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잃어버린 푸른 하늘
2-6.1. 저 하늘은 하늘이 아니다
인류는 직립 보행을 시작한 이래 끊임없이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습니다. 머리 위에 펼쳐진 광활하고 푸른 공간은 경외의 대상이자 도달할 수 없는 동경의 영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 신이 살고 있다고 믿었고, 죽은 영혼이 돌아갈 곳이라고 여겼으며, 운명을 주관하는 별들이 운행하는 질서의 공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단을 높이 쌓고, 탑을 올리고, 마침내 로켓을 쏘아 올리며 물리적인 상승을 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경전인 『삼일신고』는 첫 장인 ‘허공 (虛空)’ 편에서 이러한 인류의 보편적인 믿음에 찬물을 끼얹는 충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창창비천 (蒼蒼非天), 현현비천 (玄玄非天).” 저 푸른 것이 하늘이 아니며, 저 까마득한 검은 것도 하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인지하고 숭배해 온 물리적 하늘을 부정하고, 진짜 하늘의 실체를 묻는 형이상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푸른 하늘은 엄밀히 말해 대기권 내의 공기 분자와 태양 빛이 부딪혀 만들어내는 산란 현상 (Scattering)에 불과합니다. 태양 빛 중 파장이 짧은 푸른빛이 대기 중의 입자에 부딪혀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우리 눈에 파랗게 보이는 것입니다. 밤하늘의 검은색 또한 빛이 없는 상태, 즉 암흑이라는 물리적 현상일 뿐입니다. 따라서 창창 (蒼蒼)과 현현 (玄玄)은 시각 정보가 만들어낸 환영이지, 하늘의 본질이 아닙니다. 『삼일신고』가 지적하는 것은 인간이 ‘보이는 현상’을 ‘본질’로 착각하여, 물질적인 공간을 신성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진짜 하늘은 색깔도 없고, 형체도 없으며, 냄새도 없습니다. 그것은 감각 기관으로 포착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짜 하늘은 어디에 있습니까. 『삼일신고』는 그 실체를 ‘허공 (虛空)’이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허공은 비어있는 공간을 뜻하지만,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 (Empty Space)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만물을 담아내고 기르는 근원적인 바탕이자, 형상이 없는 신 (God without Form)이 거주하는 자리입니다. 텍스트는 하늘의 속성을 “형체도 없고 (無形質, 무형질), 끝도 없고 (無端倪, 무단예), 위아래도 없고 (無上下, 무상하), 사방도 없다 (無四方, 무사방)”고 묘사합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방위와 좌표가 사라진 차원, 즉 비국소적 (Non-local)이고 무한한 장 (Field)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허공의 개념은 『천부경』의 첫 글자인 ‘무 (無)’와 완벽하게 공명합니다. “일시무시일”에서 ‘무’는 우주 창조 이전의 시간적 개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주를 꽉 채우고 있는 공간적 본질이기도 합니다. 현대 양자역학이 밝혀낸 것처럼, 원자 내부의 99.99%는 텅 비어 있습니다. 물질은 아주 미세한 입자들의 진동일 뿐, 우주의 대부분은 텅 빈 공간입니다. 그러나 이 공간은 죽어있는 여백이 아니라, 입자가 생성되고 소멸하며 에너지가 요동치는 역동적인 잠재성의 바다입니다. 『천부경』의 ‘무’와 『삼일신고』의 ‘허공’은 바로 이 텅 빈 충만의 공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늘은 저 머리 위에 있는 천장 (Ceiling)이 아니라, 만물 안팎에 스며들어 있는 존재의 바탕입니다.
