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9장: 시간과 영원 - 흐름 속에 머물기

by 이호창

제4-19장: 시간과 영원 - 흐름 속에 머물기



4-19.1. 시간의 폭력과 느림의 미학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시간을 아끼는 기술이 발달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세탁기와 식기세척기가 가사 노동 시간을 줄여주고, 고속철도와 비행기는 이동 시간을 단축하며, 초고속 인터넷은 정보 검색에 걸리는 시간을 0.1초 단위로 줄여줍니다. 논리적으로라면 우리는 남는 시간의 풍요 속에서 여유롭게 시를 읽거나 노을을 바라보며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만성적인 ‘시간 기근 (Time Famine)’에 시달립니다. “바쁘다”는 말은 현대인의 입버릇이자 훈장이 되었고, 1분이라도 허투루 쓰는 것을 죄악처럼 여기며 쫓기듯 살아갑니다. 우리는 시간을 아끼려고 발버둥 치지만, 정작 아껴둔 그 시간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삶은 점점 더 앙상해져 갑니다. 이 기이한 역설은 우리가 시간을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 즉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는’ 자본주의적 시간관이 우리 영혼을 잠식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작가 미하엘 엔데 (Michael Ende, 1929-1995)의 동화 『모모』와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상소 (Pierre Sansot, 1928-2005)의 『느림의 미학』은 바로 이 ‘시간 절약’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사기극을 폭로하며,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시간을 되찾는 법을 일러줍니다. 그것은 시간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기술이 아니라, 시간을 있는 그대로 누리고 향유하는 ‘쓸모없음의 지혜’입니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는 어린이 동화의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그 어떤 철학서보다 예리하게 현대 문명의 시간관을 비판하는 묵시록입니다. 이 책에는 ‘회색 신사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잿빛 양복을 입고 잿빛 가방을 들고 다니며, 끊임없이 시가 연기를 피워댑니다. 이들은 도시 사람들에게 찾아가 기묘한 제안을 합니다. “당신이 늙은 어머니를 돌보는 시간, 앵무새에게 말을 거는 시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 친구와 잡담하는 시간을 다 합치면 인생의 몇 년을 낭비하는지 아십니까? 그 무의미한 시간들을 우리 ‘시간 저축 은행’에 맡기십시오. 그러면 이자가 붙어서 나중에 당신은 엄청난 부자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논리적이고 효율적인 제안에 설득당합니다. 그들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삶의 ‘군더더기’들을 잘라내기 시작합니다. 이발사 푸지는 손님과의 수다를 끊고 머리만 깎습니다. 건축가는 집에서 장식과 곡선을 없애고 네모반듯한 성냥갑 같은 건물을 짓습니다. 사람들은 더 빨리 일하고, 더 빨리 먹고, 더 빨리 이동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그들의 삶은 점점 더 삭막하고 차가워집니다.


엔데가 지적하듯이, 사람들이 시간을 절약하는 동안 그들은 사실 전혀 다른 것을 쥐어짜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쥐어짠 것은 바로 자신의 삶이었습니다. 엔데에게 시간이란 단순히 흘러가는 물리적 단위가 아니라, 가슴속에 깃들어 있는 생명 그 자체였습니다. 따라서 시간을 아낀다는 명목으로 ‘쓸모없는’ 수다나 멍하니 있는 순간을 잘라내는 행위는, 곧 생명을 지탱하는 온기와 의미를 쥐어짜 버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엔데의 통찰은 명확합니다. 회색 신사들이 훔쳐 간 것은 물리적인 시계의 눈금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 깃들어 있던 ‘생명의 온기’와 ‘사랑’이었습니다.


회색 신사들의 논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효율성’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우리는 모든 행위를 ‘목적’과 ‘수단’으로 나눕니다. 돈을 벌지 못하는 시간, 스펙이 되지 않는 시간,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 시간은 ‘죽은 시간 (Dead Time)’으로 간주되어 제거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삶의 진정한 기쁨은 대부분 이 ‘비생산적인 시간’ 속에 숨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바라보는 것, 아이의 서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 활짝핀 꽃을 보고 감탄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는 무가치하지만, 우리 영혼을 살찌우는 필수적인 영양분입니다. 회색 신사들은 우리에게서 이 ‘쓸모없는 시간’을 빼앗아감으로써, 우리를 영혼 없는 기계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피우는 시가는 바로 훔쳐낸 인간들의 시간, 즉 ‘말라비틀어진 꽃잎’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바쁘다는 핑계로 소중한 순간을 희생할 때마다, 우리는 회색 신사들에게 우리의 생명을 먹이로 던져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 숨 막히는 효율성의 감옥을 부수고 나오는 힘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느리고, 가장 비효율적이며,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고아 소녀 ‘모모’에게서 나옵니다. 모모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녀가 가진 유일한 재산은 ‘시간’입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어떤 조언도, 판단도 하지 않고 그저 온 마음을 다해 들어줍니다. 모모가 귀를 기울이면, 사람들은 잊고 있었던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되고, 쫓기던 마음이 차분해지며, 텅 빈 가슴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모모의 ‘경청’은 시간을 내어주는 행위, 즉 ‘비움’의 실천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시간을 상대방을 위해 온전히 비워둠으로써, 상대방이 그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치유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선물’입니다.


모모의 친구인 도로 청소부 베포의 지혜 또한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는 아주 긴 도로를 청소해야 할 때 결코 도로 전체를 보지 않습니다.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오로지 다음 한 걸음, 다음 한 번의 비질, 다음 한 번의 호흡만 생각해야 해. 그러다 보면 어느새 청소가 다 끝나 있게 되지.”


이것은 ‘지금 여기 (Here and Now)’에 온전히 머무르는 ‘마음챙김 (Mindfulness)’의 태도입니다. 효율성에 쫓기는 사람은 미래의 목표 (청소의 끝)만을 바라보며 현재 (비질하는 순간)를 고통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베포는 비질하는 그 순간 자체를 즐깁니다.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행위의 과정 자체에 몰입할 때, 시간은 시계 바늘에 쫓기는 ‘물리적 양’의 압박에서 벗어나, 생명의 밀도가 꽉 찬 ‘질적인 깊이’로 확장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상소는 이러한 통찰을 ‘느림의 미학’이라는 철학적 사유로 확장시킵니다. 그에게 느림은 단순히 동작을 천천히 하는 물리적인 속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에 쫓기지 않고 시간을 지배하는 주체적인 태도이자, 삶의 맛을 음미하려는 실존적 결단입니다. 상소는 느림을 “개인이 자신의 구성 요소를 와해시키지 않으면서 세상의 리듬에 맞추어 갈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합니다.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타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평정심, 그것이 느림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몇 가지 구체적인 ‘느림의 기술’을 제안합니다.


첫 번째는 ‘한가로이 거닐기 (Flânerie, 산책)’입니다.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걷는 것은 이동이지만, 목적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걷는 것은 산책입니다. 현대인은 늘 최단 거리를 검색하고 내비게이션의 지시를 따르느라 길 위에서 마주칠 수 있는 우연의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상소는 말합니다. “서두르지 않고 걷는 자만이 세상이 자신에게 건네는 말들을 들을 수 있다.” 골목의 낡은 담벼락, 보도블록 틈새의 잡초,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우리가 속도를 늦출 때 비로소 말을 걸어옵니다. 산책은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스며드는 행위이며, 세상과 나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연결되는 ‘비움’의 걷기입니다.


