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이야기 비평
‘결혼 이야기’는, 결혼한 부부가 이혼 이후, 양육권을 놓고 갈등하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이다. 사실 노아 바움백은 이미 이혼이라는 주제를 자녀의 관점에서 본, ‘오징어와 고래’라는 영화를 만든 바 있다. ‘결혼 이야기’ 역시 이혼의 과정에 있어 헨리의 관점을 소홀히 하지 않지만, 주로 니콜과 찰리 둘의 관점에 더 집중한다. 중간에, 니콜과 찰리, 헨리가 함께 문을 닫는 시퀀스는 이 영화의 주제를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함께 문을 닫지만, 결국 문은 둘을 갈라놓는다.
영화는 서로의 장점을 공유하는 시간을 거부하는 니콜의 관점으로 시작한다. 처음 장점만 나열했을 때만 해도 행복해 보였던 공동체에서, 니콜은 자신이 지나치게 찰리에게 맞춰지고 있었고 자기 자신으로서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찰리에게 이혼 소송장을 건넨 이후로, 이제 영화는 찰리의 관점을 중점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서는 찰리가 소송 과정을 통해 느낄 서운함과,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변호사를 동반한 법적 공방을 보여주면서 갈등은 격화된다.
여기에서 이혼소송이라는 얼개가 흥미로운 이유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두 사람 간의 관계를 거칠게 축약해버린다는 데에 있다. 물론 법은 특정한 상황에서 어느 개인이 부당함을 겪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존재할 테며, 그럼에도 동시에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감정인과의 면담을 준비하면서 그들이 있는 그대로의 삶을 숨겨야만 하는 코미디는 이를 반영한다. 여기에서 니콜은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왔던 삶에서 자기 자신을 살려내기 위해 자신의 삶에 공감해주는 변호사를 선택하고, 찰리는 법에 가려진 인간적인 관계에 우선을 두는 변호사를 선택한다. 그러나 찰리는 뉴욕으로 돌아오지 않으려는 니콜에 대한 부당함과 헨리를 뉴욕으로 되돌리려는 조급함으로 졸렬하고 사회적 편견에 호소하는 변호사로 바꾸게 된다. 물론 어떤 변호사이냐를 떠나서, 법적 과정 자체는 냉정하고 때때로 정당하다기보다는 비겁하다. (물론 니콜의 변호사를 단순히 비겁함으로 퉁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녀의 비겁함은 언제나 반작용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찰리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리고 찰리가 편협한 변호사를 데려왔을 때. 엄밀히 말해 비겁해질 빌미를 제공한 건 찰리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영화는 초반에 찰리가 여러 가지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보여준다. 찰리의 입장에서 헨리를 데리고 la에 간 니콜, 그리고 거기에서 그녀가 건네는 이혼 서류는 당혹스러우며, 소송 과정에서 초반 우위를 점하는 전략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니콜이 la에 갔다가 돌아올 지에 대해서 서로가 제대로 합의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또한 놓쳐서는 안 되는 사실은, 그 전까지의 상황들이 찰리를 위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니콜은 찰리를 위해 그녀 자신의 커리어보다는 찰리의 커리어에 함께 하게 된다. 그것이 니콜의 선택이었다고 할 지라도, 그것만으로 모든 게 설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가고 싶었던 길은 찰리에게 존중받지 못하며 오히려 비웃음을 사게 된다.
영화 말미에 니콜과 찰리는 각자 노래를 부른다. 두 노래 모두, 동일한 뮤지컬(‘company’)에서 가져온 노래라고 한다. 니콜의 노래는, 찰리가 어떻게 그녀를 평평하게 만들고 화나게 만드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반면 찰리의 노래는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간, 그러나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니콜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노래의 성격은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에게 서운해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 서로에 대한 사랑을 보이고 있다. 영화 내내 보여주는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서로를 생각하며 신경 쓴다. 노래 말미에, 찰리는 그럼에도 혼자가 아닌 ‘같이’를 외친다. 찰리는 스스로에게 이상적이었던 기존의 형태가 해체됨을 인정하고, 이제 la로 떠난다. 헨리와의 관계를 위해서. (그런데 넷플릭스에서, 찰리의 노래에는 한국어 자막이 뜨지만, 니콜의 노래에는 자막이 뜨지 않는다. 비록 영화가 중, 후반부에 찰리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는 모양새를 보이더라도, 영화 감상에 있어서 니콜이 부르는 노래 가사를 없애버린 건 오역만큼이나 잘못되었고 편향적이다. 물론 영어 자막은 둘 다 나온다.)