‘저 하늘이 하늘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인류의 종교관과 세계관을 뿌리째 뒤흔드는 혁명적인 메시지입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하늘을 ‘위쪽 (Up)’에 있는 것으로 설정해 왔습니다. 이 수직적 사고방식은 필연적으로 위계와 계급을 만들어냅니다. 신은 위에 있고 인간은 아래에 있습니다. 왕은 위에 있고 백성은 아래에 있습니다. 정신은 위에 있고 육체는 아래에 있습니다. 이러한 ‘상하 (上下)의 세계관’은 지배와 복종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동해 왔습니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은 고귀하고, 낮은 곳에 있는 것은 비천하다는 이분법적 사고가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늘에 닿기 위해 바벨탑을 쌓고 마천루를 올리며 끝없이 위로 올라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삼일신고』는 “위아래가 없다 (무상하)”고 말하며 이 수직적 위계를 단숨에 허물어버립니다. 하늘이 특정한 방향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신 또한 저 높은 곳에서 인간을 내려다보는 감시자가 아닙니다. 하늘은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으며, 위에도 있고 아래에도 있습니다. 이것은 중심이 어디에나 있고 둘레가 없는 구 (Sphere)와 같습니다. 하늘을 ‘장소 (Place)’가 아닌 ‘상태 (State)’로 인식할 때, 인간을 억압하던 수직적 굴레는 사라집니다. 신성함은 도달해야 할 높은 고지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발견해야 할 깊이의 문제가 됩니다.
이러한 통찰은 ‘내면의 하늘’이라는 개념으로 귀결됩니다. 『천부경』이 “인중천지일 (人中天地一, 사람 안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있다)”이라고 선언했을 때, 그 하늘은 바로 인간의 의식 (Consciousness) 공간을 의미합니다. 눈을 감으면 펼쳐지는 그 무한한 내면의 어둠,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 텅 빈 스크린이 바로 진짜 하늘입니다. 외부의 하늘은 구름이 끼고 밤이 되면 어두워지지만, 내면의 하늘은 물리적인 빛과 어둠에 영향받지 않는 근원적인 광명 (本心本太陽, 본심본태양)을 품고 있습니다.
현대인이 겪는 가장 큰 비극은 이 내면의 하늘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망원경으로 수십억 광년 밖의 우주를 관측하고,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를 날아다니며 물리적인 하늘을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하늘은 쓰레기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끊임없는 걱정, 욕망, 분노, 타인의 시선, 정보의 소음들이 내면의 허공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빈 공간이 없기에 새로운 창조가 일어날 수 없고, 꽉 막힌 공간에서 영혼은 질식합니다. 현대인이 느끼는 답답함과 불안은 폐소공포증과 유사합니다. 물리적으로는 넓은 집에 살지 몰라도, 의식의 공간이 탐욕으로 꽉 차서 옴짝달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푸른 하늘’을 되찾는다는 것은 환경 오염으로 탁해진 대기를 정화한다는 생태적 의미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외부로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어 내부의 무한한 공간을 회복한다는 영적 의미입니다. 『삼일신고』가 가르치는 ‘지감 (止感)’과 ‘조식 (調息)’은 바로 이 내면의 하늘을 청소하는 기술입니다. 감정의 구름을 걷어내고 (지감), 호흡의 바람으로 탁한 기운을 몰아낼 때 (조식), 마음속에는 다시 ‘창창 (蒼蒼)’하고 ‘현현 (玄玄)’한 것들을 넘어선 투명한 허공이 드러납니다.
이 내면의 하늘을 회복한 사람에게는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그는 타인을 볼 때 겉모습 (물리적 형상)을 보지 않고, 그 사람 안에 깃든 하늘 (신성)을 봅니다. 그는 자연을 볼 때 정복해야 할 대상 (땅)으로 보지 않고, 나와 함께 숨 쉬는 생명 (하늘의 표현)으로 봅니다. 모든 존재가 각자의 하늘을 품고 있음을 알기에,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 (敬天愛人, 경천애인)’는 정신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하늘을 공경한다는 것은 저 먼 허공에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과 네 안에 있는 신성을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을 느낄 때 쓰는 말입니다. 하지만 『삼일신고』의 관점에서 보면 하늘은 무너질 수 없습니다. 형체가 없기에 무너질 구조물도 없고, 기둥이 없기에 쓰러질 수도 없습니다. 무너지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우리가 하늘이라고 착각했던 욕망의 탑, 아집의 성벽, 그리고 고정관념들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무너져야 진짜 하늘이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절망은 끝이 아니라, 가짜 하늘을 허물고 진짜 하늘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현대 문명은 하늘을 잃어버린 문명입니다. 고층 빌딩이 하늘을 가려서가 아니라, 인간의 오만과 탐욕이 내면의 하늘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땅의 소유권을 두고 싸우느라 하늘을 잊었고, 눈앞의 이익을 계산하느라 무한을 잊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우주의 고아가 되었습니다.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머리 둘 곳이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고개를 들어 구름을 보는 대신, 눈을 감고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곳에 우주가 시작되기 전의 ‘무 (無)’가 있고, 만물을 낳고 기르는 ‘허공’이 있으며, 138억 년의 역사를 품은 ‘천 (天)’이 있습니다. 이 내면의 하늘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으며, 돈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오직 스스로 자각하고 비워냄으로써만 들어갈 수 있는 성소입니다.
