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의 20세기>
*본문은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의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하였습니다.
힘든 마음을 달래주는 건 직접적인 위로의 말이 아니라 공감이다. 사연을 듣고 울거나 감동하는 경우 역시 적진 않지만 ‘나도 저런 마음이 있었는데’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은 보통 일이 아니다. 상반기에는 인생영화라 할 수 있는 괜찮은 작품들이 상당수 등장했고 그걸 갱신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작품이 나타났다는 것은 축복이다. 관객의 마음을 헤집는 방법을 알고 있는 제작진이 완벽에 가까운 작품을 들고 돌아왔다. 그러나 오점은 대개 의외의 곳에서 드러난다.
국내 배급사의 잘못된 제목 선정으로 흥행하지 못한 작품은 많았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대표적. 그럼에도 명작은 기어이 입소문을 타기 마련이다. 다만 한국 관객의 수준을 얕잡아 보는 태도가 아쉬울 뿐. 차라리 영어를 직역한 <20세기 여인들>이나 영어 원제를 썼다면 어땠을까. 영화를 관통하며 등장하는 페미니즘은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이며 작품은 인물을 빌어 입장을 분명히 한다. 여성의 삶과 입장을 그려 논란이 되거나, 특정 고객층을 잃을 것이라 지레 겁을 먹어 제목을 변경했다면 국내 배급사는 반성해야 한다. 어떤 문제든 해결을 위해선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리고 그것이 영화의 본질적 역할이라는 것을.
미래는 언제나 늘 빨리 다가올 뿐 아니라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다가온다
-앨빈 토플러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사춘기를 보내는 제이미. 도로시는 그런 아들을 걱정한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올 수밖에 없던 자신의 삶에 남편은 없고, 홀로 셰어하우스를 운영하며 안정적인 주식을 쥐고 있음에도 엄마는 처음이라서. 행복을 두려워하는 도로시는 자식에게 해줄 마음은 많지만 해줄 말이 많지는 않다.
엄마는 행복해?
그런 질문은 하는 거 아냐.
왜 그런 것 때문에 싸우니. '고작 그런 일'로 싸우는 제이미를 도로시는 이해할 수 없다. 도로시에게 고작 그런 일이 제이미에게 중요한 것일 수 있다는 고려가 없는 말은 제이미에게 늘 상처로 남는다. 엄마와 나누는 대화보다 친구인 줄리, 세입자 애비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것이 편한 제이미는 엄마가 싫다. 도로시는 결국 애비와 줄리에게 제이미의 사춘기를 도와달라 부탁했지만 우습게도 제이미는 엄마 도로시를 옹호한다. "대공황 세대를 겪으셨잖아." 그리고 그녀의 삶을 이해하지만 따르지 않겠다는 여자 둘과 충돌한다. 인생을 가르쳐주지만 인생관이 다른 세 여자의 방식. 그렇게 형성된 책임의 경계는 미묘하다.
결국 엄마로서의 책임이 있느냐 없느냐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입장의 차이에서 자식의 인생길이 평탄하길 택할 수밖에 없는 도로시는 아들의 실패를 견딜 수 없다. 제이미가 나쁜 길로 빠졌나 아니면 또래의 아이들이 모두 그런 것일까. 흔히 ‘일탈’이라 일컬을 수 있는 사춘기의 방황이 때때로 제이미에게도 일어날 때 도로시는 혼란스럽다. 겉으로 꾸준히 강한 척을 하는 도로시가 걱정을 숨기고, 자신은 깨어있는 여성인 듯 많은 것을 허락하면서도 꾸준히 근심한다. 제이미의 인생에 결정권을 쥐고 결코 핸들을 내어주지 않는다.
애비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돈을 번다. 적당히 벌고 재미를 추구하는 애비의 삶엔 언뜻 불안이 비치지만 늘 하루를 충실히 보낸다. 음악과 사진으로 스트레스를 풀며 제이미에게 나름대로 자신의 인생을 들려준다. 여성으로서 겪는 부조리에 대해 일갈하고 페미니즘에 관련한 서적을 선물하는 애비. 그 강경한 태도가 머쓱한 주변 사람들의 불편한 기색이 있을 때면 그녀는 더욱 떳떳하다.
