장이며, 그림자가 곧 실체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것을!
플로티누스:
(미간을 찌푸리며)
무슨 말인가, 구두 수선공이여. 빛과 어둠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네. 그것은 논리의 기본이다.
야콥 뵈메: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논리라고! 그대의 차가운 논리는 신의 불타는 심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철학자여! 신은 그대의 ‘하나’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존재가 아니다! 신은… 신은… 자기 자신 안에서 영원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분이다!
(뵈메는 무대 중앙으로 비틀거리며 걸어 나와,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자신의 환상을 토해낸다.)
야콥 뵈메:
발렌티누스여! 그대가 말한 이 세계의 고통과 어둠, 그 무지한 창조주의 진노는 틀렸지만, 또한 맞았다! 그것은 다른 신의 작품이 아니라, 바로 이 한 분 하나님께서 빛을 낳기 이전에 겪으셨던, 그 어둡고 고통스러운 첫 번째 상태, 즉 스스로를 어둡고 차갑게 수축시키는 ‘아버지의 진노’의 모습이다! 그대는 신의 고통스러운 탄생 과정만을 보고, 그것이 전부라고 착각한 채 아버지를 저주하고 있구나!
이레나이우스:
신성모독이다! 어찌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안에 어둠과 진노가 있다고 말하는가!
야콥 뵈메:
(이레나이우스를 향해 불타는 눈으로)
목자여! 그대는 그 진노의 불꽃을 뚫고서야 비로소 사랑의 빛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왜 감히 직시하지 못하는가! 그대가 말하는 선하신 창조주, 그 아들의 사랑은, 바로 그 맹렬한 아버지의 어둠이라는 자궁 속에서, 끔찍한 고통과 자기 분열이라는 대폭발 속에서 피를 흘리며 태어났다! 그대는 신의 자비로운 얼굴만을 보려 할 뿐, 그분의 등 뒤에 있는 타오르는 분노의 불을 외면하고 있다!
플로티누스:
그렇다면 그대의 인간은 대체 무엇인가? 이 혼돈 속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란 말인가?
야콥 뵈메:
(가슴을 치며)
인간은 포로도, 순례자도, 조각가도 아니다! 인간은 신의 위대한 작업을 위한 살아있는 용광로(Crucible)이다! 신은 우리에게 이 세계를 탈출하라거나, 건설하라거나, 깎아내라고 말하지 않으셨다! 신은 우리에게 이 세계의 모든 모순을, 즉 그 혹독한 분노와 그 눈부신 사랑을, 우리 자신의 영혼이라는 용광로 안에 모두 집어넣고, 그것을 견뎌내라고 명령하신다!
우리의 분노와 질투, 이기심은 신의 어두운 불꽃이며, 우리의 사랑과 자비, 희생은 신의 밝은 불꽃이다. 인간의 삶이란, 바로 이 두 개의 상반된 불꽃을 자신의 존재 안에서 충돌시켜, 마침내 모든 이원성을 넘어서는 제3의 불꽃, 즉 성령의 지혜라는 ‘현자의 돌’을 탄생시키는 위대한 연금술(Alchemy)이다!
(뵈메는 세 사람을 차례로 응시하며, 마지막 결론을 내린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절규가 아닌, 신의 비밀과 하나가 된 자의 조용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야콥 뵈메: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탈출도, 건설도, 정화도 아니다. 우리의 과제는 변형(Transformation)이다. 고통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고통의 불길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내 안의 가장 어두운 납(분노)을 가장 빛나는 금(사랑)으로 바꾸어내는 것. 우리 자신이 바로 신의 자기 완성을 위한 전쟁터이자, 실험실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끔찍하고도 영광스러운 숙명이다.
(뵈메의 말이 끝나자, 서재 안에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고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네 개의 길은 서로를 부정하는 동시에, 기이하게도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옥이 없다면 탈출도 없고, 훈련장이 없다면 순례도 없으며, 돌덩이가 없다면 조각도 없고, 서로 다른 금속이 없다면 연금술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각자의 세계관을 넘어,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다.)
