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인을 따라 제주도를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정해야했지만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었다.
한동안 만나기 힘들었던 진해를 만났다. 퇴사와 입사를 반복하며 반 년이상 일을 하지 못하고 있던 진해는 일을 하고 싶은데 구직이 어렵다며 고민을 말해왔다. 너희 회사는 규모도 큰데, 정규직인 아니어도 일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없냐며 묻기 시작했다. 때마침 회사 내 디자인팀에서 사무보조 업무를 할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었다. 하루 6시간 근무이지만, 업무 시간이 변경될 여지가 있고 정해진 일이 아닌 서무에 가까운 일이라 구인공고를 올리기가 망설여진다는 디자인팀 팀장의 걱정을 들었던지라 일할 사람을 소개해주면 고맙겠다고 점심 식사 자리에서 말을 들었던게 떠올랐다. 나는 진해에게 이러한 자리가 있다고 운을 띄웠다.
“사무보조라 일이 어렵진 않을거야. 내가 도와줄 수 있는건 이거인데, 원하니?”
“어우야, 나는 너무 좋지!”
사내 메신저로 디자인 팀장에게 쪽지를 남겼고, 이후 절차에 맞춰 진해는 입사를 했다. 디자인 팀장, 나, 진해는 동갑내기였고 진해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해내고 있다며 연신 만족해했다.
진해가 우리 회사에 입사 후 3개월이 지난 날이어다. 진해는 어느정도 회사 생활에 적응을 한듯, 팀장과 함께 셋이서 가볍게 술자리를 하면 어떻냐며 제안했다. 선임이지만 동갑이기도 한 팀장과 적절한 선은 지켜갔기 때문에 괜찮은 자리일거 같았다. 팀장도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술자리를 함께한 우리는 일 이야기, 회사 분위기 이야기, 각 부서의 이야기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술이 취하지 않았을 때라 서로 선을 지켜가며 꽤나 재밌게 놀고 있었다. 한 두잔의 술이 목으로 넘어가고, 세 네시간이 지나가면서 취기가 올라왔고, 우리는 조금씩 각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피웠다,
이 셋이 나눌 수 있는 사적인 대화에서 가장 만만한 대상은 나였을 것이다. 팀장과 진해를 일로 만나게 한건 나이므로, 나의 이야기를 하는게 서로가 아는 가장 사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의 사적인 말들은 점차 태인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최근 태인은 하는 일의 성과가 좋아졌고 사내에서 매우 빠른 승진을 이뤄냈다. 그리고 점차 자기 사업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태인은 나에게 제주도로 이사를 가자고 제안했다. 서울에서 해낸 모든 성취를 잊고, 자신을 믿고 따라와달라는 말을 했다. 제주도에서 건축 사업을 시작할 것이며, 자리가 잡히고 난 뒤엔 우리의 집을 짓고 늙어 가자고 했다. 웨딩드레스나 프로포즈가 중요한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결정하는 일이라면서…. 나는 태인을 따라 제주도를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정해야했지만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었다.
“야 이루나야. 태인씨 너에게 잘하잖아. 너네 만난지 오래 됐잖아. 근데 왜 태인씨가 너한테 결혼하자고 안해? 걔가 널 사랑한다면 진즉 결혼했어야 하는거 아니냐? 아니지, 널 사랑하지 않는가보네.”
진해는 취했다. 하지만 진해가 하는 말은 취기를 빌려 할 뿐, 진심이었다. 나의 마음이 어떤지보다, 나의 결론에 항상 궁금한 시선이 가있던 진해. 한동제를 만났을 때도, 진해는 늘 똑같은 질문을 했다. 사랑하면 헤어졌어도 연락을 하게 된다는 것과 오래 만났으면 결혼을 해야한다는 답을 내린,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해는 사랑한다며 만난 남자와 결혼을 할 수 없었다.