저 높은 곳에 펼쳐진 푸른 창공은 눈에 보이는 현상일 뿐, 생명의 근원인 진짜 하늘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늘은 외부의 대상이 아니라, 우주 만물을 인식하고 생각하는 인간의 의식 깊은 곳, 즉 '내면의 텅 빈 공간'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이 광활한 내면의 우주를 깨닫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물질세계의 중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하늘은 먼 우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 안에 있었습니다. 다만 망각했던 것은 하늘이라는 공간이 아니라, 스스로 하늘을 품고 있었던 자아의 본질입니다.
2-6.2. 선악이라는 도덕의 굴레
인류는 오랜 시간 동안 선 (善)과 악 (惡)을 우주의 절대적인 법칙으로 믿어왔습니다. 신은 선하고 악마는 악하며, 인간의 삶은 이 두 세력 사이의 전쟁터라고 여겼습니다. 도덕과 윤리는 문명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으로 추앙받았고,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숭고한 의무로 교육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도덕관은 인간을 구원하기는커녕, 죄의식과 위선이라는 이중의 족쇄를 채워 자유로운 본성을 억압해 왔습니다. 선악의 기준은 시대와 장소, 권력의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왔지만, 인간은 그 가변적인 기준을 불변의 진리라 착각하며 서로를 단죄하고 배제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경전인 『삼일신고』는 이러한 도덕적 통념에 대해 매우 파격적이고 근원적인 통찰을 제시합니다. 텍스트는 인간의 본질인 진성 (眞性, 참된 성품)에 대해 “선도 없고 악도 없다 (無善惡, 무선악)”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무지하거나 타락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과 악이라는 인위적인 분별이 생겨나기 이전의 순수한 상태, 즉 우주의 원리가 그대로 발현되는 절대적인 긍정의 상태가 바로 인간의 본래 모습이라는 선언입니다. 선악은 본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 현상계에 드러난 마음 (心)의 작용일 뿐입니다.
이 개념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일신고』가 분석하는 인간의 삼중 구조인 성 (性), 명 (命), 정 (精)과 심 (心), 기 (氣), 신 (身)의 관계를 파악해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 (性)은 선악이 없는 절대적 자리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육체를 입고 땅에 태어나 환경과 상호작용할 때, 이 본성은 마음 (心)이라는 현상으로 드러납니다. 이때 비로소 선과 악이 발생합니다. 『삼일신고』는 “마음에는 선악이 있으니 선하면 복이 되고 악하면 화가 된다 (心 有善惡 善福惡禍, 심 유선악 선복악화)”고 설명합니다. 즉, 선악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간이 상황에 반응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상대적인 파동이자 결과론적인 현상입니다.
『부도지』는 이 철학적 원리가 역사적 현실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고성 (麻姑城) 시대의 인류는 선해서 착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선악의 개념 자체가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행동했습니다. 이를 ‘무위 (無爲)’의 상태라 부를 수 있습니다. 사자가 배고파서 사슴을 사냥하는 것은 악이 아니며, 어미 사슴이 새끼를 돌보는 것은 도덕적 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생명의 흐름일 뿐입니다. 마고성의 사람들은 우주의 율려 (律呂)와 공명하며 살았기에, 그들의 행위는 우주의 질서와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억지로 착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상태, 이것이 바로 타락 이전의 순수함입니다.