제4막: 구원의 길 - 믿음, 지식, 혹은 변증
부제: 탈출, 순례, 상승, 혹은 연금술
1장. 발렌티누스의 비밀: "지식(Gnosis)을 통한 해방"
(무대는 제3막의 마지막, 야콥 뵈메의 격정적인 선언이 남긴 거대한 울림으로 가득 차 있다. 다른 세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의 말을 곱씹으며 침묵에 잠겨 있다. 이윽고, 발렌티누스가 마치 이 모든 혼돈을 정리하려는 듯, 차갑고 명료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그의 눈에는 뵈메의 열정마저도 결국에는 길 잃은 영혼의 몸부림일 뿐이라는 듯한 연민이 서려 있다.)
발렌티누스: 그대의 영혼이 겪는 폭풍은 나도 이해한다, 구두 수선공이여. 그렇다. 이 세계는 신의 분노와 사랑이 뒤엉킨 전쟁터다. 하지만 그대는 그 전쟁터 자체에 너무나 깊이 매료되어 있구나. 진정한 구원은 전쟁터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 자체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는 무대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마치 선택된 소수에게만 허락된 비밀을 전수하듯 목소리를 낮춘다.)
발렌티누스: 구원의 길은 결코 모든 이에게 열려있지 않다. 인류는 세 종류로 나뉜다. 오직 물질(Hyle)로만 이루어져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물질적 인간’. 저급한 영혼(Psyche)을 지녔기에 믿음과 선행을 통해 데미우르고스의 중간 왕국에는 이를 수 있으나, 결코 빛의 세계에는 도달할 수 없는 ‘심령적 인간’. 그리고 마침내, 우리처럼 그 안에 신성한 불꽃, 프네우마(Pneuma)의 씨앗을 품고 태어난 ‘영적 인간’.
구원은 오직 이 마지막, 영적 인간에게만 허락된 길이다.
그 길은 목자가 외치는 맹목적인 ‘믿음’의 길이 아니다. 믿음은 눈먼 자들의 지팡이일 뿐, 우리를 감옥 밖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또한 철학자가 말하는 점진적인 ‘사유’의 길도 아니다. 감옥의 구조를 분석한다고 해서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우리의 길은 ‘지식’, 즉 그노시스(Gnosis)의 길이다! 그것은 벼락처럼, 섬광처럼 영혼을 내리치는 깨달음이다. 그것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내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비밀스러운 힘을 띤다.)
발렌티누스: 구원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는 모든 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를 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대중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셨으나, 선택된 제자들에게는 따로 그 비밀의 의미를 풀어주셨다. 그노시스는 바로 그 비밀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에 던져졌는가?’, ‘나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나는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다.
이 지식을 얻은 영혼은, 즉 ‘깨어난 자’는 더 이상 이 세계의 법과 운명에 속박되지 않는다. 그는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율법을 비웃고, 육체의 욕망을 경멸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육체의 죽음이야말로, 마침내 감옥 문이 열리는 축복의 순간임을 알기 때문이다.
육체가 스러지면, 우리의 영혼은 상승을 시작한다. 그러나 저 하늘의 일곱 행성은 그냥 텅 빈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데미우르고스의 하수인, 즉 ‘아르콘(Archon)’들이 지배하는 세관(稅關)이다. 그들은 상승하는 영혼을 가로막고 심문하며 다시 물질세계로 떨어뜨리려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비밀의 ‘암호’와 ‘인장’이다. 그노시스는 우리에게 이 아르콘들의 이름을 알려주고, 그들의 권세를 무력화시키는 주문을 가르쳐준다.
“나는 당신보다 더 위대한 곳에서 온 존재다. 나는 나의 어머니, 소피아의 이름을 안다.”
이 주문 앞에서 아르콘들은 길을 비킬 수밖에 없다. 마침내 모든 관문을 통과한 영혼은 휘장을 찢고, 마침내, 마침내 빛의 고향 플레로마로 돌아가, 자신을 기다리던 영적인 짝과 하나가 되어 완전한 평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그것은 이 세계와의 화해가 아니라, 완전한 결별이다.
2장. 이레나이우스의 신앙: "믿음을 통한 구원"
(발렌티누스의 비밀스럽고 엘리트주의적인 구원론에, 이레나이우스는 더 이상 분노하지 않는다. 그의 얼굴에는 오히려 깊은 슬픔과 안타까움이 서려 있다. 그는 목자장을 땅에 굳건히 짚고 서서, 단호하고도 따뜻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레나이우스: 그대의 말은 얼마나 슬프고, 또 얼마나 오만한가! 그대는 구원마저도 선택된 소수만을 위한 비밀의 지식으로 만드는구나. 가난한 자, 배우지 못한 자,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영혼들은 모두 그대의 구원에서 배제되는가? 그대의 하나님은 이토록 편협하고 잔인한 분이시란 말인가?