“여러모로 이유가 있는거지. 결혼 얘기는 하고 있는데, 그냥 내가 좀 더 놀고 싶은거 같아.”
진해를 공격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결혼을 묻지말고, 너가 먼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하는게 어떻겠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진해를 짓밟는 질문이 될 것이다. 나는 진해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었다.
“에이, 그런게 어딨냐. 너 요가 배운거, 그 전에 공부한거, 그리고 지금 이무진 작가랑 협업하는거 다 잘되가냐?”
진해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저런 질문을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신기할 정도로 퍼붓기 시작했다. 취한 사람의 주정이라, 마음에 담고 있지 않으려고 애썼다. 점점 분위기는 재미없어지기 시작했다. 빨리 이 자리를 정리하고 싶은데, 진해는 자꾸만 어딜 가냐며 나와 디자인 팀장의 팔을 잡아 끌었다.
“진해 씨. 오늘 기분 좋으신가보네요. 목소리가 이렇게 큰 줄 몰랐어요.”
“네, 팀장님. 헤헤. 제 친구가 요즘 저랑 술을 안먹어줘서, 오랜만에 이런 술자리라 재밌네요.”
“하하. 우리 루나 씨가 일을 하느라 바빴나보네요. 그래도 루나 씨가 능력이 좋아서, 회사에서는 루나 씨를 좋아해요. 루나 씨 덕분에 진해 씨가 저와 함께 일하고. 여러모로 루나 씨께 고맙네요, 진해씨. 그쵸?”
“네? 제가 왜 루나에게 고마워해야 해요?”
“아. 그야 물론, 일을 소개시켜주셨으니 고마운거죠.”
“어.. 제가 일을 잘 할 것 같고, 그리고 지금 잘하고 있으니 제 능력이 아닌가요?”
진해의 말에 디자인 팀장의 표정은 굳어갔다. 못볼 것을 보았고, 듣기 싫은 말을 들은 얼굴이었다. 팀장은 대답을 잇지 못한 채 진해와 나를 번갈아봤다.
“그럼, 입사 후 루나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거네요?”
“아니, 무, 물론. 소개를 시켜준 건 고마운 일인데…. 아직 저는 정규직도 아니고, 앞으로 어떻게 될 지 확실성이 없으니 인사를 늦춘거죠. 안하려고 한건 아니에요.”
진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려고 한 적은 없다. 하지만, 고마워해야 하는 줄도 몰랐다는 말은 꽤나 기분이 나빴다. 디자인 팀장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걸 느껴서인지, 진해는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고마워해야 하는 이유를 전혀 모른다는 앞의 말과는 다른, 말을 덧붙일수록 말 같지 않은 핑계를 늘어뜨렸다.
진해는 나에게 고마워하지 않았다. 항상, 친구니까 모든걸 이해해주고 들어줄 수 있다는 마음을 내세웠으니까. 그리고 이 순간에도, 미안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자신의 앞날이 잘못될까봐 걱정되어 눈치껏 수를 쓰고 있을 뿐이다.
“아 우리 오늘 너무 많이 마셨어요! 저는 술을 더 많이 먹으면 잠을 못자서. 그만 집으로 갈까요?”
