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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민관 Jul 20. 2020

데스 스트랜딩, 2020

첫 트레일러 공개부터 너무 궁금했었던 게임입니다만, 플레이스테이션이 없어 해보지 못하다가 PC 버전 출시 전에 예약 구매했고, 출시 당일 바로 플레이 시작해서 어제 엔딩을 봤습니다. PS4 출시 후에도 스포일러 안 당하려고 궁금증 꾹 참고 리뷰를 거의 안 봤었네요. 그래서 아주 뒤늦은 리뷰이기도 합니다.


참 기묘한 게임이더라고요. 레드 데드 리뎀션 2 엔딩을 본 이후로 약간 게임 불감증에 빠진 거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 기분을 말끔히 씻어내려 주는 게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데스 스트랜딩이 레드 데드 리뎀션 2를 뛰어넘는 걸작이다, 이런 건 아니고 그냥 불감증을 확실히 없애줄 만큼 새롭고 이상한 게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인상 깊었고 어떤 점은 별로였는지 한번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배경 설명을 조금 하겠습니다. 근미래 인류에게 갑자기 '데스 스트랜딩'이라 불리는 일련의 재앙이 발생합니다. 시간 흐름을 가속화해 사람을 갑자기 노인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물건을 부식시키고 식물을 시들게 하는 '타임폴'이라는 비가 내리고, 그 어떤 물리적 공격도 소용없는 'BT'라는 존재들이 타임폴 속에서 나타나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BT에 의해 사람이 죽으면 그 자리에는 '보이드 아웃'이라는 대폭발이 일어나 운석 충돌 수준의 크레이터가 형성됩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간의 연결과 소통을 거부한 채로 지하 쉘터에 들어가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하에서 완전 자급자족은 불가능하기에 '포터'라고 불리는 극소수의 배달부들이 타임폴을 뚫고 이들 간에 필요한 물자나 장비를 보급해 줍니다. 주인공은 그중 전설적인 배달부로, 각 쉘터를 돌아다니며 '카이랄 네트워크'라는 정신 인터넷을 통해 세상을 다시 연결한다는 임무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오래 고립되었기에 연결을 거부하고, 이들의 물건을 배송해 주며 다시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세상을 연결하는 것이 게임의 주된 내용입니다. 더 핵심적인 스토리는 스포일러이므로 자제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계속 변화하는 날씨


일단 PS4에서 PC로 이식된 게임이니까 이식 퀄리티 문제를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아주 잘 이식했습니다. 끊김도 없고, 멀티코어도 아주 잘 활용해요. 특히 RTX 계열 그래픽카드에서 사용할 수 있는 DLSS 2.0을 굉장히 잘 지원해서, 수준 높은 비주얼을 보여주면서 성능 대비 퍼포먼스도 훌륭하게 뽑아줍니다. 기본 안티앨리어싱이 좀 별론데, DLSS를 켜면 무척 좋아집니다. 저는 RTX 2070 슈퍼 사용 중인데 2560x1440 해상도에서 그래픽 최고급/DLSS 품질 중시 설정으로 평균 110~120 프레임 정도가 나옵니다. 아마 4K 고정 60 프레임도 무리 없이 가능할 거 같네요. 4K 모니터가 없어서 테스트는 못 해봤습니다만은...


폴리곤이 엄청 세밀하다거나 텍스쳐 해상도가 굉장히 높진 않은데, 그래픽도 적당히 실사스럽고 적당히 SF 스럽게 잘 만들었습니다. 비주얼적으로는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광원이나 색감이 아주 고급스러우면서도 게임 스토리와 어울리는 분위기를 연출해 주는 거 같아요. 특히 지형과 날씨 그래픽이 굉장히 아름답네요.


저기까지 언제 가나...