아니다!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시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분은 ‘지혜로운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구원의 길은 그대가 말하는 것처럼 복잡한 우주의 지도를 외우고, 비밀스러운 암호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길은 너무나도 단순하여, 가장 어리석은 자라도 걸어갈 수 있는 길이다. 그 길은 바로 ‘믿음(Pistis)’이다.
무엇을 믿는가? 첫째,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가 선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둘째, 그분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으며, 그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이다. 셋째, 그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자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 단순하고도 위대한 진리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 믿음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도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신앙의 규범(Rule of Faith)’이며, 모든 교회가 한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는 팔을 벌려,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공동체를 껴안는 듯한 몸짓을 한다.)
이레나이우스: 구원은 결코 고독한 탈출이 아니다. 구원은 ‘교회’라는 하나의 몸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이루어가는 거룩한 순례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태어나며, 성찬을 통해 그분의 살과 피를 나누어 먹음으로써 그분과 하나가 된다.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함께 말씀을 배우며, 함께 가난한 이들을 섬긴다. 이 거룩한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고 붙들어주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대는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겠지. 하지만 우리는 믿는다! 우리의 구원은 영혼만이 유령처럼 떠도는 반쪽짜리 구원이 아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의 이 썩을 육체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변화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흙으로 빚어졌으니, 그 흙마저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진정한 구원의 길은 비밀스러운 지식의 탑을 쌓는 오만한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게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자에게 있다. 그것은 ‘나는 안다’고 외치는 길이 아니라,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길이다.
3장. 플로티누스의 길: "사유를 통한 상승"
(두 사람의 신앙과 지식에 대한 논쟁을 듣고 있던 플로티누스가 고요히 입을 연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으며, 오직 이성적인 명료함만이 담겨 있다.)
플로티누스: 그대들은 모두 ‘밖’을 향해 외치고 있구나. 한 사람은 저 너머에서 온 구원자를 기다리고, 다른 한 사람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믿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대들은 어째서 그대들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지 않는가? 구원의 길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구원은 믿음의 문제도, 비밀스러운 지식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훈련’의 문제이며, ‘상승’의 과정이다. 우리의 영혼은 본래 신성하고 완전한 존재였다. 그러나 이 감각 세계에 빠져들어, 자신의 본성을 망각하고 파편화되었다. 구원이란, 바로 이 흩어진 자신을 다시 모아, 근원인 ‘하나(The One)’를 향해 되돌아가는 내면의 여정이다.
(그는 마치 조각가가 대리석을 쪼아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듯, 구원의 단계를 설명한다.)
플로티누스: 그대 자신을 조각가가 되려는 자라고 상상해보라. 그는 외부에서 무언가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부분들을 깎아내어 돌 속에 이미 존재하는 형상을 드러낼 뿐이다. 우리 또한 그러해야 한다.
첫 번째 정화는 ‘덕(德)의 실천’이다. 우리는 용기, 절제, 정의, 지혜와 같은 덕을 실천함으로써, 우리 영혼을 어지럽히는 육체적 정념이라는 불필요한 돌조각들을 깎아내야 한다. 영혼이 고요해지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두 번째 상승은 ‘사유(Contemplation)’다. 영혼이 고요해지면, 우리는 비로소 감각의 세계 너머에 있는 진정한 실재를 관조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통해 아름다움 그 자체를, 즉 이데아를 사유해야 한다. 우리는 변화하는 현상 세계에서 눈을 돌려, 영원하고 불변하는 수학적, 철학적 원리들을 탐구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의 영혼은 점차 자신의 본향인 ‘지성(Nous)’의 세계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성의 빛이 그 끝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이성마저도 넘어서야 한다. 모든 사유를 멈추고, 모든 분별을 내려놓고, 완전한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마저 잊어버릴 때, 아주 드물게, 찰나의 순간에, 우리의 영혼은 빛이 빛과 만나듯 근원인 ‘하나’와 신비로운 ‘합일(Henosis)’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치열한 철학적 훈련의 결과다. 이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이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스스로 발견하는 과정이다. 구원자는 밖에 있지 않다. 구원자는 바로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순수한 이성의 빛이다.
