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딸아, 내일의 너희에게 보내는 열다섯 번째 편지
사랑하는 아들과 딸에게.
오늘은 인간이 가진 가장 불완전하면서도 오묘한 능력, 바로 '기억'과 '망각'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어제 아빠는 지인의 상가(喪家)에 다녀왔단다. 그곳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옛 친구들을 만났지. 그런데 술잔을 기울이며 옛날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참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어. 우리가 분명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었는데, 각자가 기억하는 과거는 전혀 딴판이더구나.
우리의 뇌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저장하지 않는다. 현재의 나를 보호하거나 합리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과거를 오려 붙이고 색칠하지.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중심적 편향' 혹은 '기억의 재구성'이라고 부른단다.
어제 만난 친구 A는 학원가에서 잔뼈가 굵은 강사인데,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시기해서 험담한다고 믿고 있더구나. 사실 냉정하게 보면 그 친구는 이제 예전만큼의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데도 말이야.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과거의 영광을 현재까지 끌어와 기억을 왜곡하고 있는 셈이지.
또 다른 친구 B는 어느 학교 이사장을 흉보더구나. 교육적인 철학이 부족하다며 비판했지만, 아빠가 여러 사례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그 이사장은 학교 운영 면에서 아주 탁월한 경영가였어. B 역시 자신의 가치관이라는 안경을 쓰고 과거를 제멋대로 재단하고 있었던 거야.
이처럼 사람들은 모든 과거를 자신에게 유리하고 편리한 방식으로 편집해서 기억하려는 경향이 있단다.
나이 든 사람들이 고집이 세진다고들 하지? 어제 친구들을 보며 아빠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 그건 단순히 고집이 세진 게 아니라, 자신의 편향된 기억을 '진실'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 아닐까 하고 말이야. 왜곡된 기억 속에 갇히면, 남의 말이 들리지 않게 되거든.
그래서 너희에게 꼭 당부하고 싶다. 너희의 기억을 너무 믿지 마라. 대신 매일매일을 기록하고, 매월을 정리하고, 매년을 갈무리하는 습관을 들여라. 짧은 일기도 좋고, 핸드폰 메모장에 적는 몇 줄의 글도 좋다.
당시의 감정과 사실을 적어둔 '기록'은, 시간이 지나 제멋대로 변해버린 '기억'을 바로잡아줄 유일한 판사란다. 기록하는 사람은 과거를 미화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객관적인 나를 마주하며 성장할 수 있어.
하지만 기억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야. 오히려 '망각'이라는 기능은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모든 것을 생생하게 기억한다면 어떻게 될까? 살면서 겪은 억울했던 일, 찢어질 듯 괴로웠던 이별, 부끄러운 실수의 순간들이 매일 밤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면, 우리는 단 하루도 제정신으로 살 수 없을 거야.
다행히 우리 뇌는 시간이 지나면 고통을 무디게 하고, 나쁜 기억을 흐릿하게 지워준단다. 그러니 잊어야 할 것은 과감히 잊어라. 억울함과 분노는 기록하지 말고, 강물에 띄워 보내듯 망각의 바다로 흘려보내렴.
사랑하는 아들과 딸아.
기억은 믿을 것이 못 되니 '기록'으로 삶의 중심을 잡고, 고통은 담아두지 말고 '망각'으로 치유하렴. 팩트(Fact)는 기록해 두고, 상처는 잊어버리는 지혜. 그것이 너희의 정신을 건강하게 지키는 비결이란다.
오늘도 좋은 것만 기억하고 나쁜 것은 잊는 행복한 밤 되거라.
너희의 기록관이자 든든한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