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1장: 예술과 창조 - 삶을 예술로 빚기

by 이호창

제5-21장: 예술과 창조 - 삶을 예술로 빚기



5-21.1. 고독과 창조: 예술가의 길



현대인에게 고독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잠시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해 스마트폰 화면을 켜고, 끊임없이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의미 없는 소음으로 침묵을 채웁니다.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곧 도태되는 것이며, 실패한 인간관계의 증거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술의 역사는 정반대의 진실을 증언합니다. 위대한 창조는 언제나 철저한 고독 속에서 잉태되었습니다. 고독은 단순히 외로운 상태가 아니라, 내면의 깊은 우물에서 새로운 영감을 길어 올리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이자 창조의 산실입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 1875-1926)는 그의 유일한 장편 소설 『말테 라우리즈 브리게의 수기, 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를 통해, 이 고독이 어떻게 예술가의 영혼을 단련시키고 삶을 예술로 승화시키는지를 처절하고도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말테 라우리즈 브리게의 수기』의 주인공 말테는 덴마크 출신의 젊은 시인으로, 예술적 영감을 찾아 파리로 옵니다. 하지만 그가 파리에서 마주한 것은 낭만적인 예술의 도시가 아니라, 병원, 죽음, 가난, 그리고 공포가 득실거리는 비참한 현실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도시의 소음과 군중 속에서 말테는 철저히 고립됩니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 역시 누구와도 대화를 나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릴케는 이 극한의 고독 속에서 말테가 겪는 내면의 변화를 포착합니다. 말테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수기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Ich lerne sehen)."


여기서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흔히 눈을 뜨고 있으면 세상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릴케에게 있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행위는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물의 겉모습을 스치듯 확인하고 기존의 개념으로 분류하는 ‘인식’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나무를 보고 "저것은 나무다"라고 이름 붙인 뒤 곧바로 관심을 거둡니다. 이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의 틀에 대상을 가두는 행위입니다.


반면 말테가 배우기 시작한 ‘봄 (seeing)’은 이러한 관습적인 인식을 멈추고, 사물과 세계가 자신의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하는 ‘비움’의 태도입니다. 그것은 나의 편견, 나의 지식, 나의 성급한 판단을 비워내고, 대상이 가진 고유한 존재감이 드러날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리는 응시입니다. 말테는 거리의 병자, 무너져가는 벽,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피하지 않고 응시합니다. 그가 절대적인 고독 속에 있었기에, 즉 타인과의 수다나 사회적 관계망 속에 숨을 수 없었기에, 그는 세상의 비참함과 아름다움을 여과 없이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처럼 고독은 우리를 보호하고 있던 일상의 막을 걷어내고, 날것 그대로의 세계와 대면하게 만드는 가혹하지만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릴케는 이러한 고독 속에서의 체험이 어떻게 예술이 되는지를 『말테 라우리즈 브리게의 수기』의 가장 유명한 구절을 통해 설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詩)나 예술이 ‘감정’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플 때 시를 쓰고, 기플 때 노래를 부른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릴케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시는 감정이 아니다. 시는 경험이다."


그에 따르면, 단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도시와 사람들과 사물들을 보아야 합니다. 동물들을 알아야 하고, 새들이 어떻게 나는지 느껴야 하며, 아침에 꽃이 피어나는 그 작은 움직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경험’들이 기억 속에 저장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릴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단순히 기억을 갖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 기억들이 너무 많아지면 우리는 그것을 잊을 수 있는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그 기억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억 그 자체는 아직 예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경험과 기억들이 우리 안에서 "피가 되고 (Blut), 눈짓이 되고 (Blick), 몸짓 (Gebärde)"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들이 이름 없는 상태가 되어 더 이상 '나' 자신과 구별되지 않을 때, 즉 나의 전 존재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어 육화 (Incarnation) 되었을 때, 비로소 그 한가운데서 시의 첫 단어가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성에 대한 놀라운 통찰입니다. 창조는 번뜩이는 영감이나 천재성의 소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외부의 경험을 내면의 가장 깊은 곳까지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존재와 하나가 될 때까지 숙성시키는 지난한 인내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 숙성의 과정은 오직 ‘자발적 고독’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세상의 소음과 타인의 시선에 끊임없이 노출된 상태에서는, 어떤 경험도 우리 내면의 '피'가 될 만큼 깊이 스며들지 못합니다. 정보는 흘러가고, 감정은 소비되며, 경험은 휘발됩니다. 현대인들이 그토록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소비하면서도 정작 깊이 있는 사유나 창조적인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을 ‘소화’할 시간을 갖지 못합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멍하니 있는 시간, 산책하며 사색하는 시간, 즉 고독의 시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의 경험은 ‘나’와 융합되지 못하고 겉도는 정보 파편으로 남을 뿐입니다.