디자인 팀장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진해는 기분 좋게 놀고 싶었을테지만, 결국 그녀의 혀가 모든 이의 기분을 엉망으로 망가뜨렸다. 진해를 떠난 모든 이들이 왜, 진해를 욕하고 다니는지, 진해 이야기를 일부로라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지 오늘로서야 완전히 이해했다. 사람들은 진해의 입을 싫어했고, 진해는 타인들이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장면을 싫어했다. 대학 동기 어느 누구든 진해는 만나고 싶지 않게 된 사건을 말했을 때, 그게 나의 일이 될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진해는 항상 자신이 뱉은 말이 만들어낸 굴레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 진해를 불쌍하다고 여긴 내가 싫어졌다. 내가 진해에게 잘못한 일이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진해는 항상 나의 이야기를 도마에 올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진해를 뒤로하고 술집 거리를 걸어 나왔다. 나를 부르는 진해의 목소리가 울려퍼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진해는 오래전부터 지옥속에 살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도 지옥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진해에게 일자리를 건넨 것이 사다리라면, 사다리를 건너와 사는 곳이 천국은 아닐지라도 그전과 같은 지옥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진해는 그곳 마저 지옥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렸다. 사다리를 건네어도 고마움보다는 당연함을 내세웠다. 금지된 사랑을 기어이 하는 것도 본인이었고 동기들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도 그녀의 혀로 인한 것이고, 오늘 이 술자리의 분위기를 싸하게 만든 것도 본인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불타는 용광로에 제발로 뛰어든, 타들어가는 고통에 몸부림을 쳐도 나오지 않는 것은 다 그녀의 선택이다. 지옥속에 사는 인간을 구제할 노릇은 나의 할 일이 아닐 것이다. 아무도 진해의 소식과 안부를 궁금해 하지 않는 것처럼, 나 또한 진해가 가진 지옥의 냄새를 더이상 맡지 않기로했다.
“흠. 하.”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러운 머리속에, 두 가지 버거움이 빙글빙글 돌아다닌다. 요즘 이무진 작가는 묵언을 할 때가 많다. 회사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성장가도를 달리는 열혈넘치는 회사는 맞으나, 직원들의 퇴사가 이어졌다. 벌리는 일은 엄청나게 많으니, 소문난 잔치는 이무진의 회사이다. 하지만, 회사 통장에는 잔고가 넉넉하지 못했다. 나는 이무진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더 열심히 할거라는, 증표처럼 내민 계획서는 잉크가 채마르지 않은채로 선명했지만 어쩐지 그는 힘들어보였다. 짧은 시간이지만 꾸준히 사무실에 얼굴을 드리우는 나에게 일이 몰리기 시작했다. 이무진이 내게 본 표식은, 성장과 목표에 배가 고픈 사자였을 것이다. 그 목표가 채워질 수 있다는 먹이를 건내면, 의심을 하다가도 먹게 되는 사자를, 이무진은 보았을 것이다.
회사에 사표를 내지 않았던 나를, 칭찬하기에는 너무 안타까운 결말이 오고 있었다. 이무진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이무진이 나를 이용하고 있는건 분명했다. 그리고 다음, 태인의 제안이 떠올랐다. 나는, 모든걸 내치고 태인을 따라가서 태인만을 바라보며 태인을 보조하여 태인의 성공을 도와가며 살아도 충분히 편안할 것 같다. 하지만, 태인은 항상 가능성에 머물러살고 있다. 나는 태인의 가능성을 응원했고, 그 안에서 나도 살아왔다. 그러나, 제주도로 따라간 그곳에서 마저 또 다른 가능성에서만 살게 된다면, 나는 더이상 태인을 믿을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다시금 마음이 아팠다. 지금껏, 등 떠밀듯 내려온 결정이 다다른 이곳이, 나를 너무 아프게했다. 찾아 보고 싶었던 나의 완성, 떠나 보고 싶었던 과거, 믿어 보고 싶었던 나의 힘. 나의 굴레는 나에게 무슨 깨달음을 찾으라며 이렇게 무겁게 오는 걸까. 정말, 나는 나로서의 변신. 오로지 찾고자 하는 어떠한 모습을 영영 찾아 볼 수 없는 것일까. 나의 계획이 신의 뜻이라면 이제 그만 이런 겨울 같은 시간이 사라지고 봄을 맞이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왜 나는, 오랜 겨울 바다에서 나가지 못하고 있는 걸까.
