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에서 말을 거는 신성

소크라테스의 다이몬, 기독교의 성령, 베단타의 아트만

by 이호창

내면에서 말을 거는 신성


— 소크라테스의 다이몬, 기독교의 성령, 베단타의 아트만



https://youtu.be/QMnEEP5-7Zs?si=Ko2Ey-yiD3seM8EA


인간의 지성사에는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물음이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에 자기 자신보다 더 크고 더 명료한 어떤 것이 실재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에 대해 기독교 신학은 성령(聖靈, Holy Spirit)이라고 답하고, 인도 베단타 철학은 참나, 곧 아트만(Ātman)이라고 답하며,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Socrates, BC 469~399)는 다이몬(Daimon)이라고 답했습니다. 이 세 개념은 그것이 탄생한 시대와 문화, 그리고 그것을 떠받치는 형이상학적 전제가 서로 크게 다릅니다. 그러나 이 셋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경험 안에서 인간을 이끄는 신성한 내면의 실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에세이는 그 세 개념이 각각 무엇을 주장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어떤 지점에서 근본적으로 갈라지는지를 검토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다이몬 — 금지하는 목소리의 철학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내면에서 들었다고 주장한 목소리를 그는 다이몬(Daimon) 혹은 다이모니온(Daimonion)이라고 불렀습니다. 플라톤 (Plato, BC 428~348)이 기록한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명 (Apologia Sōkratous)』에서 소크라테스는 이 목소리가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들려왔으며, 그것은 언제나 어떤 행동을 하지 말라고 제지하는 방식으로 작용했다고 밝힙니다. 다이몬은 그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무언가를 하려 할 때 그것이 잘못된 방향임을 신호로 알려주는 방식으로만 개입했습니다.

다이몬이라는 단어 자체는 고대 그리스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호메로스 (Homēros)의 서사시에서 다이몬은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는 초자연적 힘 전반을 가리켰습니다. 헤시오도스 (Hesiodos, BC 750~650 추정)에 이르면, 황금시대의 영혼이 죽어서 지상의 수호령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등장하며, 다이몬은 개인의 영혼 안에 머무르며 그를 보호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헤라클레이토스 (Hērakleitos, BC 535~475 추정)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의 성품이 곧 그의 다이몬이다"라는 명제를 남겼습니다. 이 명제에서 다이몬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본성과 동일시됩니다.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은 이 모든 전통적 의미를 계승하면서도 그것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은 올림포스의 신들처럼 인간 삶에 직접 개입하여 운명을 좌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크세노파네스 (Xenophanēs, BC 570~475 추정) 이후에 발달한 철학적 신, 즉 세계의 논리적 근거로서의 신과도 다릅니다.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이 가진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것이 부정성(否定性)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이몬은 인간의 자연적 욕구나 사회적 기대를 추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 의식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려 할 때만 작동하며, "아니다"라고만 말합니다.

이 부정성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실천 전체를 설명하는 열쇠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정치 권력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는데, 그는 이것이 다이몬의 명령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다이몬이 그에게 공직에 나서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를 소크라테스는 간접적으로 설명합니다. 진정한 정의를 추구하는 자는 아테네의 정치 체제 안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이몬은 그를 광장(아고라, Agora)의 대화자로 남겨두었고, 그 덕분에 소크라테스는 법정, 군대, 원로원이 아닌 아고라의 사람들, 즉 노예와 외국인과 청년들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후대의 학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다이몬을 양심의 목소리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다이몬은 소크라테스 특유의 도덕적 직관이 의인화된 표현에 불과합니다. 두 번째 해석은 다이몬을 합리적 이성 이외의 또 다른 인식 능력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분명히 합리주의자였지만, 동시에 합리적 논증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실재가 있다고 믿었으며, 다이몬은 바로 그 실재에 접촉하는 통로였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해석은 다이몬을 신성한 존재로부터 비롯된 실제적 음성으로 보는 신학적 해석입니다.

