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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굴레 11화

운명의 수레바퀴

by 슬기

해는 고정되어, 모습이 바뀌지 않는다.

달은 변화하고, 모습이 바뀐다.

해와 달은 서로의 다른 점을 탓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할 뿐이다.

그게 그들의 운명이다.


찬란이 일깨워지는 새벽, 인시(寅時)에 해가 찾아온다.

고요가 단정히 드리우는 유시(酉時)에 달이 찾아온다.

그들은, 서로를 찾아가는 운명으로 살아왔을 뿐이다.



꿈에서 만난 해는 하염없이 내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해의 손끝은 따뜻했고 나는 그 열기가 끝나지 않길 바랬다.

오랫동안 내 머리를 넘겨 주기를, 내 잠이 깨지 않게 계속 쓰다듬어 주기를.

눈을 감아도 느껴질만큼 생생한, 나를 고요하게 지켜보는 시선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꿈

에서 깬다면 해의 온기가 사라질거 같아, 너무나 두렵다.


해가 사라지면 차가운 공기가 바닥에 떨어지겠지

나는 공기의 무게에 눌려 허덕이며 울어대겠지.

숨을 쉴 때마다 볼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이 배갯잎을 적셔대겠지.


해가 나를 살피는 손길이 흐려지고 있다.

해의 손을 잡으려 뻗은 내 손은,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가지말라는 말을 입술 끝에 머금었지만, 바짝마른 목소리는 힘을 내지 못한다.

미친 사람처럼 뻗은 팔을 내리지 못하고 애꿎은 허공을 휘젓는다.


가지말라고 말해야 하는데.

내가 가지 말라고 말하면 해가 아파할테니 입술을 깨물어 참아야겠지.


-


잊고 있던 모든 기억이

빨리 감기를 돌리는 테이프처럼 생생하게 재생되어, 너를 다시 보게 한다.


폭포수가 부서질듯 떨어지며 끝내 돌을 깨트리는 소리처럼,

100도에서 물이 끓어 넘치는 뜨거움처럼.

잊은줄만 알았던 장면이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멈추고 싶지만 멈추지 않는 기억들. 이 장면의 정체는 한동제였다.


한동제와 튤립, 한동제와 바람결, 한동제와 책, 한동제의 미소. 한동제의 품.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게 아니라, 덮은 거였구나. 한동제를 품으면 너무나 아파질 내가 무서워서, 도망쳤던 거였구나. 지나간 시간속에 살아 움직이는 한동제에겐, 말랑이는 살점이 붙어있다. 당장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어제의 일 같은 당신. 잊고 있던 눈물이 쏟아지지만, 부를 수 없어서 더 아파온다.


내 운명을 깨달았을 때,

내 운명이 그저 나에게서 나온 것임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내가 그토록 찾아 헤멘 나의 운명이 심장이 있는 내 마음에 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온연한 사랑이 내 안에 있어서 내가 태어난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이 사랑이 부르는 이름은, 한동제였다.

어디까지 걸어왔나, 되돌아 보았을 때 나는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내가 걸어온 모든 걸음이 한동제를 향해있었다.


해와 달의 거리는 평균 38만 5,000km.

한동제와의 이별은 1,460일.

그리고, 손과 심장의 거리는 100cm.



-



눈을 뜨자, 창문 사이로 햇빛이 드리웠다.

오늘도 어제도 떠 있던 햇빛이

다시금 마음을 비춘다.

태양은 언제나 그곳에서 떠오르고 있었다는 걸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 알았다.

언젠가 서럽장에 넣어둔 손목시계를 찾아 꺼내었다.

먼저간 사람의 시간이 멈춘줄도 모르고, 시곗바늘은 째깍째깍 돌아갔다.


이별하지 못한 시계추는 흩어진 약속이 올 것 마냥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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