그러나 오미의 변 이후, 인간은 대상을 ‘나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나에게 쾌락을 주고 생존을 돕는 것은 ‘선’이라 이름 붙이고, 고통을 주고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악’이라 규정했습니다. 이것이 선악의 기원입니다. 선악은 우주적 진리가 아니라, 에고 (Ego)의 생존 본능이 만들어낸 편리한 분류법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인간이 이 주관적인 분류법을 객관적인 도덕 법칙으로 격상시켰다는 데 있습니다. “내 입에 단 것은 선이고, 쓴 것은 악이다”라는 생물학적 반응이 “나를 따르는 것은 선이고, 나를 거스르는 것은 악이다”라는 권력의 논리로 확장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그의 저서 『선악의 저편, Jenseits von Gut und Böse』과 『도덕의 계보, Zur Genealogie der Moral』에서 이러한 도덕의 은밀한 기원을 파헤쳤습니다. 그는 우리가 숭고하다고 믿는 ‘선 (Good)’이라는 개념이 사실은 지배 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발명품이거나, 반대로 피지배 계급이 강자를 깎아내리기 위해 만든 원한 (Ressentiment)의 산물임을 폭로했습니다.
니체에 따르면, 원래 ‘좋음 (Good)’은 생명력이 넘치고, 강하고, 고귀한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반면 ‘나쁨 (Bad)’은 생명력이 약하고, 비천하며, 활력이 없는 상태를 뜻했습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고 집단생활이 시작되면서 이 가치는 전도되었습니다.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과 야성은 ‘악 (Evil)’으로 규정되어 억압받았고, 반대로 시스템에 순종하고 무해하며 얌전한 상태는 ‘선 (Good)’으로 포장되었습니다. 즉, 도덕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야성을 길들이기 위해 고안된 ‘사회적 조련 도구’였습니다.
『부도지』에서 요 (堯) 임금이 등장하여 인위적인 법과 제도를 만들고 세상을 통제하려 했던 시도는 니체가 지적한 ‘도덕의 발명’ 과정과 맥을 같이 합니다. 『부도지』는 요 임금이 천부 (天符)의 자연스러운 이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만든 역법과 수 (數)의 논리로 세상을 재단했다고 비판합니다. 요 임금에게 ‘선’은 자신의 통치 시스템에 순응하는 것이었고, ‘악’은 그 시스템 밖에서 자유롭게 율려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정한 기준에 따라 백성을 나누고, 말을 잘 듣는 자에게는 상을 주고 (선), 거역하는 자는 정벌하여 죽였습니다 (악).
이때부터 ‘선 (善)’은 생명을 살리는 따뜻한 힘이 아니라, 시스템을 유지하고 타자를 억압하는 서늘한 칼날이 되었습니다. “너는 선하지 않다”라는 말은 “너는 우리 집단의 질서를 해치는 위험분자다”라는 사형 선고와 같았습니다. 도덕은 권력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가장 세련된 무기가 되었습니다. 칼로 찌르면 저항하지만, ‘죄책감’을 심어주면 스스로 복종하기 때문입니다. 요 임금의 제도는 겉으로는 질서와 평화를 가져온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인간 내면의 자유로운 신성 (天符, 천부)을 거세하고 규격화된 부품으로 만드는 거대한 감옥의 건설이었습니다.
선악의 굴레가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인간을 끊임없는 자기 검열과 분열 속으로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선해야 한다’는 강박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내면에 있는 자연스러운 욕망이나 감정을 ‘악’으로 규정하고 억압하게 만듭니다.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는 빛은 폭력이 됩니다. 자신의 어두운 면을 악으로 몰아세울수록, 그 억눌린 에너지는 무의식 속에서 괴물이 되어 타인을 향한 혐오나 비난으로 투사됩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잔혹한 학살과 전쟁이 종교적 신념이나 도덕적 정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악을 처단하겠다는 선의지야말로 가장 파괴적인 악이 될 수 있습니다.
