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쉘>, <여자라는 이름으로>, <더 헌트>, <쓰리 빌보드>
* 이 글은 2020년 7월 9일에 발생한 어느 사건과 영화 <밤쉘> 관람을 계기로 생각을 곱씹으며 정리한 글입니다.
'미투'는 2006년 아프리카계 미국인 타라나 버크가 고안한 용어라고 한다. 이 운동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릴 때, 연대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등장했다.
'나도 고발한다.', '당신의 고발에 공감하며, 당신과 함께 하겠다.'
이러한 말들을 두고, 혹자는 역차별 내지, 무죄추정의 원칙을 먼저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미투 운동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집중해보아야 한다. 미투는 특정 집단이 입지를 다지기 위한 정치적 전략이 아닌,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권력을 경유해서 나타나는 각종 폭력, 성폭력 사건들이 수면 위로 쉽게 올라오지 않는 현실 속에서 터져 나온 고발이자, 연대일 테니까 말이다.
#미투
밤쉘
<밤쉘>은 2018년 미국의 지상파 방송국인 FOX의 설립자인 로저 에일스의 성추문 사건을 다룬다. 영화는 실존인물인 앵커 그레천 칼슨과 메길 켈리, 그리고 가상 인물인 케일라 포스피실을 통해 사내의 분위기와 각종 사건들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실존 사건을 실존인물을 통해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중간중간에 인물들이 카메라를 보고 말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단순히 영화로만 머무는 게 아니라, 영화를 통해 우리들에게 메시지를 던지는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드러난다.
이 사건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맥락 또한 여실히 드러낸다. 남직원이 여직원을 보며 외모나 몸매를 평가한다던지 혹은 뉴스를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여성 앵커들의 몸매를 신경 쓴다던지 말이다. 또한 퀴어 직원이 자신과 자신의 동성 연인이 함께 찍은 사진을 책상 위에 당당하게 꺼내지 못하는 모습은, 사내 분위기가 얼마나 편견과 혐오로 가득한지를 보여준다.
케일라 포스피실이라는 가상 캐릭터는 여러 여성들이 회사에서 겪은 경험들을 엮어서 만든 캐릭터이다. 이로써 영화는 실제 사건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여성이 겪을 수 있는 모습들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이 캐릭터를 통해 영화는 부조리한 사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확고한 행동을 보여준다. 이는 사람들에게 해방감, 혹은 용기를 주는 의도일 테다.
다만 영화에서 아쉬운 부분들도 존재한다. 영화의 서사는 빠르게 흐르기 때문에, 몇몇 장면들은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실제 사건에 대한 배경을 모르고 본다면 쉽게 이해하지 못할 인물들도 있다.
또 카메라의 시선에 대한 아쉬움도 남는다. 케일라가 로저 에일스로부터 성추행을 당하는 장면인데, 카메라는 일종의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장면을 여실히, 그것도 가해자의 시선으로 재현한다. 해당 장면을 다른 방식으로도 조심스럽게 조명할 수 있음에도 굳이 해당 장면을 넣은 것은, 어떻게든 '얘가 이렇게 나쁜 놈이에요.'라는 걸 보여주기 위함일까? 하지만 관객이 누군가의 부도덕을 알기 위해 굳이 그의 시선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분명 다른 방법들은 존재한다.
여자라는 이름으로
<여자라는 이름으로>는 주인공이 요양원에 일하면서 겪는 성폭력을 고발하는 영화이다. 서사의 얼개가 <밤쉘>과 비슷하지만, 실존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성폭력 장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밤쉘>과 다르다.
이 영화는 그녀가 사내 부조리를 고발할 때 겪는 힘든 상황들을 보여준다. 가령 주인공인 니나는 직장 스케줄이 불리하게 조정되기도 하고, 심지어 직장에서 퇴출당한다. 그녀와 같은 다른 피해 직원들은 입을 다물며, 오히려 니나를 따돌린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보이는 이러한 상황들은 성폭력을 고발하고 고소하는 행위 자체가 당사자를 어떻게 소외시킬 수 있는지를 드러냄으로써 미투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위 영화들은 사건이 해결되었음에도 사회 자체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자라는 이름으로>는 마지막에 권력자가 유죄를 선고받음에도, 후배 여기자의 몸을 더듬는 선배 남기자를 보여줌으로써 여성을 향한 포르노적 시선과 성희롱, 성폭력은 쉽게 근절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희망과 현실을 동시에 드러냄으로써, 관객은 이 영화들을 통해 용기를 얻으면서도 여전히 부조리한 사회를 냉철히 바라봐야 함을 깨닫는다.
