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빛과 소리의 궁전

by 이호창

제1-3장: 빛과 소리의 궁전



1-3.1. 지유, 대지가 주는 젖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 각인된 낙원의 풍경은 노동하지 않아도 먹을 것이 주어지는 세상입니다. 성경의 에덴동산이나 그리스 신화의 황금시대, 그리고 우리 민족의 『부도지』가 그리는 마고성 (麻姑城)의 삶은 모두 이러한 특징을 공유합니다. 하지만 『부도지』가 묘사하는 생존 방식은 단순히 과일을 따 먹는 채집 생활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텍스트는 당시의 사람들이 ‘지유 (地乳)’를 마시고 살았다고 기록합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땅의 젖’이지만, 이 단어는 지질학적인 온천수나 특정한 식물의 수액을 가리키는 것 이상의 철학적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지유는 대지와 인간 사이에 존재했던 가장 원초적이고도 완전한 에너지 교환 방식을 상징하는 메타포입니다.


어머니가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행위를 상상해 봅니다. 아기는 젖을 얻기 위해 밭을 갈거나 사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머니 또한 젖을 주기 위해 대가를 요구하거나 조건을 걸지 않습니다. 젖은 어머니의 몸에서 아이의 몸으로 직접 흘러 들어가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 이 과정에서 두 존재는 분리되어 있지만 생물학적으로는 하나로 연결된 순환계입니다. 마고성 시대의 인류가 지유를 마셨다는 것은, 인간이 지구라는 거대한 어머니의 가슴에 탯줄을 대고 있는 태아처럼, 자연이 제공하는 순수한 생명 에너지를 가공 없이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노동 없는 삶’이라기보다는 ‘단절 없는 삶’에 가깝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파괴하거나 착취하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비폭력의 식탁’이 차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양식은 『천부경』의 수리 철학인 “운삼사 성환오칠 (運三四 成環五七)”의 원리와 깊게 맞닿아 있습니다. “3이 움직여 4를 만들고, 5와 7로 고리를 이룬다”는 이 구절에서 5와 7은 우주의 순환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숫자입니다. 동양 상수학에서 ‘5 (五)’는 1부터 9까지 숫자의 정중앙에 위치하며, 중심과 조화, 그리고 흙 (土)을 상징합니다. 또한 ‘7 (七)’은 변화와 주기, 그리고 생명 활동을 상징합니다. 즉, 5가 대지의 중심 에너지를 뜻한다면, 7은 그 에너지가 생명체 내에서 순환하며 발현되는 리듬을 뜻합니다.


지유를 섭취한다는 것은 땅의 중심 에너지 (5)를 섭취하여 내 몸의 생명 리듬 (7)으로 순환시키는 행위 (成環, 성환)입니다. 당시의 인류는 이 과정에 어떤 인위적인 조작이나 불순물도 개입시키지 않았습니다. 대지의 5와 인체의 7이 막힘없이 소통하며 거대한 생명 고리를 형성했기에, 그들의 육체는 맑고 가벼웠으며 수명에는 한계가 없었습니다.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엔트로피 (Entropy, 무질서도)가 증가하지 않는 상태, 즉 에너지 효율이 100%에 가까운 열린계 (Open System)의 대사 과정을 보여줍니다. 찌꺼기가 남지 않는 완전 연소처럼, 지유는 인간의 몸을 투명한 에너지체로 유지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오미 (五味)의 변’을 겪으며 이 순환 고리에서 이탈했습니다. 포도를 따 먹고 다섯 가지 맛에 중독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미식가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수용 (Receptivity)’의 자세를 버리고, 대상을 쪼개고 가공하여 쾌락을 추출하려는 ‘착취 (Exploitation)’의 자세로 전환했음을 의미합니다. 지유는 기다리면 솟아나는 것이지만, 포도와 고기는 내가 직접 움직여서 쟁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대지의 젖을 빠는 아기에서, 대지의 살을 파먹는 포식자로 변모했습니다.


