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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 Aug 07. 2020

연상호의 ‘아버지’

<반도> 비평

* 영화 <반도>와 <부산행>, <서울역>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반도>에서 가장을 그리는 방식은 이전 영화들과 사뭇 다르다. 영화는 가부장을 전면에 드러낸다기보다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 사과하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조력, 헌신으로 분투하는 가모장을 전면에 내세운다.


사실 연상호의 <반도>는 흥미로운 부분들보다는 아쉬운 부분들이 많은 영화다. 가령 <반도>에서의 좀비가 밤에는 주변을 보지 못하고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설정은, 후반 헬리콥터 씬에서 무너져버린다. 자동차 경적 정도는 가뿐하게 압도해버릴 헬리콥터 소음은 그 어떤 좀비도 유혹하지 못하니까 말이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세계와 캐릭터들은 꽤 흥미롭게 다뤄지지만, 캐릭터가 상황에 따라 감정이 변화하고 행동에 나서는 과정은 너무 빠르게 전개된다. 가령 서 대위가 배신감을 느끼고 차량을 뒤로 빼는 장면은, 우리에게 그가 느낄 배신감의 충격의 여운을 느낄 충분한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솔직히 나를 구해낼 사람한테 갑작스럽게 총격을 당하면, 그 상황을 판단하고 다음 행동을 생각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리고 신파가 억지스럽지 않으려면 최소한 해당 캐릭터에 관객이 이입할 수 있는 시간들을 마련해야 하는데, 영화는 각각의 캐릭터에 이입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다. 더 황당한 것은, 영화는 자신 있다는 듯이 맨 처음부터 신파를 넣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파는 관객을 울리려는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든 캐릭터의 배경과 감정을 짧은 시간 안에 관객에게 욱여넣으려고 하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부산행>의 오락성은 모험이 좌절되는 순간들 때문에 인상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강렬한 서스펜스나 화려한 눈요기보다도, 힘겹게 역경을 뚫고 도달한 세이브포인트에서 목도하는 절망적 풍경이 <부산행>을 더 돋보이게 만든 것이다. <반도>에는 그런 리듬이 없다. 이전 영화에서 우리가 좌절을 통해 디스토피아보다 더 디스토피아스러운 인간군상의 모습들을 고민했다면, <반도>에서 좌절되는 순간들은 너무 가볍고 쉽게 휘발된다. 그나마 보이는 631부대의 모습은 좌절의 포인트를 준다기보다는, 좀비처럼 일종의 환경으로 보일 뿐이다. 그리고 그 집단이 윤리적 고민을 던진다기보다는, '광기'이라는 키워드로 묶을 수 있는 단순한 악당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여러 가지 단점들을 뒤로 제쳐두고, 이제 <반도>에서 연상호가 그리는 세계와 캐릭터를 살펴보도록 하자.

영화의 세계는 명백히 돈으로 움직인다. 홍콩 마피아로부터 한반도에 있는 돈 트럭을 가져오라는 제안은, 한반도 주변을 경계하는 경찰을 무력케 하며 가까스로 빠져나온 주인공을 다시 반도 안으로 집어넣게 만든다. 그러나 반도의 서 대위, 민정 일행들에게 돈은 돈 그 자체가 아니라, 반도를 벗어날 수 있는 티켓이다. 영화의 메인 서사는  이윤을 위한 모험과, 탈출을 위한 모험이라는 두 가지 커다란 줄기들로 맞물리며 진행된다.


좀비가 그려지는 방식은 부산행과는 다르다. 부산행에서의 좀비가 불가항력적인 재앙으로서 공포감과 동시에 기이한 감정들을 야기했다면, 반도에서의 좀비들은 주변으로 밀려난다. 봉준호의 괴물처럼, 부산행에서의 좀비는 어느 아버지의 책임으로 파생된 결과물이자 일종의 사회적 현상으로 읽힐 수 있다. 반도에서의 좀비는 그보다는, 이미 황폐해져 버린 환경이 되어버린다. 인간은 거기에서 생존법을 찾고, 나아가 좀비들을 이용해 유희까지 즐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반도의 좀비는 확실히 장르적 쾌감을 위한 소품으로 소비된다. 영화는 좀비보다도, 좀비로 인해 바뀌어진 인간 사회의 모습에 더 집중하는 것이다.



