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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 Nov 14. 2017

달리기 하는 가상

<포레스트 검프> 비평

Alan Silvestri - Forrest Gump Main Theme



윈스턴 그룸의 1986년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20세기의 미국 역사를 관통하는 어느 백인 남성의 일대기를 다룬다. 1994년도에 개봉했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영화다. 일대기를 그리는 만큼, 20세기의 실제 사건들과 인물들이 나오기도 한다. 누군가는 실제 사건을 되돌아보며 향수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영화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일대기를 살아내는 포레스트 검프가 보여주는 잔잔한 감동에 있다.




영화는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어느 벤치에서 포레스트 검프가 임의의 사람들에게 현재까지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 초반부에 하늘에서 깃털이 하나 떨어지는데, 카메라는 이 깃털에 초점을 맞춘다. 마치 관객이 깃털을 따라가다 포레스트를 마주침으로써 그의 인생으로 들어가게 되는 서사를 제공하는 것 같다. 바람에 의해 임의의 방향으로 움직였던 깃털은 우연적이지만, 포레스트의 그림책에 꽂힘으로써 의미를 지니게 된다. 깃털을 따라가는 관객은 이제 알 수 없는 여정이 아닌 ‘포레스트’의 여정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깃털을 쫓다가 포레스트를 만난 관객은 벤치 위의 청자가 된다. 물론 벤치 위의 청자는 버스를 타기 위해 떠나기도 하고, 감동받아 울기도 하며, 허풍이라며 비웃기도 한다. 초반부의 청자, 중반부의 청자, 후반부의 청자는 다르다. 영화는 특정한 청자를 설정하지 않는 셈이다. 특정한 맥락, 특정한 누군가를 설정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저 영화는 우연의 순간에 만난 ‘당신’에게 ‘포레스트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건넬 뿐이다.



포레스트는 척추가 휘었고 머리조차 좋지 않은 백인 남성이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삶은 표준적인 삶의 형태에서 빗겨나간 채로 시작된다. 학교에서 입학을 거절당하기도 하고,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를 결코 비정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표준적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키우려 노력한다. 어머니는 유년기의 포레스트가 잘 성장하기 위한 규율로 존재한다. 기존의 폭력적 규율이 아닌, 폭력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규율로 말이다. 포레스트는 종종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말을 한다. 포레스트의 삶의 양식은 어머니의 목소리로 형성된다.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의 장애를 차별하는 사회 속에서 부조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동력을 부여한다.


그의 존재에 대한 차별은 버스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아무도 그에게 빈자리를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그에게 자리를 내준 사람은 제니이다. 그녀는 사실 폭압적 아버지에 의해 성폭력을 당한 가부장제의 피해자이다. 그녀는 기존의 사회를 구성하는 가부장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히피 운동에 들어서는 그녀는 포레스트에게 탈규율로 존재한다. 즉 기존의 폭력적 규율로부터의 이탈 그 자체인 셈이다. 포레스트가 비장애 백인 남성들에게 놀림받을 때 뛰라고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포레스트의 ‘달리기.'라는 행위가 탄생한다. 이는 ‘뛰어, 포레스트’라는 제니의 탈규율적 목소리와 그를 억압하려는 폭력적 주체의 규율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추동된다. 그리고 이 ‘달리기.' 행위는 그가 장애를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그의 ‘달리기.’는 단순히 들판만을 가로지르지 않는다. 그의 능력을 알아본 미식축구 코치는 그가 선수로 뛸 수 있게 해준다. 내레이션이 말하는 걸로 추측컨데, 그의 미식축구 팀 입단은 그가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해 준 모양이다. 그러나 해방의 행위로 묘사된 달리기는 미식축구의 승리를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다. 미식축구 경기장은 가장 이상적인 남성 신체들로 구성되는 오락적 공간이다. 그를 뒤에서 쫓는 양아치와 미식축구 선수는 어떤 의미에서는 동일하다. 그의 기능적 장애를 조롱하기 위해 쫓는 남성과, 월등한 신체적 기능을 경쟁하기 위해 쫓는 남성. 그들은 비장애 중심적 관점을 가진 채로 포레스트를 쫓는 표준적 남성인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에서 포레스트가 표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고, 후자에서는 그가 표준을 능가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표준 미달로 시작해서 표준을 능가하게 되는 서사는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줄기들 중 하나이다. 군대에서도, 새우잡이 어선 위에서도 처음엔 인정받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의 행동은 ‘이상적인’ 성취를 일궈낸다.


군대

군대는 폭력을 수행하는 남성성이라는 규율의 공간이다. 주어진 규율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개별적 자유가 쉽게 보장되지 못한다. 그러나 상관의 말을 잘 듣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포레스트는, 요구하는 내용 이상으로 임무를 잘 수행해낸다.