두 번째는 ‘기다림’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기다림은 낭비이자 무능력으로 취급받습니다. 우리는 전자레인지의 3분을 견디지 못하고, 로딩 화면의 1초를 참지 못합니다. 하지만 상소는 기다림을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신뢰의 태도”라고 봅니다. 씨앗을 심고 싹이 트기를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 약속 장소에서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설렘, 빵이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리는 제빵사의 인내 속에서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무르익어갑니다. 기다림은 텅 빈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고 있는 것을 맞이하기 위해 내 마음을 정돈하고 비워두는, 가장 적극적인 수용의 상태입니다. 기다림을 잃어버린 우리는 과정의 숙성 없이 결과만을 탐하는 미성숙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권태’와 ‘몽상’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심함을 죄악시하며, 잠시라도 시간이 비면 스마트폰을 꺼내 듭니다. 그러나 상소는 권태야말로 창조의 자궁이라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멍한 시간 속에서, 우리의 무의식은 자유롭게 부유하며 뜻밖의 영감과 연결됩니다. 몽상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딱딱하게 굳은 현실의 논리를 말랑말랑하게 녹여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하이데거가 “깊은 심심함 (Deep Boredom)”이 존재의 심연을 드러낸다고 말했듯, 우리는 억지로 시간을 채우려는 강박을 버리고 그 텅 빈 권태 속에 머무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기능하는 인간 (Do-er)’이 아닌 ‘존재하는 인간 (Be-er)’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느림의 철학’은 ‘게으름’과는 다릅니다. 게으름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회피하는 것이지만, 느림은 삶의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온전히 살아내려는 치열한 정성입니다. 밥을 먹을 때 밥의 맛을 온전히 느끼고, 대화할 때 상대의 눈빛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 이것이 느림입니다. 빨리 먹으면 배는 부르지만 맛은 기억나지 않듯, 빨리 살면 수명은 채울지 몰라도 삶의 의미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시간은 은행에 저축할 수 있는 화폐가 아니라 쉼 없이 흐르는 강물과 같습니다. 흐르는 물을 붙잡아 둘 수 없듯이, 오늘 아껴둔 시간을 내일 꺼내 쓸 수는 없습니다. 사용하지 않고 흘려보낸 시간은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소멸할 뿐입니다. 따라서 시간을 아끼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방법은, 그 시간을 ‘지금 여기’에서 충분히 누리고 온전히 소비하는 것뿐입니다.


이제는 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회색 신사들에게 내어준 시간을 되찾아야 할 때입니다. 이는 물리적인 시계를 멈추거나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대하는 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전환함을 의미합니다. 효율성의 칼날로 시간을 조각내어 그 틈새에 자신을 끼워 넣는 강박에서 벗어나, 시간을 넉넉한 그릇으로 삼아 그 안에 삶을 담아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아무런 계획 없이 벤치에 앉아 햇살을 받는 주말 오후는 불안해할 시간이 아니라 영혼이 충전되는 소중한 순간입니다. 약속이 지체될 때 화를 내는 대신 주변 풍경을 관찰하며 기다림을 즐기는 태도는, 그 ‘빈 시간’을 뜻밖의 선물로 변화시킵니다.


시간의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비움’의 실천입니다. 더 많은 일을 하려는 욕심을 비우고, 더 빨리 가려는 조바심을 비우고, 시간을 통제하려는 오만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연결’을 채우는 것입니다. 느리게 걸을 때 비로소 발밑의 흙과 연결되고, 기다릴 때 비로소 타인의 소중함과 연결되며, 몽상할 때 비로소 내면의 깊은 자아와 연결됩니다. 모모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마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존재에게 나의 시간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시간은 곧 생명입니다. 이를 성과나 돈으로 환산하여 소진하는 것은 삶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시간의 진정한 목적은 효율성이 아니라, 삶을 향유하고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 단 10분이라도 허락된 ‘쓸모없는 시간’ 속에서 하늘을 보고, 바람을 느끼며, 목적 없이 걸을 때, 인간은 기계의 부속품이 아닌 존엄한 존재로서 비로소 숨 쉬게 됩니다. 회색 신사들로 대변되는 효율성의 유혹을 물리치고 고유한 속도와 리듬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간이 금이 아니라 삶이라는 진실을 살아내는 길입니다.





4-19.2. 카이로스: 기회의 시간



우리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초침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원을 그리며 돌아갑니다. 우리는 이 기계적인 움직임에 맞추어 기상 시간을 정하고, 출근 버스를 타며, 회의 시간을 맞추고, 잠들 시간을 계산합니다. 달력은 우리의 일생을 균일한 네모 칸으로 나누어 놓았고, 우리는 그 칸을 채우기 위해 허덕이며 달려갑니다. 이것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시간, 즉 크로노스 (Chronos)의 세계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름 붙인 크로노스는 물리적이고 정량적인 시간입니다. 그것은 과거에서 미래로 쉼 없이 흘러가는 직선이며, 모든 사건을 삼켜버리는 거대한 강물입니다.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1분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60초이며, 어제의 1시간과 오늘의 1시간은 무게가 같습니다. 이 균질한 시간 위에서 우리는 늙어가고, 사물은 낡아가며, 모든 것은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소멸을 향해 행진합니다. 현대인이 느끼는 만성적인 불안과 조급함은 바로 이 크로노스의 독재 아래서 우리가 시간의 노예로 전락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관리한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시간이 우리를 관리하고 갉아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모든 시간이 똑같은 무게로 다가오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첫 키스를 나누던 그 찰나의 순간은 물리적으로는 몇 초에 불과했겠지만, 우리 영혼에는 영원처럼 긴 여운을 남겼습니다. 반대로 지루한 강의를 듣거나 원치 않는 노동을 하는 시간은 억겁처럼 느껴지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증발해 버립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내리는 단 한 번의 결단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물리적인 길이와 상관없이, 의미와 가치가 응축되어 우리 삶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특별한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이를 카이로스 (Kairos)라고 불렀습니다. 크로노스가 양 (Quantity)의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질 (Quality)의 시간입니다. 크로노스가 흘러가는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다가와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건의 시간이며, 결정적인 기회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갇힌 세계에서 벗어나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 크로노스의 독재에 맞서 카이로스의 감각을 회복해야 합니다. 20세기의 신학자이자 실존주의 철학자인 폴 틸리히는 이 카이로스의 개념을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을 치유하는 핵심 열쇠로 제시했습니다. 틸리히에게 크로노스는 덧없이 흘러가며 모든 것을 마모시키는 수평적인 시간입니다. 이 시간 속에서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역사의 공포’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그는 바로 이 절망적인 크로노스의 한복판을 뚫고, ‘영원 (Eternity)’이 수직으로 침투하는 순간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카이로스는 영원이 시간 속으로 들어와, 무의미하게 반복되던 일상을 거룩한 의미로 가득 채우는 ‘충만한 순간 (The filled moment)’입니다. 틸리히의 신학적 통찰에서, 인류 역사의 가장 위대한 카이로스는 예수가 등장하여 “때가 찼다 (Kairos)”고 선포한 바로 그 사건입니다. 그 순간은 낡은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운명적인 기회’였습니다. 틸리히는 이러한 거대한 카이로스가 단지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카이로스는 어떻게 경험됩니까? 그것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사는 방식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요구합니다.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자아 (Ego)는 미래를 예측하고 과거를 분석하며 시간을 ‘통제’하려 합니다.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일정을 빽빽하게 채우고, 텅 빈 시간을 견디지 못해 스마트폰을 켭니다. 크로노스의 세계에서 우리는 텅 빈 그릇과 같습니다. 우리는 미래라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향해 입을 벌리고,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사건과 자극을 갈구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시간을 보내도, 아무리 많은 일을 처리해도 그 갈증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크로노스는 우리의 생명을 삼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흘러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틸리히는 우리가 이 허무한 흐름을 멈춰 세울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흐르는 강물을 손으로 움켜잡을 수 없습니다. 억지로 시간을 붙잡으려 하거나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하는 것은 에고의 헛된 저항일 뿐입니다. 대신 우리는 흐르는 시간의 한복판에서, 영원이 깃들 수 있는 틈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처럼 ‘채우려는’ 강박 속에서는 카이로스가 깃들 자리가 없으며, 그 틈은 오직 비움과 결단을 통해서만 열립니다.