영화 초반, 니콜, 찰리, 헨리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시퀀스에서 나오는 음악은 동시에 마지막 시퀀스에서도 흘러나온다. 이 노래가 나오는 순간만큼은 헨리의 순간으로 보인다. 셋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들의 이혼 여부일 것이다. 그리고 니콜의 이기심의 양상과 찰리의 이기심의 양상일 것이다.
La에서 찰리는 헨리와 시간을 보내려 하지만, 헨리의 입장에서 그는 일과 이혼 소송건으로 헨리에게 소홀히 하게 된다. 찰리는 노력했지만, 그 기회는 니콜에게 빼앗기게 된다. 애초에 헨리를 데리고 간 니콜은 여러 가지에 동시에 집중할 수 있다면, 찰리는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했다. 중요한 일, 공간적 제약에도 찰리는 포기할 것들을 포기한다. 그러나 법적 공방 이후 격하게 싸우는 장면에서, 찰리는 니콜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자신의 이기심을 드러낸다. 그리고 찰리는 뉴욕에 돌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헨리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니콜의 이기심이 희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온다면, 찰리의 이기심은 희생을 유발한다.
두 이기심의 차이는 니콜과 찰리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고, 서로를 어떻게 존중했는지를 반영한다. 배우와 감독이라는 관계는 니콜과 찰리 두 사람의 구도를 반영한다. 연극을 이끌어가는 찰리는 그 누구보다 확고하지만, 찰리의 호흡에 맞춰야 하는 니콜은 우유부단해진다. 니콜에게 찰리의 영역은 니콜을 성장케 할 수 있지만 오직 그 성장이 찰리의 그늘 안에서만 유효한 공간이며, 찰리에게 니콜의 영역은 열등한 공간이다. la와 뉴욕은 각자의 영역을 대변하며, la에 가서 활동을 함으로써, 니콜은 감독이 되어 확고한 자기 자신으로 성장한다. 니콜의 영역을 무시했던 찰리는 니콜의 공간에서 음식 메뉴 하나 확실하게 고르지 못한다.
또한 두 이기심의 차이는 각자가 헨리와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우선 둘은 소송 과정을 겪으며 헨리에게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헨리가 니콜과 찰리와 각각 할로윈을 즐겨야만 했을 때, 해당 시퀀스가 찰리의 서운함을 드러낸다고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헨리의 관점에서 둘 사이의 분리가 헨리를 지치게 한다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찰리는 헨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안타까운 모습들을 보여준다. 니콜은 서로가 헨리에게 소홀히 했음을 인정한다. 니콜은 헨리의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헨리는 뉴욕과 la 둘 다 살아보게 되었고, la를 선택했다. 그러나 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이 이기심이 헨리와 조응하지 못하며 코미디를 보여준다. 결국 그는 감정인이 방문한 집에서 자신의 칼에 베이고야 만다.
영화는 대체로 이혼 소송 과정에서의 갈등을 보여주지만, 결국 헨리와 관계 맺는 두 사람에서 시작해서, 다시 헨리와 관계 맺는 두 사람으로 끝난다. 이는 가족 내 갈등이 서로 간의 대화로도 해결될 수 있음에도 법이라는 거친 언어를 빌려야만 했던 상황을 야기한, 그 어떤 ‘이기심’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여기에서 ‘이기심’이란, 기존의 영역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기심과, 그 영역에서 희생된 자기 자신을 구하고자 하는 이기심으로 나뉠 것이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헨리를 조금이라도 자신의 영역에 두려고 하는, 동시에 그를 소홀히 대할 수밖에 없는 이기심 또한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나에게 따뜻하게 다가왔다. 가족이 해체됨에도, 각각의 관계들은 단절되지 않고 이어진다. 어쨌든 셋은 함께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혼한 후로도 니콜과 찰리는 함께 헨리를 껴안는다. 니콜의 대사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난 평생 그를 사랑할 거다. 이제 말이 안 되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