이 변화는 인간의 생리 구조마저 바꾸어 놓았습니다. 『부도지』는 오미를 섭취한 후 사람들의 입에서 맑은 소리 대신 탁한 침이 고이고, 몸이 무거워졌으며, 피부가 거칠어졌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소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독소와 노폐물, 즉 엔트로피가 몸 안에 축적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천부경』의 5와 7의 순환 (성환)이 깨지면서, 에너지는 흐르지 못하고 물질화되어 몸을 굳게 만들었습니다. 맑은 기운인 기 (氣)가 탁한 물질인 혈 (血)로 변질되면서 질병과 노화, 그리고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인간이 겪는 생로병사의 고통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주적 대사 시스템 (Cosmic Metabolism) 접속을 끊고 고립된 폐쇄계 (Closed System)로 전락하면서 발생한 부작용입니다.


현대 문명은 이 ‘지유의 상실’을 극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흙의 기운 (5)을 잃어버린 채 공장에서 가공된 식품을 섭취하고, 자연의 리듬 (7)을 거스른 채 밤낮없이 활동합니다. 19세기 독일의 사상가 칼 마르크스 (Karl Marx, 1818-1883)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 대사를 교란시켜 ‘대사적 균열 (Metabolic Rift)’을 일으킨다고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면서 농촌의 토양에서 나온 영양분이 곡물의 형태로 도시로 빠져나가 소비되지만, 그 배설물과 폐기물은 다시 토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도시를 오염시키는 현실을 목격했습니다. 흙은 척박해져 생명력을 잃고, 도시는 오물로 넘쳐나는 이 단절된 고리가 바로 마르크스가 지적한 회복 불가능한 균열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도지』의 통찰은 이보다 훨씬 근원적인 차원에서 생명의 균열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단순한 비료의 순환이나 식량 자원이 아니라, 대지와의 근원적인 ‘신뢰 관계’입니다. 지유를 마신다는 것은 “지구가 나를 먹여 살린다”는 절대적인 믿음, 즉 어머니에 대한 아이의 무조건적인 신뢰가 전제되어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구를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내일 먹을 것이 없을까 봐 걱정하며 쌀을 쟁여두고, 더 많이 갖기 위해 숲을 불태우고 강을 막습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물질적 균열 이전에, 이미 인간의 의식 속에서 대지와의 영적 탯줄이 끊어지는 ‘심리적 균열’이 먼저 발생한 것입니다. 이 불안과 결핍이 소유욕을 낳고, 소유욕은 분쟁과 전쟁을 낳았습니다.


호모 판테이스트가 지향하는 삶은 이 끊어진 대사의 고리를 다시 잇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당장 농사를 그만두고 산속에서 이슬만 먹고살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지유의 섭취가 아니라, ‘지유적 삶의 태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먹는 음식이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햇빛과 바람과 비, 그리고 대지의 미생물들이 협력하여 만들어낸 우주의 선물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밥 한 그릇에 우주가 담겨 있음을 알 때, 우리는 함부로 먹을 수 없고 함부로 남길 수 없습니다.


또한 지유의 정신은 ‘무위 (無爲)’의 경제학과 연결됩니다. 내가 애써서 무언가를 쟁취하려는 행위를 멈추고, 우주가 나에게 흘려보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이는 게으름이 아니라, 우주의 흐름을 신뢰하는 가장 적극적인 맡김입니다. 식물이 가만히 서서 태양 에너지를 받아 꽃을 피우듯, 우리도 조급함을 내려놓고 내면의 고요함 속에 머무를 때 비로소 우주의 기운 (5)이 우리 몸의 생명력 (7)으로 전환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삼일신고』의 조식 (調息) 수행은 호흡을 통해 보이지 않는 지유, 즉 대기 중의 맑은 생명 에너지를 섭취하여 몸을 맑게 하는 현대적인 지유 섭취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고성의 사람들이 지유를 마시며 ‘자재율 (自在律)’을 이루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먹는 것이 해결되면 다투지 않습니다. 생존의 불안이 사라지면 소유의 욕망도 사라집니다. 그들은 법이나 도덕이 없어도 스스로 조화로웠습니다. 5와 7의 에너지가 막힘없이 순환하는 존재에게는 탐욕이 깃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현대인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허기를 느낍니다. 위장은 채워졌지만, 영혼의 배고픔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허기는 바로 대지와의 단절에서 오는 결핍입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고아가 된 듯한 근원적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끊임없이 소비하고 파괴하지만, 그것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갈증을 더할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식탁 위에서 혁명을 시작해야 합니다. 무엇을 먹느냐의 문제를 넘어, 어떤 마음으로 먹느냐의 문제입니다. 음식을 대할 때 그것을 나의 미각을 만족시키는 도구 (오미)로 볼 것인가, 아니면 나와 대지를 연결하는 탯줄 (지유)로 볼 것인가. 이 선택이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판테이스트를 가르는 분기점입니다. 호모 판테이스트는 사과 한 알을 먹으면서도 그 안에 깃든 5와 7의 순환을 읽어내고, 자신의 몸이 우주를 향해 열려있는 통로임을 확인하는 사람입니다.