삶을 너무나 사랑하여, 나를 너무나 사랑하여, 미움 마저 이렇게 깊은거라면.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거지. 지겨운 이루나의 쓰임들. 이 지겨운 쓰임의 세계로 나를 던진건, 오로지 나였다. 이루나의 쓰임을 확장시키고자 했던건, 정말 다름 아닌 나였다. 그러니 모든 세계가 나를 쓰고자하는 장면으로 채워진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만 놓는 세계로 가야 할 것 같다. 모든걸 다 버리더라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던 어린 아이가 되어 돌아가야 할 것 같다.
태인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와 달라고 말을 했다. 태인을 만나, 얼굴을 맞대었다. 태인은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 이렇게 나를 찾을 줄도 아냐며 내심 좋아했다. 태인은 너무나 순수한 사람이다.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자기가 보내는 사랑만큼,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기대어 갈 줄 알길 바라는 사람이다. 그런 태인에게 당신을 따라 이곳을 떠나가기 싫다고 말해보았자, 안된다며 자신을 따라오라 말하는 사람이다. 나의 슬픈 얼굴을 바라보며, 태인은 다시금 내게 말했다.
“루나야, 지금 그냥 말할게. 나 진짜, 다다음달에 퇴사할거야. 제주도에서 사업할거야. 날 따라 제주도로 와줘. 사실 지금 난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번만큼은....”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태인의 집으로 함께 따라왔다. 그 날 밤 나는, 씻지도 않은 몸을 바닥에 눕혀 떨리는 어깨를 손으로 감싸 울었다. 울음의 이유는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불확실한 미래가 나를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만큼, 분명하게 느껴졌다.
창 밖 넘어엔 빗물이 폭우로 쏟아졌다. 나의 울음은 오로지 나와 태인에게만 들렸다. 나는 그간 찾지도 않았던 신을 불렀다. 제발 나를 용서해달라고, 잘못한게 있다면 내가 무지했다는 것 뿐이니, 그게 이 아픔의 원흉이라면 알게해달라고 빌었다.
‘모든게 힘들어요. 내가 진 짐이지만, 다른 사람의 짐도 있어요. 너무 무거워졌어요. 쉬고 싶어요. 알고 싶었던게, 잘 하고 싶었던 마음으로, 많은 걸 시도했던 나의 인생이 이렇게 아파할 정도로 나쁜건 아니잖아요.’ 라며 어리광을 부렸다.
괴물처럼 소리치며 우는 나를, 태인은 바라보다가 그만 하라고 말했다. 점차 화가 얼굴에 돋구워진 태인은 나를 향해 말했다
"너는 나를 못믿는거야. 너를 그렇게 사랑해도, 너는 나를 믿지 못하는 거라고..."
"너를 믿으니까, 네가 모든걸 처음 시작했을 때도 널 응원했던거고 네가 힘들다고 울어도 묵묵히 들어줬던거고, 네가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성심껏 너를 도왔던거야. 근데, 나는 언제까지 너의 희망만을 믿고 살아야하는거야?"
밤새도록, 태인과 나의 소리가 이어졌다. 우리는 달라지지 않는 결론을 두고 달라지지 않는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아무것도 결정짓지 못한채로, 아침이 밝아지며, 비는 잦아들었다.
나와 태인은 언제 잠든지 모르른 상태로 누워있었다.
나와 태인은 더이상 서로를 설득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는, 잘 해낼 수 있다는 눈빛을 보냈다.
“사랑이 많은 우리 이루나, 앞으로도 루나는 많이 사랑받고 살거야. 그거면 돼.”
태인이 마른입을 떼어내며, 나에게 건넨 한 마디였다. 낮이지만, 어두웠다. 해가 뜨지 않은 긴 우기를 태인과 나는 건너고 있었다. 찬란했기도, 씁쓸했기도 했던 눈빛을 서로에게 담아내고 있었다. 비가 다 내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듯 구름이 걷힐테고. 비구름이 자리를 비킨 하늘엔, 언제나 떠있는 태양이 세상을 밝힐 것이다. 그게, 태인의 세상이 되든 나의 세상이 되든…….
