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흡혈귀의 진실

by 이호창

스트리고이와 뱀파이어

서구 문명이 구축한 공포의 원형질 속에서 뱀파이어는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며 타자의 피를 탐하는 매혹적인 괴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존재의 기원을 루마니아의 깊은 숲속, 트란실바니아의 고성에서 찾곤 합니다. 브램 스토커 (Bram Stoker, 1847-1912)가 창조한 드라큘라 백작이 전 세계적인 아이콘이 되면서, 루마니아는 흡혈귀의 본향이라는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땅의 역사와 언어 속에 깃든 진실은 서구의 대중문화가 덧씌운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궤적을 그립니다. 루마니아 사람들에게 '뱀파이어'라는 단어는 19세기 중반까지 낯선 외래어였으며, 그들의 무의식 깊은 곳에는 '스트리고이 (Strigoi)'라는 토착적인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루마니아 문화사에 유입된 서구적 뱀파이어 개념과 토착적 실재인 스트리고이의 충돌, 그리고 이들이 정치적 도구로 변주되는 역사적 과정은 공포라는 감정이 단순한 심리적 기제를 넘어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는 핵심 동력임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예시입니다.

루마니아어 사전에 '뱀파이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39년의 일입니다. 콘스탄틴 네그루치 (Constantin Negruzzi, 1808-1868)가 빅토르 위고 (Victor Hugo, 1802-1885)의 시 「사바트의 춤, La Ronde du Sabbat」을 번역하면서 이 낯선 단어를 소개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네그루치가 원문에는 없는 '스트리고이'라는 단어를 뱀파이어와 함께 슬며시 끼워 넣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당시 루마니아 독자들에게 뱀파이어라는 생경한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익숙한 토착 귀신인 스트리고이를 호출해야만 했던 번역가의 고뇌를 보여줍니다. 즉 뱀파이어는 처음부터 루마니아의 것이 아니라, 서구의 낭만주의 문학을 통해 역수입된 문화적 산물이었습니다. 서유럽, 특히 독일과 프랑스의 문화를 동경하며 근대화를 추진하던 19세기 루마니아 지식인들에게 뱀파이어는 문명화된 서구의 유행이자 세련된 공포의 양식이었습니다.

반면 스트리고이는 루마니아 농촌 공동체의 뿌리 깊은 민속 신앙에 기원을 둡니다. 그들은 죽음 이후에도 구천을 떠도는 원혼이나, 살아생전 악행을 저지른 자가 죽어서도 쉬지 못하고 돌아오는 존재였습니다. 19세기 말까지 루마니아 문학에서 뱀파이어와 스트리고이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채 혼용되기도 했으나, 그 함의는 미묘하게 달랐습니다. 뱀파이어가 서구 문학의 번역과 수용 과정에서 유입된 도시적이고 세련된, 때로는 정치적인 은유의 대상이었다면, 스트리고이는 시골 묘지의 음습한 흙냄새를 풍기는 원초적인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두 존재의 기묘한 동거는 루마니아 근대화 과정의 이중성을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흥미롭게도 19세기 후반 루마니아 문학에서 뱀파이어는 초자연적인 괴물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수사로 더 빈번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이온 루카 카라지알레 (Ion Luca Caragiale, 1852-1912)의 희극 『잃어버린 편지, O scrisoare pierdută』나 요아킴 드라게스쿠 (Joachimu C. Drăgescu)의 소설 『카르파티아의 밤, Nopţile carpatine』에서 뱀파이어는 민중의 피를 빠는 부패한 정치인이나 탐욕스러운 자본가를 지칭하는 용어로 등장합니다.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자본이 노동자의 고혈을 착취하는 것을 흡혈 행위에 비유하듯, 당시 루마니아 지식인들은 외세의 간섭이나 내부의 부조리를 비판하기 위해 뱀파이어라는 단어를 적극적으로 차용했습니다. 이는 뱀파이어가 실재하는 공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모순을 꼬집는 지적 도구로 기능했음을 시사합니다.

반면 스트리고이는 여전히 민중의 삶 속에서 실체적인 두려움을 자아내는 존재였습니다. 바실레 알렉산드리 (Vasile Alecsandri, 1821-1890)나 미하이 에미네스쿠 (Mihai Eminescu, 1850-1889)와 같은 낭만주의 시인들은 민담 속의 스트리고이를 시적 소재로 삼아 죽음을 초월한 사랑이나 역사적 비극을 노래했습니다. 에미네스쿠의 시 「유령들, Strigoii」은 고트프리트 뷔르거 (Gottfried A. Bürger, 1747-1794)의 발라드 「레노레, Lenore」에서 영감을 받았으면서도, 루마니아 고유의 정서를 담아내어 스트리고이를 문학적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습니다. 서구의 뱀파이어가 살롱과 극장에서 소비되는 동안, 스트리고이는 민족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고유한 문화유산으로서 문학적 시민권을 획득해 나갔습니다.

