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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Sep 26. 2020

관계에서 자유의 세 가지 의미

타자가 부재하는 자유

 자유란 무엇인가? '인간은 본연적으로 자유롭기를 원한다'는 명제는 옳은가?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주체가 욕망하는 수준에서의 자유란 대상화된 주체의 이미지가 존속하는 응시점에 머물러 있다. 그 이미지가 성취된 상태에서 주체는 '자유로워졌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욕망의 충족이 자유로의 이행이라는 이 간단한 공식은 진부하며 또 새삼스럽기만 하다. 허나 이를 부정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욕망하는 만큼 뛰어라'는 격언은 어떤 일을 해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고 적극적으로 수긍하게 될 표현일 것이다. 노력을 강조하는 이 격언처럼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은 어떤가? 그 어떤 역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나아가는 모습이 감격스러운가? 나도 이 영화를 좋아한다. 그리고 믿음은 외화된다.


 인간에게 있어 자신의 자유에 방해가 되는 어떤 대상은 배제의 대상이 된다. 본질적으로는 욕망에 방해가 될 어떤 '대상'이라고 지칭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인간의 본성을 '자기 자신의 열정에 반하는 무언가가 곧 배척의 대상'이라고 말한 바 있다. 특히 자유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실존적 개인인 단독자의 입장에서 파악한다면 수긍되지 않을 이유란 없을 것이다. 반드시 욕망하는 이미지에 도달해야만 한다는 당위적인 내재성에서 의해 공격의 대상이 선정된다. 그러나 항상 누누이 강조한 것처럼, 개인이 완전한 자유로 나아가기란 불가능하다. 존 스튜어트 밀이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은 자유의 역설을 가장 잘 함축한 표현일 것이다. 단독자로 머물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전제되는 자유의 역설은 인간이 무한히 자유로을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주체와 직면하고 있는 실존적 타자부터, 대상화된 주체로 등장하는 상상적 이지미 속에서조차 타자가 등장한다는 사실에 말미암아, 자유의 역설에 관해 관철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주체와 타자를 종속하는 상징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점을 암시적으로 드러내며, 또 이것 외부에서 주체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견지하게 만든다. 이 질서 내부에서의 주체의 덕목이란 곧 타자의 자유에 대한 인정인 것이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물음을 들고 와서 직유하면 어떨까 싶다. 데카르트는 가장 진실된 것이 무엇인 지를 알기 위해 지금 내 눈 앞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타인 조차도 의심한 미친 인간이다. 타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조차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심은 데카르트 본인이 미쳤다는 것을 의심하지 못하는 광기이다. 그러나 데르트가 계속 광적인 의심을 물고 늘어졌을까? 데카르트는 타인이 나와 같은 인간이며 '의식'이란 것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아 두었다. 이를 시금석으로 삼아 앞 문단의 내용을 유비적으로 축약하자면, 내가 자유를 가진 만큼 타인에게도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타자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만이 주체가 무작정 자유로워서는 안 된다는 역설을 합당하게 만들며, 또한 이것이 더 큰 결과로써의 자유를 창출한다. 하지만 간단하게 묻는다면, 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존중하는가? 문제는 주체로서 이 역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유로워지려는 것이 문제 삼아야할 부분일 것이다.


 라캉은 자신의 저서 <에크리>에서 말한 '자유의 삼각형', 즉 인간 존재가 관계 내에서 어떻게 자유로운 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헤겔의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착안한 사유이며, 나의 부족한 필력으로 어중간하게 적는 것보다는 라캉의 말을 직접 보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아래와 같은 것을 구성하는 삼각형 안에 완벽하게 새겨진다. 즉 타자의 예속에서 얻는 과실들을 향유하기 위해 죽이겠다고 위협함으로써 타자의 욕망에 강요하는 포기.-인간적 삶에 자신의 척도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자발적으로 자기 삶을 희생하는 것. -그리고 주인에게서 승리를 빼앗고 주인을 비인간적인 고독 속에 방치하는 패자의 자살적 포기가 그것이다.


 라캉의 말에서 첫 번째 자유란 주체가 타자를 향유하는 하나의 방식인 '가학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주관을 타자에게 관철시키려는 수많은 나르시시스트들부터, 타자를 강박적으로 구속하고 재현하려고 드는 편집증적 망상을 현전하는 권력자들까지. -자기 중심적 성향을 가진 자들은 자신만을 사랑한다- 그들은 타자가 자신의 뜻을 따르기를 언제나 희망한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할 경우 너무나도 쉽게 폭력을 일삼고 또 모든 것들을 종식시키려 드는 과격함마저도 불사한다. 이런 류의 극단적 전형은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빌런의 전형이기도 하다. 최근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테넷>에서 '사토르'라는 인물도 그런 류이다.


