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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Jun 19. 2021

자존감과 자신감 2

먹고 살 자원이 부족했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먹고 살 자원을 생산할 노동력이 절실했던 시절엔 아이를 많이 낳았다. 노동력이 필요해서 아이를 많이 낳았지만, 자원이 없으니 모든 아이를 배부르게 먹여 키울 순 없었다. 설명은 할 수 있으나,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딜레마와 역설이다. 이른바 자식 중에서도 첫째, 그중에서도 아들을 선택해 자원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선택과 집중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딸과 자투리 아들도 그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제일 먼저 태어난 누나는 공부를 꽤 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들 학바라지를 위해 자발적으로 상고에 진학했다. 누나가 번 돈이 나를 포함한 형들의 학비에 보태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적어도 부모님이 누나의 대학교 등록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누나의 상고 선택은 그 자체로 남동생들의 학바라지와 다를 바 없었다. 중학교 때 우연히 큰형과 도시락이 바뀐 적이 있었다. 큰형 도시락에는 먹음직스러운 계란 후라이가 올려져 있었다. 하지만 난 어머니께 왜 큰형 도시락에만 계란 후라이를 넣었냐고 항의할 수 없었다. 같은 형제이지만 태어난 시기가 달랐고, 가족의 안위를 위해 차별과 불평등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 논리가 확장되면 국가의 불평등도 감내할 수밖에 없는 국민들이 길러진다. 경제적으로 큰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잘못을 해도 죗값을 묻지 못하는...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지금은 오히려 아이를 많이 낳지 않는다. 과거에 다둥이를 선택과 집중의 방식으로 키울 수밖에 없었던 어르신들의 육아에 대한 조언은 오히려 지금의 부모들에게 방해가 된다. 새내기 부모의 관심은 오롯이 첫째에게 집중되지만, 첫째를 키우며 알게 된 육아의 깨달음은 주로 둘째에게 적용한다. 인간은 특정한 환경 안에서 태어나 환경과 상호작용을 통해 성장한다. 모짜르트가 지금 이 시대, 대한민국에 태어나도 같은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을까? 나는 천재와 둔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독립적이고 내재적 특성이 아니라, 환경이라는 조건과 상호작용하며 얻어진 과정이자 결과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외동이나 두 자녀가 일반화된 현재 아이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어떤 자존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갈지는 확신할 수 없다.


난 3남 1녀 중 막내로, 하나뿐인 누나는 비교 대상이 없어 잘 모르지만, 큰형, 작은형, 그리고 나는 독특한 환경에 의해 다른 성격이 형성되었다고 믿는다. 한 가족이라는 비슷한 환경 속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소심한(좋게 말해 세심한) 나와 다르게 큰형은 남의 눈치를 잘 보지 않는 대범한 성격이었다. 세상을 떠난 큰형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큰형은 진짜 눈치가 없었다. 삼형제 중에서도 작은형은 가장 소외를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강한 생활력을 후천적으로 습득했던 것 같다. 설날 친척집에 세배를 가면 모든 형제들에게 세뱃돈을 줄 수 없었던 친척들은 큰 아들인 큰형에게 세뱃돈을 주었고, 부모님이 타지에서 장사를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을 때 누나와 형들은 할머니에게 남겨졌지만, 막내인 나는 부모님을 따라가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이 남는 어렸을 적 흑백 사진 한 장이 있다. 부모님이 갓난아기인 나를 안고 창경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당연히 사진을 본 기억이 나는 것이지 부모님과 함께 한 창경원 나들이가 기억나는 것은 아니다. 그날은 비가 왔고, 누나와 형들은 막내인 나만 데리고 간 창경원 나들이에 비가 내린 것을 꼬소해 했다고 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나의 성격은 그것이 좋건 나쁘건 나의 자발적 의지보다는 내가 처한 환경의 영향이 더 컸을 것이다. 농사를 지으며 당한 설움때문에 자식들에게는 농사를 안 짓게 하겠다며 서울로 올라오신 부모님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나는 디지털 디바이스를 꽤 잘 다루는 편이지만, 내가 다루는 그 어떤 디바이스도 내가 필요에 의해 만든 것은 없다. 제대 후 작은형이 할부로 386DX에 4M 램이 장착된 컴퓨터를 사 주었기 때문에, 다행히 또 그 형이 마침 (나의 의지와 완전히 무관하게) 잘 나가는 프로그래머였기 때문에 시작부터 제대로 컴퓨터를 배울 수 있었고, 누군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인터넷 상에 올려 두었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무지함을 숨긴 채 비교적 수월하게 일을 하고 있다.  


아이들을 지독하게 사랑했던 나는 그 지독함으로 인해 어느 날 사랑하는 딸에게 소위 폐드립 3종 세트를 모두 듣게 되었다. ① 누가 낳아 달라 그랬어? (맞아, 네가 낳아 달라고 한 적은 없지), ② 아빠가 지금까지 나한테 해 준 게 뭐야? (그래, 아빠의 사랑은 그저 아빠의 만족을 위한 사랑이었던 거 같아), ③ 죽어 버릴 거야! (제발 그것만은... ㅠㅠ) 그래서 언젠가부터 난 사랑하는 나의 딸들에게 그 어떤 요구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아빠가 되어 버렸다. 미래에 대해 확신할 수 없으니 나의 기준으로 일방적으로 딸들에게 일해라 절해라 할 수도 없고, 확신할 수 없으니 책임 또한 질 재간이 없다.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무리 공부를 잘 하고, 이 사회가 조성해 놓은 경쟁의 울타리 안에서 승리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장차 성인이 될 아이의 취업과 행복은 부모도, 이 사회도 마련해 줄 수 없다. 그래서 난 생각했다. 소위 교육이라는 것은 아이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맘껏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고, 어른들은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아이의 자신감은 어찌할 수 없으니, 자존감 만이라도 지킬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부모들의 역할 아닐까?


미안하지만, 너의 미래는 아빠도 알 수 없구나.
그러니, 후회 없이 지금을 즐기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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