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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옹알이 Jan 18. 2022

사회초년생의 물맞댐

[퇴사일기#24] 충분한 물맞댐의 시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물맞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새 물고기가 어항의 수온과 수질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입니다. 보통 물고기는 구입 시 봉지에 포장해서 데려오는데 그 상태 그대로 어항에 일정 시간 넣어두면 됩니다.


 어릴 때 마트에 놀러갔다가 엄마에게 졸라 금붕어를 사온 적이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엄마는 금붕어에게 물맞댐의 시간을 줬습니다. 잘 적응한 녀석은 우리 집에서 꽤 오래 살았습니다.


 그 때 처음 배운 물맞댐은, 작은 생명이 갑자기 바뀐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는 점에서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릴 때는 그 금붕어처럼 저를 배려해주는 어른이 많았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엄마 손을 놓고 내 짝이 될 아이의 손을 잡으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울어버렸습니다. 낯선 사람과 낯선 환경이 무서웠습니다.


 선생님은 아직 어려서 그럴 수 있다며 어머니께서 아이를 잠시 다독여주라고 하셨습니다. 엄마는 나를 안고서 무서울 것 없다고, 새로운 친구들과 재밌는 일이 많을 거라 말씀해주셨습니다. 의심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목소리와 품이 익숙하게 따뜻해서 용기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뚝, 울음을 그치고 짝이 될 친구와 손을 잡고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로도 수많은 물맞댐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자라면서 속한 환경이 계속해서 바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직장에 따라 이사를 다닐 때,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로 진학했을 때, 처음 남자친구가 생겼을 때, 키우던 강아지와 이별했을 때, 사춘기로 신체의 변화를 겪을 때, 길게 기른 머리를 잘랐을 때 등등.


 적응의 시간은 언제나 버거웠습니다. 하다못해 동생과 방을 바꾸는 것도 싫었습니다. 저는 예민한 물고기여서 다른 물고기보다 물맞댐의 시간이 배로 드는 편이었습니다.


 다만 성장하면서 '안 그런 척'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마음속에서는 천둥과 번개가 콜라보로 요동을 쳐도 괜찮은 척 하는 것이 성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힘들지만 힘들다고 티를 내지 않는 것이 어른이 되는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첫 직장을 얻었습니다. 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지역의 8평 남짓한 원룸, 온통 새로운 것에 둘러싸인 공간은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처음으로 경제적 독립을 이룬 것인데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된 것만 같았습니다.


 딱 하루 차이로 열아홉에서 스무살이 되던 그 날에 들었던 ‘어른’의 소리에는 모순을 느꼈지만, 부모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지금 이 상태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회초년생이 되어 어른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직장생활은 실전입니다. 자격증, 영어점수, 학점으로 할 줄 아는 것이 많다고 증명하던 면접 자리의 저는 어디로 가고 꿔다놓은 보릿자루 마냥 아무 말 없이 팀장님 뒤만 졸졸 따라다녔던 첫 날, 집으로 돌아와 생각했습니다.


 신입사원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회는 신입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배워 1인분을 해낼 때까지의 물맞댐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때부터 노력을 했습니다. 성실한 것이 최고의 무기라고 믿어왔던 순진한 존재는 스스로를 갈아 넣어 회사에 적응해나갔습니다.


 많이 힘들었고, 또 많이 외로웠습니다. 몰아치는 업무와 처음 겪는 꼰대 사회, 선배들의 시기 어린 괴롭힘과 부적절한 추파 속에서 저는 제가 속해있는 환경이 스스로에게 맞는 온도와 조건의 물인지 판단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물맞댐의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맞지 않는 물속에 담긴 물고기는 서서히 죽어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그 일이 터졌습니다. 회식 날이었습니다. 당시 담낭제거술을 한지 몇 달 되지 않았던 나는 회식 자리가 불편했습니다.