 두 번째 자유, 타자가 자기 자신을 보호해 주며 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보존한다는 명목 아래에서의 순종적 전형의 인간이다. 그 보호 내지 보존이 강요이거나 억압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자발적이게 되는 태도를 유지한다. 여기서 '희생'이라는 가치적 개념이 '복종'으로 불가해하게 치환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대의라는 것이 상징적 동일화에 의한 강요된 희생이라고 지목한다. 그러나 이 상징적 심급은 전방위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냉소적 태도부터 더불어 한 술 더 떠서 자기 자신의 불안을 투사할 곳을 찾아야만 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렇다. 이는 불안정한 존재는 어떤 사람이 현실적 인간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자유가 가장 명확하고도 흔한 유형이라고 한다면 너무 비약적일까? 이를 충족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영웅 신화의 비화이기도 하다. 우상 숭배 및 그에 버금가는 동경은 선량하며 삶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려고 애쓰지만 전혀 그렇지 못한, 그리고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유래한다.


 세 번째 자유, 타자가 자신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저항'으로서의 자유이다. 자기 자신이 가진 아주 사소한 권리-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나?-마저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즉슨, 자살적 권리를 행하는 주체이다. 이 자유를 구가하는 주체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제된다. 즉 노예인 주체는 이 권리를 행함으로써 주인의 영광을 박탈시킨다. 노예의 죽음이나 저항 따위는 주인의 권리였던 노예에 대한 귀속을 자연스럽게 제거시킨다. 동시에 노예는 주인에게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인 고독을 안긴다. 영화 <조커>에서 그는 분명 패자이며 상징적 질서에서 배제된 존재이다. 그런데 그가 제대로 미치기 시작한 시점은 자신의 어머니가 '조현병' 증세가 있다는 진단서를 본 후인 즉슨, 정신병자라는 상징적인 낙인을 발견한 이후이다. 그 시점부터 그는 불가능을 대담하게 일으킨다. 금지된 것을 더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존재가 된다. 이 거부적 움직임이 발생하는 곳이 조커가 자리한 곳이다. 그렇다면 이 세 번째 자유가 일어나는 곳이 가장 문제적인가? 마냥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이 곳에는 조커뿐만 아니라 베트맨도 있다. 이 둘의 차이는 확실히 존재하지만 말이다.


 자유의 역설적 의미를 단독자가 전혀 견지하지 않는 방식으로, 즉 이 역설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채 자유를 바라본다면 자유란 존재할 수 없다. 라캉이 자신의 저서에서 말한 3가지 자유 모두 '타자의 자유' 또는 '타자로서의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주체가 따르게 되는 방향성이다. 간단히 축약하면, 주인이 되거나 노예가 되거나, 아니면 양자가 투쟁 상태로 돌입해 상호적 파멸을 실현시키거나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무한한 투쟁 상태를 지속하게 될 것이라 본 것처럼, 그리고 니체가 다윈주의에 힘입어 '투쟁은 만물의 본질'이라고 언명한 것처럼, 그런데 현시대에 예수와 애덤 스미스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처럼 보이는 다윈은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생존 투쟁'이라는 개념에 귀감을 받아 진화론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투쟁은 불가피한 것인가? 그러나 이 세 가지 자유 내에서 관계를 맺지 않고서의 자유가 있을까? 다시 말하자면, 주체의 자유란 강요와 희생으로 전개되며 저항이라는 특이한 자유로서, 세 개념 내에서 전개된다. 그러나 이 전개되는 양상에서 한 가지 확실히 집고 넘어가야 할 진실은 관계가 부재할 시에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 항상 구태여 외로움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외로움'이라 적지 않고 '고독'이라 적는 이유는 그 표현 자체가 주는 고상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비-인간적인 정념이기 때문이다. 고독한 인간이 자유롭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이거나 특권적인 것,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라캉이 <세미나>에서 마지막 대목의 말처럼, 이 담론은 광기의 접근에 이르게 되는 방식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을 진 몰라도 부재하는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방법을 도모하는 것은 아니다. 고독은 인간을 광기와 마주하게 한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고통의 현전과 끝없는 재현, 그러니 굳이 고독해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것에서 연원하는 나르시시즘과 마조히즘적 징후의 반복의 발견은 필연적 숙명이라는 불가해한 사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상상적 형성물로 인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정초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첫 번째 자유와 두 번째 자유의 원인자가 동일하다는 것은 확실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양자 간에 상징적인 동일화가 가능한 이유는 모두 불안을 투사하는 방식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번째 자유는 각별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물론 여기서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앞서 상징적 질서 위에 위치하고 있지 않은 두 허구적 존재인 베트맨과 조커는 분명 영웅과 빌런이라는 상반된 행보를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 둘의 관계는 상보적이다. 마치 어둠이 있어야 빛이 부각된다거나 반대로 빛이 있어야 어둠이 있다는 상보성을 담아내는 흔하디 흔한 은유적 표현처럼, 배트맨의 존재 가치를 보증하는 존재가 조커이다. 영화 <다크나이트>에서 조커는 베트맨에게 베트맨이 자신을 완성시킨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이 조커라는 인물이 허구적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저항'이라는 세 번째 자유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저항적 행위는 아무런 신념도 지성도 갖추지 않고서 그저 터져 나올 뿐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지형학적으로 설명하며 자아의 의미를 바꾼 것처럼, 저항은 자아만의 특권이 아니라 이드의 특권이기도 하다.