『삼일신고』가 제시하는 ‘무선악’은 도덕적 허무주의나 방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악의 대립을 초월하여 생명의 전체성을 회복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하나를 취하면 다른 하나가 따라옵니다. 선을 추구할수록 악에 대한 예민함도 커집니다. 진정한 구원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선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해가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비추듯이, 비가 옥토와 자갈밭을 가리지 않고 내리듯이, 인간의 본성은 대상을 판단하지 않고 존재 그 자체를 긍정하는 거대한 자비입니다.
이러한 경지를 노자 (老子)는 ‘상덕부덕 (上德不德)’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가장 높은 덕은 덕이라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진짜 선함은 자신이 선하다는 의식조차 없습니다. 숨 쉬는 것을 자랑하지 않듯, 타인을 돕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행위가 자연스러운 생명 활동으로 일어날 뿐입니다. 반면 ‘하덕 불실덕 (下德不失德)’이라 하여, 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애씁니다. 즉, 억지로 착한 척하고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려 합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작위적인 선, 계산된 도덕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호모 판테이스트는 선악의 재판관이 아니라 생명의 옹호자입니다. 그는 타인의 행동을 도덕적 잣대로 심판하기 이전에, 그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생명적 배경과 결핍을 이해하려 합니다. 악을 미워하는 대신, 악이 발생한 원인인 분리와 단절을 치유하려 합니다. 범죄자를 감옥에 가두는 것보다, 범죄를 낳는 사회적 불균형을 바로잡는 데 관심을 둡니다. 이것이 『삼일신고』가 말하는 ‘성통공완 (性通功完)’의 사회적 실천입니다. 공덕을 완성한다는 것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점수를 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그러진 균형을 바로잡아 생명이 막힘없이 흐르게 하는 ‘조율 (Tuning)’의 작업입니다.
현대 사회는 과잉 도덕의 시대입니다. 인터넷과 SNS에서는 매일 누군가가 도덕적 결함으로 인해 단죄받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합니다. 정의라는 이름의 마녀사냥이 횡행하고, 나와 다른 생각은 ‘악’으로 규정되어 공격받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이 소란스러운 도덕 전쟁 속에서 정작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은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선악을 따지느라 사람을 잃어버린 형국입니다.
이제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깨어있는 사람’으로 도약해야 할 때입니다. 착함은 타인의 인정이나 사회적 규범에 맞추려는 수동적인 태도일 수 있지만, 깨어있음은 선악의 판단이 일어나기 이전의 자리, 즉 ‘진성’의 자리를 지키는 주체적인 태도입니다.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그 상황을 “좋은가, 나쁜가”로 재단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생명 활동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는 용기가 필요하고, 때로는 불의에 대해 분노하는 에너지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행위가 좁은 자아 (에고)의 이기적인 반응인가, 아니면 전체를 살리기 위한 본성의 응답인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부도지』의 복본은 윤리적 교정을 통해 도덕 군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자재율 (自在律)’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자재율은 외부의 규율 없이도 스스로 조화로운 삶을 사는 상태입니다. 법이 없어도 남을 해치지 않고, 규칙이 없어도 우주의 질서와 하나 되어 흐르는 경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도덕이자, 도덕을 넘어선 도덕입니다.
선악의 굴레를 벗어던질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남의 시선이나 사회적 평판이라는 감옥에서 걸어 나와, 내면의 신성이 이끄는 대로 춤추며 살 수 있습니다. 그때의 행동은 의무가 아니라 유희가 되며, 희생이 아니라 나눔이 됩니다. ‘무선악’의 지혜는 선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강요와 억압의 도구가 아닌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생명력으로 해방시키는 열쇠입니다. 본성에는 선도 악도 없습니다. 오직 무한한 가능성과 사랑만이 펼쳐져 있을 뿐입니다.