릴케가 말하는 예술가의 길은, 따라서 특정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모든 인간에게 요구되는 태도입니다. 삶을 예술로 빚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 성공과 실패라는 모든 경험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그것을 내면의 용광로에 넣어 ‘나만의 고유한 무늬’로 주조해 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고독할 수 있는 능력 (Capacity to be alone)’을 회복해야 합니다. 영국의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콧 (Donald Winnicott)은 이 능력을 정서적 성숙의 가장 중요한 지표로 보았습니다. 혼자 있을 때 불안해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내면과 편안하게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창조성의 원천입니다. 고독은 단절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인이라는 거울 없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힘이며, 그 힘을 바탕으로 세상과 더 깊고 진실하게 연결되기 위한 준비입니다.


릴케는 19세의 어떤 시인 지망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당신의 고독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 고독이 만들어내는 통증을 아름답게 울리는 노래로 만드십시오."


고독은 아픕니다. 그것은 단순히 심심하다는 느낌이 아닙니다. 타인의 칭찬이나 사회적 지위, 바쁜 스케줄과 끊임없는 가십 등 우리가 평소 의지하던 외부의 지지대들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 오직 벌거벗은 ‘나’만 덩그러니 남겨지기 때문입니다. 그 적막함 속에서는 우리가 그동안 외면하고 싶어서 깊이 감추어두었던 불안, 열등감, 그리고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이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마치 마취가 풀리듯, 외로움은 내면의 가장 아픈 곳을 찌릅니다.


하지만 릴케는 그 시인 지망생에게 그 통증을 피하려 하거나, 다시 사람 틈으로 도망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가 보기에 그 통증은 '병'이 아니라 '성장통'이기 때문입니다.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가 껍질을 부수는 고통을 겪어야 하듯, 우리 내면의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낡은 자아를 감싸고 있던 껍질이 깨지는 아픔을 겪어야 합니다. 고독의 통증은 바로 그 산통 (産痛)입니다. 이 아픔을 견디고 응시할 때, 비명 같던 고통은 비로소 깊고 아름다운 노래가 되어 세상에 울려 퍼지게 됩니다.


우리가 예술가처럼 산다는 것은, 일상의 순간순간을 ‘보는 법’을 배우는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출근길에 마주치는 가로수의 변화를, 동료의 얼굴에 스친 미세한 그늘을, 밥을 먹을 때 느껴지는 쌀알의 감촉을, 섬세하게 감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 중 잠시라도 세상과의 연결을 끊고, 그 경험들이 내 안에서 어떤 울림을 만들어내는지 귀 기울이는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이 비움과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스쳐 지나갈 뻔했던 평범한 일상은 ‘의미’를 입고 되살아납니다. 남들이 보기에 하찮은 것들이 나에게는 소중한 보석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심코 지나치던 ‘배경’을 ‘전경’으로 끌어올려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릴케의 소설 속 말테가 파리의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그것을 위대한 문학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 고독을 견디며 세상을 깊이 들이마신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혼자였기에 세상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깨어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민한 감각으로 거리의 고통과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주했습니다. 이렇게 뼛속 깊이 스며든 경험들이 그의 내면에서 차곡차곡 쌓여, 마침내 위대한 문학이라는 꽃으로 피어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이 연결되어 있기에 오히려 분절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구경하느라 자신의 삶을 응시할 시간을 잃었습니다. 릴케의 호소는 지금 우리에게 더욱 절실합니다.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고요한 심연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그곳은 텅 빈 곳이 아니라, 당신의 영혼이 쉴 수 있는 자궁이며, 당신만의 고유한 삶이 잉태되는 가장 창조적인 공간입니다. 외부의 인정을 구걸하는 분주함을 멈추고 (비움), 내면의 목소리와 깊이 만날 때 (연결), 당신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술가가 걷는 고독의 길이며, 우리 모두가 걸어가야 할 삶의 길입니다.





5-21.2. 미적 체험: 대상과 하나 되기



우리는 흔히 예술을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유리관 속에 안전하게 모셔진 값비싼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일상과 분리된 고상한 취미이며, 특별한 재능을 가진 천재들만이 만들고 비평가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난해한 영역이라고 여깁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평범한 우리들의 일상은 예술이 부재한 잿빛 산문 (Prose)이고, 예술은 주말에나 잠시 시간을 내어 감상하는 화려한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 (John Dewey, 1859-1952)는 이러한 예술과 일상의 분리야말로 현대 문명이 앓고 있는 가장 심각한 병리라고 진단했습니다. 그의 기념비적인 저작 『경험으로서의 예술, Art as Experience』은 예술을 액자 속에서 꺼내어,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생생한 ‘경험’ 한복판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시도입니다. 듀이에게 미적 체험은 캔버스를 바라볼 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대상과 온전하게 만나 ‘하나가 되는’ 모든 순간에 깃드는 생명의 절정입니다.