카이로스를 맞이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기다림과 깨어있음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추수할 때를 기다리듯, 카이로스는 내가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르익었을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궁수가 활시위를 당기고 과녁을 응시하며 가장 완벽한 순간을 기다리듯, 우리는 삶의 흐름을 예민하게 주시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대인은 기다릴 줄 모릅니다. 우리는 침묵과 정지를 비생산적인 것으로 여기며, 쉴 새 없이 무언가를 함으로써 불안을 잊으려 합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의미 없는 뉴스를 소비하며, 바쁨을 핑계로 자신의 내면을 외면합니다. 그러나 흙탕물이 가라앉아야 맑은 물이 드러나듯, 소란스러운 행위를 멈추고 내면을 텅 비울 때 비로소 시간의 결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비움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성이 아니라, 다가오는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 감각을 곤두세우는 가장 능동적인 준비 태세입니다. 틸리히는 이를 성스러운 공허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신적인 계기가 들어올 수 있는 여백을 만드는 작업으로 보았습니다.


이 비움의 토대 위에서 카이로스는 결단 (Decision)을 요구합니다. 기회의 신 카이로스는 앞머리는 무성하지만 뒷머리는 대머리인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기회가 다가올 때는 잡기 쉽지만,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잡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카이로스는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릴 때, 망설임 없이 자신의 전 존재를 던져 그 순간에 참여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랑을 고백해야 할 때, 사과해야 할 때, 낡은 습관을 끊어내야 할 때, 불의에 저항해야 할 때, 그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크로노스의 관성에 젖어 "다음에 하지"라고 미루는 순간, 카이로스는 사라지고 우리는 다시 무의미한 반복의 굴레로 떨어집니다. 결단은 시간을 자르는 칼입니다. 과거의 인과관계와 미래의 걱정을 단칼에 끊어내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의미에 온전히 몰입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틸리히가 말한 충만한 순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행복이나 쾌락의 순간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고통이나 시련의 모습으로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틸리히는 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서, 그리고 나치즘이라는 거대한 악 앞에서 문명이 붕괴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그 절망적인 위기의 순간이야말로 낡은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는 카이로스임을 직감했습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직, 이별, 병환과 같은 위기는 우리를 크로노스의 안락한 잠에서 흔들어 깨웁니다. 더 이상 기존의 방식대로 살 수 없다는 절박함, 이대로 무너질 것인가 아니면 새롭게 태어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섰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깊은 의미와 대면하게 됩니다. 고통은 우리를 껍데기만 남은 일상에서 끌어내어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세웁니다. 이때 우리가 도망치지 않고 그 고통을 직시하며 새로운 삶의 태도를 선택한다면, 그 고통의 시간은 우리를 성숙시키는 축복의 시간, 즉 카이로스로 변모합니다.


카이로스의 시간관은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효율성의 신화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금이라 부르며, 최소의 시간으로 최대의 성과를 내는 것을 미덕으로 여깁니다. 10년 걸릴 일을 1년에 해치우는 것을 성공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관점에서 보면, 속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밀도와 깊이입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자신의 사명 (Calling)을 깨닫지 못하고 타인의 욕망에 휩쓸려 산다면, 그 인생은 텅 빈 크로노스의 나열일 뿐입니다. 반면 단 하루를 살아도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깨닫고 사랑과 헌신으로 그 시간을 채운다면, 그 하루는 영원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시간을 관리 (Manage)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시간을 창조 (Create)하는 예술가가 되어야 합니다. 스케줄러에 빽빽하게 적힌 일정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것이 삶이 아닙니다. 밥을 먹을 때 밥알의 맛을 온전히 느끼고, 아이와 놀아줄 때 아이의 웃음소리에 완전히 빠져들며, 길을 걸을 때 발바닥에 닿는 대지의 감촉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 이 모든 순간이 잠재적인 카이로스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내는 일상 속에 영원의 씨앗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씨앗을 발견하고 꽃피우는 것은 오직 우리의 깨어있는 의식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할 때, 내가 하는 일을 돈벌이가 아닌 소명으로 대할 때, 물리적 시간의 껍질이 깨지고 그 안에 숨겨진 의미의 빛이 쏟아져 나옵니다.


틸리히의 통찰은 또한 우리에게 역사적 책임감을 일깨웁니다. 카이로스는 개인적인 깨달음의 순간인 동시에, 역사가 성숙하여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적 순간이기도 합니다. 낡은 가치관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새로운 정신이 요구되는 전환기마다 인류는 카이로스를 마주해 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기후 위기, 불평등, 혐오의 확산은 우리 시대가 직면한 거대한 카이로스입니다. 이것은 위기인 동시에, 인류 문명이 생태적이고 포용적인 문명으로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적 징후를 읽어내고 (비움), 그에 응답하여 행동하기로 결단할 때 (참여), 우리는 흘러가는 역사의 방관자가 아니라 역사의 주체로서 영원한 가치를 실현하게 됩니다.


현대인은 시간에 쫓깁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시간에 쫓기는 사람은 시간을 죽이는 사람입니다. 그는 현재를 살지 못하고 늘 미래를 향해 도망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이로스를 사는 사람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신이 허락한 유일한 영원임을 알기에, 그 순간을 충분히 음미하고 누립니다. 차 한 잔을 마시는 짧은 시간에도 우주의 고요를 맛볼 수 있고, 짧은 눈맞춤 속에서도 깊은 연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지 않고도 영원을 사는 비결입니다.


카이로스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심장이 뛰는 이 순간, 눈길이 머무는 그곳에 카이로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쫓기던 발걸음을 멈추고 깊은 숨을 들이쉬며, 자신이 지금 시간을 견디고 있는지 아니면 시간을 살고 있는지 묻는 성찰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짐을 내려놓고, 지금 여기 (Here and Now)에 온전히 존재하기로 결단할 때 비로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 결단의 순간, 째깍거리던 크로노스의 소음은 멈추고 삶은 의미의 선율로 춤추기 시작합니다. 시간은 인간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영원을 조각해 나가는 재료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가 바로 그 기회의 시간, 카이로스입니다.





4-19.3. 지금 여기: 영원한 현재



우리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존재하지 않는 두 영역에서 표류하며 보냅니다. 하나는 이미 지나가 버려 실체가 없는 ‘과거’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아 실체가 없는 ‘미래’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지금 여기’라는 유일한 실재의 공간에 머무르지 못하고, 과거가 남긴 기억의 유령에 붙들려 후회와 원망을 되새기거나, 미래라는 불확실성의 안개를 향해 달려가며 불안과 기대를 투사합니다. 이처럼 과거와 미래라는 허상 속을 방황하는 심리적 상태야말로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의 근원입니다.