대지는 한 번도 우리를 버린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오미에 취해 대지를 잊었을 뿐입니다. 지금도 지구는 묵묵히 우리를 받쳐주고 있으며, 태양은 대가 없이 빛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무상의 증여 (Gift) 속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 내면의 마고성은 다시 깨어납니다. 지유는 사라진 전설의 음식이 아닙니다.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음식이 지유이며, 깊은 호흡으로 들이마시는 공기가 지유이고,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지유입니다. 5와 7의 순환을 회복하여 자연과 하나 된 육체, 그것이 바로 호모 판테이스트가 거주하는 이동식 마고성입니다.






1-3.2. 언어 이전의 투명한 소통



인류는 역사상 가장 많은 말을 쏟아내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통신 기술의 발달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실시간으로 대화하고, 소셜 미디어에는 매일 수십억 개의 문장이 범람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역사상 가장 깊은 단절과 고독을 겪고 있습니다. 말은 많아졌지만 이해는 줄어들었고, 연결은 쉬워졌지만 관계는 얕아졌습니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이지만, 동시에 존재와 존재 사이를 가로막는 불투명한 막이기도 합니다. 내가 느낀 고통을 ‘아프다’라는 단어로 뱉는 순간, 그 생생한 감각은 납작한 기호 속에 갇혀버립니다. 듣는 이는 자신의 경험 속 ‘아픔’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두 사람의 아픔이 진정으로 만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오해를 내포한 불완전한 매개체입니다.


우리 민족의 시원 역사를 다룬 『부도지』는 이러한 언어의 한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태초의 시공간을 증언합니다. 마고성 (麻姑城) 시대의 인류에게는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들은 입을 열어 소리를 내지 않고도 뜻을 전달했고, 귀를 기울이지 않고도 상대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이를 『부도지』는 ‘자재율 (自在律)’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타율이나 자율 같은 도덕적 규범이 아닙니다. 우주의 근원적 파동인 율려 (律呂)가 개체와 개체 사이를 막힘없이 흐르며 공명하는 상태, 즉 ‘스스로 존재하는 파동의 질서’를 의미합니다.


당시의 소통은 정보를 주고받는 통신 (Communication)이 아니라, 상태를 공유하는 공감 (Communion)이었습니다. 두 대의 조율된 피아노가 한쪽 건반을 누르면 맞은편 피아노의 현이 저절로 울리는 공명 현상과 같습니다. A가 기쁨을 느끼면 그 파동이 B에게 즉각적으로 전달되어 B도 기쁨을 느꼈습니다. 중간에 언어라는 필터가 끼어들 틈이 없었기에, 거짓말이나 꾸밈, 오해가 비집고 들어올 자리도 없었습니다. 속마음과 겉표현이 일치하는 투명한 사회, 이것이 바로 언어 이전의 소통이 보여주는 원형입니다.


그러나 ‘오미 (五味)의 변’ 이후 인류는 이 투명성을 상실했습니다. 감각적 욕망이 생겨나면서 ‘나’와 ‘남’을 구분하는 자의식이 비대해졌고, 이는 곧 파동의 불일치를 가져왔습니다. 내 마음속에 숨기고 싶은 욕망이나 남을 해치려는 의도가 생기자, 더 이상 투명하게 속을 내보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공명이 끊어진 자리에 필연적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언어’입니다. 사람들은 끊어진 연결을 잇기 위해 소리를 지르고 약속을 정하고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깨진 거울 조각을 테이프로 붙이는 것과 같아서, 결코 원래의 온전한 비춤을 회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언어의 탄생은 문명의 시작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영적인 퇴화를 알리는 서글픈 신호탄이었습니다.


