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AKI Jan 02. 2022

2022년의 첫번째 글

의식의 흐름대로 막 쓰다 보니 길어진 글

뉴노멀 New Normal

    내게는 작년이 뉴노멀을 더 체감하고 허둥지둥했던 한 해이다. 시장에 유동성이 풍부해졌고 스타트업 업계 저변이 넓어졌으며 VC업계의 실력이 상향평준화되었다. 다시 말해 판이 커지고 경쟁이 치열해졌다. 게다가 아예 전제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는 Web 3.0(그리고 NFT,디파이..), AI, VR/메타버스,자율주행 등..의 키워드가 한꺼번에 사방에서 쏟아져서 어디서 끊어가야 할지 모르고 주춤거리며 손톱만 물어뜯는 상태였다. 

    이 변화가 더 빡센 이유는.. 시장의 기존 플레이어들과 신규 진입자들 모두 여전히 머리가 핑핑 돌아가고 에너지 넘치는 사람들이기 때문. 90년대 PC시대를 주름잡은 플레이어들(40대와 50대)과 현재 모바일 시대의 주역들(30대와 40대)은 판이 바뀔 때 얼마나 큰 기회가 열리는 지, 그리고 먼저 선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미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여전히 젊고 똑똑하다. 이상 기존 플레이어들. 

    여기에 거칠 것 없이 과감한 군단이 새롭게 입장권을 흔든다. 20대. 그들은 부모세대의 미덕이 전혀 통하지 않는 시대에 사회에 진입했다. 장기화된 저성장 시대에다 대기업들도 신입공채보다는 (경력있는) 수시채용을 선호한다고 하질 않나 그나마 겨우 입사해서 월급 받으며 성실하게 살아도 절대 그 전 세대의 풍요를 누릴 수 없음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러나 세상의 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시대를 살아왔기에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 기본값으로, 다른 세대가 갖지 못한 치트키로 잘 장착되어 있다. 레거시가 없기에 뉴노멀을 훨씬 더 쉽게 체화하는 이 신진세력이 새로운 미덕을 찾아 빠르게 전쟁터에 참전하고 있다.

    20대에서 50대까지.. 난다긴다하는 사람들이 다 이 판에 있다. 그야말로 정신없이 돌아간다. 치열하지 않았던 적 없었으나, 이제는 기합의 데시벨이 달라져야 하는 2022년. 


지금(에서야) 알고 있는 걸 그 때 이미 알았어야 했다. 

    내 직업은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그 결과조차 운과 타이밍이 많이 작용하는 종류의 것이다. 결과가 즉각적이지 않은데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속도만 내다 보면 번아웃이 오기 쉽다. 게다가 기본 스탯이 좋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 제일 좋은 결과를 가져가는 세계가 아니며 심지어 역량도 그냥저냥에다 별로 열심히 안했는데 운때가 맞아 어마어마한 성과를 가져가는 경우도 많기에 허탈감에 빠질 수 있는 직업이다. 그래서 별로인 직업이라는 건 아니고, 그냥 이 직업의 특성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배워가는 중. 조금 아쉽고 억울한 대목은 사실, 내가 이걸 몇 해에 걸쳐 스스로 깨달아야 했다는 점. 누가 이것만 일찍 알려줬어도 불면의 밤들을 조금 줄일 수 있었을 텐데!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갑자기 '직업적성교육/직무설명 이대로 좋은가!' 하고 외치고 싶어짐. 분명히 각 일/직업의 특성이라는 게 존재하는데 실제 그 일을 하기 전까지는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너무 어렵다.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연수원에 들어간 친구들이 "어떻게 하지..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하고 그제서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경우를 꽤 여러 번 보았다. '넌 수학 잘하니까 회계사', '넌 글 잘 쓰니까 소설가', '돈 잘 벌고 존경 받으니까 변호사, 의사' 가 아니라 각 직업을 잘 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성향/성격, 해당 직업이 가져다 주는 성취감의 종류, 반대로 견뎌야 하는 스트레스의 특성을 알려주고 그 것이 당신의 타고난 성향과 맞는지, 혹은 다르더라도 감수할 결심을 할 것인지 판단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했다. 그리고 그 체크리스트들은 꽤 실무적이고 디테일해야 하므로 반드시 해당 직무를 수행해 본/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받아야 한다.


생각보다 중요한 "당신은 스트레스를 받아도 잠은 잘 자는 성격입니까?"

    개인적으로 그 전엔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창업 해보니 의외로 엄청 중요하구나.. 하고 생각되었던 창업가의 자질 중 하나가 '엄청 스트레스 받아도 잠은 잘 자는가' 이다. 사업을 하면 정말 사방에서 문제가 터지고 초기 스타트업일수록 내일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순간들이 잦게 찾아오기에, 불안에서 비롯된 불면증은 일종의 게임값 같은 것. 그런데 수면이 부족하면 몸도 마음도 취약해져서 에너지도 떨어지고 우울감이 쉽사리 파고든다. 긍정적 사고회로를 돌리기 힘들어지고 좋은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생각보다 큰 방해요소가 된다. 이렇다 보니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일단 잠은 잘 자는' 성향이 스타트업 창업자로서 너무나 중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기승전 '그러니까 나는 다시 창업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게 됨 (혹시 지금은 더 많은 일들을 겪었으니 다시 창업한대도 '이 쯤은 별 거 아니야' 하고 좀 더 편하게 잘 수 있으려나? 갑자기 궁금하다)