 욕망을 관둘 수 없다는 사실은 이것이 없다면 자유 또한 없다는 사실을 규정짓는다. 본연적으로 자유롭기를 원하는 존재라는 말의 배후에는 본연적으로 욕망하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당신이 그토록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되었다면, 그 사태의 배후에는 '절대'라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결과를 성취했다는 사태의 이면에는 동시적으로 욕망하는 상태가 끝이 났다는 종결적 어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던가? 우리가 해방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나를 구속하고 있는 속박이 무엇인 지를 알아야만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즉 속박의 고리의 존재함을 알지 못한다면 해방조차도 없다. 고생하는 것과 낙이 오는 것이 별개로 치부되는 듯한 요즘에는 저 말을 신봉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이것과 유사한 뉘앙스의 표현들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시대라면, 요즘은 그 여느 때보다도 더 많이 믿어야 하는 시대이다. 믿음은 끊임없이 외화된다.


 그러나 단언컨대, 나는 노력하지 말라거나 욕망하지 말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저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머무르는 욕망, 즉 어떤 대상에 대한 '앎'의 의미로서 인식적으로 주어지는 표상이 나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으며 또한 그곳에서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는 간극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몹쓸 존재로 바라보며 자책하는 태도를 자신의 진정성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태도는 존재론적 차원으로 소급되지 않으며, 주체의 이미지는 중첩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우울증자는 자신을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처럼, 굳이 스스로 죄인이 될 필요는 없다.


 여기서 관찰치와 아집을 적으며 글을 마무리하자면, '현실에 충실하자!'라는 말을 자신의 삶을 전부라 생각하며 살는 사람이 있었는데,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들이 미래에 대한 계획이 전무하다는 것이 꽤나 충격적이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아주 근시안적으로만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심리학적 관점에서 권장하는 태도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 조언은 너무 막역하고 막중해서 구체적일 수 없는 계획을 세워서 쉽게 무기력해지는 사람에게 당장 내일이나 아니면 당장 1시간 후에 할 일을 생각하면서 행동하라고 조언하기도 한다. -하이데거는 주체가 겪는 심적인 고통을 '존재부담'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오늘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의한 불안감이 엄습하면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 내리며 그것을 외부로 적극적으로 투사하려고 애쓰는 즉슨, 너무나도 쉽게 의존하려고 했다. 그들은 스스로에 대해 아무런 엄격함도 갖추지 않은 채로 오늘을 살려고 한다. 또한 미래에 대한 맹목적인 낙관을 얻으려고까지 한다. 주체가 퇴행기로 접어드는 이유는 자신이 마주한 것에 책임일 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의문들이 솟아오른다. 정녕 주체가 중층 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 중에 누가 가장 비-인간적 정념에 굴복하지 않는가? -나는 은밀하게 니체를 동경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출발점으로 삼은 의심은 데카르트의 의심을 다시 물고 늘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과연 내 눈 앞에 있는 타자가 동일자로 포섭될 수 있는 인간인가? 나에겐 '인간'이라는 표현조차도 불일치를 가리려고 애쓰는 언어적 수사이다. 가령 인간의 탈을 쓴 악마라던가, 금수만도 못한 인간과 같은 표현들은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져버리는 자들을 지칭한다. 왜 그런 자들을 인간으로 여기려 하지 않으며 또한 왜 인간이 되질 못하는가? 의심이 발생하려면 어떤 괴리가 있어야 한다. 나중에 좀 더 길게 적을 기회가 올 것이지만 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도 죄의식을 가지길 거부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깊은 회의를 느낀 적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르시시스트들은 구제불능'이라는 말을 하면서 그런 사람들에게 당한 경험을 풀어내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만약 진실로 '구제불능'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의문이다.


 ps. 영화 <조커> 리뷰를 적기 위한 일종의 선행 학습을 하려고 글을 적고 있는 것인데, 주객전도라는 말이 어울리는 듯하다. 그리고 최근에 잠깐 동안 기회가 생겨 짧게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와중에도 생각을 정리하면서 새삼스러움을 많이 느낀다. 더군다나 '새삼스럽다'는 표현이 뇌리를 항상 스치는데 그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해보니, 내가 지켜야할 것들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않았을 때 주로 저 말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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