『삼일신고』는 이러한 불완전한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지감 (止感)’이라는 구체적인 기술을 제시합니다. 지감은 글자 그대로 ‘느낌을 그친다’는 뜻으로, 오감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희로애락의 감정적 반응을 의도적으로 멈추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타인과 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안의 소음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말을 할 때, 우리는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듣지 않습니다. 내 과거의 경험, 선입견, 판단, 그리고 ‘다음에 무슨 말을 할까’라는 생각들이 쉴 새 없이 뇌 속에서 떠들며 상대의 존재를 가립니다. 이 감각적 소음 (Sense-noise)이 바로 율려의 공명을 방해하는 전파 방해 요인입니다. 지감은 이 내부의 소음을 끄는 스위치입니다. 판단을 멈추고, 감정의 반응을 멈추고, 오로지 텅 빈 마음으로 상대를 마주하는 것입니다.


『삼일신고』는 인간의 마음 (心), 기운 (氣), 몸 (身)이 외부 자극인 감 (感), 식 (息), 촉 (觸)과 부딪혀 혼란스러워지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지감은 이 혼란을 잠재우고 의식을 순수한 상태로 되돌립니다. 마치 흙탕물이 든 컵을 가만히 두면 흙은 가라앉고 맑은 물만 남듯이, 감각적 반응을 멈추고 기다리면 우리의 의식은 본래의 투명함을 회복합니다. 이 맑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교류가 바로 ‘순수 의식 교류’입니다. 이때는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눈빛 하나, 침묵 속의 호흡만으로도 상대의 존재가 내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서양의 현상학자 에드문트 후설 (Edmund Husserl, 1859-1938)은 우리가 가진 선입견이나 편견을 잠시 괄호 치듯 묶어둘 때, 비로소 사물의 참모습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를 ‘판단 중지 (Epoche, 에포케)’라고 합니다. 『삼일신고』의 지감 (止感)은 이 정신적인 판단 중지를 넘어, 몸과 기운의 차원까지 멈추는 행위입니다. 생각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끓어오르는 감정과 예리한 감각 반응까지 멈추는 것입니다. 내가 텅 빈 피리처럼 비워질 때, 비로소 우주의 파동이 나를 통과해 타인에게로 흐릅니다. 이것이 호모 판테이스트가 추구하는 대화법입니다. 그는 화려한 말솜씨로 상대를 설득하는 사람이 아니라, 깊은 침묵으로 타인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내는 거울 같은 사람입니다.


현대 과학에서도 이러한 비언어적 소통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거울 뉴런 (Mirror Neuron)의 발견은 인간이 타인의 행동이나 감정을 볼 때, 마치 자신이 직접 겪는 것처럼 뇌세포가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뇌와 뇌는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신경학적으로는 공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식물들이 뿌리의 균사체 네트워크를 통해 위험 신호나 영양분을 주고받는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자연계는 이미 언어 없이도 완벽하게 소통하고 있습니다. 인간만이 언어라는 도구에 과도하게 의존하다가 본래 갖추고 있던 공명의 감각을 퇴화시킨 꼴입니다.


우리가 지감을 수행하여 마고성의 자재율 (自在律)을 회복한다는 것은, 텔레파시 같은 초능력을 얻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해 없는 사랑’을 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언어는 자꾸만 대상을 규정하고 가둡니다.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상대방의 무한한 가능성은 그 단어 안에 갇힙니다. 하지만 침묵 속에서 상대를 바라볼 때, 우리는 그를 규정하지 않고 존재 그 자체로 존중하게 됩니다. 투명한 소통은 상대를 내 식대로 해석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갈등이 극에 달한 관계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논리적인 설득이나 화려한 언변이 아닙니다. 그저 판단을 멈추고 (지감), 곁에 머물러 주는 것입니다. 함께 비를 맞거나, 나란히 앉아 석양을 바라보는 침묵의 시간 동안, 헝클어졌던 두 존재의 파동은 서서히 조율됩니다. 말이 멈춘 곳에서 진심은 흐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부도지』가 말하는 율려의 회복이자, 『삼일신고』가 가르치는 성통 (性通, 본성에 통함)의 사회적 실천입니다.


