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는 공간이 좋다. 서점이 좋고 북카페가 좋고... 내 책이 아니더라도 한쪽 벽을 바닥에서 천장까지 책장으로 빼곡하게 채운 곳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분이 좋아진다. 독특한 공간의 냄새, 햇살이 비추는 분위기, 따뜻한 차 한잔... 책을 떠올리면 내 머릿속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장면이다. 그래서 자주 가보진 못해도 파주 출판단지가 좋고 지혜의 숲이 좋고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이 좋다.
별마당도서관 / 인천 송도 카페 꼼마
하지만 나는 책 없이는 살 수 없는 책벌레도 아니고 일 년에 백 권 이상의 책을 읽는 다독 가도 아니며, 인문, 과학, 경제, 자기 계발 등 분야별 다양한 독서를 하지도 못한다. 그저 내 취향의 독서를 하고 책 읽는 공간의 분위기와 시간을 즐기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전자책이나 오디오북보다는 손에 잡고 읽어야 편한 지극히 아날로그적이기도 하고... 집에서 책을 읽을 때 거실 소파 한구석에 처박히는데 햇살이 좋은 날 책을 읽다 잠시 멈추고 거실로 스미는 햇살을 바라보는 것도 좋아한다.
이쯤이면 책보다는 분위 기려나... 내가 좋아하는 그런 분위기를 책 표지에서부터 느낄 수 있는 책을 만났다. 정신과 전문의이자 작가이기도 한 하지현 교수의 책 《정신과 의사의 서재》...
햇살이 가득한 공간에 놓인 원목 의자와 콘솔... 그 위에 반쯤 읽고 덮어 놓은 책... 보기만 해도 편안해진다. 하지현 교수는 워낙에 유명하니 방송에서도 익히 봐 왔던 분이지만 책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다. 워낙 다독가로 알려져서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일반인도 아닌 정신과 의사가 읽는 책은 얼마나 다른가 싶기도 했다.
목차와 함께 먼저 보게 된 프롤로그... 하지현교수는 마음의 코어 근육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했다. 코어를 강화하는 독서야말로 매일 할 수 있는 마음의 홈트레이닝이라고... 코어가 강해질수록 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낯선 일에 당황하지 않고, 실패에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이다(P12).
목차를 보고 책을 읽어 보니, 이 책은 하지현 교수가 지금까지 읽었던 독서의 과정, 책에 대한 애정과 그에 얽힌 추억, 그만의 독서 방법, 의사가 아닌 저자로서 책을 대하는 마음, 그리고 마지막엔 그가 읽은 책의 목록까지 담고 있었다. 마지막 '하지현이 읽은 책들'까지 가지 않아도 중간중간 그가 읽은 책의 제목과 내용을 슬쩍 알고 혹시나 마음에 드는 책이 있다면 살짝 메모하거나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담아두는 것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더군다나 그런 책 제목 중에 내가 읽었던 책을 발견한다면 그 반가움이 더해진다. 정신과 의사이니 얼마나 많은 전공 서적과 책들을 읽어 왔을까... 그러면서 쌓이게 된 지식의 양이 얼마나 방대할까 생각이 들었다. 남들 눈에는 전문가지만 하지현 교수 스스로가 생각하는 전문가의 정의는 달랐다.
"전문가는 자기 영역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 외에는 섣불리 아는 척하지 않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할 줄 아는 사람이 전문가의 정의여야 한다. 내 분야에 대해 확실하게 아는 것에 더해, '안다는 것을 아는 것'에 대한 경계가 분명한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조금씩 그 영역이 넓고 확고해지고 깊어지기를 바라면서 책을 읽는다."
<옥수동 독서일기>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독서 관련 리뷰어를 해 본 경험이나 북클럽을 운영해 본 경험들을 읽으면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자기가 쓴 책에 대한 독자의 혹평을 들으며 리뷰할 때는 신중하게 되었다는 일과, 아무리 책을 좋아해도 한 권의 책으로 몇 시간씩 얘기하는 북클럽 스타일은 자기와는 맞지 않아 혼자 읽는 게 좋음을 알게 된 일, 그리고 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 땐 여지없이 만화방을 향한다는 저자의 말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게도 해 준다. 그리고 도서관이든 동네 책방이든 그가 책을 찾아다니는 공간에 대한 설명을 할 때는 나도 그곳을 리스트업 해서 찾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가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니 그에게 상담을 오는 내담자들에게도 딱 맞는 책을 권할 수 있는 '책 처방'이 가능한 게 아닌가 싶다.
