맺음말 : 끝없는 시작, 지금 여기의 신비

by 이호창

맺음말 : 끝없는 시작, 지금 여기의 신비



한국인의 영혼 깊은 곳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거대한 정신적 맥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먼지 쌓인 고서 속에 갇힌 낡은 이론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혈관을 타고 흐르며 삶을 추동하는 실재적인 에너지입니다. 한국 고유의 영성 안에 흩어져 있는 보석 같은 개념들을 하나의 실로 꿸 때, 우리는 21세기 문명이 직면한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갈 견고한 나침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차원을 넘어, 균열이 생긴 인류 문명을 봉합하고 개인의 완성을 넘어 공존과 상생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거대한 여정의 끝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고 확립해야 할 것은 바로 마음의 주권입니다. 신라 시대의 원효 대사가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았듯,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의 진리는 우리가 세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의 현실을 창조해 나가는 주체임을 준엄하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갈등, 그리고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은 외부에서 날아온 화살이 아니라 내 마음이 짓고 붙잡은 그림자일 때가 많습니다. 세상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 투영된 거울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그 얽히고설킨 매듭을 푸는 열쇠 역시 내 안에 있습니다. 마음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는 말은 막연한 긍정주의나 심리적 위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면에 잠재된 창조적 권능을 회복하고, 스스로 삶의 주인으로 우뚝 서라는 엄중한 자각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힘을 온전히 쓰고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수행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잡지 못해 괴로워하는 현대인들에게, 우리의 선조들은 『삼일신고, 三一神誥』라는 경전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정교한 기술을 일러주었습니다. 그것은 막연한 명상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아우르는 구체적인 방법론입니다. 첫째는 지감 (止感)입니다. 기쁨과 두려움, 슬픔과 분노 같은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그 흐름을 가만히 멈추어 바라보는 것입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파도 너머의 고요한 바다를 인식함으로써 감정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조식 (調息)입니다. 거칠어진 숨을 고르게 하여 탁한 기운을 내보내고 생명의 맑은 기운을 채우는 것입니다. 숨이 고라야 마음이 고르고, 마음이 고라야 삶이 바르게 섭니다. 셋째는 금촉 (禁觸)입니다. 끊임없이 자극을 찾아 헤매는 감각의 촉수를 거두어들이고, 외부의 유혹이나 충격에 부딪히지 않으며 내면의 중심을 잡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수행을 통해 우리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본래의 밝고 순수한 성품을 회복합니다. 이러한 수행이 깊어질 때 우리 몸에서는 수승화강 (水昇火降)이라는 생명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차가운 신장의 물 기운은 위로 올라가 머리를 맑게 식혀주고, 뜨거운 심장의 불 기운은 아래로 내려가 아랫배를 따뜻하게 데워줍니다. 이것은 자연의 대류 현상이 우리 몸 안에서 구현되는 최적의 건강 상태이자, 깨달음을 담을 수 있는 신체적 그릇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머리가 맑아지고 가슴이 열리며 아랫배에 묵직한 힘이 생길 때, 우리는 비로소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신명 (神明)'의 상태, 즉 신성하고 밝은 의식의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개인의 차원에서 회복된 이 맑고 밝은 기운은 멈추지 않고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 지성사의 척추를 이루는 선비정신을 만납니다. 선비정신은 고루한 유교적 덕목이나 신분적 특권 의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사로운 이익 앞에서도 의로움을 굽히지 않는 서릿발 같은 양심이자, 나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숭고한 공적 책임감 (Public Spirit)입니다. 현대 사회가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길을 잃고 헤매는 이유는 바로 이 지조와 품격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선비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전문성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약자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깨어있는 시민입니다. 꼿꼿한 선비의 기개에 너와 나를 하나로 잇는 따뜻한 정 (情)이 결합할 때, 우리는 차가운 무한 경쟁을 멈추고 서로를 살려내는 살림의 문화를 꽃피울 수 있습니다. 기술을 개발하든 기업을 경영하든, 그 바탕에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선비의 마음, 즉 '어진 마음 (仁)'이 깃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자본주의의 너머, 사람 냄새 나는 세상의 풍경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은 고통을 대하는 태도의 전환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면의 상처나 결핍, 억울함을 숨겨야 할 부끄러움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오래된 지혜는 그 어둠이야말로 빛을 잉태하는 자궁임을 일깨워줍니다. 가슴 깊이 맺힌 응어리, 즉 한 (恨)은 단순히 제거해야 할 병적인 증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피어나지 못한 생명력의 응축이며,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려는 영혼의 도움닫기입니다. 이 억눌린 에너지를 부정하지 않고 직시하여 풀어낼 때, 그것은 슬픔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우주의 리듬과 공명하는 역동적인 춤사위로 변모합니다. 한을 품고 삭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신명 나는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기제야말로 한국 문화가 지닌 역동성과 회복 탄력성의 비밀입니다. 고통의 밑바닥을 박차고 오르는 이 힘은 개인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봉합하는 거대한 용광로가 됩니다.