이제 소음의 시대를 거슬러 침묵의 시대로 나아가는 전환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회의 테이블에서의 격렬한 논쟁보다 숲속에서의 고요한 산책이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합니다. 호모 판테이스트는 언어를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언어의 한계를 알고 언어 너머의 진실을 응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말과 말 사이의 여백 (Space)을 파동으로 채웁니다. 그의 침묵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깊은 이해와 공명으로 꽉 차 있습니다.

타인을 마주할 때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보다, 그 말을 뱉어내는 숨결과 눈빛, 그리고 존재의 떨림입니다. 내면의 판단을 멈추는 지감 (止感)을 통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떨림과 주파수를 맞추는 자재율 (自在律)에 도달할 때, 타인이라는 미지의 우주로 건너가는 투명한 다리가 놓입니다. 그 연결 속에서 너와 나는 둘이 아닌 하나의 파동으로 공명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잃어버렸던, 그리고 다시 찾아야 할 소통의 원형입니다.






1-3.3. 영혼이 기억하는 고향



때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오곤 합니다. 붉게 타오르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거나, 낯선 여행지의 골목을 걸을 때, 혹은 깊은 밤 홀로 깨어있을 때, 인간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에 젖습니다. 그러나 갈 곳을 잃은 이 마음은 특정한 사람이나 장소에 대한 그리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기원에 대한 원초적인 향수이자, 설명할 수 없는 근원을 향한 목마름입니다. 이는 마치 강물이 바다를 향해 흐르며 느끼는 근원적 회귀 본능과 같습니다. 강물은 흐르는 동안 끊임없이 바다를 그리워하지만, 사실 그 강물 자체가 이미 바다로 이어져 있는 물줄기입니다. 인간이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먼 곳’은 실은 인간이 떠나왔으며, 동시에 돌아가야 할 ‘진짜 집’인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서 『부도지』는 이 근원적인 향수의 실체를 ‘복본 (復本)’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복본은 문자 그대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과거로 회귀하려는 복고주의나 퇴행적 본능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가 마고성 (麻姑城)을 떠날 때 스스로의 의지로 각인한 영혼의 맹세이자, 잃어버린 신성을 회복하여 완성에 이르려는 생명의 진화적 의지입니다. 마고성에서 오미의 변이 일어나고 사람들의 심신이 혼탁해지자, 장자였던 황궁 (黃穹) 씨는 마고성 문을 나서며 피 끓는 다짐을 합니다. “지금은 비록 맑은 기운을 잃고 성을 떠나지만, 언젠가 반드시 망상을 씻어내고 본성을 회복하여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이 서약이 바로 복본의 맹세입니다.


따라서 우리 내면에서 울리는 그리움은 패배자의 회한이 아니라, 이 오래된 약속을 지키려는 무의식의 발동입니다. 연어가 거친 물살을 거슬러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가듯, 인간의 영혼에는 근원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려는 강력한 귀소본능이 프로그래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능을 ‘향수’라고 부르지만,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만유인력과 같은 ‘중력’입니다. 흩어진 것들을 다시 하나로 모으려는 우주의 힘이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그리움이라는 감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귀의 법칙은 『천부경』의 마지막 구절인 “일종무종일 (一終無終一)”에서 완벽한 수리적 논리로 증명됩니다. “하나는 끝나지만 끝이 없는 하나이다”라는 이 문장은 우주의 시간과 역사가 직선이 아니라 거대한 원형의 고리를 이루고 있음을 선언합니다. 서양의 직선적 시간관에서 시작은 탄생이고 끝은 소멸입니다. 그러나 『천부경』의 원형적 시간관에서 끝 (終)은 사라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귀환입니다. 숫자 1에서 시작하여 2, 3, 4를 거쳐 9와 10까지 팽창한 우주는, 거기서 멈추거나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1로 돌아옵니다. 10은 곧 1과 0의 결합이며, 다시 1로 돌아가기 위한 완성된 상태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겪는 온갖 경험과 분열, 고통과 희열은 1에서 출발하여 밖으로 뻗어나가는 확장의 과정입니다. 이것은 『부도지』에서 인류가 마고성을 떠나 전 세계로 흩어지는 ‘출성 (出城)’의 역사와 대응됩니다. 반면, 삶의 어느 지점에서 문득 멈춰 서서 내면을 돌아보고 근원을 그리워하는 것은 팽창을 멈추고 다시 1로 수렴하려는 ‘회귀’의 과정입니다. 이것은 ‘복본’의 역사와 대응됩니다. 즉, “일종무종일”은 우주가 벌여놓은 거대한 드라마가 파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과 도착점이 맞닿는 대통합으로 완성됨을 의미합니다.


