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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Dec 28. 2023

나의 2023년, 나의 겨울

남는 것은 오롯이 '사람'이더라



거센 겨울바람이 산등성이서부터 흉측한 소리를 가득 몰고 온다. 산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귀신의 울부짖음 같기도 하다. 털이 복슬복슬한 귀마개를 했는데도 벌써부터 귓바퀴가 얼얼하다. 서둘러 외투에 달린 모자를 펼쳐 다급히 머리통을 집어넣는다. 길쭉하고 커다란 눈사람 형상이 따로 없다. 바람결에 정신없이 나부끼는 노란 깃발을 꼭 붙잡는다. 시니어 클럽의 교통안전 지도는 11월까지였다. 아직 학교는 정상 등교 중인 12월. 겨울방학식까지 여남은 한 달 간, 아이 학교에 소속된 녹색 어머니들이 돌아가며 건널목을 지켜야 했다. 지난번에는 추적추적 비가 쏟아지더니 오늘은 차갑고 시린 바람이 말썽이다.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 내 아이의 안전과 관련된 일이라 되뇌며 추위를 잊어보려 하지만 영 쉽지 않다.    


귀마개에 모자까지 덮어썼는데도 등굣길 아이들의 참새 같은 재잘거림이 겨울바람을 타고 귓가로 새어들어 온다. 바람이 휭- 거리를 휩쓸 때마다 “꺄악!”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 제 멋대로 개사한 크리스마스 캐럴 노래 소리, 의미를 알 수 없는 장난스런 수다 소리들까지. 매일 아침 교문 근처에서 지저귀는 참새들만큼이나 입을 바삐 움직이며 떠드는 아이들을 눈으로 쫓는다. 모자에 마스크까지, 두 눈만 빼꼼 내민 채 노란 깃발을 든 대형 눈사람에게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남몰래 엄마 미소를 그리며 건널목 신호로 시선을 돌린다. 초록불이 환하게 켜지고,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깃발을 앞으로 펼친다.      





“고맙습니다!”

그 때였다. 엄마 손을 잡고 길을 건너던 한 여자 아이가 재빠르게 몸을 돌려 내 쪽으로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놀란 토끼 눈으로 아이를 바라본다. 마스크 안에서 놀라 어버버 거리던 입술이 적당한 대답을 찾기도 전에 아이는 저만치 길을 건너버렸다. 머쓱해진 나는 애꿎은 입술만 지그시 깨물고 만다.


“어, 감사해요~”

다음 신호에서도 키가 몹시 큰 남학생 하나가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다. 전봇대나 기둥 같은 풍경 중 하나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노란 깃발이 움직이는 걸 보고서야 사람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는 표정이다. 이번에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답을 건넨다.

“네, 고마워요!”


비단 학생 뿐 아니다. 추위를 헤치고 교장 선생님까지 길을 건너와 내 앞에서 고개 깊이 숙이며 감사 인사를 건넨다. 아이를 등교시키던 보호자 분들도 나의 추위에 온 몸으로 걱정스러움을 표한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여러 번 감사 인사를 받는 동안 추위도 잊은 채 더 큰 감사 인사로 마음을 돌려주기 바빴다. 여전히 바람은 짐승처럼 거칠기 짝이 없는데, 가슴 한 켠에서는 뜨거운 불꽃이 일렁인다.     





녹색 어머니 활동을 마치고 종종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늘 건널목에서 스친 그 짧은 순간들이 나의 올 한해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더없이 바쁜 한 해였다. 하루살이처럼 일정들을 쳐냈던 작년보다도 더 빠듯한 일 년이었다.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가며 살았다. 그럼에도 곁을 지켜준 사람들 덕에 힘들지 않았다. 나와 올 해를 함께 보낸 사람들 덕에 바쁜 일 년을 잘 버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이 자주 상할 정도로 강의가 많았지만 매 시간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집중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기말고사 시험지 귀퉁이에 적은 짧은 메모로 건네던 감사 인사를, 초콜릿과 에너지 드링크로 표현하던 수줍은 애정을 잊지 않는다. 이 정도면 독서가 업(業)인가 싶게 읽어낼 책들이 탑처럼 쌓였지만 약속한 시간, 같은 장소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던 독서회 멤버들이 있었다. 책도 책이었지만, 책을 통해 맞닿은 그 여러 마음들이 훨씬 더 좋았다. 온라인으로, 오프라인으로 연결된 그 마음들 덕에 계속해서 읽을 수 있었다. 거의 매일 새벽 2시가 되도록 이어지는 강의 준비에 지칠 때가 많았지만 더쓰다 멤버들을 생각하며 아끼듯 쪼갠 시간마다 워드 화면 앞에 앉았다. 정말로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올 한 해 쓰는 삶은 잠시 멈추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이어간 글쓰기가 결국은 가장 지치고 힘든 시기의 나를 위로 건져 올렸다.      






좋은 사람들로 가득 찬 2023년은 더없이 포근했다. 나의 마음은 일 년 내내 따스한 봄날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곁에서 만개한 벚꽃나무처럼 자리를 지키고 서서 분홍빛으로 물든 시간을 만끽했다. 아무리 거센 바람이 휘몰아쳐도, 차가운 빗방울이 흩날려도 끄떡없는 강인한 봄이었다. 오늘, 건널목에서 병풍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내게 짧은 감사 인사로 뜨거운 온기를 퍼뜨린 이들. 2023년, 일상 곳곳에 숨어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지켜준 이들. 그 모든 아름다운 얼굴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생각만으로도 한없이 그립고 또 사랑스러운 얼굴들. 평생 내 뒤를 따라붙던 겨울 같은 외로움은 일 년 사이 또 저만치 멀리 달아나 있다. 스스로를 제대로 건사하고 싶었던 2023년, 실은 내 힘이 아닌, 주위 사람들의 힘으로 비로소 온전할 수 있었음을 깨닫는다. ‘사람’과 ‘마음’으로 가득한 2023년이었다. 벌써부터 올해가 몹시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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