이 모든 수련과 실천, 그리고 승화의 과정이 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지는 홍익인간 (弘益人間)입니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이 가르침은 한민족만의 건국 신화나 민족주의적 구호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류가 도달해야 할 평화의 이정표이자, 모든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한 자들이 실천해야 할 우주적 윤리입니다. 기후 위기와 전쟁, 극심한 양극화라는 지구적 난제 앞에서 우리는 '지구 경영'이라는 거대한 책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나 하나 잘 사는 것을 넘어, 내 가족과 이웃, 더 나아가 지구 생태계 전체의 안녕을 도모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정신문화의 정수입니다. 홍익의 정신은 인간만을 위한 이기적인 휴머니즘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깃든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고, 인간과 자연이, 물질과 정신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꿈꾸는 생태적 영성입니다.

그리고 이 길의 끝에서 우리는 『부도지, 符都誌』가 전하는 복본 (復本)의 섭리와 마주합니다. 복본은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회귀가 아닙니다. 그것은 태초의 순수한 근원, 즉 우리 안에 내재된 신성 (神性)을 회복하여 본래의 참된 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본성을 되찾고, 거짓된 자아의 껍질을 깨고 나와 우주와 하나 되는 대자유의 경지입니다. 이는 『천부경, 天符經』이 설파한 "하나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시작은 시작이 없고, 하나에서 끝나나 그 끝은 끝이 없다 (一始無始一 一終無終一, 일시무시일 일종무종일)"는 우주의 영원한 순환 원리와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시작과 끝이 하나로 연결된 우주의 이치 속에서, 우리는 매 순간 근원으로 돌아감으로써 날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복본은 삶을 부정하고 초월적인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발 딛고 선 이 현실 속에서 하늘의 뜻을 실현하고 자신의 신성을 꽃피우는 것입니다.

이 거대한 철학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주인공은 바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 즉 생활 속의 도인 (Living Master)입니다. 깨달음은 산속의 암자나 난해한 이론 속에 있지 않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노동의 현장,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지감·조식·금촉을 실천하고, 선비의 양심으로 매 순간 홍익을 선택하는 과정 그 자체가 수행입니다. 우리가 내쉬는 깊은 숨 하나에 우주의 질서가 있고, 타인에게 건네는 따뜻한 눈빛 하나에 살림의 기적이 깃들어 있습니다. 밥을 먹을 때는 온전히 밥 먹는 행위에 감사하고, 일을 할 때는 그 일에 온 정성을 쏟으며, 사람을 만날 때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신성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생활 속에서 도를 닦는 법입니다.

우리는 이제 명확히 인식합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창조함을 알고, 몸과 마음을 닦아 생명력을 회복하며, 양심과 의리로 세상을 대하고, 한을 신명으로 승화시켜, 마침내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여, 본래의 참된 자리로 돌아가야 함을 말입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이식된 낯선 사상이 아니라, 우리 핏줄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 삶의 원리이자, 미래를 여는 오래된 지혜입니다. 서양의 과학이 물질의 미시 세계를 파고들어 양자역학이라는 불확정성의 세계를 발견했다면, 동양의 지혜, 특히 한국의 영성은 그 불확정성의 파도 위에서 조화를 이루며 춤추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만나는 지점에서 인류 문명은 비약적인 도약을 이룰 것입니다.

깨달음에는 완성된 결론이 없습니다. 고인 물이 생명력을 잃듯, 우리의 인식과 실천 또한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합니다. 과거의 지혜에 머무르지 않고, 변화하는 현실에 맞춰 매 순간 새롭게 적용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어제의 깨달음이 오늘의 고정관념이 되지 않도록, 날마다 낡은 껍질을 벗고 새롭게 태어나는 부단한 갱신이 필요합니다. 각자가 서 있는 그곳, 활동하는 바로 그 현장이 가치를 창조하는 우주의 중심입니다. 개개인의 실천을 통해야만, 생명이 존중받고, 평화가 뿌리내리는 구체적인 변화가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이러한 통찰은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증명되어야 할 실천 강령입니다. 자신의 존엄성을 자각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새로운 문명을 여는 시작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타인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고, 타인의 기쁨이 나의 기쁨입니다.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서로의 성장을 돕고 지지하는 도반 (道伴)이 되어가는 과정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공부는 멈추지 않습니다. 가슴속에서 뛰고 있는 거대한 맥박 소리를 믿고, 그 소리를 따라 두려움 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삶이라는 거대한 축제는 이미 시작되었고, 그 무대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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