독일 출신의 현대 영적 스승 에크하르트 톨레 (Eckhart Tolle, 1948-)는, 이 고통의 구조를 ‘심리적 시간 (Psychological Time)’이라는 개념으로 명료하게 분석합니다. 그는 우리가 이 ‘심리적 시간’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여, 유일하게 실재하는 ‘지금 이 순간 (The Now)’의 힘을 회복할 때만이 진정한 구원과 평화에 이를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톨레의 사상에 따르면, 우리가 ‘나’라고 굳게 믿는 ‘자아 (Ego)’는 이 ‘심리적 시간’을 먹고사는 존재입니다. 에고는 ‘지금 여기’의 생생한 현실 속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에고는 오직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 속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합니다. 에고의 정체성은 ‘과거’의 기억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는 이런 상처를 받았어”, “나는 이런 성공을 이뤘지”,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과거의 이야기 (Story)가 없다면, ‘나’라는 에고는 그 즉시 해체됩니다. 따라서 에고는 끊임없이 과거를 현재로 불러들여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으려 합니다. 특히 ‘원망’이나 ‘죄책감’은 에고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입니다. 과거의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원망을 되새길 때마다, 에고는 “나는 피해자다”라는 정체성을 강화하며 더욱 견고해집니다.


톨레는 이러한 과거의 감정적 고통이 개인의 마음속에 단순히 기억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몸과 에너지장에 축적되어 하나의 독립적인 생명체처럼 작동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것을 ‘고통체 (Pain-Body)’라고 불렀습니다. 고통체는 개인이 과거에 겪었던 모든 고통스러운 경험, 즉 슬픔, 분노, 두려움의 찌꺼기들이 뭉쳐진 것입니다. 이 고통체는 평소에는 잠복해 있다가, 현재의 어떤 사소한 사건이 과거의 상처를 건드리는 순간, 마치 잠자던 괴물이 깨어나듯 활성화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사람은 고통체에 완전히 사로잡혀 (동일시되어), 과거의 감정을 현재에 재현하며 비이성적인 분노나 우울을 쏟아냅니다. 이처럼 에고와 고통체는 ‘과거’라는 시간을 통해 현재의 삶을 끊임없이 파괴합니다.


동시에, 에고는 ‘미래’를 통해 자신의 구원을 약속합니다. 에고는 ‘지금 이 순간’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결핍되어 있다고 속삭입니다. “나는 지금 부족하다. 하지만 미래에 저것을 성취하면 (더 많은 돈, 새로운 연인, 더 높은 지위) 나는 비로소 완전해지고 행복해질 것이다.” 이것이 에고가 만들어내는 가장 강력한 환상입니다. 이 환상 때문에 우리는 ‘지금’을 ‘미래’를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게 됩니다. 현재의 모든 순간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 가야 하는 귀찮은 장애물이 됩니다. 우리는 “언젠가 행복해지겠지”라는 미래의 당근을 좇아 쉴 새 없이 달리지만, 그 ‘미래’는 결코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래’라고 부르는 그 순간이 닥쳤을 때, 그것은 언제나 또 다른 ‘현재’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에고는 이처럼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미래’를 향한 갈망을 통해, 우리를 영원한 불만족의 굴레 속에 가둡니다. ‘불안 (Anxiety)’은 바로 이 ‘현재’와 ‘미래’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감정입니다.


톨레는 이러한 ‘심리적 시간’의 폭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시계 시간 (Clock Time)’과 ‘심리적 시간 (Psychological Time)’을 명확히 구분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시계 시간’은 약속을 정하고, 비행기 스케줄을 맞추며, 요리를 하는 등, 우리가 이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실용적인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과거와 미래를 도구로서 사용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심리적 시간’, 즉 나의 정체성을 과거의 기억과 동일시하고, 나의 구원을 미래의 환상에서 찾는 마음의 습관입니다. 우리가 비워내야 할 것은 바로 이 ‘심리적 시간’입니다. 톨레가 제시하는 해방의 길은, 이 ‘심리적 시간’을 만들어내는 나의 ‘마음 (Mind)’과 나 자신을 분리하는 ‘탈동일시 (Dis-identification)’입니다.


이 ‘탈동일시’는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주의를 기울이는 ‘현존 (Presence)’의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마음 (생각)은 거의 항상 과거나 미래에 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몸’과 ‘호흡’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설거지를 할 때, “어제 그 사람이 나에게 한 말”을 곱씹거나 “내일 해야 할 일”을 걱정하는 대신, 오직 ‘지금’ 손에 닿는 물의 따뜻함, 그릇의 매끄러운 감촉, 거품의 냄새에 모든 주의를 집중해 보십시오. 그 순간, ‘심리적 시간’은 멈추고 우리는 ‘현재’로 돌아옵니다.


톨레는 이 ‘현재’에 대한 자각을 ‘내면의 몸 (Inner Body)’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손끝이나 발끝, 혹은 뱃속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생명 에너지의 흐름을 가만히 느껴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각’에서 ‘감각’으로 주의를 돌릴 때, 우리는 머릿속의 소음에서 벗어나 ‘몸’이라는 실재의 영역에 닻을 내리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생각을 바라보는 자 (Watcher)’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실패자야”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 그 생각과 나를 동일시하여 절망에 빠지는 대신, 한 걸음 물러서서 “아, 내 머릿속에서 ‘나는 실패자야’라는 생각이 지나가고 있구나”라고 그 생각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그 ‘생각’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구름이라면, ‘나’는 그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입니다. 이 ‘관찰하는 의식’이야말로 ‘심리적 시간’에 물들지 않는, ‘참자아 (True Self)’의 현존입니다.


톨레에게 ‘지금 이 순간 (The Now)’은 크로노스 시간의 한 조각이 아닙니다. 과거와 미래는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환상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우리가 유일하게 접근할 수 있는 ‘실재’ 그 자체입니다. 더 나아가, ‘지금 이 순간’은 시간의 흐름 (크로노스)이 일어나는 ‘배경’이자, 영원불변하는 ‘존재 (Being)’의 차원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관문’입니다.

‘존재’란 모든 형태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고 파괴될 수 없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현존할 때, 우리는 생각의 소음을 뚫고 이 근원적인 ‘존재’의 고요함과 연결됩니다.


이 ‘존재’의 차원이 바로 ‘영원 (Eternity)’이며, 이는 ‘무한히 긴 시간 (Endless Time)’이라는 미래적 개념이 아니라, 시간을 완전히 벗어난 상태, 즉 ‘시간이 없는 상태 (Timelessness)’를 의미합니다. 이 ‘시간 없음’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수직적인 깊이를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온전히 깨어있는 것은, 시간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영원한 ‘존재’의 차원에서 숨 쉬는 것이며, 이것이 곧 영원을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처럼 ‘지금 여기’의 즉각적인 현실을 강조하는 톨레의 가르침은, 동양의 선불교 (禪佛敎), 특히 중국 당나라 시대 임제의현 (臨濟義玄, Linji Yixuan, ?~867) 선사의 사상과 놀라울 정도로 깊은 공명을 이룹니다. 『임제록, 臨濟錄』에 담긴 그의 가르침은, ‘심리적 시간’의 가장 강력한 형태인 ‘개념’과 ‘권위’를 타파하려는 치열한 투쟁이었습니다.

