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날씬해져서 돌아가는 여행

<언제라도 경주> 못 다한 이야기 #1

by babonabi

혼자 떠나는 길은 가볍지만 무겁다. 시험은 망쳤는데 어쨌거나 주말인 그런 기분이랄까. 잊고 있으면 콧노래가 절로 나다가 생각나면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진다. 더러는 나 없이 셋이 지내는 것도 해봐야 익숙해진다며, 어느 날 내가 갑자기 사라지게 되면 손만 빨고 있을 순 없으니, 연습을 해보라며 아이들과 남편에게 큰소리치지만, 마음의 소리는 기어들어 갔다. 아. 기분 좋았는데 10시 47분쯤 도착할 거라던 이놈의 버스가 신호마다 걸리고 정류장마다 선다. 10시 50분에 경주 가는 시외버스를 타야 하는데 10시 51분 도착이란다. 평소 그 버스는 보통 5분 정도 늦게 도착하지만, 오늘은 제시간에 올 수도 있을 텐데. 도착 10분 전부터 똥줄이 타기 시작했다. 계속 새로고침을 해봐도 시간은 줄어들질 않는다. 겨우 딱 50분에 맞춰 내리자마자 냅다 뛰어가 발권하는데, 탑승 시간이 지났다고 예매 정보가 뜨질 않는다.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는데 경주 가는 버스가 승강장으로 들어온다며 방송을 해대고. 하. 사람이 있는 창구는 전부 닫혀있고 망할 키오스크에서 현장 발권으로 끊고 뛰어갔다. 타려고 보니 출발시간이 지나서인지, 다음 시간 버스표를 끊었네. 출발하려는 버스에 올라타 버스표를 내밀며 태워 주시면 안 되냐고 물었다. 어디 가냐는 물음에 경주 간다고 근데 1시 반 티켓이라고 하니 괜찮다고 빈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얘기해주신다. 빈자리라지만 내가 예매했던 자리. 취소하려고 보니 수수료가 8,500원. 그 돈이면 택시를 타고 왔어도 되는 건데. 가고 있냐는 남편의 카톡에 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해 주다 보니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빈속에 커피를 들이붓고 온 내 잘못이요. 빠듯하게 버스를 탄 내 잘못이니 가득 찬 방광을 부여잡고 휴게소에 도착할 2시간 동안 정신 수양하며 갈 수밖에. '아까는 똥줄이 타더니 이젠 염불을 외우네.' 휴게소 도착 30분 전부터 허리를 바로 세우고 최대한 압박하지 않는 자세로 "참을 수 있다. 참을 수 있다. 나는 참을 수 있다."를 읊조렸다. 휴게소 도착과 동시에 총알처럼 튀어 나가 세상 시름 다 내려놓고 정신도 내려놓았나 보다. 빈속의 커피가 얼마나 위험한지 좀 전까지 체험해 놓고는, 정신 못 차리고 또 커피를 사려다 나의 왼손이 나의 오른손을 뜯어말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다행히 아무것도 사지 않고 시원하게 비운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남은 시간 창밖을 보며 가는데 불현듯 도자기 체험이 생각ㅆ나다. 예약하려고 전에 알아봤던 곳을 다시 찾으려는데 네이버 지도에서 사라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버젓이 있었는데 폐업했거나 없는 정보라고 뜬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나만의 접시를 만들어 보겠다던 나의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인가? 이리저리 검색해서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두 개의 번호가 있었다. 하난 일반 전화번호 하난 휴대전화 번호. 전화하면 금방 해결할 수 있는 의문이지만, 통화가 불편한 X세대는 휴대전화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다행히도 뭘 잘못 눌러 정보가 지워졌다고 한다. 다음날 11시로 예약을 하고 벗어둔 옷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날이 따뜻해진다고 해서 입고 온 얇은 잠바가 춥다. 넓은 목도리를 그 위에 덮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자는 내내 춥단 생각이 들었는데 어느 순간 햇살이 따뜻해졌다. 위도상 한 시간쯤 밑으로 내려왔다고 버스 안으로 들이치는 볕이 봄 볕인냥 온화함을 가장하며 한껏 뜨겁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게 하는 봄의 햇살은 온도가 비슷한 가을볕과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 옛말에 봄볕엔 며느리를 내놓는단 얘기가 있지 않나. 얼굴은 한껏 타겠지만 그보단 추운게 더 싫으니, 커튼을 치지 않고 30분쯤 따뜻하게 잠을 잤다.


버스에 내려 하나로마트에 들렀다. 우리 동네에선 맛있어 보이지 않는 딸기가 참 비싼데 여긴 엄청 맛있어 보이는 딸기가 어찌 그리 싼 건지. 집에 있는 딸기 귀신 생각이 났다. "집에 가는 날 사가야 겠네~~"혼잣말로 중얼거리다 "형님! 말에 음이 붙으면 나이먹은 거래요!"라던 동서의 말이 떠올라 또 혼자 낄낄거렸다. 오늘은 딸기 말고, 맛있어 보이는 사과 한 개를 집어 들었다. 무게를 재고 가격표를 붙여야 해서 직원분께 넘겨 드렸다. 가격이 삼천 원쯤 나왔다. 직원분이 나를 쳐다보며 묻는다.

“하시겠어요?”

과하다 싶은 사과값에 움찔하는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나? 평소라면 조용히 사과를 내려놓았겠지만, 이번엔 당당하게 받아 들고 장바구니에 넣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지만, 안하던 짓을 하는 이유는 이번 여행의 목표를 '조금은 날씬해져서 돌아가는 여행'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맛있게 생긴 사과 한 알, 단백질 음료 한 개, 잘 익은 토마토 한 봉지, 미니 햄버거. 평소와는 다른 장바구니를 보며 흐뭇해졌다.




+ 딸기는 한 팩에 6천 원. 그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지만 ‘딸기는 뭐 내일 사 먹지!’ 하는 마음으로 사과를 내려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