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삭 속았수다,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 각각의 시점

by 김기수


폭삭 속았수다, 아버지 — 아들의 시점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이 없다고 믿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나가고, 같은 자세로 앉아 TV를 보던 사람.

질문엔 짧게, 감정엔 더 짧게 반응하던 사람.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그 등을 ‘벽’처럼 생각했다.

기댈 수는 있지만 다가갈 수는 없는.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내 컵에 막걸리를 따라주며 말했다.

“요즘은… 힘들진 않냐.”

그 한마디가,

내가 평생 기다렸던 사랑 고백처럼 들렸다.


이제는 안다.

그 말 없는 등 뒤에,

무거운 하루를 짊어지고도

내일을 더 걱정하던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다는 걸.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지만,

한 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은 적도 없었던 사람.


아버지,

속았죠.

폭삭, 속았수다.

근데 말이죠.

그렇게 따뜻하게 속아서…

참 다행이에요.



“내 말이 다 사랑이여” — 아버지의 시점


사랑한다고?

그 말, 내가 왜 못했는 줄 아냐.

그거, 부끄러워서가 아녀.

너무 커서 그랬어.

말 한마디론 안 될 것 같아서,

손으로 했지.

일하고, 벌고, 참고.

그게 다 내 말이었다.


나는 늘 생각했다.

내가 앞장서서 살아야

니가 좀 덜 힘들 거라고.

그러니까 뒤에 서 있는 너를

한 번도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다.


근데 이제야 깨닫는다.

사랑도, 아껴도,

말로 해야 아는 거였구나.

괜찮다고만 하지 말고

“사랑한다, 내 새끼야.”

그 말 한 번,

진작 해볼걸.


폭삭 속였지.

내가 너를 이렇게까지 사랑할 줄

너도 몰랐을 거야.

근데 속여서 미안하지는 않다.

왜냐면,

진심이었으니까.



아버지에게 보내는 15줄의 마음

1. 아버지, 늘 말하지 못했지만

2. 당신은 우리 삶의 첫 번째 기둥이었습니다.

3. 그 무거운 짐을 아무 말 없이 짊어진 채,

4. 당신은 늘 앞장서 걸어가셨죠.

5. 우리가 웃을 수 있도록

6. 당신은 매일 조금씩 무너졌습니다.

7. 말보다 손으로 사랑을 보여준 사람.

8. 침묵 속에서 가장 큰 위로가 되어준 사람.

9. 미안하단 말보다 고맙단 말을 먼저 드릴게요.

10.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할게요.

11. 아버지, 당신은 실패한 적 없습니다.

12. 당신이 있어 우리는 무너지지 않았으니까요.

13. 지금까지 걸어온 길,

14. 우리가 함께 다시 걸어드릴게요.

15. 사랑합니다, 그리고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