2-6.3. 욕망의 전차가 짓밟은 것
인류의 문명사는 속도전의 역사입니다. 더 빨리 이동하고, 더 빨리 생산하며, 더 빨리 소비하기 위해 인류는 끊임없이 가속 페달을 밟아왔습니다. 증기 기관에서 내연 기관으로, 그리고 디지털 네트워크의 광속으로 이어지는 이 속도의 향연은 표면적으로는 기술의 진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 거대한 전차를 움직이는 진짜 연료는 화석 연료나 전기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임을 알게 됩니다. 멈출 줄 모르는 욕망의 전차는 풍요라는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는 동안, 정작 그 풍요가 기반해야 할 삶의 토대를 무참히 짓밟고 지나갔습니다. 『삼일신고』는 이 파괴적인 동력의 실체를 ‘탐 (貪, 탐냄)’이라고 정의하며, 『천부경』은 이로 인해 우주의 조화로운 구조인 ‘6 (六)’이 붕괴되었음을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삼일신고』는 인간이 감각의 노예가 되어 빠지게 되는 18가지 경계 중에서 ‘탐 (貪)’을 ‘감 (感)’의 작용 중 하나로 지목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탐은 단순한 생존을 위한 식욕이나 의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필요 (Need)’를 넘어선 ‘탐욕 (Greed)’입니다. 필요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만큼만 요구하지만, 탐욕은 한계가 없습니다. 컵에 물이 가득 찼는데도 계속 들이부으려는 이 맹목적인 의지는 필연적으로 흘러넘침과 낭비를 낳습니다. 오미 (五味)의 변 이후, 인간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소유하고 축적하기 위해 타자를 착취하기 시작했습니다.
근대 문명은 이 ‘탐 (貪)’을 시스템의 동력으로 공식화했습니다. 막스 베버 (Max Weber, 1864-1920)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분석했듯이, 근대 자본주의는 개인의 이윤 추구 욕구를 합리적이고 정당한 행위로 승격시켰습니다. 과거에는 죄악시되던 탐욕이 ‘자본 축적’이라는 세련된 이름으로 포장되어 문명 발전의 엔진이 된 것입니다. “탐욕은 선하다 (Greed is good)”라는 영화 속 대사는 자본주의 사회의 숨겨진 십계명입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인간을 부속품으로 만드는 행위는 경제 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합리화되었습니다. 탐욕은 더 이상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구조적 원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부경』의 수리 철학은 이러한 무한 팽창의 욕망이 우주의 생명 회로를 끊어놓는 치명적인 오류임을 지적합니다. 『천부경』은 우주의 운행 원리를 설명하며 “대삼합육 (大三合六)”이라는 지표를 제시합니다. 이는 하늘 (1), 땅 (2), 사람 (3)이라는 큰 셋이 합쳐져 ‘6’이라는 생명력의 공유 지대를 만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6은 단순한 합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천지인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에게 스며들어 에너지를 주고받는 ‘상생 (相生)의 교차로’입니다. 1, 2, 3이 각자의 존재를 주장하는 수라면, 6은 그 존재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관계의 풍요로움’을 상징합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수증기가 되어 다시 하늘로 올라가듯, 6은 막힘없이 흐르는 우주적 대순환의 고리입니다.