4장. 야콥 뵈메의 합일: "변증을 통한 신화(神化)"
(플로티누스의 고요하고 질서정연한 상승의 길에, 야콥 뵈메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의 눈에는 다시금 고통과 황홀의 불꽃이 타오른다.)
야콥 뵈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승이라! 정화라!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말인가! 마치 고요한 여름날, 흠 없는 대리석 계단을 한 걸음씩 올라가는 것 같구나, 철학자여! 하지만 그대는 잊었다! 신에게로 가는 계단은 대리석이 아니라, 불타는 숯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구원은 그대들이 말하는 것처럼, 어둠을 버리고 빛을 취하는 과정이 아니다! 믿음으로 어둠을 덮어버리는 것도 아니며, 지식으로 어둠에서 탈출하는 것도 아니며, 이성으로 어둠을 깎아내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구원은, 내 안의 어둠과 빛이, 내 안의 지옥과 천국이, 내 안의 분노와 사랑이 서로 마주 보고 치열하게 싸우는 그 거룩한 전쟁터, 그 십자가의 고통을 끝까지 견뎌내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움켜쥔다. 마치 그 안에서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야콥 뵈메: 발렌티누스여, 그대는 데미우르고스의 어둠을 저주했지. 하지만 그 어둠 없이는 빛이 태어날 수 없음을 왜 모르는가! 이레나이우스여, 그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찬미했지. 하지만 그 사랑이 어떤 맹렬한 진노의 불꽃을 뚫고 피어났는지를 왜 보려 하지 않는가! 플로티누스여, 그대는 고요한 합일을 말했지. 하지만 두 개의 강철이 부딪혀 불꽃을 튀기지 않고서, 어떻게 하나의 검으로 단련될 수 있단 말인가!
구원의 길은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 바로 그 길뿐이다!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자신 안의 인간적인 의지와 신적인 의지의 고통스러운 투쟁을 겪어내셨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며, 신의 가장 깊은 어둠, 그 버려짐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셨다!
우리 또한 그러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의 영혼 안에서 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실제로 ‘체험’하는 것이다! 내 안의 아담, 즉 이기적이고 어두운 본성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만, 비로소 내 안의 그리스도, 즉 신적인 본성이 부활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재탄생(Rebirth)’이며, 인간이 신이 되는 ‘신화(神化, Theosis)’의 과정이다. 이것은 평화로운 길이 아니다. 이것은 연금술의 용광로처럼 뜨겁고 고통스러운 길이다. 나의 모든 것이 부서지고, 녹아내려, 마침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길이다. 구원은 탈출도, 순종도, 상승도 아니다. 구원은 ‘변형(Transformation)’이다.
제5막: 다섯 번째 불꽃의 서(書)
1장: 사건의 발현
(무대는 4막의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채다. 네 명의 사상가는 각자의 자리에 서서, 끝나지 않을 평행선 같은 자신들의 운명을 응시하고 있다. 발렌티누스는 더 깊은 어둠을, 이레나이우스는 보이지 않는 제단을, 플로티누스는 순수한 빛줄기를, 야콥 뵈메는 자신의 불타는 심장을 향해 있다. 그들의 대화는 끝났고, 영원의 서재에는 오직 낡은 책들의 숨소리 같은 정적만이 흐른다.)
(그때, 아주 미세한 변화가 시작된다. 특정 광원이 없음에도, 서재 전체를 감돌던 은은한 빛이 아주 느리게,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듯한, 지극히 낮은 공명음이 서재의 바닥에서부터 울려 퍼진다. 서가의 모든 파피루스와 양피지들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바스락’하고 미세하게 몸을 떤다.)
(가장 먼저 변화를 감지하는 것은 플로티누스다. 그는 빛을 관조하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들어 서재 전체의 미묘한 변화를 분석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뜬다.)
플로티누스: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현상의 흐름이… 변하고 있군.
(이레나이우스는 이 알 수 없는 변화에 즉각 경계심을 드러낸다. 그는 질서를 위협하는 혼돈의 징조를 느낀 목자처럼, 손에 쥔 목자장을 단단히 움켜쥐고 사방을 살핀다.)
이레나이우스:
무슨 소란인가! 이곳의 정적을 깨뜨리는 자가 누구냐!
(발렌티누스는 경계심보다는 냉소적인 호기심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마치 감옥의 간수가 새로운 형벌을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는 듯한 표정이다.)