이 세 가지 해석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 자신의 진술을 따를 때, 다이몬은 분명히 그의 이성적 판단과 구별되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성이 아직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미리 경고를 보내는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이몬은 이성보다 앞서 있는 어떤 인식 능력이거나, 혹은 이성 자체가 완전히 포착하지 못하는 더 넓은 실재와 인간을 연결하는 통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기꺼이 독배를 마셨는데, 이때에도 다이몬은 침묵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죽음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증거로 해석했습니다. 다이몬이 제지하지 않는 것은 그 선택이 옳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이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그것이 인간의 이성에 대해 갖는 관계입니다. 다이몬은 이성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다이몬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이성적 검토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논리적 논변을 통해 진리를 탐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성만으로는 인간이 완전한 지혜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이몬은 이성의 한계 지점에서 작동하며, 인간을 더 큰 실재 쪽으로 방향 전환시키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기독교의 성령 — 인격을 지닌 신의 내재


기독교 신학에서 성령(聖靈, 그리스어: Ἅγιον Πνεῦμα, 하기온 프뉴마)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의 세 번째 위격입니다. 성령은 어떤 비인격적 힘이나 에너지가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성령은 근심하시고(에베소서 4:30), 탄식하시며(로마서 8:26), 뜻을 행사하시는(고린도전서 12:11) 분입니다. 이러한 속성들은 인격체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은 성령을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본질적으로 동등하며 영원한 존재로 이해합니다.

성령이라는 개념은 히브리어 루아흐(Ruach)에서 출발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루아흐는 하나님의 영, 바람, 호흡을 뜻하는 단어로, 생명의 근원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1장 2절은 태초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했다고 기록합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은 특별한 과업을 위해 선택된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임하는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예언자들, 판관들, 왕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그 사역이 끝나거나 그들이 죄를 범하면 영이 떠나가기도 했습니다. 사울 왕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건(사무엘상 16:14)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신약성경은 성령의 사역에 대해 질적으로 다른 이해를 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난 후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 그리스어: 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를 보낼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약속했습니다(요한복음 14:16~17). 파라클레토스는 옆에서 돕는 자, 위로자, 중보자를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사건 이후, 신약성경은 성령이 신자들 안에 영구적으로 내주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서 신자의 몸을 성령이 거하시는 전(殿)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령의 내주는 기독교 신학에서 단순한 신비적 체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론적으로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성령은 신자를 거듭나게 하고(요한복음 3:5~8), 의의 길로 인도하며(로마서 8:14), 성경을 이해하도록 돕고(고린도전서 2:12), 기도를 풍성하게 하며(로마서 8:26~27),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聖化) 과정을 이끕니다(갈라디아서 5:16). 이 목록은 성령의 사역이 지적이고 도덕적이고 영적인 모든 차원에 걸쳐 있음을 보여줍니다.

기독교 신학의 맥락에서 성령의 내주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인간과 하나님의 합일(合一)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가톨릭 신학자들은 이 점에서 동의합니다. 성령이 신자 안에 내주한다고 해서 신자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내주는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격과 인격 사이의 교제(交際)의 관계, 즉 하나님이 인간을 통치하고 인간이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관계를 뜻합니다. 성령은 신자 안에 거하시지만, 신자와 성령은 여전히 서로 구별되는 인격입니다.

이 점에서 성령은 소크라테스의 다이몬과 구조적 유사성을 가집니다. 둘 다 인간의 내면에 작용하는 신성한 실재이며, 인간의 의식보다 더 큰 지혜를 가지고 그 의식을 이끕니다. 그러나 성령은 다이몬과 달리 인간이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제지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성령은 신자를 적극적으로 인도하고, 가르치고, 변화시킵니다. 다이몬의 사역이 부정적(否定的, negative)이라면, 성령의 사역은 긍정적(肯定的, positive)이고 건설적입니다. 성령은 인간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형성되는 과정을 주도하는 능동적 행위자입니다.

또한 성령은 보편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이해에 따르면, 성령의 내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해 부어지며, 인간의 종교적 열망이나 노력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은 참나(아트만)의 개념과 날카롭게 대조됩니다. 참나는 인간이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인간이 그것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베단타의 참나 — 인간이 곧 우주인 이유


힌두철학, 그 중에서도 베단타(Vedānta) 학파의 전통에서 참나는 아트만(Ātman)을 한국어로 옮긴 표현입니다. 아트만은 산스크리트어로 자아, 영혼, 개인의 본질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베단타 철학에서 아트만은 일상적 의미의 자아, 즉 자의식(自意識, ahaṃkāra)이나 감각과 감정을 경험하는 심리적 주체와는 전적으로 구별됩니다. 아트만은 이 모든 경험적 자아의 기반에 있는 순수한 의식, 변하지 않고 영원한 존재의 토대입니다.

아트만에 관한 가장 체계적인 사유는 우파니샤드(Upaniṣad)에서 시작됩니다. 대부분 기원전 8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성립된 우파니샤드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핵심 주제는 아트만과 브라흐만(Brahman)의 관계입니다. 브라흐만은 우주의 궁극적 실재, 존재 전체의 근거를 뜻합니다. 우파니샤드는 이 두 개념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가르칩니다. "나는 브라흐만이다(Aham Brahmāsmi)"와 "그대는 바로 그것이다(Tat tvam asi)"라는 명제가 이 가르침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합니다. 한자로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즉 우주의 본체와 개인의 자아가 하나라는 뜻으로 옮깁니다.