듀이는 예술의 뿌리를 박물관이 아닌, ‘살아있는 생명체 (Live Creature)’가 환경과 맺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에서 찾습니다. 야생의 동물이 숲속에서 먹잇감을 쫓거나 위험을 감지할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 순간 동물의 모든 감각은 최고조로 깨어 있고, 근육은 긴장과 이완의 리듬을 타며,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상황은 완벽하게 통합됩니다. 거기에는 딴청을 피우거나 지루해할 틈이 없습니다. 생명체와 환경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고, 오직 ‘행위’와 ‘흐름’만이 존재하는 이 완전한 몰입의 상태, 이것이 바로 미적 체험의 원형입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깊이 빠져들어 주변과 나 사이의 거리감을 잊을 때, 우리는 가장 동물적이면서도 가장 영적인 상태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대인의 일상은 이러한 통합된 경험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경험은 대부분 파편화되어 있고, 중단되며, 산만합니다. 일을 하면서 점심 메뉴를 걱정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스마트폰을 힐끔거립니다. 시작은 있지만 끝맺음이 없고, 행위는 있지만 감동이 없습니다. 듀이는 이런 상태를 ‘마취된 (Anesthetic)’ 상태라고 불렀습니다. 감각이 무뎌지고, 나와 세상이 겉돌며, 삶의 의미가 조각난 채 흩어지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살아가고는 있지만, 진정으로 ‘경험’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듀이가 말하는 진정한 ‘미적 체험’은 다릅니다. 그것은 그저 흘러가 버리는 시간의 파편이 아니라, 뚜렷한 시작과 과정, 그리고 명확한 마무리를 갖춘 ‘하나의 온전한 경험 (An Experience)’입니다.


예를 들어, 정성껏 차린 식사를 마지막 한 입까지 음미하며 남김없이 다 먹었을 때, 거친 폭풍우를 뚫고 마침내 고요한 항구에 닿았을 때, 혹은 복잡한 문제를 풀고 명쾌한 해답을 얻었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이 순간들은 산만하게 흩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돌아보며 “그래, 그건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꽉 찬 충만감과 내적인 통일성을 느낍니다.


이러한 통일성은 ‘나’라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객체가 서로 겉돌지 않을 때 탄생합니다. 나와 대상이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며 마침내 하나로 융합될 때, 그 경험은 비로소 미적인 차원으로 완성됩니다.


이 융합의 핵심 원리는 ‘행함 (Doing)’과 ‘겪음 (Undergoing)’의 리듬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술을 감상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듀이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본다는 것은 렌즈에 빛이 맺히는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나의 과거와 기억, 에너지를 투입하여 대상을 재구성하는 적극적인 ‘행함’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내가 쏟아부은 에너지에 대해 대상이 반응하는 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겪음’을 경험합니다. 조각가가 돌을 쪼는 것은 ‘행함’이지만, 돌의 결이 저항하거나 쪼개지는 느낌을 손끝으로 감지하는 것은 ‘겪음’입니다. 이 행함과 겪음이 분리되지 않고 호흡처럼 주고받으며 고조될 때, 우리는 ‘대상과 내가 함께 춤추는 듯한’ 일치감을 느낍니다.


이러한 미적 체험의 절정에서 일어나는 가장 신비로운 현상이 바로 ‘몰아 (沒我, Self-forgetfulness)’입니다. 우리가 흔히 ‘나’라고 부르는 것은, 세상을 나와 분리된 대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고, 이용하려는 ‘자아 (Ego)’입니다. 이 자아는 끊임없이 “이건 나에게 이득인가?”, “이건 예쁜가?”,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볼까?”라고 재잘거리며 경험의 순수성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압도적인 아름다움 앞에서는, 혹은 깊은 몰입의 순간에는 이 시끄러운 자아가 침묵하게 됩니다.


장엄한 일몰 앞에 섰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태양이 붉게 물들며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그 순간, 우리는 “나는 지금 일몰을 보고 있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는 나’는 사라지고, 오직 ‘붉게 타오르는 현존’만이 남습니다. 듀이는 이 순간을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이 붕괴되고, 인간과 세계가 본래의 하나 됨을 회복하는 순간이라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우주만큼 확장되는 것입니다. 나를 가두고 있던 좁은 자의식의 껍질이 깨지고, 대상의 생명력이 내 안으로 밀려 들어와 내가 곧 그 대상이 되는 물아일체 (物我一體)의 경지입니다.


