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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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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옹알이 Feb 15. 2022

당원이 된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퇴사일기#26] 까라면 까

 오늘도 제가 당원으로 가입된 홈페이지에 들어가 전화 연결을 시도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곧 연결 해드리겠습니다'라는 안내 멘트를 몇 번째 듣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진짜 작정하고 기필코 연결되리라는 마음으로 3시간 동안 내리 전화를 건 적이 있습니다. 몇 십통의 전화가 연결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날은 상담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운수가 좋았는지 상담원 연결에 성공했습니다. 매번 안내 멘트만 듣다가 사람 목소리가 들려오니 당황스러울 정도로 반가웠습니다.


 이런 저런 사유로 당원이 되었고 탈당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제 전화번호를 조회하고는 홈페이지에서 탈당 신고서를 작성하여 팩스를 보내라고 안내해줬습니다.


Q: 제가 원해서 가입한 게 아닌데도 꼭 팩스까지 보내야 하나요?
A: 저희도 증거를 남겨야 되서 어쩔 수 없습니다.


 가입할 때는 그렇게 쉽더니 탈퇴 절차는 꽤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당은, 제 의지로 가입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정치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어쩌다 당원까지 되었냐고요? 회사를 다녔을 뿐인데 당원 가입까지 하게 됐습니다. 오늘은 제가 당원이 된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전(前) 직장은 굉장히 보수적이었습니다. 윗 사람들의 태도부터 분위기까지, 여기서 딱 한달만 일해보면 바로 체감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며 다양한 생각을 들여다보고 세상의 작은 목소리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잘못은 인정하고 더 나은, 그리고 합리적인 것을 선택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편하게 표현하자면 스스로가 신세대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회사 내에서 느껴지는 윗선의 보수적인 분위기가 견딜 수 없이 싫었습니다. 결국 가면을 쓰고 회사생활을 해나가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쓴 것은 '아무것도 몰라요' 가면이었습니다. 부당하고 불합리적이며 억압과 권위적인 윗선의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한 입장이었습니다.


 윗선들과의 술자리에서는 그 어떤 정치색이나 성향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또한 누군가의 뒷담화도 싫었습니다. 윗선들 입장에서는 그저 생각없이 회사 다니는 해맑은 직원으로 보였을지 몰라도, 속에서는 언제나 부당함에 맞서느라 피멍이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 피멍이 기어코 터져버리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어느 날, 회사에서 권위있는 윗선이 저를 포함한 직원 세 명을 사무실로 불렀습니다. (윗선의 구체적인 위치가 드러날 것을 고려하여 '윗선'으로만 표현하겠습니다.) 저만 사원이었지 나머지 두 분은 직급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앉는 자리에서도 직급의 높낮이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윗선이 앉은 자리로부터 가까운 좌석에는 가장 직급이 높은 A 과장이, 그 옆에는 B 선배가, 그리고 가장 끄트머리에 제가 앉아 있었습니다.


 윗선은 안부를 물으며 실없는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어떤 종이를 내밀었습니다. 당원 가입서였습니다. 순간 너무 놀래서 눈이 땡그랗게 떠졌지만 그 자리에서는 어떠한 내색도 할 수 없었습니다.


 "회비는 안 내도 되니까 계좌는 쓰지마."


 회비고 나발이고 저는 그 당에 가입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 이름이 그 당에 속하는 것 자체가 싫었습니다. 회사가 보수적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직원을 당에 가입 시키는 비상식적인 일까지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놀란 저와 달리 A 과장은 자연스럽게 당원 가입서에 인적사항을 기재하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B 선배가 가입서를 작성했습니다. 차례를 거쳐 펜과 당원 가입서가 제 앞으로 왔습니다.


 윗선은 '하기 싫으면 하지 말고'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그 말이 의미가 있었을까요. 앞에서 이미 과장과 선배가 가입서를 작성했는데 제가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리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선명하게 존재하는 압박과 당장에 겪을 불편한 상황 자체가 이미 협박이었습니다.


 사무실에서 나오며 A 과장과 B 선배에게 물었습니다. 그 당에 관심이 있었냐고. 그들은 진저리 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아니랍니다. 그저 윗선이 쓰라니까 썼다고. 말로만 듣던 '까라면 까'를 경험한 겁니다.


 그 후에 소식을 들었는데, 타 팀에서는 당원 가입서를 돌려 원하는 희망만 적어낼 수 있게 했답니다. 저희처럼 불려가서 강제로 가입한 일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 사건은 몇 번이고 다시 떠올려봐도 속에서 울분이 솟았습니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거절할 수 없는 경우가 또 있을까요.   