임제 선사는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나의 설법을 듣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경전 속의 부처나 역사 속의 조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그대들의 살덩어리 위에 ‘무위진인 (無位眞人)’, 즉 '아무 지위 없는 참사람'이 있어, 쉴 새 없이 그대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이 ‘무위진인’은 사회적 지위나 이름, 과거의 기억으로 규정되는 ‘자아 (Ego)’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개념’과 ‘시간’ 이전에 이미 존재하며, ‘지금 이 순간’ 생생하게 작동하고 있는 ‘순수한 의식 (Awareness)’ 그 자체입니다. 톨레가 말한 ‘현존’이자 ‘참자아’와 정확히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임제 선사의 유명한 외침인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逢佛殺佛 逢祖殺祖, 봉불살불 봉조살조)는, 바로 이 ‘심리적 시간’의 함정을 깨부수라는 명령입니다. 만약 우리가 ‘부처’나 ‘깨달음’을 ‘지금 여기’가 아닌 ‘저 밖’이나 ‘미래’에 존재하는 어떤 ‘대상’이나 ‘목표’로 설정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현재’를 놓치고 ‘환상’을 좇는 노예가 됩니다. ‘부처’라는 개념, ‘깨달음’이라는 ‘미래’의 목표조차도 ‘지금 여기’의 ‘참사람’을 가리는 장애물이기에, 그것마저 죽여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임제 선사가 제자들의 어리석은 질문에 종종 고함을 치거나 (喝, 할) 몽둥이질 (棒, 방)을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폭력적인 행위는 제자들이 ‘과거’의 지식이나 ‘미래’의 깨달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강제로 중단시키고, 그들을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고통과 감각 속으로 되돌려 놓기 위한 충격 요법이었습니다. ‘심리적 시간’이라는 꿈에서 깨어나 ‘현재’라는 실재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톨레와 임제의 가르침은 ‘시간’에 갇혀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근본적인 ‘비움’과 ‘연결’의 길을 제시합니다.


현대인의 불행은 ‘소유’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존재’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을 살지 못하고,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이라는 두 개의 환상에 갇혀 있습니다. ‘비움’이란 바로 이 ‘심리적 시간’이라는 환상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나의 정체성을 규정했던 과거의 이야기들을 내려놓고,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 믿었던 미래에 대한 집착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결’이란, 그 텅 빈 자리에서 유일하게 실재하는 ‘지금 이 순간’과 온전히 만나는 것입니다. 이 ‘현재’와의 연결은 우리를 모든 고통에서 해방시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에 나를 해칠 수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나를 불안하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지금 여기’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 '내가 먹는다'는 자의식은 사라지고 오직 밥 먹는 행위 자체에 온전히 몰입하게 됩니다. 길을 걸을 때, 우리는 걷는다는 감각과 하나가 됩니다. 타인의 말을 들을 때, 판단하는 '나'를 비우고 오직 순수한 '들음'만이 존재합니다. 이처럼 ‘지금 여기’에 온전히 깨어있는 삶은, 하루하루가 영원과 맞닿아 있는 축복이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시간을 ‘견디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사는’ 존재, 나아가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차원을 경험하는 존재가 됩니다.






4-19.4. 지속 (Durée): 창조적 진화의 시간



우리는 시간을 하나의 선 (線) 위에 나란히 놓인 점들로 인식하는 데 익숙합니다. 시계의 초침이 한 칸 한 칸 균일하게 이동하듯, 시간은 과거라는 이미 지나간 점, 현재라는 찰나의 점, 그리고 미래라는 아직 오지 않은 점의 연속적인 나열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공간화된 시간 (Temps spatialisé)’의 관념 속에서, 우리의 삶은 마치 자로 잴 수 있는 직선의 경로처럼 취급됩니다. 어제는 오늘과 분리되어 영원히 사라졌고, 오늘은 내일과 분리되어 곧 사라질 운명입니다. 이처럼 시간을 측정 가능하고 분할할 수 있는 ‘양 (Quantity)’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우리의 지성이 세계를 파악하고 관리하기 위해 고안해낸 매우 유용한 도구입니다. 우리는 이 도구 덕분에 약속을 정하고, 계획을 세우며, 효율성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명료한 계산의 이면에는 우리 존재를 옭아매는 깊은 비극이 숨어 있습니다. 시간을 공간처럼 취급할 때, ‘현재’는 무한히 얇은 칼날에 불과하게 되며, 우리는 결코 ‘지금 여기’에 온전히 머무를 수 없게 됩니다. 또한 ‘과거’는 이미 죽어버린 시체이기에,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상실’의 연속이 됩니다. 1분 1초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는 그 시간을 잃어버리고, 그만큼 죽음에 가까워집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 (Henri Bergson, 1859-1941)은, 이처럼 시간을 공간화하여 파악하는 방식이야말로 우리 지성이 저지른 가장 근본적인 ‘오류’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이 차가운 시계의 시간을 넘어, 우리가 직관을 통해 감지할 수 있는 진짜 시간, 즉 ‘지속 (Durée)’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시간이란 점들의 나열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 속으로 녹아들어 미래를 창조하는 역동적인 힘이며, 나이 듦이란 상실이 아니라 기억의 축적을 통한 영혼의 성숙임을 일깨워줍니다.


베르그송은 인간의 ‘지성 (Intelligence)’이 진리를 파악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지성은 본질적으로 ‘행동’을 위한 도구입니다. 그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 (Homo Sapiens)’ 이전에 ‘도구를 만드는 존재 (Homo Faber)’로 규정합니다. 도구를 만들어 물질세계를 조작하고 살아남기 위해, 지성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고정된 사물’로 파악해야만 했습니다. 쉴 새 없이 흐르고 변화하는 강물 그 자체는 우리가 조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흐름을 순간 ‘정지’시킨 사진처럼, 즉 ‘강’이라는 고정된 ‘개념’으로 파악해야만 그 위에 다리를 놓을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성은 살아있는 실재의 연속적인 ‘흐름’을 잘게 쪼개어, 다루기 쉬운 ‘공간화된 점’들로 재구성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엘레아의 제논 (Zeno of Elea)이 제시한 ‘날아가는 화살의 역설’은 이러한 지성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제논은 날아가는 화살이 과녁에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화살이 과녁에 닿으려면 먼저 경로의 절반을 지나야 하고, 그 절반에 도달하면 또다시 남은 거리의 절반을 지나야 합니다. 이렇게 경로를 계속 나누면 무한히 많은 지점이 나옵니다. 제논은 이 각각의 지점을 하나의 '순간'으로 보았는데, 어떤 순간이든 화살은 그 순간의 한 지점에 정확히 '멈춰' 있습니다. 한 지점에 정지해 있는 물체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순간마다 화살은 정지해 있습니다. 제논은 이처럼 정지한 순간들을 아무리 많이 더한다 해도 결코 '움직임'이 될 수는 없다고 결론 내립니다.


앙리 베르그송은 이 역설이 ‘움직임’ 자체의 불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악하려는 ‘지성’의 오류를 드러낸다고 간파했습니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제논은 화살의 살아있는 ‘움직임 (Mouvement)’ 그 자체를 본 것이 아니라, 화살이 지나간 ‘경로 (Trajet)’라는 ‘공간화된 선’을 움직임과 혼동했던 것입니다. 지성은 본질적으로 살아있는 흐름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지성은 그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마치 사진을 연속으로 찍듯이 그것을 무수히 많은 '정지된 순간'으로 쪼갭니다. 그러나 쪼개진 사진 (순간) 몇 장을 모아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살아있는 영상 (흐름)이 되지는 않습니다.