반면 줄리는 어설프다. 들은 것은 많지만 스스로 정제하지 못한 가치관들이 내내 그녀의 마음에서 굴러다닌다. 담배를 '남자답게' 피워야 한다며 알게 모르게 박힌 고정관념까지 들먹인다. 텅 빈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에 대한 가학으로 채우는 줄리는 뭐든지 아는 척을 하면서 때로 위악적이다. 그러나 종종 넘겨짚는 예상이 들어맞으니 포기할 수가 없다. 아직 많은 것을 모르고 그 때문에 성적 가치관마저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이미를 가르친다. 그러나 가끔 쐐기같이 꽂히는 말은 아프게 다가온다.
언제나 모든 문제의 시작은 엄마예요.
중간에 나오는 지미 카터의 연설은 극 중 인물들에게 상반된 반응을 이끌어낸다. 주체적인 개인의 삶이 팽창하던 시기. 공동체를 우선하는 연설은 낡았다. 대의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에 맞서기 시작한 사람들의 관념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후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제나 '선대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문화라는 표현을 쓰는데,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고 국가를 위해 일조하던 세대는 정작 자신들의 과거를 희생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런 시기와 그런 시대에 대한 반발심이 나타나던 시기가 맞닿아 나타나는 갈등은 어딘가 익숙하다. 그들의 '20세기'는 한국의 '21세기'가 아닐까.
영화를 보면 유독 눈에 들어오는 클리셰가 많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장면에서 도로시아는 제이미를 통제하는 듯 뒤따라간다. 위태롭게 도로를 달리는 제이미를 멀찍이 지켜보면서도 함께 달리지 못하는 모습은 도로시아의 상황과 참 닮았다. 그리고 애비와 제이미가 해변가를 거닐며 연신 눌러대는 카메라의 플래시가 번쩍거리는 모습. 인생의 반짝이는 순간들에 집중하는 삶이라는 느낌을 준다.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무엇보다 자신을 우선순위로 둔 삶.
또 제이미는 입버릇처럼 바다로 가자는 말을 한다. 자신이 매여있다는 심적 족쇄를 털어버리고 싶은 듯. 영화 중반, 도로시아가 홀로 바다를 갔을 땐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정말 제이미를 데리고 갈 생각은 없는 걸까. 제이미는 결국 줄리와 바다로 떠나는 것에 성공하지만 완벽하지 않다. 그리고 완벽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그렇듯, 아름답다.
도로시아는 열심히 그들의 세상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녀가 세대차이를 메우려는 시도는 낯설지 않은데 이런 사람은 우리 가까이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삐삐를 들고 다니던 시절을 지나 최신 스마트폰을 배워야 하는 기성세대가 그렇다. 도로시아도 마찬가지. 펑크를 듣고 아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려주려 노력하지만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걸 참을 수 없다. 또한 개인의 목소리를 내는 세상이 낯설기 때문에 수줍다. 그런 '척'을 하는 삶에 익숙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눈치 때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얘야,
우리가 인생을 이해할 날이 올 지는 모르겠어.
널 도와줄 사람이 네가 예상하거나 원한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결국 나중에서야 그녀는 진정 서로를 이해하는데 한 발을 내딛는다. 젊은 세대의 가치를 쫓아가려 기를 쓰는 태도를 버리고 가곡과 같은 장르의 노래를 틀어 자신이 살던 세상을 알려주는 장면에서 나는 결국 안도한다. 제이미와의 춤이 짙은 화해의 표정이 되는데, 각자 우선시하는 관념이 있는 삶에 존중이라는 덕목이 필요하다는 것.
이 작품은 가까운 곳에 벌어지는 세대갈등의 문제부터 시대를 관통하는 전반적인 사회의 흐름을 고찰하게 한다. 그러므로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편이 세상을 유연하게 헤쳐나가는 길이라는 걸 영화는 가르쳐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용기에서 나온다고.
그렇게 나이를 먹으며 세상을 먼저 살게 되었을 뿐인 사람이 자신보다 늦게 세상에 나온 사람을 아무것도 모른다며 무시할 필요가 없다면, 결국 우리는 서로를 보듬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알게 모르게 변한 낯선 세상을 위해.
인생 앞에 머뭇거리는 모든 우리를 위해.
허우적대는 손을 서로 붙잡아 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