8세기의 사상가 샹카라(Śaṅkara, 788~820 추정)는 이 가르침을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 Advaita Vedānta)으로 철학적으로 완성했습니다. 샹카라에 따르면, 브라흐만만이 참된 실재이며 현상 세계의 다양성은 마야(Māyā), 즉 환영(幻影)입니다. 개인적 자아와 우주적 실재가 분리되어 있다는 인식 자체가 무명(無明, Avidyā), 즉 무지의 상태입니다. 이 무지를 벗어나면 아트만과 브라흐만이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진리를 직접 체득하게 되고, 이것이 해탈(解脫, Mokṣa)입니다.

참나의 개념이 성령이나 다이몬과 가장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은, 그것이 처음부터 인간 안에 완전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데 있습니다. 성령은 신자에게 부어지는 것이고, 다이몬은 소크라테스에게 들려오는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신성한 실재는 인간 밖에서 인간 안으로 들어오거나 인간에게 관여하는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아트만은 처음부터 인간의 가장 깊은 본질입니다. 인간이 아트만을 발견하는 것은 외부의 신성한 실재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있는 그대로 깨닫는 사건입니다. 아트만의 관점에서 보면, 신성한 실재를 찾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이 원래 무엇인지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단타 철학은 이 망각을 매우 구체적으로 분석합니다. 인간은 육체를 자신이라고 여기고, 감각의 경험을 자신이라고 여기며, 생각과 감정을 자신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베단타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아트만이 경험하는 대상이지, 아트만 자체가 아닙니다. 아트만은 경험하는 자이지 경험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수한 의식(Cit)이며, 순수한 존재(Sat)이며, 순수한 기쁨(Ānanda)입니다. 이 세 속성을 합쳐 삿-칫-아난다(Sat-Cit-Ānanda)라고 표현합니다. 아트만은 이 속성들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 속성들 자체입니다.

이 점에서 아트만은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이나 기독교의 성령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다이몬은 소크라테스에게 말을 거는 어떤 것입니다. 성령은 신자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그러나 아트만은 인간이 그것과 대화하거나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아트만을 인식하는 주체가 따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챤도기아 우파니샤드 (Chāndogya Upaniṣad)』는 스승 웃달라카 아루니(Uddālaka Āruṇi)가 아들 쉬베타케투(Śvetaketu)에게 무화과 씨앗을 열어보이면서 하는 이 유명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그 씨앗 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이 거대한 나무 전체의 본질이다. 그것이 실재이며, 그것이 아트만이며,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Tat tvam asi)."


세 개념의 비교 — 공통점, 차이점, 그리고 인간에 대한 함의


세 개념은 표면적으로 유사해 보이지만, 그 유사성의 수준과 성격은 정밀하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공통점은 세 개념 모두 인간의 일상적 의식을 초월하는 어떤 신성한 실재가 인간의 내면에 작용한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다이몬, 기독교의 성령, 베단타의 아트만은 모두 인간이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기획하는 차원의 활동이 아닙니다. 세 개념 모두 인간의 자기중심적 의식이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더 넓은 실재와 인간을 연결합니다. 그리고 세 개념 모두 그 실재와 제대로 관계할 때 인간이 더 지혜롭고 더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각 개념이 그 신성한 실재를 어떻게 구조화하는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첫째, 그 실재가 인간과 맺는 존재론적 관계가 다릅니다. 다이몬은 소크라테스와 구별되는 신성한 안내자입니다. 소크라테스와 다이몬은 서로 다른 존재이며, 다이몬은 소크라테스에게 외부에서 신호를 보내는 방식으로 관여합니다. 성령은 신자와 구별되지만 신자 안에 내주하는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여기서는 두 인격 사이의 교제 관계가 성립합니다. 아트만은 그것을 깨달으려는 인간과 처음부터 동일합니다. 아트만과 인간은 이미 하나이며, 분리되었다는 인식 자체가 무지의 산물입니다. 이 존재론적 차이는 각 개념이 인간에게 요청하는 것을 완전히 다르게 만듭니다.

둘째, 각 실재가 기능하는 방향이 다릅니다.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은 주로 부정적 방향에서 작동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려 할 때 제지하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적극적으로 명령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성령은 부정적 기능과 긍정적 기능을 모두 가집니다.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하고(요한복음 16:8) 동시에 진리로 인도합니다(요한복음 16:13). 아트만은 방향을 알려주거나 이끄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트만은 깨달아야 할 진리 자체이며, 그것이 깨달아질 때 무지에서 비롯된 모든 잘못된 방향이 저절로 소멸합니다.