제논이 본 것은 날아가는 화살이 아니라, 이미 날아간 뒤 공간에 남은 '죽은 흔적 (궤적)'입니다. 그는 그 흔적을 다시 머릿속에서 무한히 나누고, 그 나누어진 각 점에서 화살을 인위적으로 정지시켰습니다. 살아있는 강물의 흐름을 사진으로 찍은 뒤, "이 사진 속의 물은 모두 멈춰 있으므로 강물은 흐르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활을 쏘는 사람은 그 전체의 흐름, 살아있는 추진력을 몸으로 느끼기에 화살이 과녁에 꽂히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제논의 논리는 머릿속에서만 통할 뿐, 활시위가 튕기는 실제 경험 앞에서는 힘을 잃습니다.


결국 제논의 역설은 움직임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우리 지성이 움직임을 ‘공간’으로 환원하여 이해하려고 들기 때문에 생긴 착각입니다. 베르그송은 진짜 움직임은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이며, 그것은 지성으로 쪼개는 순간 그 본질이 사라져 버린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시간의 문제에 있어서도 제논과 똑같은 오류를 저지릅니다. 우리는 시간이 흘러간 ‘경로’, 즉 시계의 눈금이나 달력의 네모 칸을 ‘시간 그 자체’라고 착각합니다. 우리는 이 측정 가능한 '공간화된 시간'을 마치 제논이 화살의 궤적을 쪼개었듯이, '순간'이라는 점들로 무한히 나눕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있는 존재로서 경험하는 진짜 시간은 그렇게 쪼갤 수 없습니다. 베르그송은 이 살아있는 시간을 ‘지속 (Durée)’, 즉 ‘실재적 지속’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지속’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지성이 아닌 다른 능력이 필요하며, 베르그송은 그것을 ‘직관 (Intui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직관은 대상을 밖에서 분석하는 지성과 달리, 대상의 ‘안으로’ 들어가 그 고유한 흐름과 하나가 되는 공감적 능력입니다.


이 직관을 통해 파악된 ‘지속’은 공간화된 시간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가집니다.


첫째, 지속은 ‘질적 (Qualitative)’입니다. 시계의 시간은 1분이든 1시간이든 동일한 양 (Quantity)으로 측정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밀도는 결코 균일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1분은 지루한 억겁처럼 길게 느껴지지만, 깊은 몰입 속에서 보낸 1시간은 찰나처럼 짧게 느껴집니다. 시간은 숫자가 아니라 ‘느낌’의 강도입니다.


둘째, 지속은 ‘이질적 (Heterogeneous)’입니다. 시계의 시간은 5시 1분과 5시 2분이 똑같은 60초의 간격으로 나열된 ‘동질적’인 점들입니다. 하지만 ‘지속’의 세계에서 5시 2분은 5시 1분과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5시 2분의 ‘나’는 5시 1분의 ‘나’와 그 ‘기억’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마치 눈덩이가 굴러가면서 점점 더 커지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 계속해서 ‘축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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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지속은 ‘불가분 (Indivisible)’입니다. 시계의 시간은 초, 분, 시로 마음대로 쪼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속’은 하나의 ‘흐름’이기에 쪼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멜로디’를 듣는 경험을 생각해 보면 명확해집니다. 멜로디는 개별적인 ‘음표’들의 단순한 합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멜로디를 음표 단위로 쪼개어 하나씩 따로 듣는다면, 그곳에는 멜로디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멜로디는 앞의 음표가 뒤의 음표 속으로 녹아들고, 뒤의 음표가 앞의 음표를 예비하는, 그 ‘연속적인 흐름’ 그 자체로서만 존재합니다. 우리의 의식과 삶 또한 이 멜로디와 같습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칼로 자르듯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과거는 현재 속으로 스며들어 현재의 음색을 결정하고, 현재는 미래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속’의 본질입니다.


이 ‘지속’의 개념은 우리가 ‘기억 (Memory)’을 이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보통 기억이 뇌의 특정 서랍 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과거의 사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그의 또 다른 주저 『물질과 기억, Matière et Mémoire』에서, 이러한 통념이 ‘공간화된 시간’의 관점에서 비롯된 오류라고 비판합니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과거’는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그 자체로 ‘존재’합니다. 뇌는 기억을 ‘저장’하는 창고가 아니라, ‘현재의 행동’을 위해 그 방대한 과거의 기억을 ‘필터링’하는 장치입니다. 그는 이 관계를 ‘기억의 원뿔 (Cone of Memory)’이라는 유명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이 원뿔의 거대하고 넓은 ‘바닥’은 우리가 살아온 ‘모든 과거의 총체’, 즉 ‘순수 기억 (Pure Memory)’입니다. 이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합니다. 반면, 원뿔의 뾰족한 ‘꼭짓점’은 ‘지금 여기’에서 물질세계와 접촉하는 ‘현재의 신체 (뇌)’이자 ‘행동’의 지점입니다.


우리의 뇌는 이 거대한 원뿔의 바닥 (과거)이 꼭짓점 (현재)으로 쏟아져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필터’ 혹은 ‘감쇠기’ 역할을 합니다. 만약 과거의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현재의 의식으로 밀려 들어온다면, 우리는 압도당하여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뇌는 ‘지금 여기’의 생존과 행동에 ‘유용한’ 극히 일부의 기억만을 선별하여 현재의 의식으로 불러냅니다. 즉, 우리가 ‘기억한다’고 말하는 것은 뇌가 기억을 저장해서가 아니라, 뇌가 거대한 과거의 기억을 ‘차단’하고 ‘선별’하는 능력 덕분입니다.


이러한 베르그송의 기억 이론은 ‘나이 듦 (Aging)’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공간화된 시간’의 관점에서, 나이 듦은 ‘상실’입니다. 매 순간이 사라져가고, 젊음은 스러지며, 기억력 (뇌의 기능)은 쇠퇴합니다. 늙음은 텅 비어가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지속’의 관점에서, 나이 듦은 ‘상실’이 아니라 ‘축적’입니다. 과거가 사라지지 않고 현재에 계속 쌓인다면, 노인이야말로 가장 ‘가득 찬’ 존재입니다. 그는 가장 많은 과거, 즉 가장 풍부한 ‘지속’을 자신의 존재 안에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노화 현상으로 관찰하는 ‘기억력 감퇴’는, ‘기억 그 자체 (순수 기억)’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현재의 행동’을 위해 그 기억을 불러내는 ‘뇌’라는 ‘물질적 메커니즘’이 쇠퇴한 것일 뿐입니다. 그의 영혼, 즉 그가 살아온 ‘지속의 총체’는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깊습니다. 나이 듦은 쇠퇴가 아니라 ‘영혼의 성숙’ 과정입니다.


더 나아가, 베르그송은 이 ‘지속’의 원리가 인간의 내면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힘이라고 보았습니다. 그의 저서 『창조적 진화, L'Évolution créatrice』는 이 우주가 뉴턴의 기계론처럼, 이미 정해진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닫힌 시스템’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우주는 ‘창조’하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베르그송은 이 우주적 창조의 힘을 ‘엘랑 비탈 (Élan Vital)’, 즉 ‘생명의 약동’이라고 불렀습니다. ‘엘랑 비탈’은 이 우주가 정지된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관성을 거슬러 올라가며 ‘새로운 것 (Novelty)’을 창조해내려는 근원적인 충동입니다. 이 ‘생명의 약동’이 바로 우주적 차원의 ‘지속’입니다. 이 관점에서 ‘진화’는 단순히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수동적인 과정 (다윈주의)이 아닙니다. 그것은 ‘엘랑 비탈’이 물질의 저항을 뚫고 자신을 표현하려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발명’의 과정입니다.


‘창조적 진화’의 세계에서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미래는 근본적으로 ‘예측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지속’은 과거를 현재로 끌어안아,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을 매 순간 창조해내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이미 그려진 지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도 자체를 그려나가는 행위입니다.


