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보기엔 허름한 가게지만 어디에 내 놔도 꿇릴 것 없는 퀄리티에 믿을 수 없이 저렴한 가격의 가게들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나 내가 밥을 먹는 우리 동네 5000원 백반집은 백종원씨가 와도 엄지를 척 하고 내세우면서
본인의 제주도 호텔 옆 그 돈까스 집 옆에 한 켠을 내 줄지도 모른다.
매일 매일 바뀌는 이 집의 반찬들은
영국의 제이미 올리버도 "와우 잇츠 언빌리버블 쏘 어매이징" 을 외칠 정도로 창의적이다.
이 백반집이 불과 우리 집에서 3분 거리에 있다는 것은 부천이 내게 주신 선물이며 나에게 판타스틱 부천은 이 집과 함께 완성되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어설픈 내 요리 생활을 깔끔하게 접었다.
여러분은 육회가 나오는 5000원짜리 백반집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있소만.
생선도 화끈하게 한 마리 다 꾸워버리심
갈비찜과 두부김치 두가지 메인 디쉬가 절경을 이루고
나는 연어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 연어 초밥은 정말 맛있었다
직접 수육을 삶으시기도 하고
비가 오는 날엔 역시나 도토리묵사발과 부침개지
오천원짜리 백반 집 중 저렇게 1인 1버너로 찌개가 나오는 곳은 이곳이 처음이야
이곳의 사장님은 50대 여자분인데 외모도 성격도 상당히 독특하다.
노랗게 탈색한 짧은 투블럭, 목의 양쪽은 검은 뱀과 전갈이 강렬하게 새겨져 있고
단골 손님이 아닌 이상 손님에게 그다지 친절하지도 않다.
그것도 그럴 것이 요리부터 경영, 청소까지 혼자 하시다 보니일단 손님이 오면 몸이 너무나 바빠지기 때문이다.
특히나 별 시덥지 않은 소리를 하는 손님의 말장난까지 맞춰줄 그런 시간은 더욱 없는 것이다.
사장님의 독특한 헤어와 여기저기 보이는 문신은 일종의 경고문이다.
여자 혼자 식당을 하다보니 정말로 별 희한한 말을 하며 시비를 거는 진상들이 많아서 힘들어 하시다가
스타일을 바꾸고 목에 커다란 전갈 하나를 딱 박아 넣는 순간! 잡놈들의 출입이 딱 끊기더라는 신비한 이야기.
물론 나같이 착하고 말 잘 듣는 단골 손님은 사장님의 이쁨을 받는다.
나는 왠만하면 식당이 붐비지 않는 시간에 가서 식사를 하고
어떤 반찬이 나오든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
혹시 식탁에 떨어진 양념들을 휴지로 깨끗이 닦은 다음
다 먹은 그릇들을 모아 주방까지 갖다 놓는다.
그리고 식당에 나올 때는 늘 90도로 감사의 인사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식당은 단순히 5000원에 이런 놀라운 퀄리티를 보여주기 때문만이 아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매번 나를 감동시켜주는 식당 덕분에 나는 내 시간을 엄청나게 저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요리에 취미도 없는 내가 요리를 해서 밥을 먹어야 한다면
1. 오늘은 뭘 먹지 고민하는 시간: 최소 10분 (이건 다른 식당을 가도 마찬가지다)
2. 장보는 시간: 최소 30- 40분 (고르고 줄을 서는 시간 -나는 줄을 서는 시간이 너무 싫다. 그래서 줄을 서야 하는 곳이라면 맛집도 가지 않는다)
3. 재료를 준비하고 요리하는 시간 최소 30-40분 (요리의 장점은 너무 잘 알지만, 난 정말 요리가 싫다)
4. 먹는 시간은: 10분
5. 뒷 정리와 설거지를 하는 시간: 20 - 30분
5. 처치 곤란 남은 재료를 소분해서 나눠 담고 다음에 이걸 어떻게 써야할까 고민하는 시간: 10분.
그리고 우리는 최소 2끼를 먹어야 한다.