 당원이 되고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선거나 명절 관련 단체 문자가 좀 많이 오고, 스스로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한 패배감이 들었을 뿐입니다.


 별일이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가면 속에 저는 피멍이 들고, 터지고, 상처가 곪아 버리면서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제 신념이 강제로 굴복 당해버린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을 선택한 것도 제 의지가 아니었고,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는 선택을 하지 못한 것도 굉장히 분했습니다. 어릴 때 진로희망 칸에 엄마가 원하는 직업을 써서 내던 것과는 다릅니다. 저는 성인이고 제가 속해있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이 모든 것을 부정 당했으니 존엄성이 휘청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화가 났지만 당장 탈퇴할 수도 없었습니다. A 과장과 B 선배는 탈퇴할 생각이 없었고, 저만 탈퇴를 했다가는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윗선이 회사 생활을 불편하게 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회사에 속해 있는 한 저는 계속해서 원치 않는 그 당의 당원으로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퇴사 후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 '당원 탈퇴'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드디어 해냈습니다. 마음 한 켠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당원 가입 사건은 제게 2가지 분노를 남겼습니다.


 첫 번째는 윗선의 부당한 권력 과시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사실 힘없는 말단 사원을 불러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당원 가입서를 쓰던지 말던지 하라는 상황 자체가 선택권이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압적으로 행해진 선택을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말고'와 같은 말을 흘림으로써 추후 문제가 될 경우 본인이 빠져나갈 퇴로를 확보해둔 것이 참 치사하고 더러웠습니다.


 사라는 커다란 갑의 권력에 휘둘리는 무력함과 직원의 의사 따위 안중에도 없는 윗선의 무례함,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직원을 정치에 끌어들이는 이기심에 치가 떨렸습니다. 실제로도 그 자리에서 손을 떨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회는 자유 의사를 중요시하는 민주 사회라는 것을 초등학생 때 배웠습니다. 특히 정치와 같은 개인의 선택과 신념이 드러나는 부분은 분명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윗선은 그 부분에서 권력을 남용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무언의 압박과 위협이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이 사건이 특히 힘들었던 이유는, 제가 회사에 속해있음으로서 약자가 되어 윗선의 권력 과시에 대응하지 못했기 때분입니다. 윗선은 지위와 권력으로 직원의 의사를 무시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21세기에 일어난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식한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A 과장의 무책임함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A 과장은 그 자리에서 윗선의 제안을 생각없이 승낙하면서 아래에 있는 B 선배와 제가 더욱 거절하기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고려했을까요?


 회사를 다니면서 본 A 과장은 언제나 본인에게 유리한 선택만 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신보다 권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부당한 요구에도 대응하지 않고 언제나 승낙해버리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그 날은 윗선이 자신(A 과장)의 부하직원(B 선배와 저)까지 불러 부당한 제안을 던진 자리였습니다. 그 순간 만큼은 자신의 행동을 조금 더 신중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생각없이 '까라면 까'라는 식로 얼토당토 않는 제안을 승낙한 것은 자신의 위치만 생각한 어리석음이 아니었을까요.


 그 자리의 부당함에 대해 용기낼 수 있었던 것은 A 과장 밖에 없었습니다. A 과장도 B 선배도 가만히 있는데 제가 나섰다면 문제는 더 커졌을 겁니다.


그 사람이 본인의 위치에 대한 책임감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펜을 쥐지 않았을 겁니다. 과장으로서 부하 직원을 보호하는 선택지를 고를 수 없었는지 따지고 싶었지만 어떻게 보면 A 과장도 피해자였습니다. 십년 넘게 이 곳에서 일하며 무력함이 학습된 피해자.  


 덕분에 저는 '위치에 맞는 책임감'에 대한 생각을 했습니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조금 더 신중하게 행동하고 책임감으로 후배를 끌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제가 선택한 것이 추후에 어떤 결과를 이끌지 신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모든 일에 들이받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슴 한켠에 품고, 잘못된 상황을 잘못된 것이라 판단할 수 있는 날카로운 시선을 갖춘 관리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끝으로, 회사를 다닌다는 이유로 근로자가 상대적 약자가 되는 일이 더는 없었으면 합니다. 어떠한 사유에서든 '윗선'은 개인의 선택을 강요하는 자리는 있어서는 안됩니다. 특히 정치는 개인의 선택과 신념을 충분히 존중하는 것이 기본기입니다. 개인의 선택권을 침해하는 일이 반복되면 그건 폭력입니다. 더 이상 외면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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