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주 Nov 30. 2022

고도를 기다리며

하이데거, 클림트, 스티브잡스의 죽음과 삶.

 이 작품은 프랑스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가 쓴 부조리극이다. 1952년 발간되어 이듬해 파리의 바빌론 극장에서 연극으로 초연되었다. 당시에는 난해한 내용 탓에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점차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지금은 세계 곳곳 다양한 사람들이 만든 극이 이뤄지고 있다.


 극의 내용은 단순하다.

 무대는 단지, ‘시골길, 나무 한 그루’.



 그곳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으로 극은 시작하고, 그렇게 이어지고, 또 그렇게 끝이 난다. 둘은 고도라는 사람 혹은 그 무언가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낸다, 잡담을 나눈다, 서로 딴 소리를 하는, 대화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행동을 해가며, 그렇게 시간을 죽여 나간다. 그러다 에스트라공이 말한다. ‘이곳을 떠나자’, 그럼 블라디미르는 말한다. ‘고도를 기다려야지’. 그럼 답한다. ‘아참, 그랬지’. 그렇게 극은 하염없이 잡담들로, 행동들로, 시간을 메꿔 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저 멀리서 한 소년이 다가온다. 소년은 말한다. “고도는 오늘 안 온대요”. 둘은 실망한다. 그러곤 다시 시간을 죽이는 행동을 하며 언제 올지도 모를 고도를 기다린다.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또다시 소년이 다가온다. “고도는 오늘 안 온대요.” 그렇게 그날도 오지 않았다. 둘은 갑자기 허망해졌는지 허리띠를 나무에 매 목을 매려 한다. 그러나 허리띠가 끊어지며 실패로 끝난다. 그들은 내일 더 튼튼한 끈을 구해오자고 약속한다. 그러나 내일이 되어도 그들은 꼼짝 않는다.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블라디미르: 이제 무엇을 하지?

  에스트라공: 기다리지

  블라디미르: 기다리는 동안에 말이야.

  …


 이 작품을 통괄하는 단어는 ‘기다림’이다. 그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고도가 누구인지도, 언제 오는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린다’라는 ‘상식’에 빠져 있다. 허나 그 모습이 낯설지 않다. 지금의 나 또한 그들과 같이 기다린다는 상식에 빠져 있다. 중학생 때는 고등학생이 되기를, 고등학생 때는 좋은 대학에 가기를, 대학생 때는 좋은 직장에 가기를, 직장인 때는 결혼을 하기를, 결혼했을 때는 집을 구하기를, 집을 구했을 때는 자녀를 낳기를, 자녀가 잘 자라기를, 자녀가 중학생이 되기를, 고등학생이 되기를, 좋은 대학에 가기를, 좋은 직장에 가기를, 결혼을 하기를, 손주를 낳기를…