때문에
시간이 곧 돈이라고 했을 때
이 백반집의 가지는 가치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요리를 포기하고 사 먹는 것도 그렇다. 밖에서 사 먹는 것도 선택지가 다양하면 고민하고 발품을 팔아야 하는 시간이 들고, 한 군데를 정해서 먹어도 금방 식상해진다.
그러니 나는 이 식당 덕분에 무엇을 먹을지, 적절한 영양소의 식단을 고민하는 시간을 줄여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에 몽땅 쓸 수가 있다.
시간은 곧 돈이다.
이 말을 또 한 번 실감할 때가 바로 책을 볼 때다.
[대부호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만 해도 책은 무조건 도서관에서 빌려 봤다. 그때는 보고 싶은 책을 살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보고 싶은 책을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 해놓고 기다리는 동안 눈에 보이는 책을 읽고 이 책이 정말로 괜찮다 싶으면 서점에서 사 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읽고 싶은 책이 있을 땐 바로 서점으로 간다.
이제는 도서관에 신청 도서를 적고 기다리는 시간보다 서점에 바로 가서 내가 원하는 책을 읽고 빨리 내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돈 보다 귀한 것이 시간이라는 것을 체감하게 된 순간, 놀랍게도 나는 돈에 대한 걱정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어떻게 시간을 더 벌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대부호 프로젝트를 시작했던 1년 전엔 "무조건 허리띠를 쫄라매자, 돈을 애끼자" 가 목표였다면
이제는 "시간 관리를 잘 하자, 시간을 제대로 쓰자"가 목표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번 주부터는 월급이 삭감되는 것을 감수하더라도 주 4일로 나가던 치과 근무를 주 3일로 줄였다.
드디어 치과 3일/ 글쓰기 4일 체계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주된 고정 수입원은 치과가 제일 크다)
예전에는 치과 추가 근무 수당 10만원을 받기 위해 자진해서 주 5일 근무를 하곤 했지만 이제는 치과에 가서 일하는 시간 보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시간이 더 시간대비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 요즘 나는 출간 준비 때문에 브런치 글을 수정해야 하고, 새로운 드라마 대본도 써야하니 요즘 나의 포커스는 시간 관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간 관리의 첫번째는 뭐니뭐니 해도 시계부를 쓰는 것이다.
시계부.
사실 끝이 "부'로 끝나는 것 중에는 재미있는 것이 별로 없다.
가계부, 차계부, 금전출납부, 살생부?
하지만 시계부는 그나마 좀 나은 편이다. 가계부를 쓰는 데 늘 실패했던 나도 시계부는 몇 년전부터 그럭저럭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시간 관리라는 개념도 없이 처음으로 드라마 대본 쓰기를 시작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회사 미팅에서 빠꾸 당하지 않을 대본을 쓸 것인가를 고민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계획표를 짜게 된 것이었고, 이제보니 그것이 바로 틀림없는 시계부였던 것이다.
보통 시계부는 30분 단위로 나눠서 작성을 하는 게 정석이라고도 하고
빌 게이츠의 경우에는 일주일간의 계획을 한 번에 스케쥴링 하고 분 단위로 시간을 정확하게 지킨다고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만큼의 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조금 널널하게 시작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다.
나는 보통 잠자기 전에 내일을 생각하며 시계부를 쓴다.
예를 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6월 27일 금요일밤 11시 ) 내일( 28일 토요일)의 시계부를 써 보자면
아침 7시 반 기상, 아침에 물 한잔, 푸쉬업 30개, 세수
아침 8시 지하철역으로 가기
아침 8시 20분 치과 앞 빠리 바게트 앞에서 단팥빵 하나 사서 출근 (원래 치과 출근은 9시인데 나는 보통 넉넉하게 일찍 간다)
아침 8시 30분 따뜻한 차와 함께 팥빵 먹으며 경제 신문 읽기
아침 9시 치과 근무 시작
오후 2시 치과 퇴근
오후 2시 30분 교보문고 둘러보기( 사야할 책: 남몰래 준비하는 개인사업자들을 위한 절세전략 )
오후 3시 낮잠 1시간
오후 4시 카페 또는 집에서 글쓰기 (브런치 글 최소 2개 수정 혹은 브런치 새 글 주제 정해서 밑그림 그리기)
오후 7시 저녁 먹기 (일요일은 백반집 쉬는 날이라 아마도 떡뽁이에 김밥) + 내일 들어올 새로운 하우스 메이트에게 연락 해 주기
오후 8시 - 책 읽기 (조 지라드 책 남은 부분 끝내기)
오후 9시 반 - 화장실 청소
오후 10시 - 자유 시간
밤 12시 - 취침
(어먹, 이렇게 쓰고 보니 나도 이제는 꽤나 섬세하게 시계부를 쓰는 사람이 되어 버렸네? 나도 이제 증말 대부호가 되려나봐)
시간을 한 시간 단위로 나눠 쓰던 30분 단위로 쓰던 그냥 To do list 만 쓰던 시계부의 핵심은 이것이다.
