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 배달민족이 기억해야 할 오래된 미래
인류는 너무나 오랫동안 스스로를 이 세상의 이방인으로 여겨왔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그 광활한 침묵 앞에서 압도적인 고독을 느끼거나, 혹은 그 별들을 정복해야 할 미지의 영토로 간주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우주의 절대적인 중심으로 세우고, 자연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정복하고 소비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현대는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 즉 '슬기로운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18세기 스웨덴의 생물학자 칼 린네 (Carl Linnæus, 1707-1778)가 붙인 이 이름에는 근대 문명이 추구해 온 지성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대상을 정확히 식별하고, 나누고, 분류하는 '이성의 칼날'입니다. 린네는 혼돈스러워 보이는 자연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꽃의 수술 개수를 세고 동물의 이빨 모양을 관찰했습니다. "신은 창조했고, 나는 정리했다"는 그의 말처럼, 당시의 지성인들에게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세상을 쪼개고 나누어 각각의 자리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를 의미했습니다.
이 분별의 지혜는 눈부신 과학 기술과 물질적 풍요를 안겨주었습니다. 인간은 이성을 무기로 세계를 주체와 객체, 정신과 물질, 문명과 자연으로 끊임없이 분리하며 거대한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수백 년이 지난 지금, 그 '나누고 쪼개는 능력'이 인류를 어디로 데려왔는지 돌아보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분류는 세상을 이해하는 첫걸음이었지만, 이제는 세상을 난도질하는 흉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지도 위에 국경을 그어 사람들을 나누고, 피부색과 성별, 소득과 학력이라는 잣대로 계급을 쪼개었습니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내 편과 네 편을 갈라 혐오를 키웁니다. 자연과의 관계는 더욱 처참합니다. 산을 깎고 바다를 메우며 지구를 개발 가능한 자원과 보호해야 할 구역으로 나누었고, 그 결과 인간은 고향을 잃어버린 고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둥근 원형의 세계는 날카로운 파편들로 조각났고, 인류는 그 파편들 위에서 피 흘리며 서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옆 사람을 낯선 타인으로 분류하고 경계하는 순간, 그 쪼개짐은 시작됩니다. 뉴스를 보며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타자화하는 순간, 세상의 칼날은 더욱 깊어집니다. 현대인이 겪는 만성적인 불안과 허무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뿌리 뽑힘'에서 기인합니다. 인간은 광활한 우주에 홀로 던져진 우연한 먼지 같은 존재라고 느끼기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유하고 성취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발버둥 칩니다. 하지만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여전히 영혼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잠시 멈춰 서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인간은 정말 우주와 끊어진 채 홀로 남겨진 고립된 존재인가. 만물을 지배하고 착취할 권한을 가진 유일한 주인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단호한 "아니요"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며, 세상과 분리된 적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거대한 생명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을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밖에서 채워 넣을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 내면의 잃어버린 연결 고리를 되살릴 확실한 기억의 도구입니다.
우리 민족의 오랜 지혜가 담긴 『천부경, 天符經』, 『삼일신고, 三一神誥』, 그리고 『부도지, 符都誌』가 바로 그 기억의 열쇠입니다. 이 세 권의 경전은 박물관 유리관 속에 갇힌 낡은 유물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본래 누구였는지, 태초에 어떻게 우주와 호흡했는지, 그리고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 분열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었는지를 명징하게 증언하는 ‘인류 기억의 원본’입니다. 혼돈의 시대를 건너기 위해, 우리는 가장 오래된 ”미래“인 이 세 가지 지혜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자는 이 책들을 그저 한민족의 고대 신화나 낡은 경전쯤으로 치부할지도 모릅니다. 또는 국수주의적인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한 도구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 권의 책에는 민족을 넘어선 인류 보편의 구원 가능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 경전들은 특정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배타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어떻게 우주와 분리되었는지 그 원인을 규명하고, 다시 우주와 하나 되어 신성함을 회복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인류 최고의 영성 교과서입니다.
여정은 『부도지』가 들려주는 태초의 기억에서 시작합니다. 『부도지』는 인류가 '마고성 (麻姑城)'이라는 원형의 낙원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왜 그곳을 떠나야 했는지를 설명하는 장엄한 서사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고성은 단순히 지리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 나와 너의 구분이 없던 순수한 통합 의식의 상태를 상징합니다. 인류가 마고성을 떠나게 된 계기인 '오미 (五味)의 변'은 깊은 통찰을 줍니다. 인간이 포도를 따 먹고 다섯 가지 맛에 탐닉하게 되었다는 이 이야기는,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면서 인간이 어떻게 외부 대상을 '나'와 분리하여 인식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주는 인지 혁명의 우화입니다. 맛을 느낀다는 것은 맛보는 자와 맛보지는 대상으로 세계가 쪼개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좋고 싫음을 나누고, 내 것과 네 것을 가르며 성벽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부도지』는 인류가 낙원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분별의 감옥을 짓고 걸어 나왔음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복본 (復本)'의 맹세를 상기시킵니다.