셋째, 각 개념이 전제하는 인간 이해가 다릅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인간은 이성과 다이몬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성은 인간의 능동적 탐구를 이끌고, 다이몬은 그 탐구가 틀린 방향으로 흐를 때 개입합니다. 기독교에게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존재론적 거리는 성령의 내주로도 해소되지 않습니다. 신자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지만,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베단타에게 인간은 그 자체로 이미 우주적 실재입니다. 인간과 우주 사이의 분리는 실재하지 않으며, 다만 무지로 인해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이 점에서 베단타의 인간 이해는 세 개념 가운데 가장 급진적입니다.

넷째, 인식론적 접근 방법이 다릅니다. 소크라테스는 다이몬의 목소리를 논리적 탐구와 병행하여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다이몬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고, 이성적 검토를 통해 그 신호가 지시하는 방향을 스스로 해석했습니다. 기독교 신학, 특히 개혁주의 전통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신자의 인격적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성령은 꿈이나 환상 같은 비일상적 방식보다는 신자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통해 유기적으로 역사하며, 성경이 그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베단타에서 아트만의 직접적 인식, 즉 아트마 즈냐나(Ātma Jñāna)는 철학적 추론만으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샹카라는 명상(사마디, Samādhi)을 통한 직접적 체험을 아트마 즈냐나에 도달하는 필수적인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이 점에서 베단타는 세 개념 중 가장 명확하게 신비적 체험을 강조합니다.

다섯째, 그 실재가 일반적인지 아니면 특수한지가 다릅니다. 아트만은 모든 인간, 아니 모든 생명체 안에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그것은 어떤 종교적 조건이나 도덕적 자격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내주는 기독교 전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은 소크라테스 개인에게 특유한 것으로 제시됩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모든 사람에게 내면의 신성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권했지만, 그 목소리의 내용과 방식이 개인마다 같다고는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 개념이 수렴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세 전통 모두 인간의 자기중심적 욕망이나 단기적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더 깊은 삶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은 그에게 권력과 안락을 추구하는 삶 대신 진리 탐구의 삶을 살도록 제지했습니다. 기독교의 성령은 신자를 자기 중심성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 사랑 쪽으로 이끕니다. 베단타의 아트만은 개별 자아에 대한 집착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힘으로써, 자기중심성 자체가 허구라는 것을 인식론적으로 해체합니다. 방법은 다르지만, 세 전통 모두 인간이 표면적 자아를 넘어서는 더 진실한 자기 자신이 될 때 비로소 지혜롭고 올바른 삶에 도달한다고 가르칩니다.

종교학자 오강남(1942~)은 이와 관련하여 의미 있는 구분을 제시합니다. 신을 자신 밖에서 찾는 표층종교(表層宗敎)와, 내면의 참나를 찾는 것이 곧 신을 찾는 것과 같다는 심층종교(深層宗敎)의 구분입니다. 이 구분을 적용하면, 성령 개념은 신학적 입장에 따라 표층에도 심층에도 위치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오직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만 이해할 때 표층적이 되고, 성령과 신자의 인격적 교제를 강조하며 내면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형성되는 과정에 집중할 때 심층적이 됩니다. 다이몬은 소크라테스 개인의 내면에서 작동했다는 점에서 심층적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본질 자체라고는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트만의 완전한 심층성에 미치지 못합니다. 아트만은 세 개념 중 가장 철저하게 심층적입니다. 그것은 신을 찾는 과정과 자기 자신을 찾는 과정이 처음부터 하나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세 개념은 각각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가능성을 이해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은 인간이 이성과 신성한 안내 사이에서 더 나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성령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베단타의 아트만은 인간이 그 자신의 가장 깊은 본질에서 이미 우주적 실재와 하나라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세 가르침은 서로 모순되지만, 동시에 서로가 포착하지 못한 인간 경험의 어떤 차원을 보완합니다. 어느 하나가 다른 둘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개념이 서로 다른 언어로 동일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 즉 인간의 내면에는 자기 자신만의 것이 아닌 어떤 더 큰 실재가 이미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세 전통 모두에서 반복적으로 주장되고 있습니다.


https://youtu.be/bihICqYexi4?si=uiYkdEkA_BerPh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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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동영상은 Google NotebookLM에 글을 넣고 자동으로 생성된 음성 파일과 PPT 파일을 다빈치 리졸브를 이용해 mp4 파일로 제가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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