서구 세계가 트란실바니아를 뱀파이어의 본거지로 인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물론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Dracula』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루마니아 대중이 드라큘라를 접한 것은 소설 출간(1897년)보다 한참 뒤인 1920년대에 들어서였습니다. 프리드리히 무르나우 (F.W. Murnau, 1888-1931)의 영화 <노스페라투, Nosferatu>가 1922년 부쿠레슈티에서 상영되었을 때, 루마니아 관객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고향이 전 세계적인 공포의 무대로 소비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토드 브라우닝 (Tod Browning, 1880-1962)의 영화들이 소개되면서 할리우드식 뱀파이어 이미지가 루마니아에 역수입되었고, 이는 토착적 스트리고이와는 또 다른 층위의 문화적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1930년대에 이르러 루마니아 문학계는 비로소 서구적 뱀파이어의 문법을 수용하여 독자적인 서사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1938년에 출간된 G.M. 암자 (G.M. Amza)와 알렉산드루 빌치우레스쿠 (Al. Bilciurescu)의 소설 『뱀파이어, Vampirul』는 루마니아 최초로 명시적인 뱀파이어를 적대자로 내세운 장편소설입니다. 이 작품에서 뱀파이어는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신비로운 존재인 동시에,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을 억누르고 봉건적 질서를 회복하려는 반동적 인물로 묘사됩니다. 이는 당시 급격한 산업화와 계급 갈등을 겪던 루마니아 사회의 불안을 투영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들이 서구의 드라큘라 모티프를 차용하면서도, 그 속에 루마니아의 현실적인 계급 투쟁과 종교적 갈등을 교묘하게 엮어냈다는 사실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미르체아 엘리아데 (Mircea Eliade, 1907-1986)의 중편 소설 「미스 크리스티나, Domnişoara Christina」는 스트리고이의 전형성을 탈피하여 뱀파이어적 요소를 결합한 수작입니다. 기존 문학에서 스트리고이가 주로 시골 노인이나 집시 노파의 모습으로 그려졌다면, 엘리아데가 창조한 크리스티나는 젊고 매혹적이며 귀족적인 배경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녀는 죽음 이후에도 생명력을 갈구하며 산 사람을 유혹하고, 자신의 영지인 농촌 마을을 공포로 몰아넣습니다. 여기서 스트리고이는 단순한 귀신을 넘어 억눌린 에로티시즘과 퇴폐적인 귀족 계급의 상징으로 변모합니다. 엘리아데는 토착적인 스트리고이 전설에 서구적인 뱀파이어의 세련된 이미지를 덧입힘으로써, 루마니아 환상 문학의 지평을 확장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파시즘의 광풍, 그리고 공산주의 정권의 수립이라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뱀파이어와 스트리고이는 끊임없이 정치적으로 호출되었습니다. 1940년대 파시즘 정권 하에서는 유대인이나 적대적인 외국 세력을 '피를 빠는 뱀파이어'로 매도하는 프로파간다가 횡행했습니다. 반면 1947년 이후 공산 정권은 과거의 부르주아 계급과 지주, 그리고 구체제 정치인들을 '파시즘의 스트리고이'라고 명명하며 청산의 대상으로 규정했습니다. 특히 공산당 기관지들은 노동자를 착취했던 자본가들을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민중을 괴롭히는 스트리고이에 빗대어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민속 신앙의 공포가 이데올로기의 적을 타자화하고 공격하는 정치적 무기로 전용된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적 전용은 1965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Nicolae Ceaușescu, 1918-1989)의 집권기와 맞물려 더욱 기이한 역설로 치달았습니다. 차우셰스쿠 정권은 서구가 루마니아에 덧씌운 '드라큘라'와 '뱀파이어'의 이미지를 국가의 존엄을 해치는 불순한 자본주의적 산물로 간주하여 철저히 배격했습니다. 대신 그는 소설 속 흡혈귀의 모델이 된 블라드 3세 (Vlad Țepeș, 1431-1476)를 자신의 통치 모델로 적극 차용했습니다. 1976년 열린 블라드 3세 서거 50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차우셰스쿠는 그를 오스만 제국에 맞서 국가의 주권을 수호한 자주적 민족 영웅으로 격상시켰습니다. 이는 소련의 간섭을 배제하고 독자 노선을 걷고자 했던 자신의 외교 정책을 중세 군주의 투쟁에 투영하여 정당화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도는 1979년 제작된 관제 영화 『블라드 3세, Vlad Țepeș』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부패한 귀족들을 척결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이룩하는 '엄격하지만 공정한 통치자'로 묘사되는데, 이는 차우셰스쿠가 자신을 '무질서를 바로잡는 강력한 지도자'로 포장하던 방식과 판박이였습니다. 심지어 콘스탄틴 지우레스쿠 (Constantin Giurescu)를 위시한 관영 역사학자들은 블라드 3세의 잔혹한 처형 방식을 '국가 안보를 위한 불가피한 결단'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정권의 공포 정치를 '필요악'으로 합리화하는 논리적 근거를 마련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잔혹했습니다. 독재의 그늘이 짙어질수록, 차우셰스쿠 자신은 서구 언론과 굶주린 인민들에 의해 '현대의 뱀파이어'로 호명되기 시작했습니다. 