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 영적 출산과 거룩한 여가

관상과 활동의 신비적 균형

by 이호창

3-7.2. 영적 출산과 거룩한 여가 : 관상과 활동의 신비적 균형



신비적 합일의 체험이 인간 영혼에게 남기는 가장 뚜렷한 흔적은 황홀경의 기억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 흐르는 생명력의 회복입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는 신과의 만남을 단순히 개인적인 희열의 차원에 가두지 않고 영적인 생명을 잉태하고 산출하는 생산적인 과정으로 재해석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가장 고귀한 영혼의 상태는 신의 품에 안겨 있는 수동적인 신부의 모습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영적인 어머니의 모습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는 중세 수도원 영성에서 관상과 활동이라는 오래된 긴장 관계를 독창적으로 해결하는 열쇠가 됩니다. 베르나르두스는 관상을 통해 신을 만나는 시간을 ‘거룩한 여가 (Otium Sanctum)’로 정의하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시간을 ‘거룩한 사역 (Negotium Sanctum)’으로 명명하며 이 두 가지 상태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 주기 안에서 순환하는 필연적인 관계임을 역설했습니다. 영혼이 신과 맺는 영적 결혼은 자폐적인 도취가 아니라 영적 출산을 위한 전제 조건이며 참된 신비가는 신의 침실에서 잉태한 진리를 세상이라는 산실에서 낳는 자입니다.

베르나르두스는 『아가 설교, Sermones super Cantica Canticorum』를 통해 영혼이 신부의 단계에서 어머니의 단계로 성숙해야 함을 강조하며 이를 위해 침실 (Cubiculum)이라는 공간적 상징을 도입합니다. 왕이 신부를 침실로 이끌듯이 그리스도는 영혼을 외부의 소란스러운 감각 세계로부터 차단된 내면의 고요한 장소로 인도합니다. 이곳은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세상의 근심과 육체의 정욕을 잊고 오직 신랑이신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하는 의식의 전환이 일어나는 내면의 성소입니다. 이 은밀한 침실에서 말씀과 영혼이 결합할 때 그 사랑의 행위는 필연적으로 ‘영적 출산 (Partus Spiritualis)’ 혹은 ‘탄생 (Generatio)’이라는 생산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베르나르두스는 이때 태어나는 영적인 자녀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는 내면의 성화를 위한 자녀들인 ‘덕행 (Virtues)’입니다. 말씀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영혼은 겸손과 온유 그리고 인내와 절제 같은 성령의 열매를 잉태하여 거친 성정을 다듬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합니다.

둘째는 이웃을 위한 자녀들인 ‘선행 (Good Works)’입니다. 이는 타인을 향한 자비로운 봉사와 진리를 전하는 설교 (Praedicatio)로 구체화됩니다. 관상 중에 하나님을 깊이 체험한 영혼은 그 내면의 ‘충만함 (Plenitudo)’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형제들에게 사랑을 흘려보내게 됩니다. 만약 영혼이 신과의 달콤한 합일만을 고집하며 이웃의 필요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영적인 불임 상태와 다를 바 없습니다. 참된 사랑은 반드시 밖으로 흘러넘쳐 새로운 생명을 낳고 기르는 결실을 맺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출산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거룩한 여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여가란 현대적 의미의 휴식이나 게으름이 아니라 세속의 소란스러움으로부터 철저히 단절된 상태에서 오직 신에게만 집중하는 내적 고요를 뜻합니다. 베르나르두스는 활동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활동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내면의 샘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타인에게 물을 주려는 행위는 결국 자신의 영혼을 고갈시키고 위선적인 행동주의로 귀결될 뿐입니다. 거룩한 여가는 영혼이 신의 현존 앞에 머무르며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는 충전의 시간입니다. 수도사는 이 시간 동안 세상의 모든 의무와 걱정을 문밖으로 밀어내고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경작합니다. 베르나르두스는 이 시간을 영혼의 안식처이자 침실로 묘사하며 이곳에서만 참된 영적 수태가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고요한 관상 속에서 신의 뜻을 깊이 묵상하고 자신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 일치시키는 치열한 내적 작업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외부로 향하는 모든 활동은 소음과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즉 거룩한 여가는 활동의 부재가 아니라 가장 본질적이고 강렬한 영적 활동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이 ‘거룩한 여가’의 달콤함 속에 영원히 안주할 수 없습니다. 베르나르두스는 베드로가 변화산 위에서 초막을 짓고 그곳에 머물기를 원했던 것처럼 수도사들이 관상의 평화 속에만 숨으려 하는 유혹을 경계했습니다. 거룩한 여가가 영적 출산을 위한 잉태의 시간이라면 ‘거룩한 사역’은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는 시간입니다. 갓난아기가 젖을 달라고 보채면 어머니는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일어나 아이를 먹여야 하듯 영적인 어머니가 된 수도사는 형제들의 필요와 교회의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베르나르두스는 이를 ‘사랑의 질서 (Ordo Caritatis)’라고 불렀습니다. 자신의 평안보다 이웃의 구원을 우선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는 참된 제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설교를 통해 진리를 가르치고 때로는 행정적인 업무를 통해 공동체를 돌보며 때로는 병든 자를 간호하는 육체적인 노동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 모든 분주한 활동은 관상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관상을 통해 얻은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거룩한 의무입니다. 기성 종교가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워 강박적인 노동을 강요하거나 반대로 현실을 도피하여 개인의 평안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신비주의에 빠질 때, 시토회의 영성은 사랑에서 비롯된 행위라는 제3의 길을 제시합니다.

