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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희태 Sep 11. 2019

가짜뉴스의 폐해

가짜뉴스에서 벗어나기 3

에서 벗어나기 3

3. 가짜뉴스의 폐해를 알아보자!


“사람들이 속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다.
거짓말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을 다 얻은 다음이므로…”
- 움베르토 에코 -


가짜뉴스의 폐해는 드라마, “육룡의 나르샤”에 나왔던 삼봉, 정도전의 대사에 잘 녹아 있다.

삼봉 : 신축년,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개경이 불타고 수도가 함락당했다. 그때 고려를 구한 4명의 영웅이 있었지.
방원 : 예,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 장군이었죠. 김득배 장군은 삼봉 선생의 스승 아니셨습니까?
삼봉 : 헌대, 그들 4명이 모두 죽었다. 아느냐? 개경을 수복하고 병사들은 승전가를 부르는 그때, 4명이 모두 죽었어.
방원 : 알고 있습니다만, 어찌 그 말씀을 하시는지...
삼봉 : 안우, 김득배, 이방실 장군이 개경 수복의 총사령관인 정세운 장군을 먼저 살해했다. 그리고 그 세 장군은 그 죄로 모두 참형을 당했어. 개경을 수복한 지 삼일도 안돼서... 왜 그랬는지 아느냐? 한 통의 서찰이었다. 길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한 통의 서찰... 간신 김용이 그 영웅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서 왕명을 위조하여 세 장군에게 내린 가짜 어명, 그것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방원 : 제가 한 행동이 김용의 그것과 같다는 말씀이십니까?
삼봉 : 그 편지 한 장으로 네 영웅들만 죽었는지 아느냐? 고려의 정치도 죽었어, 왜냐고? 신하들도 왕도 그 누구도 서로를 믿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 왕명 또한 가짜일 수 있는데, 세상 무엇이 진짜일 수 있단 말이냐? 그 편지 한 장이 그런 세상을 만들었다. 그 결과가 너와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고려다. 난세에 쓰는 칼은 따로 있다고? 난세엔 난세의 방법이 있다고? 난세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난세의 희생자, 난세와 싸우는 자, 그리고 너처럼 난세를 타는 자. 난세의 칼이라? 아니, 그것은 단지 네 마음속에서 자라난 벌레일 뿐이다. 정치를 하려는 자는 누구나 마음속에 벌레 한 마리를 키운다. 너에겐 지금은 난세라며, 난세엔 살아남아야 한다며 어쩔 수 없다며 달콤하게 속삭였겠지. 허나, 그 벌레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벌레의 말을 따르다 보면 결국 네 놈이 벌레가 되는 것이다. 난세를 타는 자들이 난세를 더욱더 악화시키는 것이다.

가짜뉴스의 가장 큰 폐해는 정도전의 말대로 누구도 믿지 못하는 불신의 확장이다. 정량화시킬 수는 없지만, 관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 사회에서 ‘신뢰’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자본이다. 신뢰를 축적하기 위해 들이는 공과 시간 대비, 그것을 잃는 데 드는 공과 시간은 허무할 정도다. 나아가 한 번 잃은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해본 적이 있는가? 아무리 사소한 배신이라도 자신을 배신한 누군가를 다시 신뢰할 자신이 있는가? 지금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불신은 과거의 산물이다. 그리고 지금 가짜뉴스로 확장되고 있는 불신은 우리의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만들 것이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것은 고려라는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불신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도전은 조선 건국 후 고려가 안고 있던 불신의 고리를 끊기 위해 전방위적인 개혁을 단행한다.

지금 우리가 불신의 고리를 끊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 정도다. 하지만 정권을 교체해도 가짜뉴스는 끊이지 않는다. 앞서 가짜뉴스의 원인에서 밝혔듯, 선거는 곁을 확인하는 행위가 아닌, 가장 첨예하게 편을 가르고 확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편을 가르는 기준을 알다시피 쪽수다. 만약 99.9%의 지지로 대통령이 당선되었다고 하더라도, 0.1%의 박탈감이 크면 그 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SNS라는 정보 권력의 힘으로 가짜뉴스를 퍼뜨릴 것이다. 왜? 자신의 이익에 반하니까… 이른바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시작되었던 선거제도의 역설이다.


가짜뉴스의 두 번째 폐해는 죄의식의 상실이다. 지금까지 난세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을까? 만약 난세가 있다면 진실과 거짓이 뒤범벅이 되어 있는 지금이야말로 진짜 난세일 것이다. 정도전은 난세에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난세의 희생자, 난세와 싸우는 자, 그리고 난세를 타는 자… 이 시대엔 난세의 희생자도, 난세와 싸우는 자도 잘 안 보인다. 난세가 일상이 되면서 바보처럼 난세에 희생당했던 사람도, 당당하게 난세와 싸웠던 사람도 모두 살아남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난세를 탄다. 살아남기 위한 생존 행위에는 쉽게 면죄부가 주어진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말에 차라리 죽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문제는 생존의 기준이 물리적인 생존에서 심리적인 생존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80년대 운동권이 군사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했던 슬로건인 ‘결사투쟁’은 이제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모두가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설 수 없다며 목청을 높인다. 생존의 기준이 물리적인 생존에서 심리적인 생존, 즉 이익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척도다.

앞서 가짜뉴스의 생산자를 이익을 지키고 싶은 개인이라고 정의하였다. 개인이 지켜야 하는 이익의 패러다임은 우주만큼 넓다. 병아리 눈물만큼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는 마음부터 진짜 생존을 위한 절박함까지… 그 심리적인 생존인 이익의 범주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까? 합의가 필요하다. 그 안에 진짜 생존을 위한 투쟁도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글을 쓰면서 갑자기 고민이 되었다. 매달 월급으로 생존하고 있는 내가 부당하게 해고를 당한다면 결사투쟁을 할까, 아니면 진짜 먹고살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설까? 그렇다면, 지금이 난세일까, 아니면 난세여야 할까? 우리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선 지금이 난세여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난세를 타는 행위에 죄의식을 안 느껴도 되니 말이다. 이 또한 딜레마다…


마지막으로 가짜뉴스의 세 번째 폐해는 논리와 이성의 상실이다. 신이 지배했던 중세에서 벗어난 근대는 이성의 시대였다. 논리와 이성을 추구하며 인류가 감당할 수 없는 지적 자산을 축적했고, 마침내 인류는 그토록 염원하던 기아와 질병으로부터 거의 해방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논리와 이성이 가짜뉴스를 만나면 무용지물이 된다. 일단 불가항력적인 부분이 있다. 확인해야 할 정보가 너무 많다. 그리고 일일이 가짜뉴스의 팩트를 체크하기에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에 너무 바쁘다. 이 두 가지가 우리를 가짜뉴스를 확인할 여유도, 이유도, 의지도 없게 만들었다. 우리는 더 이상 골치 아프게 이성을 작동시켜 논리를 따지지 않는다. 우연하게 눈에 비친 정보 중 자신에게 불리한 뉴스는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반대로 자신에게 유리한 뉴스를 신뢰할 뿐이다. 가짜뉴스의 진위를 가리는 팩트 체크 또한 진영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팩트를 누가 체크하느냐에 따라 그 진위를 가리는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back2analog)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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