태인은 일주일 뒤, 제주도로 가는 비행티켓을 보내왔다. 돌아올 예정 없이 편도로 찍힌 일정만을 던져두었다. 어느곳으로 오라는 주소도 없고, 단지 비행만 할 수 있는 여정을. 그가 먼저 제주도로 떠났는지 여전히 서울에 있는지, 정말 자신의 일생을 바치기 위한 일을 시작한 것인지, 청사진에 머물러만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아직 그는 할 일이 많다는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나는 집을 청소하고, 쓰레기를 버렸다. 이후 노트북을 켜서 이메일과 쌓인 자료를 정리했다. 이메일을 정리하던 중 유작가가 보낸 오래된 메일을 읽었다. 유 작가가 갑자기 미팅을 제안했던, 그 당일에 보낸 메일이었다. 그 날 미처 다 읽지 못한 시가 떠올랐다. 그 시를 읽으러 카페에 가고 싶어졌다.
카페에 도착하니, 정원 안에 못보던 물레방아가 만들어져있었다. 물이 떨어지며 작은 윤슬이 비춰지는 모습을 구경했다. 아름다웠다. 그때와 같이, 뜨거운 둥글레차를 주문하고 차가 나오기 전에 탁자 아래 유리에 끼워진 시를 읽었다.
<타락으로부터>
세치혀, 피해의식, 속임수, 배신은
눈을 통해 나오는 어두운 기운이며
칼 끝과 같은 살기 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모르는 너는,
네 눈만 가리면 된다고 말하는 너는,
곧 있을 심판을 달게 받아야 한다.
너는 너의 신을 망가뜨렸으므로
네가 사랑하는 것들의 붕괴를 지켜볼 것이다.
왜 너에게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이냐며
네 탄생을 탓하고, 죽음을 울부 짖게 될 것이다.
영원히 남을 질투하고, 남을 해하라.
원망이 너를 파멸 시킬 것이다.
네 존재의 폐해는 내세에서도 씻어내지 못할 낙인이며
네 죗값은 신이 내리는 형벌이 아니라, 네가 지은 업보이다.
그러니 너의 지옥은, 발아래 서있는 지금이며
오차 없이 직면하게 될 것이다.
너는, 알고 싶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깨닫지 못한 채로 수천번을 태어나고 죽을 것이다.
억겁의 용서를 구하여도,
눈 먼자에게 면죄부는 주어지지 않는다.
배 부른 시체가 되어 축생계를 떠도는 영혼이여,
헛된 구천이 당신의 숨통이오.
영원히.
작자 미상의 시는 업에 대한 엄중함을 말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치유가 되고, 누군가에겐 반성을 주는 시 같았다. 업을 지은자는, 그 자체로 업을 받는 삶을 살게 된다. 이는 미래에 존재하는 선물이나 벌이 아니다.
한 김 식혀진 둥글레차를 천천히 마셨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차의 향을 머금다가 고개를 돌려 넓은 창문 넘어의 물레방아를 바라봤다. 물레방아는 물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바퀴가 돌아가길 반복했다. 물은 계속 흐르고, 바퀴도 계속 굴러간다. 그간, 나는 저 물레방아처럼 살아온게 분명했다.
나는 내가 지켜본 나를 생각했다.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나의 형상을, 에너지로 느껴지는 나의 어떠한 것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끊임없이 내 몸을 이끌어가는 거대한 힘의 정체를 찾고 싶어했다. 나는 그걸 북극성이라 부르기도했고, 완성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나를 이끌어가면서, 나와 함께 공명하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삶에 들여왔다. 그것들은, 나의 에너지를 필요로했다. 나는 나를 나누었고, 그 안에서 나의 쓰임을 느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나의 속을 채우기 위한 것들이었다.