서양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플로티누스 (Plotinus, 205-270) 역시 이와 유사한 ‘유출 (Emanation)’과 ‘귀환 (Return)’의 우주론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우주의 근원인 ‘일자 (The One)’를 무한한 빛의 샘에 비유했습니다. 샘물이 가득 차면 저절로 흘러넘치듯, 일자로부터 정신과 영혼, 그리고 물질세계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출입니다. 이 과정은 타락이나 형벌이 아니라, 빛이 태양에서 뻗어 나가듯 생명력이 춤추며 퍼져나가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흘러나온 모든 존재는 다시 본래의 샘으로 돌아가려는 강렬한 열망을 품고 있습니다. 플로티누스는 이 근원적인 회귀 본능을 ‘에로스 (Eros)’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에로스는 육체적 욕망이 아니라, 결핍된 존재가 완전한 충만을 그리워하며 상승하려는 ‘영혼의 중력’입니다. 그는 이 귀환의 여정을 “고향을 향한 영혼의 비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천부경』의 ‘일종무종일’이나 『부도지』의 ‘복본’과 정확히 같은 맥락입니다. 인간은 신에게서 쫓겨난 죄인이 아니라, 충만한 근원에서 흘러나와 세상을 경험하고, 다시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성스러운 순례자입니다.


문제는 현대인들이 이 신성한 향수의 방향을 오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영혼이 보내는 ‘돌아가자’는 신호를, 현실의 결핍을 채우라는 신호로 잘못 해석합니다. 그래서 더 큰 집을 사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더 자극적인 쾌락을 좇으며 그 허기를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바닷물을 마실수록 갈증이 심해지듯, 물질적 성취는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아파트 평수가 아니라 우주적 안식처이며, 우리가 찾고 싶은 것은 명품 가방이 아니라 잃어버린 신성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방향이 잘못된 그리움은 집착과 중독을 낳습니다. 알코올, 도박, 쇼핑, 관계에 대한 중독은 모두 번지수를 잘못 찾은 복본 본능의 비극적 변주입니다.


『부도지』는 이 복본의 과정을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묘사합니다. 황궁씨는 복본을 위해 가장 춥고 척박한 땅인 북쪽으로 이동하여 스스로 고난을 자처합니다. 따뜻하고 풍요로운 곳에서는 감각적 욕망이 되살아나 복본의 의지를 흐릴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해혹복본 (解惑復本)’, 즉 미혹함을 풀고 근본으로 돌아가기 위한 수행을 시작합니다. 이는 복본이 단순히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뼈를 깎는 정화의 과정이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오미 (五味)의 독소에 찌든 감각을 정화하고, 분별심에 사로잡힌 의식을 닦아내는 치열한 노력이 있어야만 우리는 마고성의 맑은 파동 (율려)과 다시 공명할 수 있습니다.


이 정화의 과정은 마음의 작동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불교 유식학 (Vijnanavada)에서는 이를 ‘전식득지 (轉識得智)’라고 부릅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의식 (識, 식)을 굴려서 지혜 (智, 지)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식’은 대상을 내 멋대로 판단하고 욕망하는 오염된 마음이고, ‘지’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맑은 거울 같은 마음입니다. 즉, 마음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욕망에서 지혜로 돌리는 전환입니다. 탁한 얼음이 녹으면 맑은 물이 되듯, 분별심으로 굳어진 의식을 녹여 투명한 지혜로 바꾸는 과정이 바로 복본을 위한 정화입니다.