앙리 베르그송의 이 ‘지속’의 철학은 시간에 쫓기며 소진되어가는 현대인들에게, 우리가 시계의 논리, 즉 ‘지성’이 만든 ‘공간화된 시간’의 감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삶을 ‘관리’하려는 오만을 비워내야 합니다. 시간을 1분 1초 단위로 쪼개어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는 강박은, 우리를 ‘지속’의 흐름에서 분리시킵니다. 우리는 ‘삶의 주파수’를 잃어버리고, 기계의 주파수에 갇혀 불안해합니다.


대신 우리는 ‘직관’을 통해 ‘지금 이 순간’의 질적인 깊이와 다시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현재를 즐기라는 쾌락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라는 이 순간이, 내가 살아온 ‘모든 과거’를 품고 있으며, ‘모든 미래’를 잉태하는 유일한 실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속’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 흐름과 함께 춤추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을 비워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젊음’을 숭배하고 ‘늙음’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합니다. 하지만 베르그송의 지혜는, 늙음이 ‘상실’이 아니라 ‘완성’에 가까워지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주름 하나하나는 사라진 시간이 아니라, 축적된 기억의 훈장입니다. 뇌의 기능은 쇠퇴할지라도, 존재의 밀도는 더욱 짙어집니다. 나이 듦은 ‘기억의 축적’이자 ‘영혼의 성숙’입니다.


결국 베르그송의 철학은 ‘존재 (Being)’가 아니라 ‘생성 (Becoming)’의 철학입니다. 삶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창조적인 ‘흐름’입니다. 우리는 이 흐름을 거스르려 애쓰는 대신, 그 흐름의 일부가 되어 자신을 창조해 나가야 합니다. 시간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적이 아니라, 우리가 영원을 창조하는 재료입니다.





4-19.5. 영원회귀: 성 (聖)과 속 (俗)의 시간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보이지 않는 화살에 쫓기듯 살아갑니다. 시계의 초침은 멈추지 않고 똑딱거리며 우리를 미래라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으로 떠밀어 보냅니다. 현대인에게 시간이란 직선 위를 달리는 맹목적인 폭주 기관차와 같습니다. 어제는 영원히 사라졌고, 오늘은 곧 과거가 되며, 내일은 알 수 없는 불안으로 다가옵니다. 이 직선적인 시간관, 즉 과거에서 미래로 일방통행하는 역사적 시간 속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늙음은 슬픈 퇴화이고, 죽음은 모든 것의 끝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아껴야' 하고 '관리해야' 하는 희소 자원으로 여기며,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지 못해 안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의 폭력성 앞에서 루마니아의 종교학자이자 철학자인 미르체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 1907-1986)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시간, 즉 태초의 생명력이 펄떡이는 '성스러운 시간'으로의 문을 열어줍니다. 그가 말하는 '영원회귀 (Eternal Return)'는 니체가 말한 동일한 운명의 반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직선의 시간을 뚫고 들어가, 생명이 처음 시작되던 그 충만한 원점으로 되돌아가 우리 존재를 씻어내고 재생시키는 구원의 제의입니다. 엘리아데의 통찰은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우리의 일상적인 행위들—밥을 먹고, 몸을 씻고, 잠을 자는 일—이 어떻게 거룩한 의례가 되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엘리아데는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을 두 가지로 명확하게 구분합니다. 하나는 '속 (俗, Profane)의 시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출근 시간을 맞추기 위해 서두르고, 마감 기한에 쫓기며, 지루하게 흘러가는 회의 시간 같은 것입니다. 이 시간은 균질하고, 되돌릴 수 없으며,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흐릅니다. 여기에는 '마모'와 '소멸'만이 존재합니다. 속의 시간 속에 갇힌 인간은 '역사의 공포 (Terror of History)'에 시달립니다. 자신의 삶이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려 무의미하게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엘리아데가 말한 '역사의 공포 (Terror of History)'는 단순히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직선적이고 비가역적인 시간 속에 던져진 인간이 겪는, 존재론적인 현기증이자 근원적인 불안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시간은 둥글게 순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올해 봄이 가더라도 내년이면 다시 봄이 오듯, 모든 것은 원점으로 되돌아와 재생될 수 있었습니다.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낡아지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그들을 지탱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이 발 딛고 선 '속 (俗)의 시간', 즉 '역사적 시간'은 가차 없는 직선입니다. 이 화살은 과거에서 미래로 단 한 번만 날아갑니다. 지나간 1초는 영원히 되돌릴 수 없고,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습니다.


이 '비가역성 (Irreversibility)'이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합니다. 우리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고, 그 결과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이라는 후회는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역사적 시간 속에서 모든 사건은 '일회성'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과거라는 무덤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는 이 거대한 소멸의 행렬 속에서 나의 존재가 한 줌의 먼지처럼 흔적도 없이 잊힐지 모른다는 허무함, 즉 '무의미의 심연'을 마주하게 됩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 역사적 시간이 '맹목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신화가 사라진 세계에서 사건들은 더 이상 신의 뜻이나 우주적 질서 (코스모스)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전쟁, 기근, 사고, 그리고 개인의 불행은 그저 우연히, 아무런 이유 없이 일어나는 '사건'일 뿐입니다. 우리는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려 있으면서도, 도대체 왜 내가 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이 고통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답을 찾지 못합니다. 의미를 찾지 못한 고통, 구원받지 못한 비극, 이것이 바로 엘리아데가 진단한 현대인의 지옥, '역사의 공포'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질주하지만, 그 끝에는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벽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현재의 삶조차 불안과 권태로 얼룩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아데는 인간에게는 이 속된 시간을 정지시키고, 전혀 다른 차원으로 진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다른 차원이 바로 '성 (聖, Sacred)의 시간'입니다. 성스러운 시간은 달력이나 시계로 잴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것은 태초의 시간, 즉 신들이 세상을 창조하고 영웅들이 과업을 달성했던 '그때 그 시간 (in illo tempore)'입니다. 엘리아데는 이를 '일루드 템푸스 (Illud Tempus)'라고 불렀습니다. 신화적 시간인 ‘일루드 템푸스’는 과거에 박제된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든 우리가 의례 (Ritual)를 통해 불러내면 '지금 여기'로 뚫고 들어와 현재를 다시 태초의 싱싱한 생명력으로 채우는 '영원한 현재'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삶은 이 '성스러운 시간'으로의 끊임없는 회귀였습니다. 그들은 농사를 짓거나 집을 지을 때, 단순히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들이 세상을 창조했던 행위를 '모방'하고 '반복'한다고 믿었습니다. 씨앗을 뿌리는 농부는 대지의 여신에게 생명을 맡기는 사제가 되고, 집을 짓는 목수는 혼돈 속에 질서를 세우는 조물주가 됩니다. 그들에게 모든 중요한 행위는 인간이 제멋대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태초에 신이 보여준 모범 (Archetype, 원형)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아데가 말한 '영원회귀의 신화'입니다. 그들은 주기적인 의례와 축제를 통해 낡고 더러워진 '속의 시간'을 폐기하고, 세상이 처음 생겨났던 그 순수한 '기원'으로 돌아가 삶을 '재생 (Regeneration)'시켰습니다. 그들에게 시간은 죽음을 향해 달리는 직선이 아니라, 끊임없이 원점으로 돌아와 새로워지는 원 (Circle)이었습니다.