정석은 육군 대위로서 이 영화의 상징적 아버지로 볼 수 있다. 그는 연대보다도 자기 가족의 안위를 우선시한다. 그러나 배에서 그의 누나가 감염된 아들을 떠나지 않을 때, 결국 그는 문을 닫고 생존을 선택한다. 이에 철민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그를 다그치고, 이는 마지막에 민정을 구하는 계기가 된다. (물론 초반 상황 자체가 그가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을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신파에 집중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누나를 내버려 두고 문을 닫는 장면은 촉발점에 머문다. 영화에서 정석을 괴롭히는 것은 그가 정민의 가족을 지나치는 장면이다. 영화 중간에 그의 꿈을 통해 플래시백으로 보이는 장면도 배에서의 장면이 아니라 정민을 지나치는 장면이다. 따라서 정석의 각성은 정민에게 느끼는 죄책감이 철민의 한마디와 결합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 정석은 오직 자기 주변 사람만 챙기는 사람에서, 남남일지라도 주변 못지않게 신경 쓰는 사람으로 변화한다.



김 노인은 기성세대로서 젊은 세대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외부와의 연락을 시도한다. 그는 이 세계 자체의 부조리함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며, (상징적인 의미에서) 자기 자식들은 이러한 세상에서 살지 않기를 바란다. 그가 유진을 보호하며 죽는 장면은, 새로운 세대를 보호하는 기성세대의 희생에 가까울 것이다. 이로써 반도의 아버지는 반성과 희생, 각성으로, 새로운 세대를 위한 조력자로 움직인다.



아버지의 반성, 각성은 <반도>에서만 보인 것은 아니다. <부산행>에서도 주인공은 좀비 사태를 초래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딸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하지만, 서사가 진행되면서 희생과 헌신으로 자식(그리고 임산부)을 구해낸다.

연상호의 이전 작품들을 돌아보면, 아버지 캐릭터들이 어떻게 그려지는 지를 엿볼 수 있다. <돼지들의 왕>, <창>에 나오는 폭력적 위계로부터 어떤 남자는 트라우마를 얻는다. 그 아버지는 <사이비>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부조리의 진실을 고발하지만 사실은 본인 또한 부조리의 당사자이다. 그리고 이런 아버지의 가해자성은 <부산행>과 <서울역>으로 나뉘게 되는데, <서울역>에서는 자식에게 안식처가 되어줄 수 없는 채권자, 포주, 혹은 부재가 되어버린다면, <부산행>에서는 자신의 사회적 책임감을 깨닫고 반성과 희생으로 사람들을 구해낸다. 그리고 <반도>의 아버지는 <부산행>의 아버지에서 나아가 가부장 질서에서 벗어난 새로운 가족을 구성한다. 아니, 정확히는 그 구성에 동참한다.




여기에서 민정은 대안적 공동체를 대표하는 새로운 가장으로서 마지막 신파의 엄숙한 주인공이 되는 듯하다. 그러나 가모장으로서의 민정이 입체적으로 그려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연상호의 아버지는 그의 전작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영화의 주제를 관통하는 중요한 위치에 놓인다. 가령 <사이비>에서 아버지는 그릇된 믿음의 실체를 알고 있어도, 그가 도덕적으로 자녀의 삶을 가로막고 차단하기 때문에 옹호받기 힘들다. 또 다른 주인공인 목사조차 표면적으로는 착한 사람으로 그려지지만, 비윤리적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부산행>에서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다니는 직장이 좀비를 만들어낸 계기가 됨으로써 아버지는 윤리적 혼란을 겪게 된다. 이렇듯, 그의 작품에서 아버지라는 캐릭터는 영화의 세계관과 긴밀히 연결되어있으며, 윤리적으로 명확하게 옹호되거나 비난될 수 없는 입체적인 면모들을 지녔다. 반면, 어머니는 이미 죽었거나, 일방적인 피해자로만 보여주거나, 혹은 임신과 같은 특수한 경우로 인해 사실상 부재하는 캐릭터가 된다.