베트남에서 그의 ‘달리는 행위’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수행된다. 그의 친구는 그를 무시했던 남성 또래들 사이에서 제니처럼 유일하게 자리를 내준 버바였다. 포레스트의 가문이 흑인을 억압하는 백인 우월주의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면, 버바의 가문은 백인의 하인으로 살아온, 억압당한 흑인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억압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 억압에 의해 축적된 지식을 갖고 꿈을 꾸는 사람이며 오히려 백인 포레스트에게 동업을 제안한다.

그러나 버바는 결국 전사한다. 집에 돌아가고 싶었던 버바는 전사하고, 명예로운 죽음을 원했던 댄은 포레스트에 의해 죽음을 면하게 된다.


새우잡이

포레스트는 죽은 친구의 꿈을 대신 이룬다. ‘바보 같은 짓’이라고 외면받지만 그는 새우잡이를 시작한다. 거기에서 그에게 다가간 사람은 그가 생명을 구해준 댄이었다.

사실 댄은 그를 원망했다. 그에게 필요했던 건 명예였다. 하지만 그는 두 다리가 없는 채로 인생을 살아야만 했다. 그런 그가 포레스트와의 동업을 통해 새 삶을 얻는다. 그리고 그들의 사업이 번창한 덕에, 그들은 백만장자가 된다. 척박한 자본주의 세계에서 그들은 이상적인 모델이 된다.

포레스트의 삶은, 그 문제의 책임을 사회에 돌리기보다는, 그 사회 속 개인의 순응적 성실함의 가치를 강조하는 신화가 된다.


사회는 그를 차별하고 무시하지만, 그는 오히려 억압의 공간을 감당하며 그 사회가 부여한 기준을 능가한다. 여기에서 그는 제니와 갈라진다. 플레이보이에서 학교 재킷을 입고 야한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한 제니는 자신이 하고 싶은 포크 음악을 하지만, 그녀에게 허용된 공연장은 스크립 클럽이었다. 여기에서 그녀 역시 포레스트처럼 억압된 공간에서 묵묵히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만, 그녀는 결국 정치적 삶을 채택하고 그녀를 둘러싼 억압의 공간을 부정한다. 아쉽게도 영화는 그녀의 삶을 포레스트처럼 밝게 그려주지는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상처를 입었던 그녀가 선택한 저항적 삶 속에서도 폭력과 한계는 존재했고, 결국 그녀는 심신이 지친 상태로 포레스트를 찾아가게 된다. 지친 그녀를 구해준 건 포레스트였다.



포레스트는 억압적 공간을 수용한다. 그럼으로써 그가 얻게 된 성취는 무엇인가? 미식축구에서의 명예로운 승리, 무공 훈장, 백만장자.. 이것들은 장애를 극복한 노력에 의해 얻게 된 것들이다. 그러나 영화는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정치적 활동에 대한 긍정적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탈정치적 인간승리를 강조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가 거친 다양한 정치적 맥락들, 구체적 서사들은 생략된다. 포레스트와 대비되는 제니는 그 시대를 지배했던 정치적 삶을 상징하지만, 제니를 둘러싼 서사는 참담하게 그려지며, 그녀의 정치적 행동이 가진 역사적 성취, 가능성을 보여주기는커녕, 오히려 포레스트의 행복한 삶과 대비되는 자살시도쯤으로 비치게 된다.


여기에서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지닌 포레스트는 비백인이자 비 남성으로서의 타자였지만, 월등한 신체적 능력과 규율에 대한 습득 능력은 그를 이상적인 백인 남성으로 탈바꿈시킨다. 성공한 백인 남성 포레스트는 그러나 기존의 백인 중심주의적, 가부장적 생활양식을 수용하지는 않는다. 그의 생활양식은 오히려 백인의 시중을 들던 흑인 여성이, 백인 집사의 시중을 받는 삶을 살게 바꾼다. 제니에게 안식을 제공해주고, 그녀가 상처를 받았던 아버지의 집을 철거한다. 그의 행동은 어떠한 정치적 언어를 갖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천진함은 부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가 삶을 그려내는 방식에는 어떠한 프레임이 씌워져 있는 것 같다. 우선 영화는 장애를 딛고 성공한 백인 남성이 그의 주변부에 있는 타자들을 구원하는 서사를 제공한다. 결국 영화는 주류적 삶에 편승하여 탈정치적 휴머니즘을 가진 노력가의 판타지를 생성해낸다. 포레스트는 기적 같은 성취를 이루어 내지만 그가 백인 남성이기 때문에 더 높은 가능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은폐되고, 그의 삶을 중심으로 휴머니즘이 실현되었으나 삶의 부조리를 재생산하는 기반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은폐된다. 그리하여 영화는 사회를 탓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을 계발하지 못한 비루한 개인으로 몰릴 여지를 남긴다. 세상을 바꾼 건, 결국 탈정치적 백인 남성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보수적 프레임 속에서도 주인공 포레스트의 행동 그 자체는 어떤 가능성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의 행동은 그를 둘러싼 특정한 신화를 비웃는다. 영화가 그려낸 정치적 주체로서의 타자의 비극은 포레스트로 인해 다시 회복된다.


