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미래를 위해 눈앞의 시간을 희생하지 마라
초등학교 3학년 짜리 아들이 하나 있다. 요즘 시대의 잣대로 보면 상당히 엄한 아버지다. 작은 예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선을 넘으면 가차 없이 매를 든다.
하지만 불과 1시간 뒤, 매를 들었던 그 손으로 거실 바닥을 기어 다니며 녀석의 장난감 건전지를 갈아 끼운다. 우습게도 현재 가장 친한 친구는 아들이다. 녀석도 마찬가지라며 우긴다.
“제발 부탁인데, 한 번만 ‘아버지’라고 불러주면 안 될까?”
“아... 아... 안 돼. 그건 아니야.”
대체 뭐가 아니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녀석은 끝내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꼬박꼬박 ‘아빠’라 부른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한참 부족한 부모일지 모른다. 공부는 뒷전이고 틈만 나면 놀자고 꼬드긴다.
만화를 보고, 로봇을 조립하고, 시시콜콜한 농담을 나눈다. 오해하면 안 된다. 아들과 억지로 놀아주는 것이 아니다. 진짜로 녀석과 신나게 노는 것이다.
아내가 가끔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곤 한다. 사내놈이라 수영장부터 목욕탕까지 툭하면 벌거벗고 살을 부대끼며 놀아야 하니, 남편이 온몸으로 감당하며 고생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아내에게 깊은 미안함을 느낀다. 녀석과 물장구를 치고 벌거벗은 채 치고받으며 뒹구는 그 압도적인 재미를 혼자 독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육아라는 계산서에 억지로 적어 넣은 의무 방어전이 아니다. 스스로의 시간을 이기적으로 즐기는 온전한 오락이다. 아들은 눈만 마주치면 묻는다.
“아빠, 이제 뭐 할까?”
녀석은 입버릇처럼 자기가 정말 행복하다고 말하며 늘 웃는다. 하지만 속으로 생각한다.
'아빠가 훨씬 더 행복하다고.'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행복을 대단한 성취나 모든 조건이 갖춰졌을 때 주어지는 화려한 트로피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직접 겪어본 행복의 실체는 사뭇 달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오랜 기간 병환으로 누워계셨다. 대소변마저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감당하기엔 벅찬 일이었고, 집안의 장정이 돌봐드리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대학은 휴학했다. 까짓것 늦어진 시간이야 나중에 만회하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남들이 보기엔 20대 청춘을 병시중으로 날려버린 불행하고 우울한 시기였을 것이다. 당시 어머니와 여동생도 늘 가슴 아파했다. 한창 빛나야 할 20대 아들이, 오빠가, 하루 종일 병실에서 인생을 희생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 시간은 미치도록 행복했다. 평생을 통틀어 아버지와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어본 적이 없었다. 병상 옆에 앉아 원 없이 책을 읽었고,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성인으로서 거대한 사유의 확장을 겪었다. 배설물을 치우고 몸을 닦아드리는 그 고단한 물리적 시간 속에서, 역설적으로 인생에서 가장 밀도 높은 평온을 누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남은 가족들이 아쉬움에 눈물 흘릴 때, 남몰래 뼈아픈 죄책감마저 느꼈다.
평생에 걸쳐 나누어야 할 아버지와의 깊은 대화, 정적 속에서 원 없이 책장을 넘기던 그 묵직한 추억들을 혼자만 특권처럼 누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시간은 가족들의 장부에 적힌 것처럼 희생이 아니었다. 인생 전체를 통틀어 남는 장사였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다. 삶을 채워주는 누군가와 온전히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 그 자체다.
아버지를 배웅하며 몸으로 배웠던 그 단순하고도 압도적인 행복의 감각.
그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눈앞의 아들놈에게 굳이 책상 앞의 성공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로봇 장난감을 들고 하루라도 더 일찍, 더 많이 녀석과의 엉뚱한 시간을 축적해 나갈 뿐이다.
행복? 거창한 것이 아니다.
불안한 미래의 신기루를 좇느라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과의 시간을 놓치는 것. 부도 날지도 모르는 미래의 어음을 받겠다고, 눈앞에 놓인 확실한 현재가치를 내다 버리는 미련한 짓이다.
그것이야말로 인생에서 영영 돌이킬 수 없는 뼈아픈 손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