잠들기 전, 내일을 생각하면서 내가 할 일을 스스로 정하고 움직이는 것, 이 말인 즉, 내 인생의 핸들은 결국 내가 꺾는 방향으로 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루의 시계부가 적응이 되면, 빌게이츠처럼 일주일 단위 계획을 짤 수도 있고, 부자 언니 수진이 언니처럼 10년 후의 계획, 길게는 인생의 로드맵까지 짜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사실 나도 아직 월 단위, 올해 계획까지밖에 짜지 못 했다. 45살에 10억을 모아야겠다 해놓고서도 사실 구체적인 로드맵을 짜 놓지 않았다.
어쩌면 변명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내가 우연한 기회에 부천이라는 낯선 도시에 오게 되었고,우연한 기회에 이곳에 터를 잡았고, 또 그 덕분에 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처럼 결국 인생의 강력한 변화는 의외로 생각지도 못한 우연들이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늘 생각은 해 본다.
세계 최고 부자 빌게이츠가 1년에 한 두번 일주일간의 "생각 주간"을 정해 커다란 에코백에 책을 가득 넣고 호숫가의 작은 집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비록 그만큼 세계를 뒤흔들 대단한 인사이트는 나오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시간정도는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을 보며 혼자만의 생각의 시간을 갖는다. 때로는 책상 위에 앉아 달력을 넘겨보기도 하고 다이어리에 쓰면서 생각하는 데 시간을 쓴다.
지난 달에 인상적이었던 일, 이제껏 내가 만났던 사람들, 이번 달에 꼭 해야 할 것, 올해는 꼭 이루고 싶은 것,
내년의 목표, 그리고 그 후의 일들까지, 그러다보면 결국 이렇게 몇 년 뒤를 생각하는 이유가 뭔지, 시계부를 써 가면서까지 꼭 이루고 싶다고 하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결국 내가 이 삶에서 원하고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까지.
대부호 프로젝트를 하며 매일을 쉴 새 없이 앞으로 달리고 있지만 생각의 시간에는 주로 지난 시간들을 자주 찾아본다.
18살부터 28살동안 내가 집중했던 것은 연애였고 거기에 시간을 많이 쏟았다
28살부터 38살까지 나의 화두는 사랑이었고 이제는 그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38살부터는 갑자기 관심이 돈으로 바뀌었고 이대로 48까지 10년이란 시간을 투자해 본다면 돈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게 되지 않을까
48살 이후로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연애, 사랑, 돈, 이것 보다 재미있는 게 있을까? 물론 또 생기겠지.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돈을 쫓아가고 있는 현재를 보면
48살 이후의 김얀은 무엇을 쫓고 있을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하철 노선마다 셰어하우스를 만들겠다는 꿈은 이루었을까?
결국은 창문 너머로 초록이 많이 보이는 고요한 집에서 돈 걱정 없이 글을 쓰며 살고 있을까?
그때 내 옆엔 누가 있을까? 내 인생의 화두는 무엇으로 바뀌어 있을까.
그런데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무튼 확실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쓰는 시간이 나를 가장 잘 말해줄 것이다.
나를 괴롭게 하는 것에는 시간을 쓰지 않기.
소중한 순간들을 자주 만들고 자주 되새기기.
계획과 우연이 적절하게 섞일 수 있고,
나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가 적절하게 섞일 수 있는 적당한 틈을 유지하기.
아마 10년 후에도 그런 발란스를 잡기 위해 생각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그래도 괜찮은 인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