이때 우리는 대상을 ‘소유’하거나 ‘분석’하지 않습니다. 그저 대상의 존재 방식에 동참합니다. 꽃을 볼 때는 꽃의 피어남이 되고, 강물을 볼 때는 강물의 흐름이 됩니다. 듀이는 이러한 공감적 융합이야말로 지적인 분석보다 훨씬 더 깊게 본질을 파악하는 앎의 방식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분석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하나가 됨으로써 알게 되듯이, 미적 체험은 세상을 머리가 아닌 ‘존재’로 껴안는 것입니다.


따라서 듀이에게 예술가의 작업은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농부가 땅의 성질을 이해하고 씨앗을 심어 결실을 맺는 과정, 교사가 학생의 눈높이에 맞춰 지식의 기쁨을 일깨우는 수업, 요리사가 재료의 맛을 살려 조화로운 한 끼를 차려내는 일, 심지어 친구와 나누는 진심 어린 대화까지도, 그것이 ‘하나의 완결된 경험’으로 승화된다면 모두 예술입니다. 삶의 거친 재료들을 가지고 질서와 조화, 그리고 감동을 빚어내는 모든 순간이 바로 창조입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대상화’를 강요합니다. 우리는 자연을 자원으로, 타인을 도구로, 예술마저도 투자의 대상으로 바라보도록 훈련받았습니다. 이 차가운 거리두기 속에서 우리는 대상과 하나 되는 기쁨을 잃고, 만성적인 소외와 고독에 시달립니다. 존 듀이의 미학은 이 잃어버린 연결을 회복하라는 호소입니다. 아름다움은 미술관 벽에 걸린 그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을 보며 전율하는 당신의 가슴속에, 그리고 당신이 정성을 다해 가꾸는 화분과 당신이 온 마음을 다해 닦고 있는 찻잔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미적 체험을 회복한다는 것은, ‘나’라는 울타리를 낮추고 세상이 내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비움’의 실천입니다. 판단을 멈추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용성,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과정 자체에 몰입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설거지할 때 그릇의 감촉에 온전히 집중하고, 길을 걸을 때 발바닥에 닿는 대지의 단단함을 느끼십시오. 이 감각적 깨어있음이 바로 예술적 삶의 시작입니다.


삶을 예술로 빚는다는 것은 거창한 걸작을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 순간 주어지는 경험의 재료들과 상호작용하며, 그 안에서 의미와 조화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하는 일, 내가 머무는 공간과 ‘하나 됨’을 이룰 때, 우리의 누추한 일상은 비로소 빛나는 예술 작품이 됩니다. 존 듀이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삶이라는 캔버스 위에서 우리는 화가이자 동시에 그림 그 자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잊고 대상과 하나가 되는 그 몰아의 황홀경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살아있음의 완성을 맛보게 됩니다.






5-21.3. 숭고 (Sublime): 압도적 비움



우리는 아름다움을 사랑합니다. 잘 정돈된 정원, 균형 잡힌 건축물, 화사하게 피어난 장미꽃을 볼 때 우리는 편안함과 기쁨을 느낍니다. 하지만 때로는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훨씬 더 거대하고 압도적인 경험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밤바다의 검은 파도,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폭풍우, 혹은 깎아지른 듯한 천길 낭떠러지 앞에 섰을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 순간 우리는 아름다움이 주는 편안함 대신,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나의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는 듯한 전율과 공포,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설명할 수 없는 벅찬 고양감을 경험합니다. 철학은 이 기이하고도 강렬한 체험을 '숭고 (Sublime)'라고 부릅니다.


18세기의 영국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 (Edmund Burke, 1729-1797)는 그의 저서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통해, 미학의 역사에서 아름다움 (Beauty)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숭고’를 독자적인 미적 범주로 해방시켰습니다. 버크에게 아름다움이 ‘사회적 본능’과 연결된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감정이라면, 숭고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 즉 ‘자기 보존 본능’을 뒤흔드는 거대한 ‘공포 (Terror)’에서 기원하는 감정이었습니다. 그는 거대한 절벽, 칠흑 같은 어둠, 맹수의 포효처럼 우리를 물리적으로 위협하거나 압도하는 대상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주목했습니다.