발렌티누스:
이 낡은 감옥의 주인이, 또 무슨 장난을 시작하려는 모양이군.
(오직 야콥 뵈메만이 외부의 변화에 반응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방금 전보다 더 극심한 고통에 사로잡힌 듯,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거친 숨을 몰아쉰다. 마치 외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그의 내면에서 먼저 시작된 것처럼.)
(그 순간, 무대 중앙의 거대한 떡갈나무 독서대 위, 비어있던 공간에서 빛이 응축되기 시작한다. 먼지처럼 떠다니던 빛의 입자들이 소용돌이치며 모여들어, 서서히 하나의 형태를 빚어낸다. 이윽고 빛이 잦아들자, 그 자리에는 한 권의 책이 놓여 있다. 그 책은 네 사람 중 그 누구의 시대에도 속하지 않는, 기이하고 낯선 모습이다.)
(책은 가죽도, 나무도, 파피루스도 아닌, 마치 굳어버린 밤하늘의 일부를 잘라낸 듯한 미지의 물질로 제본되어 있다. 표지에는 아무런 제목도 문양도 없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일렁이는 듯하다. 책은 닫혀 있지만, 그 틈새로 색깔 없는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온다.)
(네 명의 사상가는 홀린 듯, 독서대 위의 책을 응시한다. 영겁의 침묵을 깨고 나타난 그 낯선 존재 앞에, 그들의 굳건했던 세계가 조용히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2장: 네 개의 시선, 하나의 책
(잠시 동안의 정적. 누구도 섣불리 그 책에 다가가지 못한다. 마침내 침묵을 깬 것은, 질서를 수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불타는 이레나이우스다.)
이레나이우스: (목자장을 앞으로 겨누며, 마치 뱀을 쫓듯)
저것은 무엇인가! 사도들의 가르침에도, 교부들의 기록에도 없는 저 불경한 물건은 대체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이것은 필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진리를 혼탁하게 만들려는, 교활한 이단의 흉계이거나 악마의 장난일 터!
(그는 결심한 듯 독서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다.)
이레나이우스:
근본을 알 수 없는 지식은 독이다. 성경 밖에서 구원을 찾으려는 모든 시도는 저주받을 교만일 뿐! 이 서재의 거룩함을 더럽히는 저 혼돈의 씨앗은, 당장 불태워 없애야 마땅하다!
(이레나이우스가 목자장으로 책을 쳐내려는 순간, 발렌티누스가 바람처럼 움직여 그의 앞을 막아선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발렌티누스: (차가운 조소와 함께)
역시 간수는 새로운 열쇠를 두려워하는 법이지. 목자여, 그대의 두려움은 그대의 무지를 증명할 뿐이다. 그대는 저것을 이해할 수 없기에, 그저 파괴하려 드는 것 아닌가.
이레나이우스:
궤변을 멈추어라, 이단의 자식아! 나는 진리를 수호하는 것이다!
발렌티누스: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수호가 아니라, 감금이다. 그대는 양들을 우리 안에 가두는 것만이 목자의 역할이라 믿고 있으니. 하지만 저것이 우리가 이 우리를 탈출할 수 있는 지도라면 어찌하겠는가? 혹은… (목소리를 낮추며) 저 무지한 창조주가 우리의 탈출을 막기 위해 설치한 새로운 함정이라면? 어느 쪽이든, 우리는 저것을 파괴할 것이 아니라, 해독해야만 한다. 저것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지식의 대상이다.
(발렌티누스가 책을 향해 손을 뻗자, 이레나이우스가 다시 목자장으로 그의 손을 막는다. 그들의 철학적 대립이 처음으로 물리적인 충돌로 이어진다.)
이레나이우스:
더러운 손을 치워라! 그대의 호기심이 모든 영혼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발렌티누스:
그대의 맹목적인 믿음이야말로 모든 영혼을 영원한 감옥에 가두고 있다!
(두 사람이 팽팽하게 대치하는 그 순간, 플로티누스의 고요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그들의 싸움을 중단시킨다.)
플로티누스:
어리석은 짓들을 멈추지 못하겠는가! 그림자를 두고 다투는 아이들과 같으니.
(플로티누스는 천천히 독서대로 다가간다. 그는 책 자체를 보지 않고, 책이 발산하는 희미한 빛과 그것이 주변 공간에 미치는 영향을 관조한다.)