이러한 회복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 내면에 태초의 기억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뇌세포에 저장된 단순한 정보 데이터가 아닙니다. 심층 심리학자 칼 융 (Carl Jung, 1875-1961)은 개인의 경험을 넘어선 ‘집단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보았고, 불교는 모든 업 (Karma)과 경험이 저장되는 거대한 창고인 ‘아뢰야식 (Alaya-vijnana)’을 이야기했습니다. 이 깊은 무의식의 바닥에는 인류가 마고성에서 누렸던 완전한 조화와 신성의 기억이 종자 (Seed)처럼 잠들어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욕망과 소음이라는 먼지에 덮여 보이지 않지만, 그 씨앗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본은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거나 외부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덮여 있는 먼지를 털어내고, 망각의 창고를 열어 그 오래된 씨앗을 다시 찾아내는 작업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 (Plato, B.C. 427-347)은 배움을 ‘상기 (Anamnesis)’, 즉 ‘기억해냄’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진리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다시 떠올리는 것입니다. 호모 판테이스트가 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낯선 초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본래의 나’를 기억해 내고, 그 신성한 기억을 지금의 현실로 불러오는 일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향수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나침반입니다. 짙은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멀리서 들려오는 고향의 피리 소리처럼 우리를 인도하는 신호입니다. 이 신호가 강렬할수록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길을 떠날 수 있습니다.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은 떠나지 않습니다. 결핍을 느끼고, 이질감을 느끼고, 여기가 나의 집이 아니라는 근원적인 불안을 느끼는 사람만이 진짜 집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지금 느끼는 외로움과 공허함은 축복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영혼이 아직 잠들지 않았으며, 복본의 맹세가 당신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천부경』의 “일종무종일”은 우리에게 거대한 위로를 건넵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이라는 절벽을 향해 달려가는 폭주 기관차가 아닙니다. 우리는 원형의 트랙을 돌고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10의 완성에서 다시 1의 시작으로 넘어가는 변곡점일 뿐입니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 증발하여 다시 비가 되듯, 우리의 존재는 우주라는 거대한 순환계 안에서 영원히 흐릅니다. 이 순환의 원리를 깨달을 때, 우리는 삶에 대한 집착과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됩니다.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아는 여행자는 해가 저물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호모 판테이스트는 이 세상을 잠시 머무는 여인숙으로 여기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행지에서의 하룻밤이 소중하듯, 찰나의 삶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누립니다. 그는 자신이 ‘유 (有)’의 세계에 파견된 ‘무 (無)’의 대사임을 압니다. 물질세계의 한복판에서 영적인 가치를 실현하고, 분열된 세상 속에서 통합의 율려를 노래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임을 자각합니다.


황궁씨가 북쪽의 추운 땅에서 천년 동안 해혹복본 (解惑復本)을 수행했듯, 우리는 지금 여기,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이라는 척박한 동토 (凍土) 위에서 우리만의 복본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소음 가득한 도시 한복판에서 내면의 고요를 지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자극적인 정보 속에서 판단을 멈추고 (止感, 지감), 가쁜 호흡을 가라앉히며 (調息, 조식), 타인과의 부딪힘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禁觸, 금촉) 삶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작은 욕망 하나를 내려놓을 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며 손을 내밀 때,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 멈춰 서서 감탄할 때, 우리는 마고성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 영혼의 GPS는 “경로를 이탈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안도의 신호를 보냅니다. 그 신호가 바로 우리가 느끼는 충만감과 평화입니다. 반대로 욕망에 휩쓸려 남을 해치거나 자신을 기만할 때 느껴지는 불안과 불쾌감은 “경로를 이탈했습니다”라는 경고음입니다.


인간은 우주에서 떨어져 나온 미아가 아닙니다. 우주가 스스로를 경험하기 위해 잠시 육체라는 옷을 입은 존재일 뿐입니다. 내면의 그리움은 우주가 보내는 호출 신호이며, 향수는 존재를 근원으로 당기는 중력입니다. 이 끌림의 끝에는 태초의 빛과 소리가 어우러진 마고성, 즉 생명의 본향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진실은,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바로 마고성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는 끝나지만 끝이 없는 하나이다."라는 천부경의, 영원한 귀환의, 약속은 인간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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