 기다림의 끝에는 또 다른 기다림이 있었다. 그래서 항상 삶에는 기다림이 있다. 그러므로 나도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려 온 셈이다. 미래에 무언가 큰 이벤트, 고도가 나타나 나의 삶을 극적으로 바꿔주지 않을까, 하는 뜬구름 같은 기대가 ‘기다림’에 묶여 있게 한다. 하지만 고도는 오지 않는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무엇을 위해 사는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누구인지도, 언제 오는지도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며 허망한 곳에서 시간을 죽이는 삶은 누굴 위한 삶일까. 고도를 기다리는 그들처럼, 기다림에 목매다 못해 허리띠에 목매는 삶은 바람직하다고는 못할 것이다. 하루하루 의미 없이 기다림으로 메꾸는 삶은, 내가 아니어도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대체 가능한 삶이며, 그것은 나라는 주체가 없음을 말한다. 마치 껍질만 존재하는 이방인이나 다름없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말했다. 우리의 일상은 불안 속 위안을 얻기 위한 시간 죽이기라고. 세상에 내던져진 우리가, 남들과 비슷한 행동양식을 따라 함으로써, 소속감을 느끼고, 책임감을 덜고, 그렇게 불안을 피한다고. 그래서 20대에는 20대로서 해야 할 양식들이 있는 것이고, 30대에는 그 나이의 행동양식과 숙제들이 있다. 그렇게 표준에 다가가려고 무던히도 애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표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금세 불안을 느끼게 된다. 표준에 속하려면 최소 대학은 어디를 나와야 하고, 짝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고, 그에 맞는 내 모습은 어때야 하고, 직장은 최소 어디를 다녀야 하고, 취미는 뭐가 있어야 하고, 결혼은 언제 해야 하고, 연봉은 얼마여야 하고, 차는 이래야 하고.. 답이 정해진, 정형화된 삶이다. 그런 표면적인 것들은 표준 집단에 속하려 무던히 애쓰는 나의 불안을 자극하고 가속화한다. 표준에 속하기 위한 무한한 기다림의 굴레에 빠지게 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삶을 비본래적 삶이라고 말한다. 나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틀에 맞추어 살아가는 삶이라는 뜻이다.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 무엇을 위해 기다리는지 모르면서 그저 그래야만 하는 것 같아서 본인의 삶을 죽이며 기다리고 있는 그들과도 같이, 내 삶이 왜 존재하는지, 무엇을 위한 삶인지 생각지 않은 채 남들 따라서 사는 삶을 말한다.

 이러한 비본래적 삶을 살도록 유혹하는, 다시 말해 표준 집단에 속하고 싶어 하는 불안의 이유는 인간이 유한성의 자각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라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자각이, 존재의 소멸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지며 죽음의 불안을 느끼게 되는 탓이다. 그 불안 탓에 표준적 삶에, 비본래적 삶에 속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죽음이 우리에게 본래적인 삶의 의미를 열어 세워 준다
-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이러한 불안을 해소하려면 죽음을 앞서 생각해 보는 것, ‘죽음으로의 선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이 생의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다는 자각을 해 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죽음의 존재를 수용하게 되면 되려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현재의 중요성을 느끼게 된다.


죽음과 삶, 구스타브 클림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라틴어로, 로마 시절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행렬의 뒤에서 노예에게 외치도록 시켰던 말이다. 아무리 큰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군이라 할지라도, 그조차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음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라는 뜻이다.

 나의 삶 또한 마찬가지다. 일상의 반복에 도취되어 죽음이라는 것을, 나 조차도 언젠가 사라질 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마치 생이 무한한 것처럼 살고 있지만, 이 삶에는 끝이 있다. 무한정 고도를 기다릴 순 없다. 만약 고도의 정체가 무한한 기다림의 끝에 맞이하는 "죽음"이라면, 내 삶은 죽음을 맞이하길 기다리며 나의 시간을, 내 삶을 죽이고 있는 우스운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고도가 죽음이라면, 나는 절대 고도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언젠가, 내가 바라던 대로 고도가 왔을 때면, 나는 그 자리, 그 세상에 없을 테니.


 ‘애플’의 창업주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대 졸업 연설에서 한 말로 글을 맺는다.

 『...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매일을 삶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대부분 옳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저는 그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후 33년 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는 것을 하게 될까?” 그리고 여러 날 동안 그 답이 ‘아니오’라고 나온다면, 저는 어떤 것을 바꿔야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제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제가 인생에서 큰 결정들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 가장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모든 외부의 기대들, 자부심, 좌절과 실패의 두려움, 그런 것들은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을 남기게 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함정을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약 1년 전 저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 30분에 검사를 받았는데, 췌장에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췌장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이것이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종류의 암이라면서 제가 길어봐야 3개월에서 6개월밖에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의사는 저에게 집으로 가서 주변을 정리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것은 내 아이들에게 앞으로 10년 동안 해줘야 하는 말을 단 몇 달 안에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임종 시 가족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모든 것을 정리하란 말이었고 작별인사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

 누구도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 위해 죽기를 원하지는 않죠.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해 갈 수 없죠.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니까요. 죽음은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않은 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 할 것입니다. 너무나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합니다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에 맞춰 사는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