 평소 윗사람들이 주는 술을 거절하지 못하는 편이라 회식 때 자주 취했습니다. 나를 미워할까봐,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욕할까봐, 매일 마주치는 사람과 껄끄러울까봐 거절을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날은 수술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라 도저히 술을 마실 수 없었다. 잔은 받되 마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욕은 먹었지만 몸이 너무 힘들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하필 그 때 그 일이 벌어졌습니다. 1차 술자리가 끝나고 2차를 가네 마네 하는 상황에서 상사 중 한 분이 집에 들어가면서 저를 태워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분은 회식에서 술을 강요하기로 유명한 상사였는데 꺼림칙했지만 아까도 술을 거절한 상태라 알겠다고 했습니다.


 대리 기사를 부르고 그 분의 차로 가던 으슥한 길에서 갑자기 엄청난 힘에 의해 몸이 기울어졌습니다. 그 상사가 제 허리를 휘어감아 안은 것입니다. 취하지 않았던 저는, 너무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에게서 떨어지려 버둥거렸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걸어오는 대리 기사님을 부르며 상사를 차에 태워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저는 알아서 집에 가겠다고 말하곤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습니다. 심장이 쿵쾅거렸습니다.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강하게 깨달았습니다.


 며칠 고민을 하다가 직장 동료에게 그 일을 얘기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 대리님 회식 때마다 너 취하면 어깨동무 하고 그러더니 손버릇 정말 안 좋다. 조심 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몇몇 동료들이 같은 얘길 했습니다. 그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니 희미했던 의심이 선명한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그는 제게 술을 강요했고 취하면 스킨십을 했왔습니다. 저는 이제껏 회식 때 취해서 그 사실을 모르다가 그 날 술을 마시지 않아서 알게 된 겁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그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제가 그를 더 윗사람에게 고발했을 때의 대응에 굉장히 실망하고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 사건을 겪고서야 제가 맞지 않는 물속에서 살려고 버둥거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발버둥 칠수록 더욱 숨이 막힌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로, 그렇게 첫 직장을 정리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면 그 때처럼 심장이 쿵쾅거립니다. 불쾌했던 그 날의 느낌이 심장 저 뒤편으로부터 스멀스멀 새어나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스스로가 미숙했던 책임도 있다고 여기며 저는 퇴사로써 그 일을 정리 했습니다.


 하지만 이따금씩 떠오를 때마다 괴로운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고 저는 이직한 회사에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했습니다. 잘못은 가해자가 했는데 피해자가 조심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이에 맞서 강경하게 대응할 수도 있겠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 불편한 그 일을 혼자 정리하는 것이 덜 힘들었습니다.


 첫 직장에서 보낸 1년 3개월 동안 많은 것들이 몸과 마음을 갉아먹었습니다. 만약 조금 일찍 그 회사를 떠났다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들 때도 많았습니다.


 무조건 버티는 것이 정답이라 믿었던 것은 누구 때문일까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신념이 무너지고 믿어온 가치를 부정 당하며 스스로가 사라지는 것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적응하지 못한 제 잘못이라 여겼습니다. 안타깝게도 우울증 진단 후 치료를 시작하고 나서야 스스로를 향한 채찍질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맞지 않는 물에 적응해보려고 고단히 헤엄치는, 아름다운 물고기들이 있습니다. 몇몇은 물에 잘 적응해 여전히 아름답게 헤엄치고 몇몇은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충분한 물맞댐의 시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처음 사회에 내던져진 존재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본인이 있을 자리가 맞는지에 대해 고민할 수 있도록 배려해줄 수 사회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합니다.


 만약 사회가 배려해주지 못한다면 스스로가 본인을 위해 충분히 고민하고 결단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는 참는 게 어른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괜찮은 어른이 아닙니다. 자신을 깊이 이해하고 본인이 헤엄칠 수 있는 물을 판단하는 것이 현명하고 괜찮은 어른입니다. 나는 물맞댐이 오래 걸리는 물고기였으나 그 사실을 외면하고 무턱대고 적응하려 들었습니다.


 물고기가 어항 속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물맞댐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 작은 생명을 위해 적응의 시간을 주는 것처럼, 갓 사회로 뛰어든 사회초년생이 회사에 적응하여 본인 몫의 일을 해낼 수 있도록 충분한 물맞댐의 시간을 주는 성숙하고 건강한 분위기가 많이 생겼으면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헤엄치고 있을 사회초년생의 물맞댐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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