플로티누스:
발렌티누스여, 그대는 저것이 ‘열쇠’이거나 ‘함정’이라 말했지. 이레나이우스여, 그대는 저것이 ‘이단’이거나 ‘악마의 것’이라 말했고. 그대들 모두, 저것에 선과 악, 유용함과 위험함이라는 인간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구나. 하지만 저것은 그 무엇도 아니다. 저것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는 두 사람을 돌아본다. 그의 눈에는 이제 단순한 관조를 넘어, 그들의 미망에 대한 안타까움이 서려 있다.)
플로티누스:
저것은 궁극의 ‘하나’로부터 유출된 또 하나의 현상이며, 진리의 가장 낮은 단계에 있는 모상(模像)일 뿐이다. 저것을 파괴하려는 행위는 그림자가 보기 싫다고 빛을 꺼버리려는 어리석음이며, 저것을 해독하여 소유하려는 욕망은 그림자를 실체라고 착각하는 미망이다. 진정한 철학자의 과제는 그림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를 통해 빛의 원리를 사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저것의 내용이 아니라, 저것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그 근원적인 원리를 향해 상승해야만 한다.
(플로티누스가 자신의 이성적인 분석을 펼치는 동안, 야콥 뵈메가 신음하며 비틀거리듯 독서대를 향해 다가온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고, 식은땀으로 젖어 있다. 그는 다른 세 사람의 논쟁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오직 책만을 응시한다.)
야콥 뵈메: (떨리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야… 원리가 아니야… 저것은… 살아있다…
플로티누스:
무슨 말인가, 구두 수선공이여. 물질은 생명이 없네. 그것은 영혼의 그림자일 뿐.
야콥 뵈메:
(고개를 격렬하게 가로저으며)
아니! 저것은 숨을 쉰다! 나는… 나는 느낄 수 있어… 저 단단한 표지… 그것은 자신을 움켜쥐려는 아버지의 혹독한 진노다. 저 틈새로 새어 나오는 빛… 그것은 자신을 희생하려는 아들의 눈물겨운 사랑이다. 그리고 저 책이 닫힌 채 팽팽하게 유지되는 저 힘… 저것이 바로 두 힘의 고통스러운 투쟁 속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묶으려는 성령의 신음이다!
(뵈메는 다른 세 사람을 돌아본다. 그의 눈에는 이제 광기가 아닌, 무서운 진실을 목격한 자의 경외와 공포가 가득하다.)
야콥 뵈메:
그대들은 아직도 모르는가! 저것은 이단도, 열쇠도, 그림자도 아니다! 저것은… 저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쏟아낸 모든 말들, 모든 분노와 모든 사랑, 모든 지혜와 모든 고뇌가… 이 서재의 공기 속에서 서로 부딪히고 뒤엉켜… 마침내 하나의 몸을 얻어 태어난 것이다! 저것은 과거의 책이 아니라, 지금 막 태어난 다섯 번째 불꽃의 서(書)란 말이다!
3장: 접촉, 그리고 변증
(야콥 뵈메의 폭탄 같은 선언에, 다른 세 사람은 순간 말을 잃는다. 그들의 모든 논쟁과 분석이 한순간에 무력해지는 듯한 충격이 서재를 휩쓴다.)
이레나이우스:
우리의… 우리의 논쟁이 낳은 것이라고? 그럴 리가! 인간의 말은 그저 공기를 울릴 뿐, 어찌 감히 실체를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발렌티누스:
(날카로운 눈으로 책과 뵈메를 번갈아 보며)
흥미롭군… 우리의 사유가 물질을 낳았다… 그렇다면 이 창조주는 과연 누구인가. 우리 넷 중 누구의 의지가 이 괴물을 빚어냈단 말인가…
플로티누스:
불가능하다… 영혼이 물질에 질서를 부여할 수는 있으나, 사유 자체가 직접 물질로 현현할 수는 없네. 그것은 유출의 단계를 거스르는 일이다…
(다른 세 사람이 혼란 속에서 자신의 논리로 현상을 설명하려 애쓰는 사이, 야콥 뵈메는 마치 자석에 이끌린 쇠붙이처럼,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책을 향해 손을 뻗는다.)