뱀파이어 신화를 거부했던 독재자가 스스로 뱀파이어가 되어버린 이 비극은, 공포의 은유가 어떻게 권력과 결탁하고 전복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흥미로운 점은 21세기에 이르러 서구 대중문화가 다시금 '스트리고이'라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호출하며 뱀파이어의 공포를 재정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000년대 초반 '트와일라잇 (Twilight)' 시리즈로 대표되는 낭만적이고 인간화된 뱀파이어에 대한 반작용으로, 현대 미디어는 루마니아의 원초적인 전설로 회귀하여 괴물성을 회복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Guillermo del Toro)의 소설 및 TV 시리즈 『스트레인, The Strain』은 흡혈귀를 매혹적인 귀족이 아닌, 기생충에 감염된 끔찍한 생물학적 변종으로 묘사하며 이들을 명확히 '스트리고이'라 명명합니다. 이는 19세기 문학이 거세해버린 스트리고이의 질병적이고 혐오스러운 속성을 현대의 생물학적 공포 (Bio-horror)로 치환한 것입니다. 또한 리셸 미드 (Richelle Mead)의 소설 『뱀파이어 아카데미, Vampire Academy』는 루마니아 민속학의 개념을 차용하여, 마법을 쓰는 필멸의 뱀파이어 '모로이 (Moroi, 스트리고이의 또 다른 이름)'와 영생을 위해 악을 선택한 언데드 '스트리고이'를 대립시킵니다. 여기서 스트리고이는 단순한 괴물을 넘어, 도덕적 타락과 잃어버린 인간성의 극단으로 그려집니다. 이러한 현대적 변주는 뱀파이어가 더 이상 살롱의 신사가 아니라, 우리가 잊고 지냈던 흙냄새 나는 죽음의 공포, 즉 스트리고이의 본질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미디어가 그려내는 스트리고이의 귀환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루마니아의 깊은 시골 마을에서 여전히 행해지는 실재하는 '스트리고이 사냥'입니다. 이는 과거의 전설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뉴스로 보도되며 현대 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2004년 루마니아 남서부 돌지 (Dolj) 카운티의 작은 마을, 마로티누 데 수스 (Marotinu de Sus)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마을의 76세 노인 페트레 토마 (Petre Toma)가 사망한 후, 그의 조카딸이 원인 모를 병에 시달리자 마을 사람들은 죽은 토마가 스트리고이가 되어 산 사람의 생명력을 빨아먹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밤중에 6명의 남자가 묘지로 숨어들어 무덤을 파헤쳤고, 시신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낸 뒤 묘지 밖 십자가로에서 불태웠습니다. 그들은 그 재를 물에 타서 병든 조카딸에게 마시게 했으며, 놀랍게도 그녀는 건강을 회복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 사건은 21세기 유럽연합 가입을 목전에 둔 루마니아에서 벌어진 중세적 의식이라는 점에서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법원은 '죽은 자의 평온을 해친 죄'로 가담자들에게 실형을 선고했지만, 마을 주민들은 "우리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괴물을 없애 산 사람을 구했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이 사건은 서구화된 법 체계와 토착적인 민속 신앙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보여주며, 스트리고이가 단순한 미신을 넘어 공동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실체적 공포로 인식되고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결국 루마니아 문화사에서 뱀파이어와 스트리고이는 서로 다른 기원을 가졌으나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진화해 온 이란성 쌍둥이와 같습니다. 뱀파이어가 서구의 시선으로 재구성된 '타자화된 루마니아'의 이미지라면, 스트리고이는 루마니아 민중의 삶과 죽음, 그리고 공포가 응축된 '내재된 자아'의 표상입니다. 서구 문학이 뱀파이어를 통해 성적 욕망과 금기를 탐구할 때, 루마니아는 스트리고이를 통해 공동체의 결속과 역사적 트라우마를 되새김질했습니다. 외래어인 뱀파이어가 도시의 극장과 신문 사설을 장식하는 동안, 토착어인 스트리고이는 시골 마을의 화롯가와 묘지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이 두 존재는 서로의 경계를 허물며, 외부에서 규정한 이미지와 내부에서 길어 올린 정체성이 혼재된 독특한 문화적 지형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루마니아의 흡혈귀 전설을 들여다볼 때 마주하게 되는 것은 단순한 괴물의 형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서구를 동경하면서도 자신의 뿌리를 지키려 했던 한 주변부 국가의 문화적 고투이자, 공포라는 감정을 통해 사회적 모순을 해석하려 했던 지성사의 단면입니다. 뱀파이어와 스트리고이의 변증법적 관계는 외부의 시선과 내부의 인식, 문명과 토착, 이성과 미신이 어떻게 충돌하고 융합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입니다. 그렇기에 트란실바니아의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피를 탐하는 괴물이 아니라, 격변의 시대를 살아낸 인간들의 불안과 욕망,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시대의 그림자일 것입니다. 지식은 박제된 정보가 아니라 이처럼 맥락을 통해 살아 숨 쉬는 지혜가 됩니다. 우리가 괴물의 역사에서 읽어내야 할 것은 공포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공포를 잉태하고 소비하며 변주해 온 인간 사회의 역동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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