버크의 통찰에 따르면, 우리가 맹수 바로 앞에 있을 때 느끼는 것은 단순한 공포이지만, 우리가 ‘안전한 거리’를 확보한 상태에서 그 위협적인 대상을 바라볼 때는 질적으로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내 생명이 위협받지 않는다는 안도감과 거대한 힘에 대한 경외가 뒤섞인 묘한 쾌감입니다. 버크는 이것을 긍정적인 쾌락 (Pleasure)과 구분하여 ‘환희 (Delight)’라고 불렀습니다. 즉, 버크에게 숭고는 인간이 자신의 나약함을 확인하고 전율하는, 지극히 ‘생리학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의 충격이었습니다. 여기서 인간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웅크리고 전율하는 유한한 육체적 존재로 그려집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이러한 버크의 경험주의적 분석을 깊이 연구했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미학적 주저 『판단력 비판』을 통해, 버크가 육체와 신경의 반응으로 설명했던 숭고를 인간 ‘이성 (Reason)’의 위대함을 확인하는 ‘도덕적 체험’으로 격상시킵니다. 칸트가 보기에 버크의 숭고는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을 굴복시키는 것이었지만, 자신의 숭고는 인간이 자연보다 우월함을 증명하는 사건이어야 했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진정한 숭고는 대상 (자연) 그 자체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산이 아무리 높고 폭풍우가 아무리 거세도, 그것은 그저 물리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숭고는 그 거대함과 맞닥뜨린 인간의 ‘마음 (Gemüt)’ 안에서 일어나는 역동적인 운동입니다. 이 드라마는 ‘좌절’에서 시작하여 ‘승리’로 끝납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일차적으로 우리의 ‘감각’과 ‘상상력’은 처참하게 패배합니다. 눈으로는 그 끝없는 크기를 담을 수 없고, 상상력으로는 그 무한한 힘을 그려낼 수 없어 우리는 고통스러운 ‘불쾌감’과 현기증을 느낍니다. 이것이 버크가 말한 공포의 단계입니다. 하지만 칸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 내면의 반전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상상력의 한계 상황에서 갑자기 우리의 ‘이성’이 깨어납니다. 이성은 상상력에게 속삭입니다. “너는 저 무한함을 그릴 수 없지만, 나는 ‘무한’이라는 개념 자체를 사유할 수 있다.”


이 순간 우리는 깨닫습니다. 나의 육체와 감각은 저 거대한 자연에 비해 티끌처럼 작고 무력하지만, ‘무한’과 ‘자유’, ‘도덕’을 사유할 수 있는 나의 인격 (이성적 자아)은 저 맹목적인 자연의 힘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따라서 칸트의 숭고는 물리적 공포를 정신적 자존감으로 역전시키는 과정입니다. 즉, 숭고는 상상력의 좌절이 주는 ‘불쾌감’에서 시작하여, 이성의 발견이 주는 벅찬 ‘쾌감’으로 마무리되는 역설적인 감정의 운동입니다. 버크의 인간이 자연의 힘에 압도되어 전율하는 존재라면, 칸트의 인간은 자연의 위력을 딛고 일어서서 자신의 존엄성을 확인하는 위대한 도덕적 주체입니다.


칸트는 이 과정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숭고를 크게 두 가지, 즉 '수학적 숭고 (Mathematical Sublime)'와 '역학적 숭고 (Dynamical Sublime)'로 나누어 제시합니다.


먼저 '수학적 숭고'는 크기의 문제입니다. 밤하늘에 끝없이 펼쳐진 은하수나 광활한 대양처럼, 우리의 시야와 상상력을 완전히 초과하는 절대적인 크기의 대상을 마주할 때 일어납니다. 우리는 처음에 눈으로 그 대상을 파악하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거대하여 우리의 감각적 직관으로는 도저히 그 전체를 담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상상력은 그 무한함 앞에서 허우적대다가 결국 한계에 부딪혀 작동을 멈춥니다. 이때 우리는 일시적인 현기증과 고통, 그리고 자신의 인지 능력이 보잘것없다는 무력감을 느낍니다. 이것이 숭고가 주는 첫 번째 단계인 '압도적 비움'입니다. 나의 감각과 상상력이 무능력함을 드러내며, '나'라는 존재가 이 거대한 우주 먼지보다 못한 존재임이 폭로되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절망적인 패배의 순간, 우리 내면의 또 다른 능력인 '이성 (Reason)'이 깨어납니다. 상상력은 무한을 그릴 수 없지만, 우리의 이성은 그 '무한'이라는 개념 자체를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비록 나의 육체와 감각은 저 거대한 우주에 비해 티끌에 불과하지만, 그 무한한 우주조차도 '무한'이라는 아이디어를 품고 있는 나의 이성 안에서 사고되는 대상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감각적 세계의 거대함에 압도당하면서도, 동시에 그 감각 세계를 초월해 있는 우리 정신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비록 육체적으로는 저 거대한 자연 앞에 무력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저 자연보다 더 위대하다"는 자각, 이것이 수학적 숭고가 주는 쾌감의 정체입니다. 그것은 에고의 껍질이 깨지면서 영혼이 무한으로 확장되는 체험입니다.


