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가 없다는 오독에 대하여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상당히 직설적이고 풍부하며, 대놓고 유머러스한 영화입니다. 대사와 장면들은 시종일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동시에 어둡고 서늘한 면모를 드러냅니다.
영화가 다루는 소재는 야심차다 싶을 만큼 광범위합니다. 메인 주제인 노동자 문제와 대량 실업 외에도 가족 간 단절, 가부장 관념, 한국 경제 고속성장기의 이면, 세대 간 갈등, 환경 파괴 등을 아우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요소를 하나로 꿰는 테마는 결국 '어쩔 수가 없다'는 자기기만입니다. 영화는 그 기만적 세계관을 지키려는 행위들과, 그로 인해 도달한 파국을 그립니다.
주인공 만수는 끊임없이 상황을 오독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회사의 해고 위로 선물인 장어를 자신의 노고에 대한 보상으로 착각합니다. 정작 해고 대상은 자신인데, 동료들을 위한 이별 연설문을 써 줍니다. 면접에서 단점을 잘 이야기하라는 후배의 조언을 곡해하여 유머를 섞어 답변하고, 아내의 댄스파티 복장을 오해해 외도를 의심합니다. 스스로도 이런 모습을 자각하는지, 늘 손바닥에 '빨간펜'으로 해야 할 말을 적어 둡니다. 말하자면 가이드가 필요한 남자입니다.
만수가 저지른 가장 큰 오독은 아마도 '어쩔 수가 없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해석 그 자체일 겁니다. 사실 그에게는 선택지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는 해고당한 후, 마당 딸린 전원주택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습니다. 딸의 첼로 레슨을 줄이거나, 분재 취미를 접고 화분 몇 개를 처분해도 됐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퇴직금을 소진하며 13개월 동안 실직 전과 유사한 생활 수준을 고수했고, 결국 경쟁자들을 살해하고 '문 제지' 관리직에 들어가는 극단적 방법을 택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풀어야 하는 유일한 문제인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되뇌며.
만수가 살해하는 대상들은 '어쩔 수 있었던' 자신의 다른 가능성들처럼 보입니다. 장인 집에 얹혀살며 제지업 외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결국 아내의 외도를 마주하는 범모는, 만수가 재취업에 실패한 채 버텼을 때 도달할 미래상처럼 느껴집니다. 제지업에 대한 진심, 스스로를 전문가라 생각하는 자신감, ‘펄프맨’ 수상 경력… 만수와 범모는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만수는 범모를 죽일 때 가장 많이 망설였고, 대화도 오래 나눴고, 범모가 택하지 않은 합리적 대안들이 있었다며 질책하다가(마치 자신을 질책하듯) 결국 그를 직접 죽이지 못하고 도망치고 맙니다.
이는 스스로, 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다다를 거라 믿는 자신의 모습으로부터 도피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범모의 최후를 통해 해고된 자신의 서글픈 종착지를 목격한 만수는 더 냉혹해집니다. 남은 두 명, 시조와 선출을 죽일 때는 더 이상 실수해 당황하거나 주저하지 않습니다.
구두 가게 점원 시조는 만수가 제지업에 대한 집착을 조금 내려놨을 때 열렸을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딸과 스스럼없이 지내고, 어설프지만 점원 일도 어느 정도 해내며, 엔지니어 역량도 있고 일본어에도 능통합니다. 만수가 '펄프맨'을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분야에서 재교육을 받았더라면, 가족을 조금 더 이해하려 했더라면 도달했을 삶입니다. 만수는 시조를 가장 빠르고 깔끔하게 처리합니다. 그리고는 분재 철사로 시체를 뒤틀어 잔혹하게 묻어 버립니다. 마치 '어쩔 수가 없'지 않은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기 싫다는 듯.
만수는 유력한 경쟁자 둘을 제거했습니다. 마지막 살해 대상은 ‘문 제지’의 관리직을 꿰차고 있는 선출입니다. 선출은 범모나 만수만큼 종이에 진심인 인물은 아닙니다. 선출은 술 좋아하고 폭력적이었던 만수의 과거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내를 만나 어엿한 가장으로 변모하기 전, 아들을 때리고 술만 마시면 개가 되던 시절 말이죠. 하지만 동시에, 그는 시류에 밝고 윗사람에게 잘 아첨하는 성격입니다. 이는 만수가 상황을 오독하는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도달했을 위치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택할 수 있었던 다른 가능성들을 이미 전부 지워버렸기에, 만수는 선출을 가장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살해합니다.
<어쩔수가없다>가 그려내는 것은 얼핏 보면 실업으로 극단에 내몰린 한 가장의 불가피한 범죄 행각이지만, 실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 상태에서 권위 있는 가장으로 남기 위해 다른 가능성들을 베어내고 '어쩔 수가 없다'며 스스로를 속이는 한 남성의 추락입니다. 그 모든 살해와 거짓말 끝에 그는 마침내 ‘문 제지’의 관리직 자리를 거머쥡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일의 실상은 제지 전문가가 필요 없는 수준의 단순 반복 업무였습니다. 동료들을 소중히 여기던 예전 모습과는 달리 부하 직원들이 AI로 대체돼 모조리 해고당할 거라는 사실을 납득해야 했으며, 집과 가족 또한 겉으로만 예전으로 돌아왔을 뿐 신뢰와 애정이 깨진 채 너덜너덜하게 봉합되었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살아갈 모든 가능성을 스스로 죽여버린 그는 더 이상 빨간펜으로 손바닥에 할 말을 적지 않습니다. 그의 인생에는 고민하며 선택해야 할 지점도, 고집스레 말해야만 할 이야기도 더 이상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 만수의 첫 살인은 고추나무 화분을 선출의 머리에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일어날 뻔했습니다. 고추나무, 전형적 남성성의 상징입니다. 이를 저지한 것은 한 할머니였습니다. '근력 운동?' 가족을 위한 거라 스스로를 속이며 타인을 죽이는 것보다는 근력 운동이 훨씬 남성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결국 만수는 ‘레드 페퍼‘라는 가짜 회사를 만들어 자신의 살해 계획을 더 치밀하게 현실로 옮깁니다.
2. 만수는 가족을 제대로 부양하고 있을 때 수염을 기릅니다. 이 역시 남성성의 표상입니다. 구직 중일 때, 마트에서 일용직을 할 때, 살인을 저지를 때에는 수염을 민 상태입니다.
3. 만수가 할아버지 얘기를 꺼내며 아들에게 주먹 인사를 청할 때, 아들은 이를 받아주지 않는다. 아들이 범죄를 저지른 게 밝혀지고 이를 해결한 후, 만수가 아들의 담배와 라이터를 아내가 못 보게 숨겨주며 다시 주먹 인사를 청하자 아들은 이를 맞받아쳐 줍니다. 이들은 가족의 끈끈함이나 혈연이 아닌 범죄 행위의 은닉으로 연대하고 있습니다.
4. 만수는 나무를 좋아하지만 자신의 온실 안, 통제 가능한 나무들만 좋아합니다. 심지어 분재를 위해 모양을 기괴하게 뒤틀다가 가지를 부숴버리기도 합니다. 그가 종사하고 집착하는 제지업은 기본적으로 나무를 파괴해 돈을 버는 산업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통제 아래 있는, 자신이 부양하는 가족만을 사랑합니다. 그가 다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저지르는 범죄는 타인의 가족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