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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속 타인의 죽음을 마주할 때

죽음은 언제나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일이 아니고, 아직은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튜브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타인의 죽음,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영상은 그 거리를 단숨에 좁혀버린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들의 죽음은 묘하게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유튜브 화면 속에서 전해지는 죽음은 낯설지만 동시에 낯설지 않다. 그것은 분명히 타인의 죽음이지만, 그 부재를 보는 순간 나는 곧 나의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죽음은 내가 아는 사람의 것이 아니어도, 모르는 사람의 것이어도 결국 나와 이어져 있다. 타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순간, 삶의 끝은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나에게도 닥칠 확실한 현실로 다가온다.


그럴 때 마음은 착잡하다. 두려움과 슬픔,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공허함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하지만 그 감정의 뒤편에는 또 다른 의미가 숨어 있다. 죽음이 나를 흔드는 이유는, 그것이 삶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일상의 사소한 다툼, 쓸데없는 고민, 미뤄둔 말들이 모두 사라지고, 대신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이 마음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든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에서 인간이 죽음을 맞이할 때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했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그리고 수용. 흥미로운 것은, 내가 유튜브에서 본 타인의 죽음에도 이 감정의 파편이 스며든다는 사실이다. “설마 저렇게 갑자기?”라는 부정, “왜 하필 저 사람이?”라는 분노, “만약 내가 저 상황이라면”이라는 타협의 상상, 그리고 차오르는 공허감. 직접 겪지 않아도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같은 감정의 파도를 스쳐 지나간다.


의사 아툴 가완데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Being Mortal)』에서 현대 의학이 생명을 연장하는 데 치중하면서도 정작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소홀하다고 말했다. 유튜브 속 수많은 죽음의 기록을 볼 때마다, 나는 그 말이 떠오른다. 마지막 순간을 연장하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시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의미 있게 채우느냐일 것이다. 타인의 죽음은 남겨진 우리에게 그 질문을 강렬하게 던진다.


정신과 의사 어빈 얄롬은 『죽음을 바라보며(Staring at the Sun)』에서 “육체적 죽음은 우리를 파괴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구원한다”고 했다. 타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경험은 바로 그 ‘구원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그것은 우리를 일상의 망각에서 잠시 깨워내어,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한다. 충분히 살아내지 못한 삶에 대한 후회만큼 죽음의 공포를 키우는 것은 없다는 얄롬의 지적처럼, 타인의 죽음은 내 삶을 더 진지하게 점검하게 만든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잊는다. 그래서 오히려 타인의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 죽음은 갑자기 숨결처럼 가까워진다. 모르는 사람의 죽음조차 나를 뒤흔드는 이유는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그것이 곧 내 미래의 모습일 수 있다는 직감 때문이다.


유튜브 속 타인의 죽음은 결코 가볍게 흘려보낼 수 없는 장면이다. 그것은 내게 삶을 더 진지하게 마주하라고, 잊고 있던 질문을 다시 붙들라고 말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웃고 바쁘게 살아가겠지만, 그럼에도 죽음을 바라본 이 경험은 마음에 오래 남는다.


죽음을 생각할 때, 삶은 비로소 선명해진다. 그래서 나는 타인의 죽음을 볼 때마다 다짐한다.
오늘을 허투루 살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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