두 번째인 '역학적 숭고'는 힘의 문제입니다. 화산 폭발, 휘몰아치는 태풍,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거대 폭포와 같이 압도적인 위력을 지닌 자연 현상 앞에서 우리는 숭고를 느낍니다. 여기서 중요한 조건은 우리가 그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우리가 폭풍우 한가운데 있다면 그것은 숭고가 아니라 단순한 공포이자 생존의 위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안전한 거리에서 그 파괴적인 힘을 응시할 때, 우리는 기이한 이중 감정을 느낍니다. 저 거대한 물리적 힘 앞에서 나라는 육체적 존재는 언제든 파괴될 수 있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합니다 (비움).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저 맹목적인 자연의 힘이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우리 내면의 도덕적 인격과 자유 의지가 존재함을 깨닫습니다 (확장).


칸트는 이를 통해 자연이 아무리 위협적이라 해도, 인간의 존엄성만큼은 파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저 폭풍은 내 몸을 부술 수는 있어도, 나의 도덕적 의지는 꺾을 수 없다." 역학적 숭고는 물리적 자연에 대한 공포를 통해, 역설적으로 자연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인간 정신의 독립성과 숭고함을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자연 앞에 무릎 꿇음으로써, 오히려 우리 안의 신성 (神性) 앞에 우뚝 서게 됩니다.


이러한 칸트의 숭고론은 오늘날 '에고 (Ego)'라는 좁은 감옥에 갇혀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강력한 치유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인간의 척도에 맞춰 축소하고 길들이려 합니다. 우리는 거대한 자연을 관광지로 개발하여 소비하고, 죽음과 고통을 병원과 제도로 관리하며, 예측 불가능한 모든 것을 시스템 안으로 포섭하려 합니다. 우리는 '안전함'과 '쾌적함'을 얻었지만, 그 대가로 영혼이 전율하는 '경이 (Wonder)'의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숭고가 부재한 삶은 안락할지는 몰라도 깊이가 없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스마트폰 화면 크기만큼 작아졌고, 우리의 고민은 기껏해야 승진이나 주식 시세 같은 세속적 가치에 머물러 있습니다. '나'보다 더 큰 무언가를 만나본 적이 없기에, 에고는 자신이 세상의 주인인 양 끝없이 비대해지고 오만해집니다.


숭고의 체험은 이 비대해진 에고를 향한 가장 강력한 철퇴입니다. 거대한 설산 (雪山) 앞에 서거나 끝없는 사막을 마주할 때, 우리가 일상에서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걱정과 욕망들은 순식간에 사소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대자연의 침묵과 거대함은 우리에게 "너는 누구인가?", "너의 삶은 이 우주 속에서 어떤 의미인가?"라고 묻습니다. 이 압도적인 질문 앞에서, 사회적 지위나 통장 잔고 따위로 쌓아 올린 '가짜 나'는 힘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이것이 바로 숭고가 선물하는 '압도적 비움'입니다. 그것은 강제적인 겸손이자, 에고의 무력화입니다.


하지만 이 비움은 공허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에고가 부서진 그 텅 빈 자리에 비로소 우주적인 생명력과 연결되는 새로운 감각이 차오릅니다. 칸트가 말했듯, 우리는 자연의 위력 앞에서는 한낱 갈대와 같은 존재이지만, "생각하는 갈대"로서 우주 전체를 품을 수 있는 존엄한 존재임을 재확인합니다. 숭고의 체험은 우리를 짓눌러서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껍질 밖으로 끄집어내어 더 큰 차원의 존재로 고양시킵니다. 우리는 압도당함으로써 해방되고, 작아짐으로써 위대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일상 속에 '숭고의 순간'을 초대해야 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에베레스트를 등반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을 우산 없이 걸어보거나, 도시의 불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혹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운명을 정직하게 묵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숭고의 그림자를 밟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위대한 예술 작품이나 고전 비극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인간 운명의 비장함 역시 우리에게 숭고한 정화를 선사합니다.