채우려면 비워져있어야 한다. 그 말의 뜻은, 나는 비워져있는 상태라고 내가 규정했다는 뜻이다. 아무도 나를 비워진 존재라 정할 수 없음에도 나 스스로 결핍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결핍으로 시작한 길은, 아무리 걸어봤자 채워질 수 없었다. 결핍은 결핍을 낳았을 뿐이다. 그러니 결핍을 느낄만한 것들이 자주 들락날락 거렸다. 도둑이 오고가도 도둑인 줄 몰랐다. 그게 나의 무지였다. 그것들은 내가 죽지 않을 만큼의 에너지를 주기도 했다. 마치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의 물이, 바닷물인지 썩은 물인지 성수인지 모를일처럼. 일단은 마시고 싶은 매혹을, 도둑은 아주 멋있게 포장한다. 결핍된 에너지는 오아시스를 마시고 싶다는 간절함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도둑은, 그 에너지를 재빠르게 알아보고 달려든다. 그 둘은 서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제 나름의 주고 받는 흐름이 생긴다. 거대한 굴레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러한 굴레를 만든건, 도둑이 아니라 나였다. 나는 도둑을 탓하기도 했다. 마음속으로 수백번 도둑을 칼로 찔러 죽이고, 그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그들의 안위를 저주했다. 그러나 도둑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그들의 업에 끼워들어간 나를 빼내었다. 나의 고통속에서 그들이 숨을 쉬고 있는 거라면, 이 과업의 세계를 멈추면 되는 것이다.
그들이 내게 저지른 상처는, 그들의 삶에서 다른 모습으로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망친건 내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묘하게 심장이 조여지며 숨이 가빠지고, 자꾸만 눈이 감겼다. 천천히 눈을 감고 가쁜 숨을 달래었다. 어두워진 시야 속, 저 먼곳에 도둑이 보였다. 죽도록 미웠던 도둑의 얼굴이 서서히 변해갔다. 도둑은 스승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 둘의 목적은 하나, 내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나타났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다른 얼굴로 같은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의 깨달음이었다.
서서히 해가 넘어가는 하늘을 바라봤다. 먼 풍경을 구경했다. 산줄기가 양 옆으로 나와있었고 단풍이 진 나무들이 울긋불긋 불을 킨듯 타오르고 있었다. 10월, 가을이 충분히 내려온 계절임을 이제야 눈치챘다. 저들은 그저 단풍으로 존재했다. 당연하게 존재했다. 조건으로 존재하지 않는 온전함. 당연하고 무한한 사랑이 느껴졌다. 무릇 나 자신도 그러하다고 보였다. 결핍이 아닌 온전함. 그게 나라고….
미안한 마음이 없어야 사랑이 완성된다는 착각, 언젠간 북극성에 도착 할 수 있다는 오만, 외부에서 나의 쓰임을 드러내고 발견할 것이라는 무지가 소용돌이처럼 떠올랐다. 나를 향해로 이끌어온 움직임이자 모든걸 버려야만 끝나는 아픔의 원흉이, 정체를 드러냈다.
고백하자면, 나는 구원을 버렸다. 그간 내가 찾은 것은 나의 구원을 바라는 갈망이었고, 이는 먼 곳에 나의 세상이 존재할거라는 허상을 만들었다. 길고 먼 여행을 떠보고 나서야, 허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시 돌아간다고 한들, 이대로 살아선 안된다고 소리치는 어린 이루나를 막을 수 없을거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구원을 바라는 자들은, 역설적이게도 서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살려내지 못한다. 그저 구원을 바라는 상태로 굴러갈 뿐이다. 그래서 구원을 버렸다. 북극성 혹은 노력으로 칭했던 것들은 모두 내면이 아닌 외부의 미지로 향해있었다. 나는 그 방향대로 나아가던 굴레를 멈추었다. 외부에서 나를 구했던 과오를, 구원과 허상 그리고 부정에 유혹되었던 시기를 한 단락 마친것이다.
나, 이루나는 쓰임에 목적을 두고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달로서 존재할 뿐, 그게 전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