그렇다면 <반도>에서 민정은 가부장의 위치를 대체하는 것일까? 변질된 군인 집단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모습, 그리고 헌신적으로 자신의 가족을 챙기는 부양자로서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영화에서 민정을 통해 함께 고민해 볼만한 지점은 보이지 않는다. 연상호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엔, 캐릭터가 평면적으로 느껴졌다.



오히려 영화가 인상 깊게 그려내는 것은, 어머니로서의 민정보다도, 청소년이라는 준과 유진 캐릭터다. (호불호가 갈리더라도) 그들은 능동적으로 영화의 모험을 주도하는 주인공이며, 위기에 처한 정석을 구출하고 ‘많이 무서웠죠?’라고 그를 걱정해주는 여유를 가졌다. 어떻게 보면 그 누구보다도 반도의 세계를 적응해낸 인물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보호받고자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이들을 지키고자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들은 능동적으로 부조리한 세계에 적응한 새로운 세대를 암시하는 것만 같다. 그렇다고 그들이 기계적으로 세계에 적응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세계를 지탱하는 공동체가 있다면 부조리한 상황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초반 부분에서, 준은 유진의 보호자로서의 모습을 보이지만, 그럼에도 유진은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위기를 돌파해낸다. 변질된 군인 집단이 철저히 원초적 본능과 위계에 의해 유지된다면, 유진과 진은 연대와 수평적 협력을 통해서 공동체를 지탱해낸다.

준은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유엔군 제인의 말에 반박한다. 반도도 괜찮은 곳이라며. 그것은 반도 자체를 긍정한다기보다는, 서로를 지지해줄 수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자신들이 서 있는 공간의 속성보다 더 중요함을 역설한다. 사회가 부조리하더라도 더 나은 공동체를 구성한다면 극복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다.



그전까지의 연상호 작품에서 보이는 딸은 윤리적으로 뒤틀린 아버지의 일방적 희생자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부산행>의 아버지의 반성과 헌신으로 (혹은 <서울역>에서 비체가 되어 직접 아버지를 잡아먹으면서) '아버지'라는 부조리로부터 벗어나며, 이제는 아버지를 구해내고 새로운 상상력을 제시하게 된다. 사실 연상호의 세계에서 어머니는 중심 소재가 아니다. 그의 세계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아버지와 딸이었다. <반도>에서의 어머니는, 전통적 가족상에서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벗어나 (초반에 민정의 남편이 죽은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새로운 가모장으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지만, 입체적으로 다뤄지지는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민정이라는 캐릭터는 변화하는 시대를 반영해 넣은 것 그 이상도 아닌 것이다.

(물론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어머니 캐릭터는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평면적인 캐릭터는 기계적인 변화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정석이라는 캐릭터도 매력적이지 않은 게, 그가 가진 윤리적 고민은 이미 <부산행>에서 다뤄지지 않았던가?)




새로운 시도들을 하는 것은 좋지만, 그 시도가 이전작들에서 보여준 것만큼 입체적이었으면 좋겠다.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더 지독한 현실을 목도하고, 윤리적으로 고민해 볼 수 있는 순간들을 보고 싶다. 이번 영화에서는 어머니도, 심지어 아버지도 흥미롭지 않았다. 차라리 광기 어린 집단의 책임자이면서도, 잔혹하고 위협적인 하급자를 견제하며, 보통의 삶을 바라는 염세주의자인 서 대위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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