욕망의 전차는 바로 이 ‘6의 흐름’을 가로막습니다. 탐욕의 본질은 흐르는 것을 멈추어 내 것으로 고인 물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 (1)을 독점하고, 땅의 소산 (2)을 사유화하며, 사람의 노동 (3)을 착취하여 오직 ‘나의 창고’만을 채우려 합니다. 천지인이 서로 소통하며 6이 되어야 하는데, 탐욕은 이 셋을 강제로 분리하여 각자의 방에 가둡니다. 그 결과 에너지는 순환하지 못하고 한곳에 쌓여 썩어가고, 다른 한쪽은 말라비틀어집니다. 기후 위기, 빈부 격차, 자원 고갈은 모두 ‘대삼합육’의 순환 시스템이 파괴되고, 욕망이라는 댐이 흐름을 막아버린 결과입니다. 6이 무너진 세상은 피가 돌지 않는 괴사 상태와 같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이러한 현상을 ‘몰아세움 (Ge-stell)’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기술 문명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두지 않고, 인간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부품 (Bestand)’으로 몰아세웁니다. 숲은 목재의 저장소로, 강은 수력 발전의 자원으로, 심지어 인간조차 ‘인적 자원 (Human Resource)’이라는 에너지원으로 환원됩니다. 탐욕의 시선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은 ‘돈이 되는가, 안 되는가’로만 가치가 매겨집니다. 이것이 바로 『삼일신고』가 경계한 ‘탁 (濁)’한 세상의 전형입니다. 맑은 생명력은 사라지고, 오직 효용 가치로만 환산되는 탁한 물질만이 남았습니다.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릅니다. “더 많이, 더 빨리”를 외치며 미래를 향해 돌진하지만, 그 끝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천부경』의 시간관인 “운삼사 성환오칠 (3이 4가 되어 5와 7로 순환한다)”은 직선이 아닌 원형의 순환을 말합니다. 봄이 가면 가을이 오고, 낮이 가면 밤이 오듯, 성장은 성숙으로 이어지고 생산은 휴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욕망은 이 순환을 거부합니다. 멈춤 없는 성장, 영원한 청춘, 끝없는 소비를 꿈꿉니다. 순환하지 않는 에너지는 독이 됩니다. 순환의 고리인 5와 7이 끊어지면, 시스템은 과부하가 걸리고 결국 자멸하게 됩니다. 암세포가 숙주를 죽일 때까지 증식하는 것처럼, 멈춤을 모르는 탐욕은 지구라는 숙주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욕망의 전차에 올라탄 인간은 풍요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극도로 빈곤합니다. 에리히 프롬 (Erich Fromm, 1900-1980)이 지적했듯, ‘존재 (Being)’ 양식이 아닌 ‘소유 (Having)’ 양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소유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입니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원하고, 둘을 가지면 셋을 원합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사물에 종속됩니다.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명품 가방이 인간을 들고 다니고, 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 집을 모시기 위해 평생을 노동합니다. 탐 (貪)은 주인을 노예로 만드는 가장 강력한 주술입니다.
『삼일신고』는 이 탐욕의 불길을 끄는 방법으로 ‘지감 (止感)’을 제시합니다. 멈추는 것입니다. 외부로 향하는 욕망의 질주를 멈추고,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노자가 말한 ‘지족 (知足, 족함을 앎)’과 통합니다. “족함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知足不辱 知止不殆, 지족불욕 지지불태).” 6의 조화는 더 많이 가질 때 오는 것이 아니라, 넘치는 것을 덜어내고 부족한 것을 채워 균형을 맞출 때 옵니다.
이러한 멈춤과 비움의 미학을 삶으로 실천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하는, 호모 판테이스트입니다. 그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허덕이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갖추어진 충만함을 발견하고 누리는 사람입니다.
무너진 6을 복원하는 것은 현대 문명이 직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환경 보호 운동을 하거나 기부를 많이 하자는 차원이 아닙니다. 삶의 방식을 ‘약탈적 모드’에서 ‘공생적 모드’로 전환하는 존재론적 혁명입니다. 밥상에서 고기를 줄이고 채식을 늘리는 것, 일회용품 사용을 자제하는 것, 과도한 냉난방을 줄이는 것. 이 사소해 보이는 실천들이 실은 욕망의 전차에서 내려와 대지의 율려와 보조를 맞추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내가 소비를 멈출 때, 지구 반대편의 숲이 살아나고, 내가 욕심을 내려놓을 때,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욕망은 결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전차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 종착역은 벼랑 끝입니다. 이제 속도를 늦추고 차창 밖을 보아야 합니다. 짓밟힌 풀꽃들이 보이고, 신음하는 대지가 보이고, 지쳐 쓰러진 이웃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끊어진 고리를 다시 연결하여 6의 조화를 회복하는 일이 바로 탐욕의 시대를 건너는 호모 판테이스트의 사명입니다. 진정한 풍요는 창고에 쌓인 곡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튼튼한 관계망, 즉 6의 완성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