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만의 휴가다. 정말 2019년은 내게 정신이 없었던 해였다. 휴가가 총 10일인데 한 5일밖에 못썼으니,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내게 너무 예민해진 거 같다며 휴가를 권할만했다.
아마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해외에 자주 다니니 막연히 여행을 자주 다니고 인생을 즐기는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 아는 사람은 안다. 휴가와 출장은 천지차이라는 것을.
묵혀놨던 휴가를 탈탈 털어 5일 정도를 몰았다. 추운 한국의 겨울을 떠나 따뜻한 곳에 있어야지. 휴가를 계획하며 짐을 조금씩 싸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이것저것 휴가 계획을 짜다 보니, 이 책을 가져가야지. 글을 쓰려니 랩탑도 챙겨야지. 따뜻한 곳에서 아침마다 런닝을 위한 운동화와 운동복을 여러 벌 챙기게 되었다. 그래 술과 야식에 찌들었던 나를 좀 Purify 하게 해주자. 그리고 앞으로 내가 내 인생을 꾸려나갈 미래 계획도 좀 세우자.
이런저런 계획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내 짐 안에 든 구성품들은 바른생활을 위한 준비물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 이 곳 세부에 와서 내가 밤에 있었던 곳은 호텔 클럽 라운지. 기온이 30도 정도 되는데 내가 좋아하는 산미구엘 맥주가 무한정 무료랜다.
마음대로 냉장고에서 맥주와 차가운 컵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일단 한 병을 가져와 마셨다. 이상하다. 한 병인데, 한잔 정도 마신 느낌이었다.
목이 말라 한잔 하고, 말하다가 한잔 하고, 밖 경치보다 한잔 하고...여튼 이러다 보니 어느덧 내 테이블에 산미구엘 빈 맥주병이 6병정도. 그래 첫날이니, 오늘 하루는 이렇게 보내자.
다음날 수영장에 누워 ‘더블린 사람들’ 이란 책을 좀 읽기 시작했다.
리조트 직원이 친절한 웃음으로 내게 말을 건넨다. ‘Hello Sir, Happy hour, buy 1 beer, get 1 free beer’
그래 이 경치를 보며 어찌 지나칠 수 있을까. 그렇게 한잔으로 시작된 맥주는 두 잔이 되었다.
점심을 좀 배불리 먹은 탓에 저녁은 클럽 라운지에서 간단히 스낵과 맥주 한잔이 계획이었는데, 아! 또 정신을 차릴 때쯤 빈병이 5병가량 있었다.
한국서 접대용 술을 마시고선 아침에 일어나면 두통과 구토 증세가 반복되었는데, 하. 맥주 5병에 마지막에 마신 양주까지 마셔도 나의 아침은 상쾌할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했다.
결국 휴가에 있는 거의 7일 정도의 시간 동안 난 한 번도 운동을 하지 않았고, 랩탑은 열지도 않았다. 운동으로 몸을 정화할 거란 내 계획은 술로 정화가 되었다.
그런데도 신기하다. 인생은 긍정적이 되었고, 친구들이 그립고, 심지어 비위를 맞춰야 하는 꼰대 부장님이 한 얘기를 떠올리며 쿡쿡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 ‘플라잉 라쿤’을 통해서 짐 값을 알아보고 짐을 별도로 구매했지만, 짐 값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싸는 동안 내 미래계획을 세웠으니까.
여행은 어떻게 보내건, 우리 인생의 작은 쉼표다. 언젠가 은퇴를 하게 되면 이 쉼표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 이 쉼표를 즐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