#위드유
더 헌트
이제 조금 다른 측면을 바라보도록 하자.
<더 헌트>는 억울하게 성폭력 혐의를 받은 유치원 교사가 겪는 일들을 다루는 영화이다.
주인공 루카스는 시골 마을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며 원만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던 중 친구 테오의 딸인 클라라는 루카스를 좋아하게 되지만, 그녀가 루카스에게 입술 뽀뽀를 하자, 루카스는 부모에게 할 수 있는 행동과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을 구별해준다. 이것에 서운함을 느낀 클라라는 그를 미워하기 시작한다. 우연히도 그녀의 오빠가 보여준 포르노 사진은 루카스에 대한 그녀의 미움과 결합되어, 루카스가 그녀를 성적으로 학대했음을 암시하는 듯한 말로 발화된다. 이것이 마을 전체로 퍼지게 되어 루카스는 누명을 쓰게 된다.
그렇다고 영화는 단순히 클라라를 악녀로 만들지는 않는다. 클라라는 오히려 자기가 잘못 말했음을 시인하고, 사태가 악화되는 모습들을 보며 몹시 혼란스러워한다. 사실 중요하게 봐야 하는 건, 루카스를 중심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시선과 태도이다. 그 사람들의 태도를 마냥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개인의 감정은 자유이며, 평가되고 누군가가 수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영화가 여러 맥락들을 보여주지 않고 단순히 클라라의 발언만을 보여주었다면, 우리 또한 루카스를 나쁜 사람으로 보았을 것이다. 문제는 루카스를 향해 드러나는 제삼자의 폭력적 행동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제삼자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이제 미투 운동과 함께 하는 위드유 운동을 생각해보자.
위드유 운동은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피해자가 불이익을 겪지 않고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함께 하겠다고 연대하는 운동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우리가 기계적으로 피해자의 편에 서서 가해자를 심판하는 게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인식하고 피해자가 온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공정한 과정을 거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영화가 혼란스러워하는 클라라를 보여주는 건, 그녀가 저지른 행동의 응보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피해자를 위한다고 생각했던 대중의 행동이 피해자에게 되돌아옴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피해자를 위한다면, 섣불리 누군가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피해자와 함께 해주고, 맥락을 고려하며 피해자의 말에 귀 기울이며, 사건 경과를 지속적으로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다시 되돌리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거기까지이다.
#시스템
쓰리 빌보드
<쓰리 빌보드>는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수사가 진전되지 않는 성폭력 살해 사건을 두고, 피해자의 어머니가 도로가에 있는 광고판에다가 경찰서장을 향한 문구를 남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 영화는 용기 있게 부조리를 고발한다는 측면에서 위 영화들과 같은 선상에 있지만, 지목 대상 다르다. 이전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고발이 가해 당사자를 지목한다면, 이 영화는 시스템을 지목한다.
그러나 영화는 또 하나의 장치를 놓는다. 시스템의 수장인 윌러비 서장이 췌장암 말기로 죽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 바로 이 지점에서 여론은 윌러비 서장을 옹호하게 된다.