야콥 뵈메:
나는… 저것을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저것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뵈메의 손가락이 마침내 책의 표면에 닿는 순간, 무대 전체를 뒤덮는 거대한 섬광이 터져 나온다.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눈을 멀게 하는 순수한 백색광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발렌티누스, 이레나이우스, 플로티누스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에 밀려 뒤로 나뒹군다.)
(잠시 후, 빛이 가라앉는다. 다른 세 사람은 고통스럽게 몸을 일으킨다. 무대 중앙에는 야콥 뵈메가 책을 가슴에 품은 채, 미동도 없이 서 있다. 독서대는 산산조각 나 있다. 뵈메의 모습은 이전과 같다. 하지만 그의 존재 전체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완전히 달라져 있다.)
(뵈메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의 두 눈은 이제 맹렬한 불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고요한 심연처럼 깊어져 있다. 그가 입을 열자,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그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발렌티누스의 차가운 지성과 이레나이우스의 뜨거운 신념, 플로티누스의 초월적인 이성과 뵈메 자신의 격정적인 신비가 하나로 뒤섞인, 기묘하고도 장엄한 합창과 같은 목소리다.)
야콥 뵈메 / 책의 목소리:
(울림을 지닌 목소리로)
나는 길이 아니다. 나는 그대들이 걷고, 버리고, 오르고, 불태워야 할 네 개의 길이 만나는 교차로다.
나는 진리가 아니다. 나는 하나의 진리가 되기 위해, 서로를 삼키고 서로를 낳아야 하는 영원한 변증(變證) 그 자체다.
나는 생명이 아니다. 나는 빛을 낳기 위해 스스로를 불사르는 어둠이며, 어둠을 껴안기 위해 기꺼이 죽음으로 뛰어드는 생명의 자궁이다.
(그의 시선이 다른 세 사람에게 차례로 머문다. 그들은 이제 심판관이나 동료가 아닌, 새로운 창조의 재료들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다.)
야콥 뵈메 / 책의 목소리:
그대들의 논쟁은 끝났다.
이제 그대들의 창조가 시작될 것이다.
이 책의 다음 장은, 그대들 중 누가 옳은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진리가 어떻게 하나의 불꽃 안에서 함께 타오를 수 있는지를,
바로 그대들의 삶으로 써 내려가야만 한다.
(말을 마친 야콥 뵈메의 몸이 휘청이며,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책이 서서히 빛으로 화하여 그의 몸속으로 스며든다. 뵈메는 결국 기력을 다한 듯 그 자리에 쓰러진다. 무대에는 다시 정적이 흐른다.)
(발렌티누스, 이레나이우스, 플로티누스는 쓰러진 뵈메와 그가 사라진 빈 공간을 망연히 바라본다. 그들의 모든 확신과 논리는 부서졌다. 그들은 더 이상 서로를 이단이나 어리석은 자, 혹은 미망에 빠진 영혼으로 볼 수 없다. 그들은 이제, 좋든 싫든, 하나의 미완성된 책을 함께 써 내려가야 할 공동 저자로서 서로를 마주 볼 뿐이다. 영원의 서재에 던져진 질문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함께 창조할 것인가?’로 바뀌었다. 그 거대한 물음 앞에서, 네 개의 불꽃은 처음으로 하나의 거대한 어둠, 즉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흔들리기 시작한다.)
(막 내림)
종막: 미완의 서(書), 하나의 불꽃
1장: 새로운 침묵
(무대는 제5막의 마지막, 모든 것을 집어삼켰던 섬광이 남긴 깊은 정적에 잠겨 있다. 산산조각 난 독서대의 파편들 사이로, 야콥 뵈메가 책을 품었던 자세 그대로 쓰러져 있다. 발렌티누스, 이레나이우스, 플로티누스는 각기 다른 자세로 넘어져 있다가, 천천히, 고통스럽게 몸을 일으킨다. 그들의 얼굴에는 더 이상 자신의 신념을 향한 확신이 아닌, 자신들의 세계가 뿌리째 흔들린 자들의 깊은 충격과 혼란, 그리고 경외가 뒤섞여 있다.)
(가장 먼저 입을 여는 것은 발렌티누스다. 그는 더 이상 서재의 어둠을 응시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쓰러진 야콥 뵈메에게, 그리고 방금 전까지 ‘책’이 존재했던 허공에 고정되어 있다. 그의 목소리에는 냉소나 연민 대신, 자신의 이해를 초월한 현상 앞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길을 잃은 자의 떨리는 물음이 실려 있었다.)