칸트에게 숭고는 미학적 범주를 넘어선 윤리적 기획이었습니다. 숭고는 우리가 감각적 욕망에 휘둘리는 동물이 아니라, 그 욕망을 거스르고 초월할 수 있는 이성적 주체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우리가 거대한 대상 앞에서 느끼는 전율은, 실은 우리 내면에 잠재된 무한한 가능성, 즉 '초월적 자아'가 깨어나는 소리입니다. 따라서 칸트의 숭고론은 우리가 편안한 아름다움에만 안주하지 않고, 때로는 우리를 압도하고 두렵게 만드는 거대한 세계와 정면으로 대면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비움'의 순간이야말로, 영혼이 에고의 감옥을 부수고 무한한 자유를 향해 날아오르는 비상의 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내면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숭고가 우리에게 주는 엄혹하지만 자비로운 선물입니다.






5-21.4. 생활 예술: 일상을 낯설게 보기



우리는 매일 똑같은 아침을 맞이합니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뜨고, 익숙한 화장실로 걸어가 양치질을 하며, 늘 먹던 커피를 마시고, 어제와 다름없는 길을 따라 출근합니다. 퇴근 후에는 익숙한 가족의 얼굴을 마주하고, 늘 보던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잠이 듭니다. 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삶은 점차 투명해집니다. 우리는 사물을 보지만 진정으로 보지 않고, 소리를 듣지만 진정으로 듣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익숙해서 더 이상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지 못하는 상태, 이것이 바로 현대인이 겪는 권태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이 지루함을 타파하기 위해 더 자극적인 여행지, 더 새로운 맛집, 더 비싼 물건을 찾아 헤매지만, 그 '새로움'조차 금세 익숙한 '헌것'이 되어버리는 악순환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새로움은 대상의 교체가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눈'의 변화에서 옵니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문학 이론가들과 동양의 오랜 선(禪)불교 미학은 시공간을 넘어 하나의 진실을 공유합니다. 그것은 바로 일상을 예술로 만드는 힘이 '낯설게 하기'를 통한 '감각의 회복'에 있다는 것입니다.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 빅토르 시클로프스키(Viktor Shklovsky, 1893-1984)는 그의 에세이 「기법으로서의 예술」에서 '습관'이 가진 무서운 파괴력을 경고합니다. 그는 "습관은 사물, 옷, 가구, 아내, 그리고 전쟁의 공포마저도 삼켜버린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반복적으로 접하면, 우리의 뇌는 효율성을 위해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을 '자동화 (Automatization)'해 버립니다. 처음 바다를 보았을 때의 그 압도적인 경이로움은, 바다 근처에 살면서 매일 보다 보면 "아, 저건 그냥 물이구나"라는 기호로 축소됩니다. 이 자동화된 인식 속에서 사물은 생명력을 잃고 단순한 배경으로 전락합니다. 시클로프스키는 이것을 "삶이 무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펜을 쥐고 글씨를 쓸 때 펜의 질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삶의 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반쯤 죽은 상태'로 살아갑니다.


시클로프스키는 습관이라는 '자동화'의 늪에서 우리를 구해내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강조합니다. 그에게 예술의 목적은 대상을 머리로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생생하게 '느끼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낯설게 하기 (Ostranenie)'입니다.


예술가는 익숙한 대상을 낯선 환경에 놓거나, 묘사 과정을 일부러 길게 늘여서 우리의 무뎌진 감각을 톡 건드려 깨웁니다. 시클로프스키는 이를 두고 "돌을 진짜 돌답게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돌을 볼 때 '아, 저건 돌이구나' 하고 기호로만 인식하고 지나치는 대신, 돌의 거친 질감과 무게감을 손끝으로 생생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예술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톨스토이가 소설에서 인간의 복잡한 제도를 사람의 눈이 아닌 '말 (馬)'의 시선으로 묘사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자 독자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사회 규범들이 사실은 얼마나 기이하고 낯선 것인지를 충격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결국 예술이란 대상을 습관적으로 '확인 (recognize)'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태어나 처음 마주한 것처럼 온전히 '바라보는 (see)' 눈을 되찾아주는 일입니다. '낯설게 하기'는 지루하게 굳어버린 일상의 껍질을 깨고,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날것의 생명력을 되살려내는 혁명적인 시도입니다.


흥미롭게도, 서양의 예술 이론이 도달한 이 지점은 동양의 선불교가 추구해 온 수행의 핵심과 맞닿아 있습니다. 선불교에서 강조하는 '초심 (初心, Beginner’s Mind)'은 시클로프스키가 말한 '낯설게 하기'의 영적 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사들은 제자들에게 "밥 먹을 때는 밥만 먹고, 잠잘 때는 잠만 자라"고 가르칩니다. 이 평범해 보이는 가르침 속에는 고도의 미학적 태도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 밥을 먹지 않습니다. 머릿속으로는 지난 회의의 실수를 곱씹거나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며, 입안의 밥알은 그저 습관적으로 목구멍으로 넘길 뿐입니다. 이것은 밥을 '개념'으로 먹는 것이지, '실재'로 먹는 것이 아닙니다.