이처럼 관상과 활동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영적 유연함은 사랑의 성숙도에 달려 있습니다. 베르나르두스는 사랑의 본질과 성장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육적인 사랑 (Amor Carnalis)에서 영적인 사랑 (Amor Spiritualis)으로 나아가는 4단계 사랑론을 제시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본능적인 생존 욕구이자 자기애의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필요와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이는 아직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기는 기복적인 신앙 단계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 영혼은 자신의 유익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의 선하심과 아름다움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는 순수한 신앙의 단계로 진입합니다. 그러나 베르나르두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네 번째 단계인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최상의 단계에서 영혼은 자기 자신마저도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며 자신의 뜻을 완전히 잊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을 긍정하게 됩니다. 이는 자아의 소멸이 아니라 자아의 신적 변형입니다. 오직 이 네 번째 사랑에 도달한 자만이 자신의 안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꺼이 고통스러운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베르나르두스는 관상과 활동의 순환을 야곱의 사다리에 비유했습니다. 천사들이 사다리를 오르내리듯 수도사는 기도를 통해 신에게 오르고 자비를 통해 이웃에게 내려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오르내림의 과정에서 영혼의 지향점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활동 중에도 내면의 고요를 잃지 않고 관상 중에도 이웃의 고통을 잊지 않는 통합된 영성이 요구됩니다. 베르나르두스는 이를 두고 “신을 위해 신을 떠나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웃을 섬기기 위해 관상의 달콤함을 포기하는 행위 자체가 가장 고귀한 형태의 하나님 사랑이라는 역설입니다. 진정한 영적 성숙은 ‘거룩한 여가’와 ‘거룩한 사역’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유연함에 있습니다. 미성숙한 영혼은 활동에 매몰되어 내면을 잃어버리거나 관상에 집착하여 현실을 도피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영혼은 두 가지 삶의 양식을 상황에 맞게 조절할 줄 아는 분별력을 지닙니다. 베르나르두스는 이를 양성적인 (hermaphroditic) 영성으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신 앞에서는 여성적인 수용성을 가지고 말씀을 받아들이며 세상 앞에서는 남성적인 주도성을 가지고 말씀을 선포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베르나르두스가 말하는 영적 출산은 자기 확장의 욕망이 아니라 자기 비움의 실천입니다. 영적인 자녀를 낳는다는 것은 자신의 지식이나 영향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산파의 역할입니다. 내가 낳은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신이 낳은 생명이기에 영적인 부모는 자녀를 소유하지 않고 다시 신에게 봉헌합니다. 거룩한 여가 또한 개인적인 휴식이 아니라 신의 도구가 되기 위한 정련의 과정입니다. 나의 뜻이 멈추고 신의 뜻이 시작되는 지점인 여가의 시간 속에서 수도사는 자신을 비우고 신의 생명으로 채웁니다. 그리고 거룩한 사역의 현장에서 그 채워진 생명을 남김없이 쏟아붓습니다.

채움과 비움 잉태와 출산 안식과 노동의 이 거룩한 리듬이 멈추지 않을 때 수도원은 세상과 분리된 섬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원천이 됩니다. 진정한 신부는 신랑과의 입맞춤에 도취되어 자신의 의무를 망각하는 자가 아니라 신랑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영적인 자녀들을 낳고 기르기 위해 기꺼이 세상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자입니다. 따라서 베르나르두스에게 있어 최고의 신비가는 하나님을 보는 자인 동시에 세상을 치유하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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