포레스트는 달린다. 그의 ‘달리기.’는 자기 자신으로 살게 해주는 중요한 행위이다.


먼저 그를 괴롭히는 아이들로부터 도망칠 때, 그는 자신을 억압했던 보조장치로부터 해방된다. 그 이후로 그는 항상 어디를 가더라도 달린다. ‘달리기.' 행위는 그를 해방케 해주는 행위이다.


또한 그는 달림으로써 타인을 구원한다. 베트남 전에서 버바를 구하진 못했지만, 다른 전우들을 구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댄의 새로운 삶의 계기를 마련한 것도 궁극적으로 그의 달리기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가 약 3년 동안 미국 전역을 달리기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로부터 깨달음 혹은 희망을 얻게 된다.


그의 세 번째 달리기는 뚜렷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 번째 달리기는 오히려 포레스트라는 사람을 온전히 설명해준다. 사람들은 그에게 인권 신장을 위해 뛰느냐, 혹은 환경문제를 위해 뛰느냐며 묻지만, 사실 이 모습은 인간의 행위에 합리적 이유를 부여하려는 근대적 사고에 기반한다. 포레스트가 보여준 모습은 수수께끼다. 어떤 언어로도 규명될 수 없는 행위의 수수께끼. 그는 인간의 합리적 언어로 설명되기를 거부한다. 그는 모든 것을 규정하는, 인간의 언어로 지배하는, 즉 모든 것을 동일화하는 사회 속에서 비동일자로 남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비동일성은 합리적 사회에서 패배자로 남지 않으며, 오히려 그 사회의 모순을 드러낸다. 그것은 포레스트가 이 영화의 ‘가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라는 ‘가상’ 속에서의 ‘가상’이라는 말이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 영화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과 가상을 구분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역동하는 20세기의 미국 역사라는 ‘실재’와, 그 역사를 살지만 허구적이고 탈정치적 삶을 사는 포레스트라는 ‘가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옛날 tv화면에서 가상과 실재가 마주하기도 하지만, 그 장면은 오히려 가상과 실재의 구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관객은 가상과 실재가 구분되었음을 알기 때문에 그 장면을 향유할 수 있다.


가상은 실재 앞에서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못한다. 그 대신 실재를 편견 없이 보여주는 징검다리가 된다. 기쁘거나, 고통스럽거나, 있는 그대로를 비춰준다. 현실을 마주하는 포레스트는 그 어떤 실재적 프레임을 지니고 있지 않는다. 오히려 그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그 모순적 현실을 재현해낸다.

가상은 자연성을 추구한다. 그것이 지닌 '결함'은 실재 속에서 고쳐야 할 대상이 되어버리지만, 오히려 실재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 할 때, 가상은 자신의 다리를 가둔 실재의 보철물을 부수고 상식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힘을 얻게 된다.


그러나 가상 그 자체만으로 실재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건 아니다. 결국 가상에 동력을 부여하는 주체자가 존재한다. 부조리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포레스트를 형성한 건 어머니의 규율적, 제인의 탈규율적 목소리이다. 이들은 모두 근대의 합리성과 폭력성을 거부하는 탈근대적 주체성이다. 그리하여, 지친 제니를 구원하는 포레스트는 사실상 제니에 의해 구원받은 포레스트에 의한 구원,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구원인 셈이다. 탈근대적 주체와 가상은 상보적으로 관계 맺는다. 주체자에 의해 구축된 가상은 다시 주체자를 둘러싼 실재 세계로부터 주체자를 구원한다. 죽어가는 제니 앞에서 포레스트는 이런 대화를 나눈다.


있잖아, 포레스트. 베트남에서 무서웠어?


응..
글쎄, 잘 모르겠어.
가끔 비가 그치고 별들이 나올 때가 있었어.
그땐 정말 좋았어.
바이유에서 태양이 질 때랑 비슷했어.
물 위에 수백만 개 별들이 반짝이고,
산속의 호수가 너무도 깨끗해 두 개의 하늘을 포갠 것 같을 때도,
사막에서 태양이 솟아오를 때도, 어디가 하늘 끝이고 땅인지 알 수 없는 그 광경..
너무도 아름다웠어.


나도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걸.


함께 있었어.





우리는 깃털과 함께 우연의 여정 속에서 포레스트를 만났다. 거기에서 20세기 미국의 역사를 관통하는 그의 가상적 삶을 보았다. 이제 깃털은 그를 떠난다. 우연의 바람에 떠내려가는 깃털은 카메라로 돌진한다. 우연은 다시 또 다른 운명을 향해 날아갈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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