현대인은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존재라 믿으며 신화를 버렸습니다. 우리는 '탈신화화'된 세계, 즉 신성이 제거된 삭막한 현실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태초의 시간을 믿지 않고, 오직 진보와 미래만을 숭배합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우리는 '존재의 뿌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의 노동은 신성한 창조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고역이 되었고, 우리의 식사는 신과의 교감이 아니라 칼로리 섭취가 되었으며, 우리의 성 (性)은 생명의 신비를 위한 의례가 아니라 쾌락의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모든 행위가 '성스러움'을 잃고 '속됨'으로 추락했을 때, 삶은 무의미한 반복과 권태의 감옥이 됩니다. 이것이 현대인이 겪는 실존적 공허의 원인입니다.


하지만 엘리아데는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호모 렐리기오수스 (Homo Religiosus, 종교적 인간)'의 본성이 잠재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성스러움을 갈망합니다. 새해가 되면 해돋이를 보며 새로운 다짐을 하는 것, 생일날 촛불을 끄며 소원을 비는 것,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엄숙한 의식을 치르는 것 등은 모두 우리가 '속의 시간'을 찢고 '성의 시간 (새로운 시작)'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몸부림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낡은 시간을 폐기하고 새롭게 태어나기를 원합니다. 엘리아데의 통찰은, 우리가 이 무의식적인 갈망을 의식적인 '삶의 기술'로 승화시킬 때 비로소 일상의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어떻게 이 '성스러운 시간'을 회복하고 '영원회귀'를 실천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특별한 종교를 갖거나 신비한 체험을 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밥을 먹고, 씻고, 청소하고, 걷는 우리의 가장 평범하고 진부한 일상적 행위들에 '원형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하나의 '의례 (Ritual)'로 수행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먼저 '씻는 행위'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매일 아침 샤워를 합니다. 속의 시간에서 이것은 단순히 몸의 때를 벗겨내고 잠을 깨는 위생 활동일 뿐입니다. 하지만 영원회귀의 관점에서 씻음은 '정화 (Purification)'이자 '재탄생'입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며,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혹은 형체가 없는 태초의 바다로 돌아가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아침에 얼굴에 물을 끼얹을 때, "나는 어제의 낡은 먼지와 피로를 씻어내고, 태초의 순수한 생명력을 받아들여 새롭게 태어난다"고 의식해 보십시오. 그 순간 욕실은 성소 (聖所)가 되고, 수돗물은 성수 (聖水)가 되며, 씻는 행위는 당신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 세례식이 됩니다. 당신은 단순히 몸을 씻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오염을 씻어내고 '기원'의 시간과 접속하는 것입니다.


'먹는 행위' 또한 가장 강력한 성사 (Sacrament)가 될 수 있습니다. 현대인에게 식사는 종종 스마트폰을 보며 허기를 채우는 무의식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엘리아데의 눈으로 보면, 먹는다는 것은 외부의 생명을 내 안으로 받아들여 나의 생명으로 전환시키는 신비로운 '변용 (Transubstantiation)'의 과정입니다. 쌀 한 톨, 사과 한 알에는 태양의 에너지와 대지의 양분, 농부의 정성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식탁 앞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이 음식이 내게 오기까지의 우주적 여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 음식을 먹음으로써 내가 우주와 하나가 되고,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받아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사실에 감사하십시오. 이렇게 먹을 때, 식사는 단순한 섭식이 아니라 신성한 '코뮤니온 (Communion, 영적 교감)'이 됩니다. 당신은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먹는 것이며, 생명의 제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집을 돌보는 행위', 즉 청소와 정리 정돈 역시 우주적 차원의 의미를 가집니다. 엘리아데는 집을 '세계의 중심 (Axis Mundi)'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보았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집을 짓는 것은 혼돈 (Chaos) 속에 질서 (Cosmos)를 세우는 창조 행위의 재현이었습니다. 우리가 방을 쓸고 닦으며 어지러운 물건들을 정리할 때, 우리는 단순히 먼지를 치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 마음과 생활의 무질서를 바로잡고, 나만의 소우주 (Microcosm)에 질서를 부여하여 신성한 공간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청소는 귀찮은 가사 노동이 아니라, 혼돈과 싸워 삶의 질서를 수호하는 거룩한 투쟁이자 수행입니다. 걸레질 한 번에 마음의 번뇌를 닦아내고, 창문을 열어 환기할 때 묵은 감정을 내보내십시오. 집이 정갈해질 때 당신의 영혼도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심지어 '잠자는 행위'조차도 영원회귀의 신비 속에 있습니다. 잠은 매일 밤 겪는 '작은 죽음'입니다. 우리는 잠들 때 의식을 놓고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아침에 깨어날 때 다시 세상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죽음과 부활, 밤과 낮, 혼돈과 창조의 영원한 순환을 몸으로 겪는 일입니다. 잠자리에 들 때, 하루의 모든 짐과 걱정을 내려놓고 기꺼이 어둠 속으로 투신하십시오. 그것은 내일 아침 새로운 태양과 함께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부활하기 위한 필수적인 소멸입니다. 엘리아데에게 잠은 단순히 피로 회복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인 깊은 어둠 속에서 영혼을 재충전하는 회귀의 시간입니다.


이처럼 엘리아데의 '영원회귀'는 우리에게 일상을 '성수 (聖水)'로 축성 (祝聖)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합니다. 속된 것과 성스러운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속'은 언제든지 '성'으로 변모할 수 있습니다 (성현, Hierophany). 이것이 바로 엘리아데가 말한 '성스러움의 변증법'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돌멩이도 누군가에게는 신의 현현이 될 수 있듯, 우리의 지루한 일상도 '의미'를 부여하고 '원형'과 연결하는 순간 기적의 현장이 됩니다.


우리가 겪는 '진부함'은 사실 '반복'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반복 속에 담긴 '신성한 의미'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해는 매일 뜨지만, 그 해는 어제의 해가 아닙니다. 매일 먹는 밥이지만, 오늘의 밥은 오늘의 새로운 생명입니다. 반복을 지루함이 아니라 '리듬'으로, 기계적인 되풀이가 아니라 생명의 '고동'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직선적 시간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엘리아데는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이 바로 이 '중심'과 '기원'에 대한 감각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우리는 중심을 잃고 주변을 맴돌며, 기원을 잊고 미래로만 내달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바쁘지만 늘 공허합니다. '영원회귀'는 우리에게 멈추어 서서 '중심'으로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우주적 생명의 드라마 속에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커피 물을 끓이는 그 순간, 당신은 불을 사용하는 최초의 인류와 연결됩니다. 당신이 아이를 안아주는 그 순간, 당신은 생명을 보살피는 대지의 여신과 연결됩니다. 당신이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는 그 순간, 당신은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영웅의 원형과 연결됩니다. 당신의 모든 행위는 수만 년 동안 인류가 반복해 온 거룩한 몸짓의 재현입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며, 당신의 삶은 사소하지 않습니다.


시계의 초침 소리에서 잠시 벗어날 때, 우리는 행위 속에 깃든 영원의 무게를 감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에 쫓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인이 되어 창조하는 의미의 시간, 즉 ‘카이로스’를 살아가는 일입니다. 밥을 먹고, 몸을 씻고, 일하고, 사랑하는 그 모든 지극히 평범한 순간들이, 실은 우주가 우리를 통해 거행하는 거룩한 의식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무의미하고 초라하게만 보였던 일상은 그 자체로 신성한 의미를 지닌 순간으로 변모합니다. 태초의 신성한 시간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숨 쉬고 있는 바로 이곳이 태초이며,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신성한 시간의 주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엘리아데의 영원회귀가 우리에게 드러내는, 일상을 구원하는 가장 내밀한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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