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른 목표도 없이 방구석에서 묵새기며 '나도 이제 30대구나.'하고 아쉬운 한숨만 하르르 내쉬는 나날이었다. 사회적인 성공이 탐나지도 않았고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한숨의 정체는 검소한 통장 잔고가 아니라 아직도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는 부끄러운 회한이었다. 무려 삼십 년을 넘게 살았는데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성향인지 희미한 윤곽만 보이는 상태였다.
물론 돈벌이는 쉬지 않고 해 왔으니까 어떤 일이 적성에 맞는지는 고민 없이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취미가 뭐예요?" 같은 질문에는 여전히 말문이 턱 막혔다. 취미가 무엇인가. 취향의 결정체 아닌가. 실제로 나이를 좀 먹고 보니 누군가를 이해할 때 직업보다 취미가 더 도움이 됐다. 취향이 모이면 성향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나는 여태 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살면서 악기 하나쯤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 꾸준히 할 수 있는 운동을 찾아라, 나중에 후회 하지 말고 여행 자주 다녀라, 이런 말을 수없이 보고 들었는데 정작 실천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게 울적했다.
'아직 늦지 않았어.'라고 자기 암시를 걸면서 충동적으로 집 근처에 있는 공방에 예약을 잡았다. 12월 초였고 크리스마스 장식을 만드는 하루 수업이었다. 예약 날짜가 되자 참새가슴답게 잘할 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섰다. 하지만 한 해의 마지막까지 여들없이 굴 수는 없다는 오기로 낯가림을 이겨냈다. 12월의 힘이었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머금고 조심스럽게 공방에 들어섰다. 낯선 미술 재료들이 선반 가득히 진열되어 있었다. 친절한 사장님의 안내를 받아 탁자 앞에 앉았다. 내가 쓸 재료들이 간잔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첫 단계는 석고 조각의 모양을 고르는 것이었다. 눈사람, 크리스마스 트리, 산타 등이 있었는데 그 중 신중히 아홉 개를 골랐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결정하는 데 고민이 길어지는 편이라 옆에서 보기에 답답했을 텐데도 사장님은 전혀 채근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 다음은 채색이었다. 고등학생 아니, 중학생 이후로 붓을 잡은 게 처음이었다. 물통 가장자리에 대고 붓 끝을 모으기만 해도 마음이 간지럽고 해죽 웃음이 지어졌다. 사장님은 원하는 색을 골라 자유롭게 색칠하라고 했다. 무슨 색이 어울릴까 물감통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자신이 낯설면서도 행복했다. 이런 순수한 고민에 빠진 게 참 오랜만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꼭 초등학생 미술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원체 갱충쩍은 성격이라 실수하지 않게 신중히 붓을 놀렸다. 흰 조각이 점점 색을 입을수록 뿌듯한 기분이 진해졌다.
"색 조합이 정말 예뻐요. 색감이 좋으시네요."
사장님이 활짝 웃으시며 칭찬해주셨다.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느낌이 나지 않아 다른 색을 쓸 걸 그랬나 슬쩍 후회가 들던 차에 그런 소릴 들으니 도로 자신감이 생겼다. '이것도 나름 괜찮네!'
정말이지 사장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봐도 서툴고 어색한 붓질인데 수시로 잘했다고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멋쩍은 마음에 칭찬을 정말 잘해주셔서 더 재밌게 느껴진다고 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 어른이 되면 칭찬 들을 일이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여기에서만큼은 많이 칭찬해 드려요. 다들 꼭 이걸 만들려고 온다기보다 힐링하러 오시는 거니까요."
아, 이래서 다들 취미 생활을 하는구나. 파스텔 색을 칠하고 있어서인지 사장님의 말투가 무척 다정해서인지 마음이 멋대로 몽글몽글해졌다. 30대가 무슨 상관인가. 내 마음은 여전히 어리고 여렸다.
색칠이 끝난 다음에는 구멍에 낚싯줄을 넣어 조각을 연결하는 단계였다. 사장님이 시범을 보여주셨지만 손재주가 없는 터라 잘 따라하지 못했다. 사장님은 대부분 매듭을 어려워한다면서 끝까지 직접 해봐도 좋고 대신 자신이 해줄 수도 있다고 하셨다. 나는 쉽게 포기했다. 대신 그 시간에 색칠을 더 꼼꼼히 하기로 했다. 재미로 하는 건데, 뭐. 좋은 것만 하면 어때.
집에 돌아와 작품을 걸어 놓았는데 자꾸만 눈길이 갔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왜 이제까지 취미를 만들지 않았을까. 얼마 안 가 답을 찾았다. 뭐든지 잘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이었다. 악기만 해도 피아노, 클래식 기타, 바이올린, 우쿨렐레 한 번씩은 다 배웠다. 뭐든지 수강생 중 잘하는 축에 속했고 처음 배우는 거 맞느냐는 얘길 들었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고 마음처럼 실력이 늘지 않는 순간 관뒀다. 그리고 실력이 원점으로 퇴행할 때까지 다시는 찾지 않았다. 헤어진 연인과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한 번 헤어졌던 취미와는 절대 얽히지 않으려고 했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애초에 시작조차 안 하려는 방어적인 태도가 생겼다.
생각해 보니 취미는 내게 한 번도 상처를 준 적이 없다. 내 멋대로 취미에 실력이라는 잣대를 들이밀고 점수를 매겼다. 그러다 제풀에 지쳐 나가 떨어졌다. 취미는 그냥 하기만 해도 잘하는 건데. 복잡한 매듭 같은 단계는 건너뛰어도 아무 상관도 없는 건데. 그러니 다들 취미 생활을 실컷 즐기길. 평가도 점수도 없는 세계를 맘껏 유영하시길. 취미는 사랑이 아니라 우정인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