게임은 기본적으로 아주 고독하고 조용합니다. 주인공은 옛날 보부상처럼 등에 짐을 잔뜩 짊어지고 고된 여정에 나서고, 황량한 광야만이 주인공을 맞이합니다. 대재앙이 일어났던 땅이기에 지형은 거친 산, 돌부리, 바위들, 절벽으로 가득하며 사람들은 모두 지하 방공호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 설령 배송을 마친다 해도 사람들이 직접 그 물건을 받아가진 않습니다. 택배 장치에 물건을 올려 두면 지하로 운반되고, 사람들의 홀로그램이 나와 고맙다고 덕담 한 마디 던져주는 게 전부예요. 소재, 생필품, 연구자료, 사치품 등 거의 모든 것을 배달하지만 사람들이 그 물건들을 사용하는 모습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근데 이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요. 드넓은 오픈월드를 이동하는 과정 자체를 게임의 메인 컨텐츠로 만들어 놨거든요. 위에 언급한 고급스러운 배경 그래픽에 힘입어,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을 연결하기 위해 홀로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다 보면 자연스레 어떤 명상적인 분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 게임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배송 완료의 성취감도 아니고, 복잡한 스토리도 아니고, 매력적인 캐릭터 설정들도 아니었습니다. 힘들게 산을 오른 뒤 나오는 내리막길과 함께 펼쳐진 넓은 평원, 그리고 그런 타이밍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탁월한 OST를 들으며 그 평원을 걸어가는 그런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어요.


다른 플레이어들과 협력하면, 막대한 자원이 들어가는 국도도 빠르게 건설할 수 있다


그와 함께, 코지마 히데오가 '소셜 스트랜드 시스템'이라고 언급한 독특한 온라인 시스템은 한층 더한 감동을 안겨줍니다. 플레이 자체는 고독하지만, 내가 플레이 도중 건설한 시설물이나 제작한 장비는 온라인으로 공유되고, 그것들을 잘 써먹었다면 상대방이 '좋아요'를 보내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의 시설물이나 장비 또한 이용하고 좋아요를 보낼 수 있습니다. 배달하다가 거대한 절벽이나 넓은 강을 멀리 돌아가야 하나 싶었을 때 발견한 다른 사람들의 사다리나 앵커, 화물이 손상 직전일 때 발견한 쉼터 등은 감동스럽게 다가왔고 저도 플레이하면서 단순히 그때그때 제가 쓰기 좋은 장소에 시설물을 건설하기보다는, 어떤 장소에 건설하는 게 모두에게 편할까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최근 몇 년간 AAA급 오픈월드는 워낙 유행이었기 때문에 많은 레퍼런스들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는 직관적이고 훌륭한 상호작용들로 세계를 채웠고, 위쳐 3는 거대한 세계에 방대한 내러티브를 담았죠. 레드 데드 리뎀션 2는 극한의 디테일과 퀄리티를 추구했고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는 양산형이되 양산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물량공세를 퍼부었습니다. 이 이상의 방식은 나오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배달을 통해 세계를 다시 연결한다는 스토리와, '좋아요'를 포함한 독특한 온라인 시스템으로 연결되는 배달의 과정은 신선한 오픈월드의 가능성을 본 느낌이었습니다.  




산을 넘고 절벽을 지나 배송 장소에 도착해도 반겨주는 사람 하나 없는 모습


하지만 게임이 장점으로만 가득한 것은 아닙니다. 일단 게임이라는 컨텐츠가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는 재미의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게임에서 느끼는 재미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고 생각합니다.


1. 플레이 자체에서 상대방을 무찌르거나 공격을 피하면서 느끼는 순간적이고 원초적인 오락적 재미.

2. 그런 원초적 오락성이 쌓여가며, 어떤 목표를 달성하거나 특정 지점에 도달하며 느끼는 성취적 재미.

3. 게임 전체에서 인상적인 연출과 스토리,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감정적(영화적) 재미.