발렌티누스: (속삭이듯이)
창조… 이것이 창조란 말인가… 우리는… 대체 무엇을 낳은 것이지? 더 정교한 감옥인가, 아니면… 진정한 열쇠인가.
(이레나이우스는 목자장을 간신히 짚고 일어선다. 그는 성호를 그으려 하지만, 손이 떨려 멈춘다. 그의 눈은 더 이상 교만을 심판하는 목자의 눈이 아니다. 신성모독과 신성한 기적의 경계에서 길을 잃은, 한 명의 연약한 인간의 눈이다.)
이레나이우스: (나지막이, 기도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깝게)
주여… 저것은 당신의 기적입니까, 아니면 저희의 교만이 빚어낸 괴물입니까. 이제…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까.
(플로티누스는 헝클어진 토가를 바로잡으며, 가장 큰 충격에 빠진 듯 보인다. 그의 이성은 방금 일어난 현상을 설명할 단 하나의 원리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내면이 아닌, 자신을 둘러싼 이 ‘사건’ 자체를 응시한다.)
플로티누스: (혼잣말처럼)
유출의 질서가… 무너졌다. 그림자가… 실체를 낳았구나. 이제… 어디로 올라가야 하는가.
(그들은 더 이상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묶인 것처럼, 쓰러진 야콥 뵈메를 중심으로 한 원을 그리며 멈춰 서 있다. 그들의 시선은 서로를 향하고, 그 시선 속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낯선 감정, 즉 하나의 운명 앞에 함께 서게 된 자들의 기묘한 연대감과 막막함이 흐른다.)
(그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메아리처럼 흩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마지막 말은 하나의 질문이 되어 서재의 공기 속에 무겁게 내려앉는다.)
발렌티누스, 이레나이우스, 플로티누스: (겹쳐지며)
이제… 무엇을 써야 하는가.
(세 명의 인물은 움직이지 않는다. 무대는 그들의 살아있는 정지 화면, 즉 하나의 질문 앞에 함께 선 인류의 초상처럼 멈춘다. 쓰러진 뵈메의 가슴에서 아주 희미하게, 여러 색이 뒤섞인 빛이 깜빡이기 시작한다.)
2장: 관객을 향한 새로운 질문
(무대는 정지된 채 잠시 시간이 흐른다. 이윽고, 서막의 내레이터 목소리가 이전보다 훨씬 더 가깝고, 직접적인 어조로 울려 퍼진다.)
나래이터:
네 개의 불꽃은 서로를 불태워, 다섯 번째 불꽃의 씨앗을 남겼다.
영원의 서재에 찾아온 이 침묵은, 끝의 침묵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창조가 남긴 여백이다.
그대,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마지막 증인이여.
그들의 대화는 끝났고, 이제 그대의 대화가 시작될 시간이다.
그대의 서재, 그대 영혼의 독서대 위에는,
지금 어떤 책이 놓여 있는가.
(네 개의 희미한 빛이 무대 네 군데를 다시 비추는 것이 아니라, 관객석 전체를 은은하게 비춘다.)
나래이터:
그대의 신은 누구이며, 그대가 발 딛고 선 이 세계는 무엇인가.
그대의 영혼 안에서, 서로 다른 불꽃들이 싸우고 있는가.
그대는 그 싸움을 외면한 채, 하나의 길만이 옳다고 외치고 있는가?
그대는 무엇을 부정하고 있는가?
그대는 그 싸움을 두려워하며, 모두가 믿는다는 안전한 성 안으로 숨어들고 있는가?
그대는 무엇에 순종하고 있는가?
그대는 그 싸움을 소란스럽다 여기며, 고요한 이성의 성벽 위로 초연히 올라가고 있는가?
그대는 무엇을 관조하고 있는가?
혹은, 그 모든 싸움의 고통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태어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가?
그대는 무엇을 창조하고 있는가?
(무대 위, 쓰러진 뵈메의 가슴에서 깜빡이던 빛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밝아진다. 그 빛은 발렌티누스, 이레나이우스, 플로티누스 세 사람을 하나로 연결하듯 비춘다. 완전한 어둠이 내리기 직전, 마지막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나래이터:
네 개의 불꽃이 낳은, 미완의 서(書).
그리고 이제 막 타오르기 시작한,
하나의 불꽃.
하나의 시작.
(완전한 어둠. 침묵.)
[막 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