그 근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하는 지도가 바로 『천부경』입니다. 여든한 글자로 이루어진 이 짧은 경전은 우주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인간의 존재 원리를 수학적 기호로 압축해 놓은 홀로그램과 같습니다. 『천부경』의 첫 구절 '일시무시일 (一始無始一)'은 우주가 텅 빈 없음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없음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으로 꽉 찬 충만임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 '인중천지일 (人中天地一)'을 통해, 하늘과 땅의 광활한 우주가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 온전히 들어와 있음을 증명합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닙니다. 현대 양자역학이 밝혀냈듯,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 하나하나가 별의 폭발에서 태어났으며, 인간은 우주라는 거대한 에너지의 파동과 한순간도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천부경』은 인간이 우주의 먼지가 아니라, 우주 그 자체임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며 좁은 자아를 무한대로 확장시킵니다.
우주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 그것을 몸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삼일신고』는 그 구체적인 수행법을 담은 실천 지침서입니다. 이 경전은 신 (神)이 저 높은 하늘의 옥좌에 앉아 인간을 심판하는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신은 '자성구자 (自性求子)', 즉 우리 본성 안에서 찾아야 할 생명력 그 자체입니다. 『삼일신고』는 인간이 고통받는 이유를 감각 (止感, 지감), 숨결 (調息, 조식), 부딪힘 (禁觸, 금촉)이라는 세 가지 통로가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귀에 들리는 소음에 휘둘리며, 거칠어진 호흡으로 생명 에너지를 낭비합니다. 『삼일신고』가 제시하는 지감, 조식, 금촉의 수행은 특별한 종교적 의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솟아오르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호흡을 고르게 하여 우주와 리듬을 맞추며, 외부의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삶의 기술입니다. 이를 통해 잃어버린 신성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관념이 아닌 감각으로 회복하게 됩니다.
이 세 가지 지도가 가리키는 최종 목적지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호모 사피엔스'의 한계를 넘어 '호모 판테이스트 (Homo Pantheist)', 즉 범신론적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범신론은 특정한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주 그 자체가 곧 신성한 생명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의 현현임을 깨닫는 태도입니다. 17세기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가 "신즉자연 (Deus sive Natura)"을 선언했을 때, 그는 우주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신성한 몸으로 껴안으려는 열망을 보여주었습니다. 호모 판테이스트는 이 철학적 통찰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존재입니다.
호모 판테이스트에게 '나'는 고립된 명사가 아니라, 우주의 흐름이 잠시 머물다 가는 동사입니다. 그는 자신의 피부를 나와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이 아니라, 세계와 소통하는 접촉면으로 인식합니다. 숲속에 들어가 깊은 숨을 들이마실 때, 그는 나무가 내뱉은 산소가 자신의 폐로 들어와 피가 되고 살이 됨을 느낍니다. 타인의 눈동자를 들여다볼 때, 그는 그 안에서 자신과 똑같이 사랑받고 싶고 고통받기 싫어하는 신성한 불꽃을 발견합니다. 그렇기에 호모 판테이스트는 타인을 해칠 수 없습니다. 타인을 해치는 것은 곧 확장된 나 자신을 해치는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의 윤리는 의무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타인과 자연으로 확장된 결과입니다.
호모 판테이스트가 된다는 것은 거창한 초능력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두 번째 순수'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고통과 모순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날카로운 이성으로 분별의 끝까지 가본 뒤에, 다시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성숙한 순수함입니다. 이것은 분열된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백신입니다. 만약 모든 존재를 신성하게 대한다면, 전쟁은 멈출 것이고 착취는 사라질 것이며 파괴된 지구는 다시 푸르게 숨 쉴 것입니다.
특별히 주목할 지점은 한민족, 즉 '배달 (倍達) 겨레'의 정체성입니다. 배달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민족의 호칭이 아닙니다. 그것은 '밝은 땅', 즉 내면의 빛을 밝혀 세상을 비추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건국 이념인 '홍익인간 (弘益人間)'은 널리 인간만을 이롭게 하라는 인간 중심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뭇 생명을 살리고 보살피라는 생태적 휴머니즘이자, 지구 경영의 철학입니다. 조상들은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경천애인 (敬天愛人)의 정신을 삶의 가장 큰 덕목으로 삼았습니다. 밥을 먹기 전에 '고수레'를 하며 자연과 음식을 나누었고, 길가에 핀 풀 한 포기도 함부로 밟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호모 판테이스트였습니다. 잊고 있었을 뿐, 우리의 유전자 속에는 이 거룩한 영성의 기억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이제 『천부경』의 우주론, 『삼일신고』의 인간론, 『부도지』의 역사관에 대한 진실한 탐구가 시작됩니다. 이는 좁은 자아의 울타리에 갇혀 분리된 개체로서 두려움 속에 머무는 대신, 자아의 경계를 허물고 우주와 하나 되는 길을 찾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닙니다. 인간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위해 이곳에 존재하는지를 확인하는 실존적 작업입니다.
이 세 권의 경전을 관통하는 진실은 명확합니다. 인간은 고작 100년을 살다 사라지는 허무한 육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한 우주의 시간을 품고 오늘을 숨 쉬는 거대한 우주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서로 분리된 적이 없으며, 본래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오래된 기록들을 다시 펼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흔히 글자 속에서 정답을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진짜 답은 글자가 아니라, 글을 읽고 있는 '생명' 그 자체에 있습니다. 생각을 멈추고 호흡을 깊이 자각할 때 비로소 진실은 드러납니다. 지금 들이마시는 이 숨결이야말로 138억 년 전 우주가 탄생할 때 퍼져나온 생명의 에너지, 바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래 신성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신성할 것입니다. 잃어버린 신성을 되찾는 여정, 호모 판테이스트의 세계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