가장 좋은 것은 이 세 가지 재미가 서로 긴밀하게 엮여 모든 재미를 전부 적절하게 제공하는 게임이겠죠. 그런데 데스 스트랜딩에서는 첫 번째 재미가 거의 결여되어 있고, 세 번째는 굉장히 호불호 갈리고 애매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결국 코지마 히데오 특유의 연출과 스토리를 선호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오직 배달의 성취감, 그리고 거대한 자연환경을 홀로 마주하며 느끼는 고독한 명상적 분위기만으로 몇십 시간의 플레이타임을 버텨야 한다는 것인데,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첫 번째 재미의 결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리뷰들이 액션 위주의 게임이 아니라는 점을 다루었을 테니 넘어가고 세 번째, 감정적 재미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일단 기본적으로 게임 자체가 이해하기 힘든 감정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얏지가 '코지마 히데오는 인간의 감정을 엄청나게 두껍고 흐린 유리벽 너머로 배운 것 같다'라고 했었는데, 그 말이 대충 맞아요. 등장인물들의 감정이나 성격 중 어떤 것들은 배경 서사에 비해 지나치게 과장되고 툭 튀어나와 있고, 또 다른 것들은 너무 감춰지고 숨겨져서 감정선 변화를 매끄럽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단점은 '지나치게 많은 설명'이라는 또 다른 단점과 결부하여 게임 스토리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스토리나 설정은 굉장히 흥미롭고 독창적이지만, 스스로의 독창성에 너무 높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나머지 모든 걸 설명하고 자랑하려고 해요. 주인공의 가장 기본 장비인 밧줄마저도 주인공의 체액으로 뽑아낸 섬유로 어쩌고 하는 식으로 설명을 하는데, 이런 건 그냥 게임 내 문서 같은 걸로 알 수 있게, 뒷 설정으로 빼놔도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플레이어에게 밧줄은 그냥 밧줄이면 됩니다. 그리고 이런 기본적인 장비부터, 게임 전체를 망라하는 설정이나 스토리, 등장인물들의 비밀 같은 부분에서도 일방적 설명이 계속 이어집니다.


플레이 과정은 자유롭고 고독하나, 스토리 진행은 반대로 과시적이고 강압적이다


그래서 이 게임의 연출을 칭찬하기가 힘들어요. 코지마 히데오는 인상적인 장면이나 순간을 연출하는 데에 있어서는 분명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연성 있게 짜인 하나의 거대한 서사를 매끄럽게 연출하는 실력은 그렇게 좋다고 하기 힘들 거 같아요. 조각조각난 인상적 연출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를 봐달라고 소리치고, 저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보며 무슨 뜻일까 하고 유추하다가 결국 엔딩 직전에서는 스토리 이해를 반쯤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그리고 엔딩에서 그 모든 연출들을 짜 맞추어 정보를 엄청나게 주입하는 결말을 내는데, 엔딩까지의 모든 연출과 장면을 계속 집중하며 봐온 플레이어가 아니라면 여기서 '감정적 재미'를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단점은 단순히 스토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게임의 주제는 사람 간의 연결이고 메인 컨텐츠 또한 '배달을 통해 흩어지고 고립된 사람들을 다시 연결하는 것'입니다. 특이한 온라인 시스템도 이를 뒷받침해 주며 주제의식을 강화합니다. 그런데 정작 게임은 자신의 주제를 아주 일방적이고 강압적으로 정보를 주입하는 식으로 전달하고 있어요. 멋들어진 연출과 흥미로운 설정을 대놓고 티 내지만 이는 스스로를 자랑하는 느낌이지, 플레이어에게 자연스럽게 세계관에 이입하게 만들어주는 느낌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영화적 연출 문법을 사용하고 싶다는 욕심이 직접 느껴질 정도로요. 특히 대사의 경우에는 코지마 히데오 특유의 난잡한 장황설이 아주 심해서, 매력적인 설정의 캐릭터들조차도 설명을 듣다가 진이 빠지게 만듭니다.