선불교의 미학은 이 개념의 막을 걷어내고, '지금 여기'의 경험과 직접 만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것은 마치 갓 태어난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듯, 모든 선입견과 판단을 중지하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如如, Tathata)' 만나는 태도입니다.


설거지라는 행위를 예로 들어보십시오. 습관에 젖은 현대인에게 설거지는 밥을 먹은 후 처리해야 할 귀찮은 '가사 노동'이자, 빨리 끝내버려야 할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 자동화된 인식 속에서 설거지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됩니다. 하지만 이 행위에 '낯설게 하기'와 '선적 주의 (Zen Attention)'를 적용하면, 설거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으로 변모합니다. 그릇에 닿는 물의 따뜻한 온기, 세제가 만들어내는 거품의 영롱한 빛깔, 그릇이 부딪치며 내는 맑은 소리, 그리고 손끝에 전해지는 매끄러운 도자기의 질감에 온전히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나는 지금 그릇을 씻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비워내고, 오직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감각의 춤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이때 설거지는 더 이상 노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물과 그릇과 나의 손이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촉각적이고 청각적인 예술 행위가 됩니다. 선사들이 "그릇을 씻는 것이 곧 아기 부처를 목욕시키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은 비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일상의 행위를 성스러운 의식으로 격상시키는 구체적인 방법론입니다.


이처럼 '생활 예술'이란 특정한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예술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모든 평범한 순간들에 '낯설게 하기'의 마법을 거는 것입니다.


매일 걷는 출근길을 낯선 여행자의 눈으로 걸어보십시오. 보도블록 틈새에 피어난 이름 모를 풀꽃의 생명력을 발견하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결을 피부로 느끼며, 계절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햇살의 각도를 관찰하십시오. 목적지를 향해 몸을 운반하는 수단으로서의 걷기가 아니라, 걷는 행위 그 자체의 리듬과 감각을 즐길 때, 지루했던 출근길은 매일 새로운 영감을 주는 산책로가 됩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일수록 이 '낯설게 보기'는 더욱 절실합니다. 우리는 부모, 배우자, 자녀를 너무나 잘 안다고 착각합니다. "내 남편은 원래 이런 사람이야", "우리 애는 딱 저래"라는 고정관념은 상대를 '자동화된 기호'로 박제해 버립니다. 시클로프스키가 "습관은 아내마저 삼켜버린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의 '이미지'를 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 관계에 예술적 생명을 불어넣으려면, 우리는 의식적으로 '모름'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퇴근길에 마주할 배우자의 얼굴을, 마치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인 것처럼, 혹은 10년 만에 재회한 옛 연인의 얼굴인 것처럼 낯설게 바라보십시오. 그의 눈가에 잡힌 주름이 말해주는 세월의 무게를, 그의 목소리에 섞인 미세한 떨림을, 그의 낯빛에 서린 오늘의 피로를 있는 그대로 '응시'하십시오. 판단하지 않고, 예측하지 않고, 신비로운 타자로서 그를 다시 만날 때, 권태로웠던 관계에는 다시금 설렘과 연민이라는 생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을 예술로 만드는 기술입니다.


현대인은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신화에 갇혀 '결과'만을 향해 달립니다. 과정은 생략될수록 좋고, 반복되는 일상은 빨리 처리해야 할 짐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결국 우리 삶을 빈 껍데기로 만듭니다. 과정이 없는 삶은 내용이 없는 삶입니다. 러시아 형식주의와 선불교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삶의 의미는 도달해야 할 어떤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을 내딛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의 '질감'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상을 낯설게 본다는 것은, 익숙함이라는 먼지를 털어내고 사물의 본래 면목을 되찾아주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우리가 주의 깊은 시선으로 바라봐 줄 때, 죽어있던 사물들은 비로소 깨어나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낡은 찻잔은 고요한 평화를 건네고, 창밖의 빗소리는 우주의 리듬을 들려줍니다.


이 '생활 예술가'가 되는 길에는 값비싼 도구나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오직 '깨어있으려는 의지'와 '멈추어 바라보는 여유'뿐입니다. 습관적인 기계적 반응을 멈추고 (비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대상과 감각적으로 생생하게 만나는 것 (연결), 이것이 바로 삶을 기적으로 바꾸는 연금술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그저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지루한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가 낯선 눈으로 바라보기만 한다면, 그 모든 순간은 경이로운 예술이 될 준비를 마친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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