책의 2장과 3장은 그가 독서하는 방식에 대한 얘기들이 많다. 책을 어떻게 분류하고 책의 정보는 어디서 얻으며, 독서를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 그리고 그가 작가로서 느끼고 알게 된 것들에 대해서 말한다. 각자 책을 읽는 이유도 다양하고, 책을 읽는 방식과 취향은 같을 수가 없으니 어떤 방식이 맞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저자가 저자의 방식이 있듯, 나도 나만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
그가 침대 옆에 낮은 책장을 짜 놓고 그곳에 읽기 편한 책들을 두고 있고, 취향에 맞는 책들만 모아 놓은 '명예의 전당'이 있다는 부분을 읽으니 내 침대 옆과 내 방안 책장이 있는 공간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침대 옆에 늘 두는 책은 말고라도, 아이들 책 내 책 정신없이 뒤섞인 내 방 책꽂이는 좀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도 같다. 지난여름 한바탕 책 정리를 했는데 그 새 또 어지렵혀진 책장을 보니 다시금 정리의 필요성도 느낀다.
다독가의 서재 중 '명예의 전당'에 안착하는 책들... 넣고 빼고를 반복하는 가운데에서도 꿋꿋하게 빠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책들은 그의 인생에 대단한 인사이트를 준 책이라고 했다. 책 속에 언급된 책에 내가 읽은 책이 없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내 취향껏 내게 그동안 많은 울림과 깨달음을 준 책들을 각자의 '명예의 전당'에 자리해 놓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기 취향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하는 경향이 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신경 쓰면서 무난한 선택을 반복한다. 그런 것들이 쌓여가면 어느 순간부터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헷갈린다. 이때가 솎아냄이 필요할 때다. 시간이 지나면 내 취향에 맞는 책과 아닌 책을 가를 수 있듯이, 시간이 얼추 지나고 나면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진짜 내 눈으로 대상을 판별해낼 수 있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난 다음에 비로소 내 취향이 남는다. 주기적인 솎아냄으로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지고 가려져 있던 내 취향이 두드러지며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이것이 내가 나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다독을 하기 때문에 그가 그동안 깨달은 노하우, 책 속에서 만난 수많은 문장들이 있기에 내담자의 상황에 맞는 책을 권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확실하게 하게 해 준 마지막 5장에서는 "이런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라는 제목처럼 상황에 맞게 골라 읽을 수 있는 책들이 소개되었다. 불안과 우울증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 괜찮은 어른이 되기 위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일, 책을 좋아할 사람이 읽으면 좋을 책 등등... 그는 그 모든 것을 책 속에서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인생의 책이 되어준 《슬램덩크》까지...
과거의 실수에 얽매이고 남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고 미래의 불확실한 인정에 목매달았던 저자가《 슬램덩크》를 읽고 남과 비교하느라 애태우지 않고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보통의 정신과 의사와는 다른 독특한 정체성이 만들어진 것 같다고...
"누구나 이런 책 한 권씩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인생에 벼락같이 확 꽂힌 책, 아무리 낡아도 이것만은 놓거나 남에게 주고 싶지 않은 책 말이다. 이런 책은 인생의 나침반이자 이정표다. 평생 간직하고 있다가 갈림길에 섰을 때, 지치고 피곤할 때 꺼내서 읽고 싶어 지고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스누피의 친구인 꼬마 라이너스는 언제나 담요를 갖고 다닌다. 없으면 불안하고 외롭다. 그런 면에서 내게 《슬램덩크》는 라이너스의 담요 일지 모른다. 나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라이너스의 담요와 같은 책이 있으면 한다. 언뜻 떠오르는 게 없다면 한 번쯤은 찾아보는 것도 좋다. 긴 인생에서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책은 반드시 필요하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들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어서 참 좋았지만 책을 마무리하는 마지막답게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부분이기도 하다. 흔들리는 나의 중심을 잡아줄 책 한 권... 소설이든, 만화든, 에세이든, 자기 계발서든 상관없이 나에게, 우리에게 그런 책이 있는지... 없다면 저자의 권유대로 지금부터라도 찾아보는 수고를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오늘도 나는 책을 쌓아놓고 읽는다. 이건 끝이 나지 않는 달리기 같은 것이다. 시작점은 있지만 반환점도 없고 종착점도 없다. 그냥 가는 것이다. 꾸역꾸역 꾸준하게 읽어가고 새로운 것을 알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고,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되면서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아는 것이 더욱 분명 해지는 것'의 즐거움을 쌓아간다. 그것이 내게는 작은 행복이고 나의 하루를 완성해가는 자잘한 벽돌들이다."
하지현 교수의 독서에 대한 행복, 하지현식 책 읽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에필로그 속의 글... 자기만의 방식으로 즐기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독서의 행복이 모두에게 깊이 스며들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말처럼《정신과 의사의 서재》라는 이 책을 읽으며 책 읽는 기쁨을 다시 한번 느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