덧붙이자면 코지마 히데오가 특정 여성이나 남성상, 가령 아버지/어머니나 자매 등을 다루는 방식도 상당히 불쾌하게 여겨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배우들은 전부 미국이나 유럽인에다가 배경도 미국이라서 특히 부조화스러운,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본적인 감성이 꽤 들어있고, 카메라 워크나 연출도 가끔 노골적이네요.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게임


요약하자면 '연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임이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자부심과 이를 전달하는 목소리가 너무 강해, 이를 플레이어에게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주지 못하고 혼자서 멋지지만 난잡한 때깔을 뽐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결이라는 주제가 오히려 스토리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고, 다른 유저들이 적절한 위치에 건설해 준 시설들과 내 시설물에 주어진 '좋아요'에서 가장 잘 느껴진다는 점이 아이러니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아이러니는, 비록 데스 스트랜딩에서 극대화되어 보이긴 했지만, 영화가 되고 싶어 하는 AAA급 대작 게임들이 대부분 비슷하게 안고 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레드 데드 리뎀션 2는 그 어떤 게임보다 디테일하고 실감 나는 오픈월드를 구현했지만 정작 스토리 진행은 반복되는 지시를 그대로 따르는 수준의 일방적이고 선형적 구성이었습니다. 스토리 자체가 훌륭했던 것과는 별개로요. 그래서 스토리와 오픈월드가 따로 놀고 있었죠. 또 최근의 라스트 오브 어스 2 논란에서 가장 크게 문제시되었던 부분은, 폭력과 살인, 복수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내고 있으나 결국 그 폭력과 살인을 게임이 플레이어들에게 지시했다는 사실이고요. 게임은 영화나 소설처럼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는 것이기에 전달하고자 하는 스토리나 메시지가 명확하고 강할수록, 플레이어의 이입이 그만큼 저하될 수 있다는 반작용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종합하자면, 일방적인 스토리 진행과 쏟아지는 장황한 설명 세례, 없다시피 한 액션을 감당하면서도 정말로 독창적이고 새로운 설정과 고독한 분위기가 제공하는 독특한 게임플레이의 매력을 경험해보고 싶으시다면,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을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토리가 강렬한 게임, 독창적인 게임을 좋아하는지라 단점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마음에 들었어요. 원래는 영화스러운 게임이라고 쓰려 했는데, 그렇다기엔 꽤 호불호가 갈릴 거 같습니다. 위에 언급했듯이 연출이나 대사가 너무 장황하고 자기 과시적이라서요.


그리고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많은 작품들이 생각났습니다. 해변이라는 메타포와 양수처럼 사용하는 오렌지색 액체에서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배달을 통해 고립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점에서는 영화 포스트맨이, 하나의 연결된 미국을 재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소설 1초 후가, 실존하는 동물이 괴물로 기이하게 변해버린 듯한, 그리고 거기에 사람이 박혀있는 듯한 BT 디자인에서는 아키라가, 유해한 물질이 퍼져 인류를 쇠퇴시킨다는 점에서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우주에서 온 색채가 떠올랐습니다. 코지마 감독은 영화광인 만큼 아마 더 많은 것들을 참고했겠지요. 이런 많은 모티프를 자신만의 독창적인 것으로 묶어낸 실력은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매즈 미켈슨, 노먼 리더스, 레아 세두, 마거릿 퀄리 등 유명 영화배우들을 대거 채용한 만큼 작중 캐릭터들의 연기는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덕분에 꽤 긴 컷씬이 많은데도 지루하지 않게 본 거 같아요. 특히 매즈 미켈슨의 연기는 게임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인상 깊었습니다. 오히려 방해되는 건 중간중간의 짧은 컷씬들이더군요. 샤워 한 번 하려면 컷씬 4개를 봐야 합니다. 4개 다 넘길 수 있긴 합니다만 심한 거 아닌가 싶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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