(아래 내용에는 <쓰리 빌보드> 초반 부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윌러비 서장은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이 죽음을 섣불리 말할 수 없다. 그저 그가 암투병을 하며 겪었을 괴로움을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가 남긴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죽음으로 인해 피해자의 어머니인 밀드레드를 향한 여론이 어떻게 될지를 그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다. 그도 하나의 인간이지만, 동시에 그는 미주리 주 에빙 도시의 치안을 책임지는 경찰서장이다. 즉 윌러비는 경찰서장이라는 책임과, 암투병을 하는 어느 가장이라는 책임을 지고 있다. 그의 선택이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짚어야 하는 사실이 있다면, 그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서장으로서의 책임을 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다은 평론가의 글을 빌리자면) 그는 편지의 목소리로 남아, '선의와 정의와 사랑으로 가득 찬 존재'로 승천한다. 영화의 전개는 그 목소리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물론 영화에서 윌러비 서장은 괜찮은 사람이다. 타인의 좋은 점을 끊임없이 봐주고, (편지를 통해서 알 수 있지만) 그는 어쨌든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온 사람이다. 심지어 광고판 임대료를 익명으로 대주기도 하며, 그의 죽음이 광고판과는 관련이 없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슬플지라도 잊혀져서는 안 되는 것이 밀드레드의 고발이다. 그녀의 광고판은 해결되지 않은 사건, 그리고 잡히지 않은 범인이 행할 수 있는 다른 가능한 범죄를 막기 위해서라도 직시해야만 하는 끔찍한 과거다. 그것이 잔인할지라도 유지되어야만 하는 것은, 부조리가 인간적인 애도로만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경찰을 윤리적으로 결함이 있는 조직으로 묘사한다. 호모포비아를 가지고 유색인종을 폭행한 혐의가 있는 경찰관이라던지, 아내를 폭행했던 전 경찰관이라던지 말이다. 물론 착한 경찰관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경찰이라는 기관이 윤리적으로 결함이 있는 경찰관들을 포함하고 있다면, 그 착한 경찰관 조차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더더욱 서장이라는 책임자라면 그에게 끊임없이 요청해야 하고 요구해야 한다. 법을 위반하는 사람을 연행하고 수사하는 경찰서에서 부도덕한 경찰관이 왜 경찰서에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런 맥락 때문에서라도 윌러비는 광고판 한 달 사용료를 지불했을 테다. 밀드레드는 그가 죽은 뒤에도 광고판에 윌러비라는 이름을 바꾸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전히 윌러비는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다르게 집중하고 싶은 부분은 대중의 분노다. 광고판을 내건 이후로, 치과의사는 밀드레드에게 의료사고가 우려될 만큼 성의 없게 치료를 해주려 하고, 윌러비의 죽음 이후 언론은 그의 죽음의 원인으로 밀드레드의 광고판을 의심한다. 밀드레드의 차에 계란이 던져지기도 하며, 어떤 이는 그녀가 일하는 공간에서 그녀를 위협하기도 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녀의 무리한 요구가 성실한 경찰서장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서사를 반영한다.
그러나 대중은 그녀의 편에 서서 부조리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을 방법을 찾거나, 혹은 부조리가 벌어진 사회의 시스템을 진단하는 담론에 관심 갖지 않는다. 오히려 '무리한' 요구를 하는 그녀를 질책한다. 우리가 영화의 메인 서사 못지않게 집중해서 보아야 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글은 부조리를 고발하는 사건 속에서 제삼자인 사람들을 향한 글이기도 하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리고 당사자가 고발을 하고 끊임없이 해결방안을 요구할 때, 많은 사람들은 불편하다던지 지겹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리고 그 고발자를 질책하기까지 한다. (이때 당사자를 둘러싼 음모론이 쉽게 만들어진다.) 도덕적 판단과 누군가를 평가하는 일은 너무나도 쉽다. 그 행위는 우리를 마치 해당 사건으로부터 분리된 판단, 평가의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한 사회를 살아가며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공동체 구성원이다. 사건이 벌어진 사회적 맥락과 시스템을 구성하는 구성원이라는 것이다. 물론 '너가 이 시스템의 구성원이니까 너가 잘못했고 너에게 책임이 있어.'라고 책망하려는 게 아니다. 최소한 책임감을 갖고 각자의 위치에서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쓰리 빌보드>에서 누군가가 밀드레드에게 계란을 던질 때, 누군가는 옆에서 그것이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말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밀드레드에게 계란을 던진 사람을 대신해서 사과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피해자를 질책하는 분위기를 내버려 두지 않고 피해자 편에 서는 것이 위드유 운동의 본질이 아니던가?
물론 이는 단순히 '피해자 편에 서서 가해자를 비난해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지만 대중은 누군가를 심판하는 집단이 아니다. 사회적 시스템이 존재하는 한, 각자의 위치에서 사건이 공정한 절차로 해결되도록 지켜보고 참여해야 하는 사람이다. 시스템을 감시하고, 필요하다면 시스템의 변화를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실하고 좋은 사회를 위해 노력해온 책임자의 죽음은 몹시 당황스럽고 슬플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별적인 슬픔과 별개로, 우리는 그 사람의 사회적 책임(혹은 당사자로서의 책임)을 인지해야 하고 <쓰리 빌보드>의 광고판처럼 아직 해결되지 않은 부조리를 기억해야 한다. 애도는 죄가 없다. 그러나 책임자를 둘러싼 어떤 사건이 종결되지 않았다면, 그를 어떤 도덕적 위인으로 승천시키지 말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일은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피해자의 고발이 죽음이라는 사건에 의해 중단되지 않도록 피해자의 편에 함께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