어쨌든 사람의 일을 다하고 볼 일이지요 

    다시 내 직업 이야기로 돌아와서.. 운과 타이밍이 중요한 직업이라고 해도 어디까지가 운이고 어디까지가 실력인지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내가 취할 수 있는 제일 안전한 삶의 태도는 일이 잘 되면 '오, 운이 좋았던 거니 너무 건방떨 필요 없어' 하고 생각하고 일이 잘 안되면 '오, 운이 나빴던 거니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 라고 생각하는 것. 그러나 일단 열심히는 해야 한다. 이번 연말 제주여행 본태미술관에서 본 추사 김정희가 석파 이하응(내가 좋아함)에게 보낸 편지 글귀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붙여본다.

"아무리 구천구백구십구 분까지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일 분만은 원만히 성취하기 어렵습니다. 이 마지막 일 분은 웬만한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겠지요."
                                            -추사 김정희가 석파 이하응에게 보낸 편지글귀 중-


결국, 진인사대천명. 일단 진인사는 제대로 하고 말해야겠다. 나는 호랑이띠니까! 호랑이해에 부끄럽지 않도록 올해는 되게 열심히 재미있게 해봐야지. 이상하게 2022년이 되고 나니 기분이 엄청 좋다. 뭐지 호랑이기운이 솟아나고 있나. 


지킬박사와 하이드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내가 제일 힘들다. 뇌에서 출발하는 나는 긍정적이고 다정하고 포용적인데 심장에서 출발하는 나는 염세적이고 예민하고 호오가 세서 계속 뾰족한 가시를 드러낸다. 지킬박사가 계속 솟아나는 하이드를 달래가면서 사는 느낌이다. 어릴 땐 하이드가 엄청 강했는데 창업을 하고 어떻게든 일이 되게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지킬박사가 탄생했다. 그리고 지금의 직업은 지킬박사여야 하는 순간들이 많기에 이제는 기세를 잡은 닥터지킬이 하이드를 계속 손으로 꾸욱 누르며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형상. 버티다 버티다 하이드를 막기 어려워진 거 같다 싶으면(=독이 가득 묻은 말/행동의 가시가 사람들을 찌를 것 같아지면) 한 달 살기로 도망가서 정신을 가다듬고 온다 (이런 뻔뻔한 태도를 이해해주고 지지해주는 회사동료들에게 그래서 항상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물론 둘이 공존해서 가지는 장점도 사실 엄청 많다. 내가 일을 그나마 잘 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들도 사실은 이 갈등하는 두 캐릭터들 덕분에 생겨난 강점들이다. 


혹은 에스텔라와 크루엘라

    영화 속 크루엘라를 보며 매우 공감했고 연민과 애정을 느꼈다. 나에게 그녀는 또라이, 싸이코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최소 30대 이상 여성들 내면의 현현으로 읽혔다. 일을 하는 여성으로서 크루엘라처럼 살았다가는 하이드보다 일찌감치 싹이 잘렸을 거다. 뭐 이리 독해, 욕심이 많아, 예민해, 까탈스러워, 뭔 말을 못하겠네 같은 말들과 함께. 물론 하이드도 사회생활 쉽지 않겠지만, 어휴 크루엘라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내 바로 직전 세대의 에스텔라/크루엘라들은 유리천장 아래 허락된 아주 한정된 슬랏을 확보하고 수성하기 위해 가끔은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어쩔 수 없는 때가 많았겠으나 그게 당연했던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그 기준과 시각으로 나를 판단하고 대하는 모습들을 보면 굉장히 싫었고 그 세계에 있고 싶지 않았다. 물론 지난 10년 사이 놀랍게 많이 바뀌었고 지금도 달라지고 있다. 그 과정 중에 충돌도 갈등도 많겠으나, 성취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1과 2가 주역인 시절과 3과 4의 시절은 매우 달라야 한다. 더 이상 에스텔라가 아니더라도 괜찮은 그런 어떤 날. 


올해도 애정을 부탁 드립니다 

    갑자기 결론. 크루엘라가 소름끼치게 재수없고 사악할 때에도 "더럽게 재수없지만 그래도 좋은 면도 있으니까" 하며 계속 옆을 지키며 속아준 소매치기 동료들이 있었다. 내 안에 하이드/크루엘라가 살고 있음을, 그러나 여전히 노력하고 있음을 알고 항상 옆에서 티 안나게 도와주고 지탱해주는 감사한 이들이 있어서 2021년도 잘 지냈다. 

  

그래서 2022년은..

    하고 싶은 개인적인 프로젝트들이 있다. 내가 관심있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리고 이 정도 사이즈면 내가 노력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들. 그 시작을 올해는 조금씩 해보고 싶다. 그 어느 하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없는데 다행히 내 주변엔 나보다 훌륭하고 멋진 사람들이 있기에 이야기 꺼내보고 더하고 빼보면서 천천히 시작해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리고 내가 10년 20년 후에도 계속 타석에 들어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그리고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면 좋겠다. 


끝끝끝.

작가의 이전글 Altos에서 두 명의 동료를 찾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